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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사랑하는 존재
뤼카스 레이네벌트 지음, 이진 옮김 / 비채 / 2026년 4월
평점 :
나보코프의 잘못은 [롤리타]를 읽게될 (남성)독자의 수준을 너무 높이 잡았다는데 있다고 나는 생각해왔다. 롤리타 에 등장하는 성애의 대상 어린아이의 육체에 대한 찬미가 이어지고 그리고 그 소녀를 욕망하는 추잡한 중년 남성 험버트가 나오는데, 험버트는 수시로 롤리타가 얼마나 취약한 상황에 놓여있엇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자신이 미성년자를 성착취함으로써 그 아이의 가능성 무한했던 미래가 어떻게 제약받는지도 보여주고. 그러나 책 뒤편의 해설과 당시의 남성 독자들은 이것을 험버트의 사랑 이야기로 읽었다. 오, 신이시여. 미친.. 나보코프는 필요한 장치들을 마련해두었지만, 그러나 그 장치들은 제대로 독자에게 가 닿지 못했고, 독자들은 언제나 그렇듯 자기 좋을대로 읽어대기 때문에, 이것은 아이에 대한 사랑이었으며, 그동안 다른 이야기에 공감하지 못했을 이 남성 독자들은, 그러나 미성년자를 향한 육체적 욕망에는 공감했던 것이다.
[가장 사랑하는 존재] 역시 미성년에 대한 중년 남성의 성적 욕망이 다뤄진다고 해서 읽지도 않으려고 했다가, 그러나 몇몇 칭찬하는 감상 글들을 보고 아, 그러나 그런 고통스런 폭력 뒤에 무언가 다른 할 말이 있는가보다 했다. 그러나, 이야기의 흐름은 이미 나보코프가 한 것의 반복이었다. 미성년을 향한 추잡한 욕망, 미성년의 육체에 대한 찬미. 그 사이사이 이것이 범죄이고, 그러므로 처벌을 받는 가해자에 대해 언급이 되며, 이 사실이 감춰야 할 것이라는 것을 가해자 역시 알고 있다고 나온다. 그러나 그 욕망을 잠재울 수 없어서 결국 열네살 소녀를 향해 사십구세 남성이 자신의 욕망을 다 실현해버리는데, 흐음. 글쎄다, 나는 잘 모르겠다.
문학이 무엇인가, 라고 한다면 아마 각자가 답할 수 있는 많은 것들이 있겟지만, 나는 아주 많은 부분, 일상적인 이야기를 아름다운 문장으로 그려냈다는 것이라 생각해왔다. 그러니까 아주 사소한 우리의 보통 삶도 어떻게 벼려진 문장이냐에 따라 찬란하게 읽힐 수 있는 것 말이다. 그렇다고 보면, 뤼카스 레이네벌트는 그것을 아주 잘 해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정말이지 이 젊은 미성년의 육체가 찬란하거든. 너무나 찬란하고 빛나는 육체인 것이다. 단, 누구의 시선으로 보느냐, 그 육체를 욕망하는 중년 남성의 시선에서 보아서 그렇다. 그녀는 이 중년 남성의 가장 사랑하는 존재이며 찬란히 빛나는 육체이다. 그 육체에 대한 욕망은 아주 뜨거운 것이어서, 그는 매일 조금씩 그녀에게 더 가까워진다. 처음엔 무릎에 앉히고, 그 후엔 포옹하고, 그 다음엔 키스, 그 다음엔.. 그렇게 욕망의 실현이 점점 더 극에 달할수록의 조급함과 흥분이 생생하게 느껴지는데, 그래서 나는 아주 드물게, 이런 생각을 하게된 것이다. 문학이 아름답게 찬란한 문장으로 일상을 그려내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런데, 굳이 그래야 하는건가, 라는 생각 말이다. 이게, 이렇게 쓸 일인가? 욕망의 대상으로서의 소녀를 이렇게 찬란하게 그려낼 일인가? 열네살 소녀에 대한 욕망을 이렇게 간절하게 보여줄 일인가? 그러자 문학이란 무엇인가, 다시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문학이라서, 그래서 괜찮은 것인가? 난 잘 모르겠다. 섣불리 '안돼!'라고 하지도 못하겠지만, 그런데 '문학에선 다 가능하지' 라고도 답할 수가 없는 것이다.
물론, 작가는 이것이 잘못된 것임을 인지하고 계속해서 언급하고 있다. 또한 이 가해자에게 어떤 어린 시절이 있었는지도 보여줌으로써, 비뚤어진 욕망과 범죄가 어떻게 대물림 되는 것인지도 보여준다. 수많은 문학 작품을 읽어나가다 보면, 문학이란 것이, 학창 시절 배웠던 것처럼, 해피엔딩의 결말이나 권선징악적 교훈을 가진 것만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되기도 하지만, 그렇지만, 잘 모르겠다. 이미 이런 문학이, 그러니까 미성년자의 육체에 대한 찬미 그리고 그에 따른 욕망과 범죄를 다룬 [롤리타]가 있었는데, 거기에서 크게 변주가 없는 이 책이, 굳이, 다시 찬란하고 아름답게 새로운 대상을 만들어냄으로써, 존재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물론, 시간이 흘렀고, 지금 이 열네살 소녀의 취약함은 롤리타의 상황과는 다르다. 이 열네살 소녀는 어릴때 오빠가 사고로 죽었고, 엄마는 도망가서 아빠와 또다른 오빠와 셋만 살고 있다. 소녀를 보살펴줄 엄마가 없고, 아빠와 오빠는 소녀를 방치한다. 소녀의 머릿속에는 수시로 히틀러와 프로이트가 찾아와 말을 걸고, 이 소녀는 책을 읽고 팝송을 듣고 머릿속에서 항상 자기 자신과 말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소년이 되고 싶다. 소년이 되고 싶다. 소년들이 가진 갈퀴-고추-를 갖고 싶다. 그리고 마을의 수의사는, 자신에게 갈퀴를 줄 수 있다 말했다. 그러니까 그녀는 환경적으로도 취약했지만 정신적으로도 매우 취약한 상황에 놓여있었고, 가해자는 그것을 알면서 이용했다. 이 취약함이 롤리타의 것과 다르지만, 또 그렇다면 얼마나 다른가. 그래서 다시 묻게 된다. 추악한 욕망과 범죄의 대물림을 보여주면서 이렇게 찬란할 일인가, 이렇게 간절할 일인가, 라고 말이다.
나는 잘 모르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