오늘의 요리 17. 시금치 베이컨 볶음



여동생이 시금치 베이컨볶음을 했다고 사진을 보내줬는데 너무 맛있게 생긴거다. 그래서 나에게도 레서피를 다오, 했더니 자기가 보고한 걸 그대로 전해줬는데, 뭐 이건 어렵지도 않아. 그래서 했다, 시금치 베이컨 볶음. 토요일 와인 안주로 만들어봤다.


재료: 시금치, 마늘, 기름, 베이컨


시금치를 깨끗이 씻는다

물기를 뺀다.

달궈진 프라이팬에 마늘다진 걸 넣고 볶는다. (이 때 썰어서 넣어도 무관할듯)

베이컨을 넣고 볶는다.

소금을 약간 뿌려 간을 맞춘다. (이건 진짜 생략해야 된다.... 여기서 내가 '베이컨이 짠데 소금을 굳이 뿌려야할까?' 하다가도, 그간 내가 요리를 못한 까닭은 시키는대로 하지 않고 혼자 생각해서 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그냥 말을 잘 듣기로 하고 소금을 넣었다가.... 개망......)

마늘이 노릇해졌다고 생각하면 씻어 물기뺀 시금치를 넣는다. 

시금치의 숨이 죽을 때까지 볶는다.

완성.





중간에 내가 소금을 넣은 바람에 짜져서 ㅠㅠ 내가 너무나 후회하며, 남겨둔 시금치마저 다 때려 넣었다. 그래도 짭짤한 맛이 가시지를 않아. 소금을 넣지 않아야 한다. 베이컨 때문에 일단 짠맛은 충분히 나고, 그리고 조금 싱겁게 먹는다면 샐러드처럼 더 많이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어쨌든 베이컨까지 넣고 완성했는데 이걸 어떻게 해야 잘 먹을까, 하다가, 

일전에 뉴욕에서 스테이크 먹을때 사이드로 시금치 주문해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나, 스테이크는 그저 도울 뿐... 스테이크까지 굽는다. 인생..





그렇게 토요일의 술상.


이번엔 좀 짜게 됏지만, 소금을 넣지 않는다면 와인 안주로 아주 좋을 것 같다. 그냥 기름으로 볶았는데 올리브유로 볶으면 어떨까 싶어서 다음엔 한 번 시도해봐야겠다. 해놓고 나니 그저 간단하게 와인 안주로 너무 좋겠다는 생각들면서 막 친구 초대하고 싶고 그런 마음이 된다. 몰랑몰랑한 마음. 

그런참에 어쩐일인지 오늘은 갑자기 영화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에 삽입되었던 노래, <Love me like you do>  가 생각나는 게 아닌가. 일자산에 갔다 내려오는 길에 이 노래 들으면서 아 너무 좋네, 파티하고 싶다, 생각했다. 시금치베이컨 볶음 차려두고 (스테이크가 거들면 좋고) 와인을 준비해두고, 그리고 음악은 러브 미 라큐 두~ 틀어두면 사랑이 몽실몽실 피어나고 당신과 내가 함께 웃을 수 있을 것 같다.









봄 되니까 날씨가 너무 좋아서 막 이런 노래 생각나고 그래...  오늘 이 노래 여러차례 들었다.




주말 너무 좋다. 늦잠도 잘 수 있고 낮잠도 잘 수 있고 밤늦게까지 술도 마실 수 있고 산책도 할 수 있고... 그런데 이렇게 다 가버리고 말았다. 시간이 너무 빨라... 벌써 일요일 밤이라니 정말이지 믿고 싶지 않다. 흑흑 ㅠㅠ


나는 자꾸 안부를 묻고 싶다.

잘 지내나요?

나는 잘 지냅니다.

같이 잘 지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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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22 21: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3-23 07: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연 2020-03-22 2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다음주엔 요리 시도하기로! 완전 맛나보임요 냠냠~

다락방 2020-03-23 07:56   좋아요 0 | URL
요리는 사실 하기 전에도 하고난 후에도 너무 귀찮지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런데 뭔가 새로운 거에 도전해서 성공하는 거 재밌어요. 성공은 잘 못하지만...(시무룩)
다음주에 요리 시도하시면 인증 반드시 부탁드려요!

얼음장수 2020-03-22 2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찌찌뽕2입니다! 시금치가 꼭 모닝글로리 같아요.

다락방 2020-03-23 07:56   좋아요 0 | URL
저 모닝글로리 너무 좋아해요! 이렇게 시금치를 삶거나 데치지 않고 볶으면서 바로 숨을 죽였더니 너무 맛있어요!(어쩐지 잔인하다..) 너무 제 취향인데 완성을 위해서는 소금은 빼고 베이컨도 좀 적게 넣어야할 것 같아요. 다음엔 올리브유에 볶아볼까 생각중입니다. 후훗. (나는 요리천재인가..)

syo 2020-03-23 0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베뽂....
근데 왜 나는 다락방님 요리 사진을 보면 웃죠?? 아니 굉장히 맛있어 보이는데 대체 왜????

다락방 2020-03-23 07:55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니 나는 왜 쇼님 댓글 보면 터지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혼자 터졌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비연 2020-03-23 09:23   좋아요 0 | URL
시베뽂.. 이란 말에 이 아침에 빵 터집니다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다락방 2020-03-23 09:35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요즘 젊은 사람들은 말 참 잘줄여요 ㅋㅋㅋㅋㅋㅋㅋ(노티내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moonnight 2020-03-23 0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맛있어 보이네요♡ 월욜 아침인데 벌써 와인 한 잔 하고 싶어요ㅜㅜ 저도 잘 지냅니다. 다락방님. 안부 감사해요^^

다락방 2020-03-23 09:35   좋아요 0 | URL
모닝와인은 또 모닝 와인대로 너무 좋지 않습니까! 저도 와인 한 잔 하고 싶네요. 회사는 좀 그만다니고...
잘 지내요, 문나잇님. 잘 지냅시다!
 

어제 오늘 날씨가 좋아서 오랜만에 일자산에 다녀왔다. 진달래는 벌써 활짝 피어 있었다. 요가센터도 한달 이상 휴관이고 한없이 게을러지는 내 자신에게 무브, 움직임을 줘야했다. 저쪽으로 집어던졌던, 그래서 잊힌지 오래였던 핏빗을 충전시키고 나갔다왔다. 날씨가 좋으면 이상하게도 기분이 좋다.



다녀와서 씻고 3월의 여성주의 책 같이읽기 도서를 꺼냈다. 북플에 보니 벌써 다 읽었다고 체크한 멤버가 있었다. 오, 분발해야지! 친구로부터 선물 받은 호두파운드 케익을 꺼내두고, 네스프레소 커피도 한 잔 내려서는 자리 잡고 앉는다. 



책과 독서대뒤로 조금 보이는, 저 고구마튀김 같아 보이는 것은, 고구마튀김이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자자, 독서하자. 이번 주말에는 너무 책을 안읽었으니 이제 읽자! 

으으. 이렇게 일요일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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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는데 가장 집중이 잘되는 장소는 아침 출근길의 지하철이지만, 가장 편한 장소는 내 서재방 내 책상앞이다. 내 다이어리를 펼쳐 놓고 맥북에 전원을 켜두고 독서대에 책을 올려두고 읽으면 모든게 다 준비된 셈이다. 책을 읽다 혹여 모르는 게 나와 찾아보고 싶으면 다다닥- 네이버를 열어 검색하면 되니까. 게다가 뭔가 메모해야 할 게 있으면 다이어리를 펼쳐서 거침없이 메모한다.


이렇게 메모를 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아마 1-2년 정도?

그전에는 책 읽으며 굳이 메모를 하지 않아도 되었다. 어, 이건 페이퍼로 써야겠다, 리뷰로 써야겠다, 하고 중요 내용을 기억하고자 하면 기억이 났던 까닭이다. 그런데 이제는.. 그게 안돼. 바로 쓰지 않으면 다 까먹어버려서 글쓰기 창을 열어두고 아, 뭐 쓰려고 했지? 막 이렇게 되어버려가지고... 이젠 키워드를 메모해두어야 한다. 아, 이 책 얘기할 때는 저 책 같이 끌고 와야겠다, 아, 이걸 얘기해야겠다, 아, 그 영화 생각나네, 하고 키워드를 써둬야 하는거다. 그래서 종이 다이어리는 책을 읽으면서 엉망인 글씨로 단어들이 채워진다. 예전엔 일기가 빼곡했는데(아, 사랑이여! 이별이여!) 이젠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이어리 펼치면 시몬 베유 나오고 한나 아렌트 나오고 트라우마 나오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낸시 폴브레, 버지니아 울프에 포드주의 찾아본 거 나오고 분리주의까지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인생은 진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니깐? 미래는 예측불허 그리하여 생은 의미를 갖는 것.


















영화 《링컨:뱀파이어 헌터》는 '세스 그레이엄 스미스'의 원작 《뱀파이어 헌터, 에이브러햄 링컨》과 큰 줄기는 같되, 내용 부분에서 많이 다르다. 링컨이 뱀파이어 헌터라는 소재 자체는 매우 흥미롭지만 책에선 좀 늘어진 경향이 있었다. 조금 더 짧게 했어도 좋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

영화에서는 두시간 분량으로 담아내다보니 많은 것들을 쳐냈고 책에서 뱀파이어 헌터인 '링컨'에 집중했다면, 영화에서는 뱀파이어 헌터인 링컨의 결투 장면에 집중했다. 시각적 매체이다보니 당연한 선택이었을텐데, 그래서 영화도 재미있다. 나쁘지 않아. 책과 영화의 다른 점은 이렇게 어디에 집중적으로 관심을 두었느냐에 있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 링컨의 아내인 '메리 토드'의 역할도 크게 달랐다. 책에서는 메리 토드가 링컨이 뱀파이어 헌터인 것을 알지 못하지만, 영화에서는 결국 알게 되고 이 전쟁에 참여하게 되는 것. 책은 책대로 영화는 영화대로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링컨이 궁금해졌다. 아니, 메리 토드가 궁금해졌다.

책에서는 대부분의 인물과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가져왔는데, 그렇다고 하면 링컨과 메리 토드 사이에는 네 명의 아들이 있었고 아들중 두 명이 링컨이 죽기 전에 죽었다. 링컨 부부는 아들 둘을 어릴 때 잃었던 것. 게다가 링컨이 암살당하고 나서 또 아들이 죽고 결국 메리 토드는 아들 넷중 아들 셋을 자신보다 먼저 보내야 했던 거다. 아이들의 때이른 죽음과 남편이 암살당하는 걸 본 메리는 어떻게 삶을 견뎌냈을까에 마음이 쓰이는 거다.


세스 그레이엄 스미스는 책에서 메리 토드가 우울증을 앓았다고 밝히고 있다. 정신병원에 나중에 입원도 한모양인데, 메리 토드를 검색해보니 그녀가 충격을 받았던 것은 남편의 암살이 자신이 보는 앞에서 이뤄졌기 때문인듯도 하다. 오래전부터 편두통을 앓았다고 하는데 이것도 다 연결이 되어있는걸까.


링컨에 대해서라면 책을 좋아했고 수염이 있고 노예 해방에 앞장선 대통령 이라는 정도밖에 모르지만 메리 토드에 대해서라면 아예 모르고 있던 터라 너무 궁금해진 거다. 메리 토드는 자신이 사랑하고 결혼한 남자가 결국 미국의 대통령이 될 거란 사실을 알았을까? 알면서도 그걸 선택한걸까? 책을 읽고난 뒤부터 영화를 보고나서까지도 나는 그게 궁금했다. 나였다면 선택하지 않았을 삶이라서.


일전에도 '크리스티앙 자크'의 《람세스》를 읽으면서 나는 '왕의 아내'는 될 수 없겠다는, 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이건 야망이 쪼꼬만 탓일 수도 있을 것이고 그런 막중한 책임 같은 것을 갖고 싶지 않은 걸 수도 있겠다. 메리 토드가 링컨을 만나 약혼을 결심하기 전에 이미 링컨은 하원의원을 했던 적이 있어서, 아마도 메리 토드는 링컨이 정치에 뜻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 둘의 연애와 결혼에 대해 나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어쩌면 연애하던 도중에 링컨은 메리에게 '나는 장차 대통령이 되고 싶어' 라고 말했을런지도 모른다. 그 때 메리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오, 그렇다면 나는 영부인이 되겠군!' 이라는 생각을 했을까, '아, 나는 대통령의 아내같은 건 하고 싶지 않은데..' 했을까? 나는 후자에 속하는 사람이라 메리 토드가 그 자리에 알고 간건지 어쩌다보니 그렇게 된건지가 너무 궁금해지는 거다. 게다가 남북전쟁, 노예해방이란 굵직한 일들의 중심에 남편이 있다는 것, 거기에서 또 자기의 역할을 고민해야 하지 않았을까.


인터넷 검색의 결과만으로 보자면, 메리는 남편이 정치에 너무 몰두하는 바람에 질투하고 우울증을 앓았다고 하는데 무엇이 그녀를 우울증을 앓게 한건지는 이 검색만으로는 알 수 없겠다. 나는 그녀의 삶이 궁금해졌다. 당시에 링컨이 아니라 링컨의 라이벌인 의원과도 알고 지냈는데, 그녀가 굳이 링컨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이었을지, 그리고 링컨의 아내였다가 영부인이 된 이후에 어떤 삶을 살았을지, 어떤 마음이었을지가 궁금한 거다. 메리 토드에 대한 책을 읽어 보고 싶어 알라딘에 '메리 토드'를 넣고 검색해보았지만 결과가 없었다. 하는수없이 링컨의 전기를 읽어볼까 싶어 링컨을 넣고 검색했더니 엄청난 책들이 쏟아져나왔는데 내가 읽고 싶은 건 보이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내 삶에 정치하겠다고 한 사람이 옆에 있었던 적도 없지만, 아마 앞으로도 그 삶은 딱히 달라질 것 같질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이야기를 읽을 때면 나는 계속 생각해보게 된다. 만약 나랑 연애를 하고 있는 남자가 혹은 결혼한 남자가 갑자기 '나 정치인이 되겠어'라고 한다면, 나는 어떡할 것인가. '정치인의 아내'라는 타이틀은 살면서 내가 갖고 싶었던 적이 없었기에 일단 전혀 욕심나진 않는다. 그리고 사실은 가급적 피하고 싶다. 만약 내가 사전에 알았더라면, 그러니까 '나는 언젠가 이 나라의 대통령이 되고 싶어' 라고 밝히는 남자였다면 나는 그 사람과 굳이 앞날을 기약하진 않았을 것 같다. 그런데 미래는 예측불허 그리하여 생은 의미를 갖는 것 아닌가. 나랑 결혼해서 살고 있다가 갑자기 '나 대통령을 해볼까 해' 라고 한다면.... 나는 어떡해야 하는가. 너무 싫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대통령의 아내 하기 싫다. 차라리 내가 대통령을 하지. 아니 이게 그러니까 내 행동이 즉각적으로 나에게 돌아오는 거라면 그건 어차피 나의 몫이지만, 내가 대통령의 아내라면 내 행동이 내가 아닌 남편에게로 리액션이 되어 갈 게 아닌가. 내 과거가 나 때문에 털리는 거라면 내가 감당하면 되는데, 내 과거가 내 남편 때문에 털리는 거라면 이래저래 너무 싫은 거다. 두 유 노 왓 아이 민?

사실 조언자의 역할을 하는 것, 의견을 내는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것은 그 자체로 매력이 있기는 하다. 누군가 어떤 결정을 앞두고 있을 때, 그리고 그게 매우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일 때, 내 의견을 하나 보태는 건 나쁘지 않은 일인 것이다. 음, 그렇지만 그게 정말 최선일까? 이런 식의 부작용도 있지 않을까? 하고 한 번 더 생각하게 하는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며 또 귀기울여야 할 일이니까. 그렇지만..

아.. 일어나지도 않을 일에 또 심란해하고 있다. 망상..



메리 토드가 너무 궁금하다. 그러나 메리 토드에 대해 말해줄 사람이 없다. 본인이 자신의 삶에 대한 기록을 남겼고 또 그게 지금까지 전달된다면 너무 좋을텐데.. 특히나 역사의 큰 자리에 있었던 사람이 아닌가. 그렇다면 더더욱이 기록을 남겨줬다면 그게 의미있었을 것 같다. 지금의 내가 그 때의 당신 삶을, 당신의 생각을, 당신의 마음가짐을 이렇게나 궁금해 하는데...

링컨에 대한 책은 수없이 많지만 메리 토드에 대해서는 쓴 사람이 없는 걸까.



여자들아, 글을 쓰자. 기록을 남기자. 지금 내가 남기는 사소한듯한 기록들 마저도, 먼훗날 누군가가 되게 궁금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니까? 기록은 중요하고 기록은 의미있다.


















오늘 출근길에 지하철에서 읽었던 책은 '카트리나 멘지스 파이크'의 《그녀가 달리는 완벽한 방법》이다. 이 책에서도 카트리나는 기록에 대해 얘기한다. 여자들이 마라톤에 참가할 수 없었고 달리는 여자들에 대해서라면 너 임신·출산에 안좋으니까 달리지말라는 잔소리를 들어야 했던 일들, 그래서 정식으로 참가하지 못해 숨어 있다가 같이 달리거나 남장을 하고 달렸던 것들. 그 때 달렸던 여자들에 대해 기록이나 그들의 생각을 찾으려해도 딱히 많이 남아있지 않은 것에 대해 카트리나가 서운해 하는 거다. 우승을 했어도 여자에 대한 것이라면 짧게 소개되고, 결혼하지 않고 자녀가 없는 여자였음에도 아이가 둘인 걸로 소개되기도 하는 거다. 이럴 때 여자가 직접적으로 자기의 기록을 남겨두고 그게 전해진다면 많은 게 달라지지 않았을까.




1964년 여자 마라톤 세계 초고 기록은 두 번이나 깨졌다. 그해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에 실린 두 번째 세계 기록 경신 기사는 이렇다.

"지난 8월 어느 토요일, 두 아이의 어머니이자 오클랜드 교외 마누레와에 거주하는 밀리 샘슨Millie Sampson, 31은 새벽 1시까지 춤을 췄다. 다음 날에는 11인분의 저녁식사를 준비했다. 중간에 마라톤 경기에 참가해서 3시간 19분 33초에 완주했다."

실제 밀리 샘슨은 결혼하지도 않았고 자녀도 없었다. 그리그의 기록을 8분이나 단축했다는 사실은 언급도 하지 않고 넘어갔다. 기사의 대부분은 뉴질랜드 중거리 육상선수 피터 스넬Peter Snell(1960년 로마 올림픽과 1964년 도쿄 올림픽 중장거리 금메달리스트-옮긴이)이 다가오는 세계 선수권대회 준비 과정을 소개하는 데 할애되었다. (p.102-103)




기록하고 기록하고 또 기록해야 하는 이유다. 기록해야 잊지 않는다. 기록해야 기억한다. 기록해야 뒤에도, 뒤에도 또 그 뒤에도 전해진다.

내가 내 기록을 해야 다른 사람이 나에 대해 엉뚱한 말을 하는 것에 맞설 수 있는 것이야.

메리 토드가 악처라는 얘기도 검색해보면 나오고 나름 행복했다는 얘기도 나오지만, 그런데 그것은 누가 판단한 것인가. 메리 토드의 입을 통해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너무 아쉽다. 아쉽고 또 아쉬워.

기록하자. 기록하는 삶을 살자.





오늘 사무실에 06:58에 도착했는데 이미 해가 환하게 떠있었고, 그것만으로 기분이 좋아졌다. 이런 걸로 기분이 좋을 수 있다니, 너무 좋은걸. 퇴근 후에는 술과 안주를 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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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큐리 2020-03-20 1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무실 도착이 6: 58 이라니요.. 항상 출퇴근에 독서에 매진하시는 모습이 너무 좋아 보입니다. 그리서 여성주의적 관점을 유지하면서 작성하는 글도 너무 좋아요~~ㅎㅎ

다락방 2020-03-20 12:41   좋아요 0 | URL
아아, 좋다고 말씀해주시니 제가 좋습니다. 으하하핫. 이맛에 글 쓰는가 봅니다. 으하하핫.
제가 출근시간이 빨라요 ㅠㅠ 나쁜 회사 ㅠㅠ 어서 빨리 퇴사하고 늦잠자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으엉 ㅠㅠ
그래도 오늘 금요일이라 너무 씐나요! >.<

비연 2020-03-21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코로나 때문에 요즘 자차를 이용하는데, 지하철에서 책을 읽는 즐거움이 없어져 슬픕니다. 얼른 지하철을 이용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퇴사하고 늦잠자는 삶을 살고 싶은 마음에 백퍼 이백퍼 동감하며.

다락방 2020-03-22 15:11   좋아요 1 | URL
비연님, 우리가 퇴사하고 늦잠자는 삶을 살게 된다면, 비연님도 저도 그런 삶을 살게 된다면, 아침에 늦잠자고 일어나서 만나 늦은 아침식사를 함께 합시다.. 게으르게...아주 게으르게 말예요... 모닝 와인을 살짝 해도 좋고요.... 그 날을 기다립시다...

공쟝쟝 2020-03-22 21:40   좋아요 1 | URL
아아 그날, 저도 거기에서.... 뵙겠습니다.....

비연 2020-03-23 09:23   좋아요 1 | URL
다들 그날 거기에서 보아요. 모닝 와인잔 하나 들고. 책도 한 권 들면 더 좋고.

다락방 2020-03-23 09:36   좋아요 2 | URL
모닝 와인으로 대동단결....
 
지복의 성자
아룬다티 로이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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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자로 태어나기를 선택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8월에 태어나기를, 우리 부모님에게서 태어나기를, 대한민국에서 태어나기를 선택하지 않았다. 내 선택과는 아무 상관없이 내가 세상에 태어났고 자라는동안 여자라서, 내가 태어난 생일이 있어서, 우리 부모님의 딸이어서, 대한민국 국민이어서 경험하게 되는 일들에 맞닥뜨렸다. 어떤 것들을 슬픔이었고 어떤 것들은 기쁨이었으며 어떤 것들은 고통이었고 어떤 것들은 행복이었다. 고통과 행복 혹은 기쁨과 슬픔앞에 놓일 때면 '내가 여기서 태어나지 않았다면', '내가 여자로 태어나지 않았다면' 같은 생각들을 수도없이 해보았지만, 이런 생각을 해본다고 해서 잠시라도 다른 사람으로 살아볼 수는 없었다. 삶은 그런 게 아니었으니까.



'안줌' 역시 남성과 여성의 성기를 모두 다 가지고 태어나기를 선택하지 않았다. 태어나보니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자신에게 남성의 성기와 여성의 성기가 모두 있었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사람으로 자랄 수밖에 없었으며,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장소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남성과 여성의 성기를 모두 갖고 태어난 사람들, 그런 '히즈라'들이 머무르는 장소 '콰브가'에, 안줌 역시 머무르기를 선택한다. 가난하게 태어나기를 원한 것도 아니었고, 남성이며 동시에 여성으로 태어나길 원한 것도 아니었고, 인도에 태어나길 원한 것도 아니었지만, 어쨌든 안줌은 지금에 와서 다른 곳에 태어날 수도, 다른 모습으로도 태어날 순 없으니까. 삶은, 정말이지, 그런 게 아니니까.



2002년, '제프리 유제니디스'는 남성과 여성의 성기를 모두 가지고 태어난 사람의 이야기인 《미들섹스》를 출간했다. 책에서 남,녀의 성기 모두를 가진 주인공은 자신의 성정체성에 혼란스러워하고, 방황하다가, 써커스단에 들어가 자신의 성기를 보여주며 돈을 벌기도 한다.

'아룬다티 로이'가 '남성과 여성의 성기를 모두 가진 사람'의 이야기를 썼다니, 나는 이 책 역시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히즈라로 태어난 고통, 히즈라인 자식을 바라보는 부모의 고통, 그리고 그 히즈라가 자라면서 받게 되는 차별당하는 삶까지. 그런 이야기들이 빼곡하게 채워질 거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자신의 성정체성을 혼란스러워하며 몇 번의 사랑을 할 것이고, 어느 순간에는 제프리 유제니디스의 주인공이 그랬듯이, 자신의 저주받은 몸을 이용하여 돈을 버는 최종선택에 이르게 될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한거다. 《미들섹스》를 읽을 때는 그저 '아 이런 사람이 존재하는구나'를 생각하며 주인공의 고통을 이해하려 했다면, 지금 이 책을 읽으려고 책을 펼치면서는, '그러나 아룬다티 로이가 히즈라가 아니면서 히즈라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좀 위험하지 않은가' 하는 고민을 혼자 했다. 당사자성을 가지지 않은 채로 이야기를 해도 되는걸까. 그렇게 살아보지 않았으면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괜찮은것인가, 하는 생각. 그러다가 퍼뜩, 그러나 당사자성이 없다는 것은 나의 편견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다. 그런 이유로 이 책을 읽기를 주저했다. 그러나 이 책에서 '히즈라'인 안줌의 이야기는 백페이지도 되지 않을 때 모두 나온다.



학교에서 다른 아이들과 다르기 때문에 학교 가기를 포기하는 점, 변성기를 맞고, 자신이 선택하고 싶은 건 '여성'으로서의 삶이고, 콰브가에 들어가고, 그리고 마흔한 살이 되어 '엄마'가 되고 싶고, 엄마가 되고 싶을 때 마침, '자이나브'라는 아기를 입양하게 되고, 그리고 마흔 여섯에 정든 콰브가에서 떠나기까지. 이 이야기가 백페이기도 되기 전에 모두 나오는거다. 아직 뒤에 무수히 많은 페이지가 남았는데, 도대체 어떤 이야기를 하려고 안줌의 이야기가 여기까지 이렇게 훅- 지나가버린 거지?




그러니까 이 짧다면 짧은 페이지안에서 안줌은 '개인'을 산다. 히즈라로 태어난 개인, 여성이 되길 선택해 성전환 수술을 받는 개인, 아이를 입양하고 엄마가 되는 개인, 그리고 상처입고 콰브가를 떠나는 개인의 이야기. 그런 안줌 개인의 이야기가 진행된다면, 자, 이제는 안줌이 살고 있는 나라의 이야기가 나온다. 안줌은 안줌 개인이되 동시에 인도에 살고 있는 사람이다. 인도의 흐름 속에서 안줌의 생활 역시 그 흐름과 뒤섞일 수밖에 없다. 안줌은 생각지도 못하게 '구자라트 폭동'의 한가운데에서 친구의 죽음을 맞게된다. 그건 안줌이 생각해본 적도 없는 작별이었고 상상해본 적도 없는 폭력의 현장이었다. 이 일은 안줌의 생각을, 생활을 바꾸게 된다. 안줌은 콰브가에서 나와 무덤가로 간다. 그곳에서 폐인처럼 살면서 자신처럼 가난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사는 사람들을 하나씩 받아들이고, 그렇게 받아들이면서 게스트하우스를 만들고, 그들과 함께 이제는 죽어서도 가난하고 고통스러운 사람들을 위해 장례식장을 만든다. 살아서 가난한 사람들과 죽어서 가난한 사람들, 아니지,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과 가난하게 죽는 사람들을 위한 파라다이스, '잔나트 게스트하우스'를 만드는 거다.




이야기는, 결국 잔나트 게스트하우스에 올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몫이다. 그들이 겪은 삶은 살아서도 고통이었고 죽어서도 고통일 수밖에 없었다. 부패한 정부를 비롯하여, 탄광때문에 밀려나고, 가스누출에 희생된 사람들, 집을 잃고 쫓겨나고, 종교 때문에 박해받고, 일용노동자로 일하다 다치고, 부러지고, 맞고, 묶이고, 납치당하고, 지진의 피해를 입고, 강간당하고, 눈이 멀고, 폭탄이 터지고, 물밑으로 가라앉고, 사생아를 낳고, 시위를 하고 맞서지만 응답받지 못하는 사람들. 부모님의 죽음을, 아내의 죽음을, 아이의 죽음을 목도해야 하는 사람들. 울부짖어도 바뀌지 않아 절망하는 사람들. 마을 사람들에게, 경찰에게, 군인에게 희생되어 죽어가는 사람들. 헤어지려는 아내에게는 따귀 몇 대를 날려주라고 충고하는 친구, 친구의 충고대로 아내의 따귀를 때리는 친구. 그들이 사는 인도는 사람들이 죽어야 사는 곳이었고, 때로 두 번 죽어야 하는 곳이었다. 시체를 만들고, 시체를 보고, 시체를 발견하는 사람들. 그들 모두는 거기에서 개인으로 살지만, 그러나 고통받는 개인은 고통받는 나라를 만들고, 고통받는 나라는 고통받는 개인을 만든다. 엉망인 개인과 엉망인 나라. 죽음이 삶이 되는 현장.




여기에서 저기로 그리고 저기에서 거기로 가도 머무를 곳은 없었다. 반드시 누군가가 죽었고, 죽여야했고 아니면 내가 죽었다. 도망쳐야 했고 숨어야 했고 감춰야 했고 속여야 했는데 대체 이 사람들은 어디에서 삶의 의지를 다질까. 무엇이 이들을 살게 할까. 여기에서 폭력을 만나거나 저기에서 폭발을 만나는데, 여기에서 폭도들을 만나거나 저기에서 군인들을 만나는데, 어디로 가야 안전할까. 분쟁이 없는 곳엔 전쟁이 있었고, 전쟁이 없는 곳엔 테러가 있었고 테러가 없는 곳엔 계급이 있었다. 가난이 있었고 더 큰 가난이 있었고, 더 더 큰 가난이 있었고, 그리고 부자가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자기만의 상처와 고통과 복수를 가슴에 품고 살았다. 가난해서 힘들었고, 불가촉천민이어서 힘들었고, 두개의 성을 한꺼번에 가진 몸이라서 힘들었고, 사생아로 태어나서 힘들었는데, 그렇게 나만의 상처만으로는 끝나는 게 아니라고, 살고 싶다면 더한 것들을 마주하게 될 것이라고 삶이 말해주고 있었다. 너가 태어나 고통이니? 사는 건 더 고통이야. 이런 세상에서 사람들이 사랑하며 사는게 가능할 수 있을까?



안줌은 18세 생일에 꿈속에서 오르가즘을 겪었던 것이 자기 인생의 처음이자 마지막 오르가즘이다. 틸로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 수는 없없다. 가슴속에 사랑을 품었으되 그 사랑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은 그들에게 사치였다. 아무도 사랑할 수 없는 삶,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할 수 없는 삶. 그러나 그들은 결코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다. 사랑은 포기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인지도 몰랐다. 엄마가 되고 싶다는 바람은 그저 바람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사랑을 주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각자의 상처와 또 복수를 끌어안고 그들은 결국 한 데 모여 버려진 아기 '미스 제빈 2세'의 엄마가 되어주고 또 엄마가 되어주고 그리고 그 아기에게 최상의 장소를 제공하고자 한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으나 모두가 사랑했다.




이 책을 읽는 것은 무척 힘든 일이었다. 그 숱한 폭력과 희생, 무의미한 죽음의 기록들 때문에 힘들기도 했지만, 낯선 용어들로 가득차 힘들었다. 처음 보는 단어는 누군가의 이름이기도 했고, 직업이기도 했고, 직함이기도 했고, 장소이기도 했다. 게다가 인도에서 그들이 겪었던 역사적 사건들 역시 내가 잘 알지 못하는 것이었기에 수차례 컴퓨터 앞에 앉아 혹은 스마트폰으로 검색해야 했다. 카슈미르 분쟁은 도대체 뭐야, 구자라트 폭동은 또 뭐야. 이 사람들 왜이렇게 많이 싸우고 죽인거야. 이 모든 것들을 나는 기억하며 읽을 수가 없어서 결국 이면지를 반으로 접어 메모하기 시작했다.





반으로 접힌 메모지는 책을 읽어갈수록 꽉 채워졌다.




소설을 읽으면서 공부하는 자세가 되고 싶지는 않았는데, 연달아 등장하는 낯선 단어들 앞에 무릎 꿇었다.


게다가 이야기의 흐름은 어떻고. 그러니까 이런 식이다.

미스 제빈 2세를 얘기하면서 갑자기 미스 제빈 1세가 언급이 되면, 아 1세가 어디에서 나왔지? 내가 놓쳤나? 앞장을 몇 장 뒤적여야 했다. 그러나 미스 제빈 1세에 대해서는 그 뒤에 나오는 거다.

자, 이 이야기가 왜 이렇게 됐냐면 이런 일이 있었기 때문이야, 로 과거를 되짚는 식. 몇 번이나 그런 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되었고, 그 때마다 나는 번번이 내가 뭘 놓친건 아닌지, 내가 제대로 읽은 게 아닌지, 혹시 내가 메모를 해둔 것에 있는지, 책장을 되넘기거나 메모를 살펴야 했던 거다.


책의 표지를 넘기고 책장을 한장씩 넘기면서 책장이 휙휙 넘어가고 결코 뒤를 돌아보지 않게 되는 책이 있는가 하면, 이렇게 결코 한 번에 다 읽어낼 수 없는 책이 있다. 이 책을 읽기로 선택한 사람이라면 최대한 집중해야 할것이며 다른 책을 읽는 것보다 더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한다고 내가 미리 알려준다. 그리고 나처럼 메모를 하는 게 도움이 된다. 읽는 순간에는 '음, 이건 기억할 수 있어' 라고 생각해서 메모해두지 않았던 단어중에 '아자디'가 있다. 이게 뒤로 갈수록 자주 나오는거다. 심지어 사람들이 아자디, 아자디 함께 외치기도 한다. 그런데 내 메모를 아무리 뒤져봐도 이 단어가 없어. 나는 다시 책장을 되돌린다. 그리고 한참 앞에서 발견한다. 아자디는 '자유 혹은 독립'이란 뜻을 가진 단어였다.




여러가지로 어려운 책읽기었으므로 결코 즐겁다고 말할 수는 없었는데, <10장 지복의 성자> 시작부분부터 마음이 크게 움직였다. 10장에서는 모두가 만나 모두가 함께하는 삶이 펼쳐지니까. 거기에, 내가 좋아하는 모든 요소가 들어 있었다. 똑똑한 여자, 다른 사람에게 가르침을 주는 여자, 재회 그리고 사랑까지. 기쁨은 슬픔 뒤에 오고 희망은 절망 뒤에 오는 거라면, 이 책은 1장부터 9장 뒤에 10장이 온다.



우리는 개인으로 살아가며 자신만의 역사를 만든다.

다른 사람과 사랑하며 그 사람과 나만의 역사를 함께 만든다.

이런 우리가 모여서 역사속의 일부가 된다.


지복의 성자는, 그런 얘기를 하고 있다.






아프타브는 그 여자처럼 되고 싶었다.
그는 투르크만 게이트까지 여자를 따라가서 그녀가 안쪽으로 사라진 푸른 문 밖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보통 여자라면 그런 차림으로 샤자하나바드의 거리를 활보할 수 없었다. 샤자하나바드의 보통 여자들을 부르카를 입거나 손과 발을 제외한 몸의 모든 부분과 머리를 가리고 다녔다. 아프타브가 따라간 여자가 그런 차림(밝은색 립스틱을 칠하고 금색 하이힐을 신고 반짝이는 초록색 새틴 살와르 카미즈를 입은)으로 그렇게 활보할 수 있었던 것은 여자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 P33

안줌은 쾌락을 주는 자로서는 노련한 기교를 발휘하여 큰 인기를 얻었지만, 붉은 디스코 사리를 입었을 때 맛보았던 것이 그녀의 생애 마지막 오르가슴이었다. - P47

안줌은 자신이 ‘학살자들의 행운‘일 뿐임을 결코 잊지 않았다. 남은 생애 동안, 심지어 그렇게 보이지 않을 때조차, 그녀와 ‘남은 생애‘의 관계는 늘 불안정하고 무모했다. - P96

이런 따분한 소견을 말해도 용서가 된다면, 결국 영원히 실현되지 못할 공연을 위해 연습하는 것, 어쩌면 그게 인생이 아닐까? 혹은 인생 대부분의 결말이 그런 식이 아닐까? - P202

틸로는 건축학부 3학년 학생이었고, 세트와 조명 디자인을 맡았다. 그녀는 우리에게 자신을 틸로타마라고 소개했다. 그녀를 처음본 순간, 나의 일부가 내 몸에서 걸어나가 그녀를 감쌌다. 그리고 여전히 그런 상태로 남아 있다. - P203

이제 과거를 돌아보며, 나가는 자신이 오랜 세월 잠재의식 속에 틸로가 사막을 지나는 낙타처럼 그저 자신의 삶을 지나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언젠가는 그녀가 분명 자신을 떠날 거라는 두려움을 품고 살았음을 깨달았다. - P310

무사와 비스킷을 든 사람이 뒤에서 나타나기 전부터 금속 쟁반에 놓인 찻잔들이 희미하게 달각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무사와 비스킷을 가져온 사람은 즉시 서로를 알아보았으나, 그들의 표정은 수동적이고 불투명한 상태로 남아있었다. 암리크 싱은 그들을 면밀히 관찰했다. 방안의 공기가 동이 났다. 호흡이 불가능해졌다. 호흡을 하는 것처럼 가장해야만 했다. - P447

틸로와 무사는 연인인 동시에 前 연인, 애인인 동시에 전 애인, 남매인 동시에 전 남매, 급우인 동시에 전 급우였기에 제 3의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이런 기묘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들은 너무도 특이한 방식으로 서로를 신뢰했기에, 설령 그것 때문에 자신이 상처를 받는다 하더라도, 상대가 사랑한 사람은 그 누구라도 사랑할 가치가 있음을 알았다. 그들은 마음의 문제에서는 사실상 숲처럼 빽빽한 안전망을 갖고 있었다. - P483

여전히 무사는 소식이 없었다. 그런데도 그녀가 몇 년동안 품고 다니던 끊임없는 두려움-갑작스레 무사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될 것에 대한-의 무게가 얼마간 가벼워졌다. 그건 그를 덜 사랑하게 되어서가 아니라, 만신창이가 된 묘지의 천사들이 만신창이가 된 피수호자들을 보살피며, 두 세계 사이의 문을 (불법적으로, 아주 조금만)열어두어 이승의 영혼들과 이승을 떠난 영혼들이 같은 파티에 참석한 손님들처럼 어울릴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삶은 덜 확정적인 것이 되고 죽음 또한 덜 결정적인 것이 되었다. 왠지 모든 게 조금은 견디기가 쉬워졌다. - P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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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19 16: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3-19 16: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단발머리 2020-03-19 1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아룬다티의 책을 읽고 싶지만 저 역시 부제가 주는 느낌 때문에 아직까지 미루고만 있었어요. 남성과 여성의 성기를 모두 가진 사람의 이야기... 로만 예상했거든요. 다락방님 글 읽으니 읽고 싶은데 마지막에 공부 메모 사진 보고 나니... 맘이 복잡해지네요@@

다락방 2020-03-19 17:06   좋아요 0 | URL
단발머리님이 미루신 이유가 제가 갈등했던 이유와 아마도 같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또 거기에 있어서 좀 복잡한 이런저런 생각들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등장인물이 중심인물 ‘안줌‘이기는 하지만, 안줌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 책에서는 다양한 개인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였다고 생각해요.
제가 인용문을 옮겨 놓긴 했지만, 단발머리님, 단발머리님이 다크룸 읽다가 저에게 일러주었던 부분이 이 책에서도 나온답니다.


아프타브는 그 여자처럼 되고 싶었다.
그는 투르크만 게이트까지 여자를 따라가서 그녀가 안쪽으로 사라진 푸른 문 밖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보통 여자라면 그런 차림으로 샤자하나바드의 거리를 활보할 수 없었다. 샤자하나바드의 보통 여자들을 부르카를 입거나 손과 발을 제외한 몸의 모든 부분과 머리를 가리고 다녔다. 아프타브가 따라간 여자가 그런 차림(밝은색 립스틱을 칠하고 금색 하이힐을 신고 반짝이는 초록색 새틴 살와르 카미즈를 입은)으로 그렇게 활보할 수 있었던 것은 여자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P33

잠자냥 2020-03-19 1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왠지 아프타브, 그러니까 안줌에 대해서 다락방 님은 좀 더 다른 할 말이 있을 것 같았어요. ㅎㅎ

다락방 2020-03-20 08:25   좋아요 1 | URL
저도 어쩐지 그럴 것 같아서 이 책을 읽는데 엄청 망설인 거였거든요. 그런데 아룬다티 로이는 아주 영리한 사람이었습니다. 저로 하여금 그런 글을 안쓸 수 있도록(?) 중심인물이긴 하되 어쨌든 ‘이런 개인‘에 대해 쓰는 것에서 멈추더라고요. 저에겐 다행한 일이었어요. 하하.

얼음장수 2020-03-19 2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삶은 정말이지 그런 게 아니니까!
드라마에 나온 유치한 대사였지만, ‘내가 나임을 증명하는 데 다른 사람의 인정은 필요하지 않다‘도 떠오르고.
메모를 보니까 와우, 꼭 문학 전공하는 대학원생 같아요.

다락방 2020-03-20 08:28   좋아요 0 | URL
어휴.. 소설 읽는게 이렇게 힘들어서야 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한국 소설은 그럴 일이 별로 없지만 이게 외국소설 읽다보면 이름 헷갈릴 때도 엄청 많잖아요. 일본 소설도 엄청 헷갈려서 ‘어, 얘 아까 죽지 않았나? 왜 살아있지?‘ 라고 해서 뒤로 넘겨보면 한글자 다르고.. 러시아 소설은 애칭이 겁나 많고... 그런데 인도 소설은 이름 뿐만이 아니라 직업도 그렇고 호칭도 그렇고 뭐가 그렇게 낯선 단어가 많은지 따라가기가 벅차더라고요. 휴... 이젠 메모해가며 읽어야 해요.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블렌드 자기만의 방 - 100g, 홀빈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0년 8월
평점 :
품절


봉지를 열었을 때 맡게 되는 원두의 향이 참 좋다.
커피메이커에 넣고 내리는데 향에서도 그리고 맛에서도 산미가 약간 느껴진다.
산미 안좋아한다고 그렇게 부르짖어놓고 왜때문에 산미.. 그리운거지?
내 마음, 나도 모르겠다..
인간의 마음이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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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03-18 08: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오...식을수록 신맛이 더 세게 느껴진다..... 커피란 이런 것인가? 신맛이란 이런것인가?

반유행열반인 2020-03-18 11:30   좋아요 0 | URL
혼자 묻고 답하고 계셔요? ㅋㅋ알라딘 커피는 이름이 다 하는 듯...알라딘 커피 영업은 다락방님이 다 하고...전 산수유 한 잔 먹었어요. 내리는 중에 딴짓하다 다 식은 커피 먹으니 시콤시콤 ㅋㅋ즐거운 하루 보내셔요.

다락방 2020-03-18 11:43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김현철의 노래 중에 이런 가사가 나옵니다.

‘나 혼자서 농담을 하고 나 혼자 웃지. 우습지도 않은 우스개 소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제 가사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이고... 알라딘에서 책을 엄청 사는걸로도 모자라 이젠 커피까지 엄청 구매하고 있으니, 제 돈은 다 어디로 가고 있나요... 가뜩이나 쪼꼬미 월급이... 하아-

반유행열반인님, 점심 식사 맛있게 하세요!

웽스북스 2020-03-18 1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미 매력있죠 ㅎㅎㅎ

다락방 2020-03-18 13:57   좋아요 0 | URL
산미.. 제겐 너무나 혼란스럽습니다..... 싫다고 생각했는데 이 그리움은 무엇인지.......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