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는데 가장 집중이 잘되는 장소는 아침 출근길의 지하철이지만, 가장 편한 장소는 내 서재방 내 책상앞이다. 내 다이어리를 펼쳐 놓고 맥북에 전원을 켜두고 독서대에 책을 올려두고 읽으면 모든게 다 준비된 셈이다. 책을 읽다 혹여 모르는 게 나와 찾아보고 싶으면 다다닥- 네이버를 열어 검색하면 되니까. 게다가 뭔가 메모해야 할 게 있으면 다이어리를 펼쳐서 거침없이 메모한다.
이렇게 메모를 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아마 1-2년 정도?
그전에는 책 읽으며 굳이 메모를 하지 않아도 되었다. 어, 이건 페이퍼로 써야겠다, 리뷰로 써야겠다, 하고 중요 내용을 기억하고자 하면 기억이 났던 까닭이다. 그런데 이제는.. 그게 안돼. 바로 쓰지 않으면 다 까먹어버려서 글쓰기 창을 열어두고 아, 뭐 쓰려고 했지? 막 이렇게 되어버려가지고... 이젠 키워드를 메모해두어야 한다. 아, 이 책 얘기할 때는 저 책 같이 끌고 와야겠다, 아, 이걸 얘기해야겠다, 아, 그 영화 생각나네, 하고 키워드를 써둬야 하는거다. 그래서 종이 다이어리는 책을 읽으면서 엉망인 글씨로 단어들이 채워진다. 예전엔 일기가 빼곡했는데(아, 사랑이여! 이별이여!) 이젠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이어리 펼치면 시몬 베유 나오고 한나 아렌트 나오고 트라우마 나오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낸시 폴브레, 버지니아 울프에 포드주의 찾아본 거 나오고 분리주의까지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인생은 진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니깐? 미래는 예측불허 그리하여 생은 의미를 갖는 것.
영화 《링컨:뱀파이어 헌터》는 '세스 그레이엄 스미스'의 원작 《뱀파이어 헌터, 에이브러햄 링컨》과 큰 줄기는 같되, 내용 부분에서 많이 다르다. 링컨이 뱀파이어 헌터라는 소재 자체는 매우 흥미롭지만 책에선 좀 늘어진 경향이 있었다. 조금 더 짧게 했어도 좋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
영화에서는 두시간 분량으로 담아내다보니 많은 것들을 쳐냈고 책에서 뱀파이어 헌터인 '링컨'에 집중했다면, 영화에서는 뱀파이어 헌터인 링컨의 결투 장면에 집중했다. 시각적 매체이다보니 당연한 선택이었을텐데, 그래서 영화도 재미있다. 나쁘지 않아. 책과 영화의 다른 점은 이렇게 어디에 집중적으로 관심을 두었느냐에 있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 링컨의 아내인 '메리 토드'의 역할도 크게 달랐다. 책에서는 메리 토드가 링컨이 뱀파이어 헌터인 것을 알지 못하지만, 영화에서는 결국 알게 되고 이 전쟁에 참여하게 되는 것. 책은 책대로 영화는 영화대로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링컨이 궁금해졌다. 아니, 메리 토드가 궁금해졌다.
책에서는 대부분의 인물과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가져왔는데, 그렇다고 하면 링컨과 메리 토드 사이에는 네 명의 아들이 있었고 아들중 두 명이 링컨이 죽기 전에 죽었다. 링컨 부부는 아들 둘을 어릴 때 잃었던 것. 게다가 링컨이 암살당하고 나서 또 아들이 죽고 결국 메리 토드는 아들 넷중 아들 셋을 자신보다 먼저 보내야 했던 거다. 아이들의 때이른 죽음과 남편이 암살당하는 걸 본 메리는 어떻게 삶을 견뎌냈을까에 마음이 쓰이는 거다.
세스 그레이엄 스미스는 책에서 메리 토드가 우울증을 앓았다고 밝히고 있다. 정신병원에 나중에 입원도 한모양인데, 메리 토드를 검색해보니 그녀가 충격을 받았던 것은 남편의 암살이 자신이 보는 앞에서 이뤄졌기 때문인듯도 하다. 오래전부터 편두통을 앓았다고 하는데 이것도 다 연결이 되어있는걸까.
링컨에 대해서라면 책을 좋아했고 수염이 있고 노예 해방에 앞장선 대통령 이라는 정도밖에 모르지만 메리 토드에 대해서라면 아예 모르고 있던 터라 너무 궁금해진 거다. 메리 토드는 자신이 사랑하고 결혼한 남자가 결국 미국의 대통령이 될 거란 사실을 알았을까? 알면서도 그걸 선택한걸까? 책을 읽고난 뒤부터 영화를 보고나서까지도 나는 그게 궁금했다. 나였다면 선택하지 않았을 삶이라서.
일전에도 '크리스티앙 자크'의 《람세스》를 읽으면서 나는 '왕의 아내'는 될 수 없겠다는, 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이건 야망이 쪼꼬만 탓일 수도 있을 것이고 그런 막중한 책임 같은 것을 갖고 싶지 않은 걸 수도 있겠다. 메리 토드가 링컨을 만나 약혼을 결심하기 전에 이미 링컨은 하원의원을 했던 적이 있어서, 아마도 메리 토드는 링컨이 정치에 뜻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 둘의 연애와 결혼에 대해 나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어쩌면 연애하던 도중에 링컨은 메리에게 '나는 장차 대통령이 되고 싶어' 라고 말했을런지도 모른다. 그 때 메리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오, 그렇다면 나는 영부인이 되겠군!' 이라는 생각을 했을까, '아, 나는 대통령의 아내같은 건 하고 싶지 않은데..' 했을까? 나는 후자에 속하는 사람이라 메리 토드가 그 자리에 알고 간건지 어쩌다보니 그렇게 된건지가 너무 궁금해지는 거다. 게다가 남북전쟁, 노예해방이란 굵직한 일들의 중심에 남편이 있다는 것, 거기에서 또 자기의 역할을 고민해야 하지 않았을까.
인터넷 검색의 결과만으로 보자면, 메리는 남편이 정치에 너무 몰두하는 바람에 질투하고 우울증을 앓았다고 하는데 무엇이 그녀를 우울증을 앓게 한건지는 이 검색만으로는 알 수 없겠다. 나는 그녀의 삶이 궁금해졌다. 당시에 링컨이 아니라 링컨의 라이벌인 의원과도 알고 지냈는데, 그녀가 굳이 링컨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이었을지, 그리고 링컨의 아내였다가 영부인이 된 이후에 어떤 삶을 살았을지, 어떤 마음이었을지가 궁금한 거다. 메리 토드에 대한 책을 읽어 보고 싶어 알라딘에 '메리 토드'를 넣고 검색해보았지만 결과가 없었다. 하는수없이 링컨의 전기를 읽어볼까 싶어 링컨을 넣고 검색했더니 엄청난 책들이 쏟아져나왔는데 내가 읽고 싶은 건 보이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내 삶에 정치하겠다고 한 사람이 옆에 있었던 적도 없지만, 아마 앞으로도 그 삶은 딱히 달라질 것 같질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이야기를 읽을 때면 나는 계속 생각해보게 된다. 만약 나랑 연애를 하고 있는 남자가 혹은 결혼한 남자가 갑자기 '나 정치인이 되겠어'라고 한다면, 나는 어떡할 것인가. '정치인의 아내'라는 타이틀은 살면서 내가 갖고 싶었던 적이 없었기에 일단 전혀 욕심나진 않는다. 그리고 사실은 가급적 피하고 싶다. 만약 내가 사전에 알았더라면, 그러니까 '나는 언젠가 이 나라의 대통령이 되고 싶어' 라고 밝히는 남자였다면 나는 그 사람과 굳이 앞날을 기약하진 않았을 것 같다. 그런데 미래는 예측불허 그리하여 생은 의미를 갖는 것 아닌가. 나랑 결혼해서 살고 있다가 갑자기 '나 대통령을 해볼까 해' 라고 한다면.... 나는 어떡해야 하는가. 너무 싫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대통령의 아내 하기 싫다. 차라리 내가 대통령을 하지. 아니 이게 그러니까 내 행동이 즉각적으로 나에게 돌아오는 거라면 그건 어차피 나의 몫이지만, 내가 대통령의 아내라면 내 행동이 내가 아닌 남편에게로 리액션이 되어 갈 게 아닌가. 내 과거가 나 때문에 털리는 거라면 내가 감당하면 되는데, 내 과거가 내 남편 때문에 털리는 거라면 이래저래 너무 싫은 거다. 두 유 노 왓 아이 민?
사실 조언자의 역할을 하는 것, 의견을 내는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것은 그 자체로 매력이 있기는 하다. 누군가 어떤 결정을 앞두고 있을 때, 그리고 그게 매우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일 때, 내 의견을 하나 보태는 건 나쁘지 않은 일인 것이다. 음, 그렇지만 그게 정말 최선일까? 이런 식의 부작용도 있지 않을까? 하고 한 번 더 생각하게 하는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며 또 귀기울여야 할 일이니까. 그렇지만..
아.. 일어나지도 않을 일에 또 심란해하고 있다. 망상..
메리 토드가 너무 궁금하다. 그러나 메리 토드에 대해 말해줄 사람이 없다. 본인이 자신의 삶에 대한 기록을 남겼고 또 그게 지금까지 전달된다면 너무 좋을텐데.. 특히나 역사의 큰 자리에 있었던 사람이 아닌가. 그렇다면 더더욱이 기록을 남겨줬다면 그게 의미있었을 것 같다. 지금의 내가 그 때의 당신 삶을, 당신의 생각을, 당신의 마음가짐을 이렇게나 궁금해 하는데...
링컨에 대한 책은 수없이 많지만 메리 토드에 대해서는 쓴 사람이 없는 걸까.
여자들아, 글을 쓰자. 기록을 남기자. 지금 내가 남기는 사소한듯한 기록들 마저도, 먼훗날 누군가가 되게 궁금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니까? 기록은 중요하고 기록은 의미있다.
오늘 출근길에 지하철에서 읽었던 책은 '카트리나 멘지스 파이크'의 《그녀가 달리는 완벽한 방법》이다. 이 책에서도 카트리나는 기록에 대해 얘기한다. 여자들이 마라톤에 참가할 수 없었고 달리는 여자들에 대해서라면 너 임신·출산에 안좋으니까 달리지말라는 잔소리를 들어야 했던 일들, 그래서 정식으로 참가하지 못해 숨어 있다가 같이 달리거나 남장을 하고 달렸던 것들. 그 때 달렸던 여자들에 대해 기록이나 그들의 생각을 찾으려해도 딱히 많이 남아있지 않은 것에 대해 카트리나가 서운해 하는 거다. 우승을 했어도 여자에 대한 것이라면 짧게 소개되고, 결혼하지 않고 자녀가 없는 여자였음에도 아이가 둘인 걸로 소개되기도 하는 거다. 이럴 때 여자가 직접적으로 자기의 기록을 남겨두고 그게 전해진다면 많은 게 달라지지 않았을까.
1964년 여자 마라톤 세계 초고 기록은 두 번이나 깨졌다. 그해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에 실린 두 번째 세계 기록 경신 기사는 이렇다.
"지난 8월 어느 토요일, 두 아이의 어머니이자 오클랜드 교외 마누레와에 거주하는 밀리 샘슨Millie Sampson, 31은 새벽 1시까지 춤을 췄다. 다음 날에는 11인분의 저녁식사를 준비했다. 중간에 마라톤 경기에 참가해서 3시간 19분 33초에 완주했다."
실제 밀리 샘슨은 결혼하지도 않았고 자녀도 없었다. 그리그의 기록을 8분이나 단축했다는 사실은 언급도 하지 않고 넘어갔다. 기사의 대부분은 뉴질랜드 중거리 육상선수 피터 스넬Peter Snell(1960년 로마 올림픽과 1964년 도쿄 올림픽 중장거리 금메달리스트-옮긴이)이 다가오는 세계 선수권대회 준비 과정을 소개하는 데 할애되었다. (p.102-103)
기록하고 기록하고 또 기록해야 하는 이유다. 기록해야 잊지 않는다. 기록해야 기억한다. 기록해야 뒤에도, 뒤에도 또 그 뒤에도 전해진다.
내가 내 기록을 해야 다른 사람이 나에 대해 엉뚱한 말을 하는 것에 맞설 수 있는 것이야.
메리 토드가 악처라는 얘기도 검색해보면 나오고 나름 행복했다는 얘기도 나오지만, 그런데 그것은 누가 판단한 것인가. 메리 토드의 입을 통해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너무 아쉽다. 아쉽고 또 아쉬워.
기록하자. 기록하는 삶을 살자.
오늘 사무실에 06:58에 도착했는데 이미 해가 환하게 떠있었고, 그것만으로 기분이 좋아졌다. 이런 걸로 기분이 좋을 수 있다니, 너무 좋은걸. 퇴근 후에는 술과 안주를 사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