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하는 여자가 강하다 - 능력 있는 현대 여성은 왜 무기력한가
레베카 라인하르트 지음, 장혜경 옮김 / 이마 / 2017년 3월
평점 :
절판


내가 페미니즘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고 그것을 더 알고 싶어질수록 다른 것들에 대한 앎의 욕망도 더 커졌다. 페미니즘에 대한 책을 읽고, 말을 하고, 생각을 나누고 하는 일련의 과정들을 거칠수록, 언어란 것에 대해 궁금해졌고 종국에는 내가 알아야 할 것은 철학이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다. 학문은 이렇게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겠구나, 하는 것도 최근에야 깨달았다. 나에게 그것의 시작이 페미니즘이었지만, 누가 어떤 다른 공부를 시작한다 해도 결국 우리는 만났을 것이다. 학문은 연결된 것이니까. 내가 언어학을, 사회학을, 정치학을, 경제학을 그리고 철학을 좀 더 잘 알게 된다면 페미니즘에 대한 시야도 좀 더 넓어지고 사고도 확장될 것이라는 게 눈에 보였다. 만약 누군가가(혹은 내가) 언어학을 먼저 공부하게 됐다면 혹은 경제학에 먼저 관심이 생겼다면, 그 사람은 그 분야에 대한 관심으로 파고 들어가다가 결국 페미니즘을 만나게 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페미니즘이 학문으로 분류되든 그렇지 않든, 결국은 모르는 상태에서는 '공부'해야 하는 것이었고, 공부는 하면할수록 얼마나 모르는 게 많은지 세상에 얼마나 알아야 하는 게 많은지를 알게 되는 것이니까.



재차 말하지만 나는 이 모든 것이 결국은 철학이라는 것으로 따라가지 않나 싶었다. 그렇게 철학을 공부하고 싶었다. 대학시절 관심도 없던 철학을, 성인이 되어서도 나와는 무관하다 생각했던 철학을 만나고 싶었고, 그 숱한, '이름만 들어본' 철학자들의 이론서를 먼저 읽는 것보다는, 개념을 먼저 잡고 가야겠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런데 마침, 맞춤하게 이 책이 눈 앞에 똭- 보이는 게 아닌가. 좋다, 철학을 공부하기에 앞서, 철학하는 여자가 강하다고 말하는 이 책을 읽어보자. 이것은 내가 접근해야 할 철학에 대한 가장 좋은 입문서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거다. 그러나, 내 예상은 빗나갔고, 결과적으로 나는 이 책에 실망했다. 이 책은 내가 생각한 '철학에 대한 입문서'가 아니었다. 이것은 오히려 '자기계발서'에 가까웠다. 아니, 자기계발서다. 조금더 상세히 분류하자면, '여성에게 맞춤한 자기계발서'쯤이 될텐데, 그렇다 해서 이 책이 무용하냐 하면, 그건 또 전혀 그렇지 않다.



이 책은 우리가, 특히 여성들이, 우리를 가둔 굴레를 벗어던지자고 시종일관 얘기한다. 우리가 그렇게 모든 걸 다 잘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계속 강조한다. 그러니까, 너무 당연한 얘기다. 우리는 훌륭한 일꾼이면서 동시에 어진 엄마이고 다정한 아내의 역할을 모두 다 갖출 수 없다. 그런 역할들을 모두 다 수행하려고 하느라 잠잘 시간마저 부족한데, 이것은 과연 우리가 '당연히' 가져가야 할 역할인가, 하면, 그렇지 않다는 거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좀 더 당당해져야 하고, 거부할 수 있어야 하고, 남자들보다 더 많이 노력하지 않아야 하고, 힘을 가져야 한다는 거다. 얌전하거나 착하지 말자고, 겸손하지 말자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분명, '나는 열심히 살고 있는데 왜 딱히 속시원한 느낌이 아닐까'를 고민하는 여성들에게 유의미한 책일 것이다. 그들로 하여금 세상과 고정관념에 맞서게 하는데 도움을 줄만한 책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문제는, 내게는 이 책이 필요가 없다는 데에 있다. 이 책의 저자가 말하는 바를 충분히 알겠고, 저자의 뜻에 충분히 동의하지만, 나는, 이 잘난 나는!!! 이미 저자가 '앞으로 우리가 살아야 할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그 지점을 넘어서 있는 것이다!!!!! 



으음, 이 책은 의미 있지만 내게 필요친 않은 책이군, 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는 절반도 채 읽기 전에 이 책을 덮을까를 진지하게 고민했다. 세상은 넓고 읽어야 할 책 또는 읽고 싶은 책은 쌓여있는데, 굳이 필요없는 책을 읽으면서 이 유한한 시간을 보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철학에게 조금 더 가까이 가고 싶은 나의 마음, 나의 이 애절한 마음은, 책장을 덮는데 반대했고, 철학자라는 저자의 말을 끝까지 들어보자고 결심하게 되었던 거다. 처음 내가 이 책에 기대한 바대로 이 책은 내게 '맞춤한' 책은 아니었다. 그러나 저자는 자신의 주장을 얘기하면서(우리가 권력을 가지자!! 충분히 가질 수 있어!!), 계속해서 철학자들을 소환해낸다. 이 철학자는 이런 말을 했어, 이 철학자는 저런 말을 했지, 하면서. 그래서 어떻게 되었냐고? 



나는 한나 아렌트가 궁금해졌다.




궁금해지는 게 많다는 게 나는 좋다. 궁금한 게 많다면 그 궁금함을 모두 해소할 수는 없지만, 해소하기 위해 노력할테고, 그건 공부로 이어지는 것일테니까. 책은 모든 문제에 대한 궁극적 해답은 결코 될 수 없지만, 어떻게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조언을 해준다. 이 책은 딱히 내게 필요한 책은 아니었지만, 다른 철학책을 또 읽어보자, 결심하게 되었다. 




지난 주말에는 창원까지, 페미니즘 철학 강의를 들으러 다녀왔다. 강의를 들었더니 칸트와 들뢰즈에 대해 빠샥하게 알게 되었다.... 라고 하면 너무나 아름다운 결론이겠지만, 나는 '이것은 무슨 말인가.... '하게 되어버렸고, 그래서 더 열심히 공부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다. 강의를 들으러 온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보다 나이가 많았다. 그런데 다들 앉아서 조금이라도 더 들으려고, 궁금한 것에 대해 질문하며 열중했다. 질문도 뭘 알아야 할 수 있는 건데, 나는 지식이 1도 없으니 질문도 못하겠더라. 공부를 하면할수록 내가 얼마나 많은 것을 모르는 가에 대해 깨닫게 된다. 




철학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너는 누구인가.

왜 우리는 이렇게 지내는가.

인생은 무엇인가.

그들은 왜 그렇게 되었는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왜 너는 너이고 나는 나인가.



이 모든 근본적인 질문은 결국 철학이다. 우리는 계속 묻고 답을 해야하고 그것을 멈추지 말아야한다. 나는 지치지 않고 게속 앞으로 나아가고 싶은데, 체력이 딸리는 것 같다는 느낌을 더러 받기도 해서, 아아, 이래서 어른들이 공부도 다 때가 있다고 하는구나.... 하는 생각도 들어....그치만, 무릇 공부란 멈춰서는 안되는 것이야. 열정적으로 공부해서 후다다닥 앞으로 가면 좋겠지만, 그러다가 지쳐서 널브러지면 오히려 뒤로 가게 되어버린다. 꾸준히 가야겠다.



학창시절 나는 공부를 못했지만, 특출나게 점수가 높은 과목은 있었다. 나는 이게 바로 공부 못하는 사람의 특징인가보다, 오늘 생각했다. 모든 학문이 연결되어있다는 결론에 이르자, 그래서 전교1등 아이들이 전과목을 다 잘했구나 싶어지는 거다. 세계적인 석학들이 모든 분야에 보통 이상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것처럼, 그들은 외국어에도 능통한 것처럼, 무엇을 알고자 하는 욕망과 그것을 채워주는 지식이란 것은 결국 다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 공부를 잘하는 사람은 이미 그것을 알고 있고 응용한 게 아닐까. 나는 너무 늦된 아이였어....그랬던거야.....





마지막으로 별점에 대한 고민을 한다...철학적으로..

나는 이 책에 대해 별을 셋을 줄것인가 넷을 줄것인가...그러니까 사실 읽으면서는 셋이다!! 했는데, 나는 내 자신의 주된 인물이니 내가 읽은 그대로 평을 해야하긴 할것인데, 그런데 이 저자가 틀린 말 한 거 하나 없고 다른 사람들에겐 유의미한 내용일 것이니까 조금 더 줘도 되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최종 결론은 3.5가 되었는데, 알라딘엔 반점짜리가 없으니까...셋이나 넷 둘 사이에 결정해야 할 것인데, 그렇다면 셋을 줄것이냐 넷을 줄것이야.... 하다가 그래, 올림을 하자, 하고는 별을 넷을 주기로 지금 막 나와 내가 쇼부를 쳤다.


삶은 이렇게 질문의 연속이다. 늘 질문하고 늘 답을 구하면서 인간은 앞으로 나아가는 거야....




이 생에서는 엄마가 되지 않을 수 있다. 직장에서 행복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인생의 남자가 딴 여자의 품으로 달려갈 수도 있다(그러지마...딴 여자의 품으로 가지마.......돌아와, 짜샤.........). 하지만 그것이 곧 우리가 무언가를 놓쳤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가 성급하게 땅에서 뽑아 버리는 바람에 말라빠진 식물을 보며 화를 낼 동안 다른 식물들이 조용히 소리 없이 싹을 틔운다. (p.57)





쉽게 반말을 하거나 상대의 반말을 용인하지 마라. 당신은 성인이다. 특히 직장이라는 무대에서 튀어나오는 반말은 쉽게 용인해서는 안된다. 반말은 친밀함을 넌지시 암시하지만 그 친밀함은 대부분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당신에게 은근 슬쩍 반말을 던지거나 당신을 별명으로 부르는 상사는 그 반말 의식을 악용하려는 사람이다. 이럴땐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정확한 발음으로 상대의 이름과 직위를 호명해야 한다. 그럼 권력은 당신 편이 될 것이다. (p.98)

유독 철학과에선 지위가 높은 여성을 만나기 힘들다. 철학과 여대생들은 대학 시절부터 제대로 대우를 못 받고 무시당하기 일쑤이며 재능없는 인간 취급을 당한다. 철학이란 것이 남자들만 가진 희귀한 재능이라도 되는 듯이 말이다.
오랜 시간 방에 틀어박혀 혼자서 비환원주의적 유물론이나 포스트 형이상학의
자유 개념을 연구하여 자식 대신 상을 타고도 남을 만한 우수한 글을 쓴 여성은
‘정상이 아니다‘. 틀림없이 ‘미쳤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녀의 글을 남자 동료가
쓴 글보다 더 나쁘게 평가하며 그녀의 말을 히스테리컬하다고 낙인찍거나, 더
나아가 아예 입을 못 열게 만든다. 그런 경험, 그 비슷한 경험들 탓에 많은 여성
학자들은 교수 자리를 아예 처음부터 꿈도 꾸지 않는다. (p.145-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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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24 11: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8-24 12: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syo 2017-08-24 1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철학책 좀 보니까 철학 그거 뭐 별거 없더라구요. 한 300000년 정도 공부하면 싸그리 정복할 수 있겠던데요? ㅠㅠㅠㅠㅠㅠㅠㅠ ㅠㅠㅠㅠㅠㅠㅠㅠ

다락방 2017-08-24 13:24   좋아요 0 | URL
ㅎㅎ 그정도 공부하면 정복 가능하단 말이죠? 오케바뤼 알겠어요. 일단 영생을 얻겠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앞으로 제가 철학 공부하는데 선배님 도움 좀 받도록 하겠습니다. 많은 지도 부탁드려요. (꾸벅)

syo 2017-08-24 13:27   좋아요 0 | URL
네, 그렇다면 제가 1년정도 먼저 시작했으니 299999년은 우리 함께 달려볼까요??ㅠㅠㅠㅠㅠ

다락방 2017-08-24 13:30   좋아요 0 | URL
흑흑 그래요 ㅠㅠ 그 머나먼 길, 쇼님과 함께라면 흑흑 외롭지 않겠지요 흑흑 ㅠㅠㅠㅠㅠㅠㅠㅠㅠ 우리 함께 달려봐요..아니, 난 좀 걸으면 안될까요? (글썽)

syo 2017-08-24 13:37   좋아요 0 | URL
걸으셔도 되요. 뭐 한 백년 살다 가는 인생 600000년 걸리나 300000년 걸리나 큰 차이 있겠어요? 쉬엄쉬엄 갑시다, 막걸리나 마시면서.

다락방 2017-08-24 13:39   좋아요 0 | URL
음... 비도 오는데......막걸리 얘기를 하니.........몹시 흔들리는군요.
오늘 저녁에 막걸리를 마실까 말까 마실까 말까...................................................

아아 역시 삶은 고민의 연속이여..................

비연 2017-08-24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한나 아렌트가 궁금합니다...

다락방 2017-08-24 14:18   좋아요 0 | URL
세상은 궁금한 것 투성이죠.... 제가 혹여 공부하게 된다면 페이퍼로 공유하도록 하겠습니다. 불끈!!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수 클리볼드 지음, 홍한별 옮김 / 반비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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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부모에게 충분히 사랑을 받고 가족 구성원들끼리 충분히 대화하며 딱히 부족한 것 없이 중산층으로 살아온 아이가 있다면, 어른이 되어서도 모나지 않은 사람이 될거라고 누구나 생각할 것이다. 실제로 건강하게 살아가는 사람을 보면 아, 어릴 때 사랑을 많이 받았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될것이고, 사랑을 충분히 주면서 살아가는 사람을 보면, 아 사랑을 많이 받아봤구나, 라고 생각하니까. 우리는 지금도 너무나 당연하게 말하지 않나. 사랑을 받아본 사람이 사랑할 줄 아는 거라고. 


나 역시 당연히 그렇게 생각해왔고, 그러므로 '좋은' 부모 밑에서 안정적으로 자라온 사람이 어떤 사건의 '가해자' 혹은 범죄자가 될 확률은 없을거라고 생각했다. 뒤집어 말하면, 어떤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에 대해 은연중에, 나도 모르게, 불행한 과거를 추측하거나 행복하지 않은 가정을 짐작하게 된다는 거다. 나쁜 부모가, 불우한 가정환경이 저 사람을 저렇게 만들었을거야. 내가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앞으로도 그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이건 너무나 당연한듯 보여서, 1999년 콜럼바인 고등학교 총기난사 사건의 가해자중 한 명인 '딜런'이 좋은 부모 밑에서 충분한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는 사실에 대해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인정하기가 매우 힘들기도 했다. 좋은 부모 밑에서, 좋은 가족구성원들 사이에서 자랐는데, 그랬는데도 살인자가 될 수 있다면, 그게 언제든 내 주변의 일이 될 수도 있는 일이니까. 그래서 우리는 아마도 화목한 가정에서 자란 아이는 문제가 없을거라고, 건강한 사람이 될거라고 당연히 믿고 싶어했는가보다. 그래야 살인과 자살이 내게서부터 먼, 다른 사람의 일이 되는 거니까. 우리가 우리 가족 안에서 사랑하고 화목하다면, 문제는 우리와 거리를 두게 될테니까.



1999년 4월 20일, 에릭 해리스와 딜런 클리볼드는 총과 폭탄으로 무장하고 콜럼바인고등학교에 갔다. 두 사람은 학생 열두 명과 교사 한 명을 살해하고 스물네 명에게 부상을 입힌 다음 스스로 목숨으 끊었다. 역사상 최악의 학교 총기 난사 사건이었다. (p.20)



수 클리볼드는 자신의 아들 딜런이 다니는 학교에서 총기난사 사건이 일어났다는 뉴스를 접하고 아들이 다치면 어쩌나 걱정을 한다. 그러나 자신의 아들이 총을 쏘는 가해자라는 사실을 알고는 더 큰 절망에 맞닥뜨린다. 차라리 아들이 자살했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한다. 딜런은 총기난사 사건의 가해자였으므로, 희생자와 유족들 그리고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괴물이 된다. 수 클리볼드는 자신의 일에서 최선을 다하고 이웃들과 사이가 좋고 가족들을 사랑하며 사는 사람이었지만, 그 사건 후에는, '수 클리볼드' 대신 '살인자의 엄마'가 된다. 어딘가에서 누구를 만나도 나라는 정체성이 '살인자의 엄마'가 될 수밖에 없는 삶을, 그 사건 이후로 수 클리볼드는 살아가게 된다.


그녀는 그 사건이 있은 후로 16년간 끊임없이 그 사건에 대해 생각한다. 처음 그녀에게 닥쳐온 건 아들을 잃은 슬픔이었다. 이제 다시는 아들을 볼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가슴 아파하며, 어릴 적에 아이가 어땠었는지를 떠올리고, 그 아이와 미래를 함께 할 수 없다는 슬픔에 휩싸인다. 시간이 조금씩 흐르고, 아들로 인한 희생자를 인식하면서부터는, 죄책감과 한없는 미안함이 그녀를 감싸고, 자신이 알고 있는 딜런과 세상이 알고 있는 딜런의 격차에 혼란스러워한다. 딜런이 왜? 그럴 리가 없어, 걘 사흘 전에도 자신이 갈 대학을 구경 갔었는데, 왜? 딜런은 친구도 많고 착한 아이인데? 

이런 혼란속에 그녀는 딜런이 약에 중독됐거나, 누군가로부터 협박을 당해서,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그런 일을 저질렀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죽기 직전 딜런이 남긴 영상속 딜런은, 수 클리볼드가 알던 그 아들과 아주 달랐다. 그제서야 그녀는 자신의 아들이 우울과 분노에 휩싸였으며, 자신의 의지로 그런 살인을 저질렀다는 걸 받아들인다. 



당연히 그녀는 '어떻게 부모가 되어서 아들이 그런 것도 눈치채지 못했냐'는 비난에 수도없이 맞닥뜨린다. 그녀가 가장 많이 자신에게 질문하는 것도 그것이다. 내가 왜 몰랐지? 어디서 무엇을 놓쳤지? 


그녀는 끊임없이 자신에게 질문하고 그 혼란스러운 감정을 일기로 남긴다. 아들이 남긴 일기를 읽고, 과거의 자신의 일기를 읽으면서 '혹시 이게 그 싸인이었나'를 곰곰 돌이켜보고, 희생자 가족들에게 편지를 쓰고, 자살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정신건강과 우울증에 관련된 전문가들을 만나고 또 만나며, 우울증에 관련된 책들을 읽고 또 읽는다. 그리고 이제, 그녀는 쓴다.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을 이 책에 꾹꾹 눌러담았다. 



수 클리볼드는 책에서 자신의 아들을 잃었음을 슬퍼하고, 희생자를 애도하며, 희생자의 가족들에게 사과하고, 자신의 아들이 잘못했음을 인정한다. 같이 살인을 저지른 에릭때문이라며 에릭만 원망하는 것도 아니고, 딜런이 정신이 건강하지 못했다며 아들 변명에 급급하지도 않는다. 자신이 힘든 시간에 자신을 비난한 모든 사람들을 이해하며, 자신을 위로한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한다. 그녀는 사실을 사실로 인정하려고 온 마음을 다해 애를 쓰고, 최선을 다해 그것을 책으로 전하고 있다. 또한, 이것이 자기에게 일어났다는 사실은, 평범하고 행복한 가정 누구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라면서, 혹여라도 앓고 있을지 모를, 아파하며 고통스러워 하고 있을지도 모를 사람들을 위해 이 책을 썼다. 앞으로 일어날 비극을, 막을 수 있다면 우리가 막아보자고 혼신의 힘을 다해 얘기를 한다. 책은 첫장부터 끝장까지 그 진실함이 차고 넘쳐 내 안의 모든 것들이 뒤틀리는 경험을 하게 된다. 내 안에 내가 가지고 있던 생각들이, 막연한 원망이 저들끼리 섞인다. 그것들이 섞여서 나는, 나란은 인간을 다시 구성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바이런에게 그랬듯이 딜런에게도 번개, 뱀, 저체온증을 조심하라고 가르쳤다. 치실질을 하고, 선크림을 바르고, 사각지대를 꼭 확인하라고 가르쳤다. 십대가 된 뒤에는 음주와 약물의 위험에 대해 최대한 터놓고 이야기하고 안전하고 윤리적인 성행위에 대해서도 가르쳤다. 딜런이 마주한 가장 큰 위험은 외부에서 오는 게 아니라 이미 자기 안에 있었다는 사실을, 나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다.

나는 내 가족은 자살 위험이 전혀 없다고 마음속 깊이 믿었다. 내가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 사이가 친밀하기 때문에, 혹은 내가 빈틈없고 민감하고 다정한 사람이라 안전하게 지킬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믿었다. 자살은 다른 집에서나 일어난다고 믿는 사람이 나 혼자는 아닐 것이다. 그런데 내 생각은 틀렸다. 

자살에 대해 내가 알던 것 전부가 틀렸다. 어떤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지, 그 까닭이 뭔지 나는 안다고 생각했다. 이기적이거나, 비겁해서 자기 문제를 마주하지 못하는 사람, 혹은 순간적 충동에 휩싸이는 사람들이라고 믿었다.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사람들을 패배자로 보는 문화적 편견을 나도 받아들였다. 너무 나약해서 삶의 도전을 이겨내지 못하는 사람, 다른 사람의 관심을 바라는 사람, 주위 사람들을 괴롭히고 싶은 사람이라고.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 머릿속에 들어가 보지도 않고 쉽사리 판단하는 정확하지 않은 생각들이었다. (p.256-257)





수 클리볼드는 정신의 고통에 대해 많이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가 다른 육체적 고통은 손쉽게 얘기하고 치료 받으러 다니면서 정신의 고통에 대해서는 숨기는 것에 대해 얘기한다. 정신의 고통에 대한 낙인을 피하려고 치료받지 않아, 더 큰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에 대해 얘기한다. 우리는 그 낙인을 없애야하고, 정신이 고통스러우면 신체의 다른 부위가 고통스러운 것과 마찬가지로 치료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픈 사람도 또 아프지 않은 사람도, 정신의 고통에 대해 지금과는 다른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혹여라도 이렇게 말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딜런에 대해 변명하는 것으로 보일까봐 걱정하며, 정신이 고통스럽다고 해서 무조건 살인자가 되는 건 아니라는 것도 잊지않고 얘기하고 있다. 그러나 정신의 고통을 무시하면 오히려 자기 자신과 주변사람들을 더 큰 고통속에 몰아넣을 확률이 높다는 것을 끊임없이 얘기한다. 정신의 고통속에 빠져있는 사람들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수 있도록, 우리는 낙인을 없애야 하고, 또 평소와 다른 상태인건 아닌지 관심을 갖고 지켜봐야 한다고 말한다. 죄책감과, 미안함과, 안타까움과, 다른 사람들에겐 고통이 없었으면 하는 그녀의 바람이, 가득 차있다.

사건 이후 그녀의 삶도 혹독했겠지만, 이 책을 쓰는 과정도 그러했으리라.




덕분에 내 안의 것들이 뒤틀렸다. 내 안의 것들이 뒤틀려서 나는 나를 재구성한다. 재구성된 나는 아마도 '꼭 그렇지만은 않아', '그럴 수도 있어' 를 더 많이 갖게 되지 않을까. 무조건 누군가를 탓하기에 앞서 한 번 더 '아, 어떻게 그 지점까지 가게 됐을까'를 고민하다 보면, 나는 수 클리볼드를 살인자의 엄마로 먼저 정체화 시키기에 앞서 수 클리볼드로 먼저 볼 수 있게 되는 거 아닐까. 그녀가 자신의 아들을 충분히, 잘 애도하고, 자살예방을 위해 노력하는 것에 힘이 실리고, 그녀의 말이 설득력을 갖고 모두에게 닿을 수 있기를 바란다. 그녀의 남은 삶은 여전히 아픔과 슬픔으로 채워질테고 그걸 극복하라고는 감히 내가 말할 수 없지만, 그녀가 전달하고자 하는 바가 충분히 잘 전달될 수 있는, 그런 삶이길 바라본다.



여러분, 이 책 읽읍시다. 내 안의 것들이 뒤틀리는 경험을 함께 느껴봅시다. 

제가 진짜 강하게 이 책을 추천합니다.





"우리는 애들한테 동화를 읽어주고 세상에는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이 있다고 가르치죠." 내가 『부모와 다른 아이들』을 쓸 때 수가 내게 한 말이다. "지금이라면 절대 그러지 않을 거예요. 사람은 누구나 선해질 능력이 있고 또 나쁜 선택을 할 가능성도 있다고 말하겠어요.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 사람의 선한 면과 악한 면, 둘 다를 사랑해야 한다고요." (p.10, ‘앤드루 솔로몬‘의 해설 中)

몇 가지 중요한 점을 정리해주면 도움이 될 것 같군요.
1. 부모님이 어떻게 해서, 혹은 어떻게 하지 않아서 딜런이 그 행동을 하게 된 것은 아닙니다.
2. 딜런이 어떤 상태인지 부모님이 ‘보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딜런은 원래 비밀이 많은 아이고 자기 내면을 부모님뿐만 아니라 자기 주위 모든 사람에게 의도적으로 감추었습니다.
3. 삶의 막바지에 다다랐을 때 딜런의 심리작용은 심하게 악화되어 제대로 생각할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4. 이렇게 악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딜런의 이전 자아가 아직 남아 있어서 총격 도중에 최소 네 명을 살려 주었습니다.
(p.262, 피터 랭먼 박사의 이메일 2015.02.09)


무릎을 다치면 걸을 수 없을 지경이 될 때까지 병원을 찾지 않고 내버려두지는 않을 것이다. 관절에 얼음찜질을 하고, 다리를 높이 괴고, 운동을 쉬다가 며칠 지나도 차도가 없으면 정형외과에 간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정신건강 문제에 있어서는 진짜 위기가 닥치기 전에는 병원을 찾지 않는다. 아무도 다친 무릎을 의지와 용기로 낫게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정신의 고통에 대해서는, 낙인을 피하려고 스스로 벗어날 방법을 찾으려고만 한다. (p.436-437)

내 불안장애를 어느 정도 다스릴 수 있게 되어 수렁에서 벗어나기 시작하자, 뇌건강 문제는 심장병이나 인대가 끊긴 것이나 다름없는 건강 문제라는 사실이 갑자기 한낮처럼 또렷하게 떠올랐다. 이런 건강 문제와 다를 바 없이 치료할 수 있다는 것도. 하지만 먼저 병을 깨닫고 진단을 받아야 한다. 오늘날에는 유방 엑스선 검사와 촉진으로 50년 전에는 놓쳤을 암을 조기 발견해 치료한다. 덕분에 나도 암을 이겨낼 수 있었다. 언젠가는 뇌건강 문제에 대해서도 그만큼 효과적인 진단과 개입이 이루어지기를 바랄 뿐이다.
반드시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뇌의 병을 제대로 인지하고 치료하지 않으면 다른 어떤 병 못지않게 위험하다. 파괴적 충동은 그 충동을 느기는 사람에게 가장 큰 고통을 준다. 일부 예외적인 사례에서는 다른 사람에 대한 폭력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고, 그럴 가능성도 낮지만, 그래도 그런 일이 일어난다. 병을 치료하지 않으면 그 병을 앓는 사람뿐 아니라 주위에 있는 사람도 위험해질 수 있다. (p.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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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겟타 2017-07-12 1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며칠전 다락방님이 이 책을 읽고 있다는 것을 알고 ‘음.. 그래 나도 이 책을 연초에 읽고 글을 썼었지..‘라고 생각하며 제 글을 찾아보니 안썼던 거에요 ㅎㅎㅎㅎ;; 분명 썼다고 기억했는데.. 그래서 저도 이 책으로 곧 써보려구요 ㅎㅎ 다락방님도 이책을 강력 추천! 하시는 군요. 저도 읽고 느낀 바가 많았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어요.

다락방 2017-07-12 11:53   좋아요 0 | URL
블랙겟타님 이미 읽으셨군요!
일전에 블랙겟타님의 마징가 z 글을 즐거운 마음으로 읽었는데, 오오옷, 이 책에 대한 글을 써주신다면 제가 후다닥 달려가서 역시 반가운 마음으로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얼른 써줘욧!

책을 읽는 내내 제 안의 것들이 뒤틀리는 기분이었어요. 제 친구도 이 책을 읽고 있는데, 둘이 그런 얘길 했어요. 이 책을 읽기를 잘했다고. 정말 읽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 책을 읽기 전의 저로 돌아가고 싶지가 않아요. 블랙겟타님, 이 책에 대한 글 기다리고 있을테니 꼭 써주셔야 해요!

북깨비 2017-07-12 14: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에 이동진님께서 영화 곡성 평론 때였나 아님 빨간 책방에서 였었나.. 아무튼 사람들이 카오스 (혼돈, 무질서)보다 완벽하지 않더라도 인과관계 (질서)를 선택하는 이유는 불행은 언제 어디서나 일어나는데 이 불행에 인과관계가 없으면 불안하기 때문이라고.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는건 나한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건데. 하지만 이 불행에다가 인과관계를 만들어 주면, 예를 들어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은 그 사람의 불우한 가정환경 때문이야 우리집은 사랑이 넘쳐나니까 그런 일은 절대 안 일어나 나는 안전해! 하고 안심하고 싶은, 불행한 사람들과 나는 다르다 그러니까 나한테는 불행이 안 일어날꺼야 하는 절박한 논리가 형성이 되니까요. 이런 논리의 희생양으로 잘나가다가 한순간에 불행해진 연예인들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일은 이유를 불문하고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다는거 다락방님 리뷰를 보면서 다시 한번 마음을 단단히 먹게 됩니다.

다락방 2017-07-12 16:50   좋아요 1 | URL
네 맞아요 북깨비님. 말씀하신 그대로예요. 이 책을 읽다보면 바로 그런걸 알 수 있어요. 저는 언제나 그렇게 안다고 생각해왔으면서도 인정하긴 싫었던 것 같아요. 그게 그렇게 어디에나 언제든 올 수 있다고 인정해버리고 나면, 결국 제 것이 될 수도 있을테고, 그걸 받아들이기가 너무 싫어서 조건을 붙였던 것 같아요. 내 가정환경은 그렇지 않으니까, 우리 집은 화목하니까, 하고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니까요.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수 클리볼드 역시 저와 같은 사람이었다는 걸 알고, 아, 운명이라든가 인생이라든가 삶이라든가 하는 건, 대체 뭐지? 어떤 식으로 굴러가고 있는거지? 하고 혼란이 찾아오더라고요.

북깨비님, 이 책 참 좋습니다. 북깨비님께도 일독을 권합니다.

2017-07-24 18: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7-25 09: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꿈을 향해서 2017-08-20 14: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지금 보고 있는데 박찬욱 감독의 서평이 인상적이기도 하였는데 읽다보니, 자식 키우는 일이 이게 참... 한 생명을 키운다는게... 무거운 부담감으로 다가오더라구요. 아이의 행동이나 말에 더 귀를 기울이게 되고, 혹은 내가 대체적으로 잘 하더라도 아이는 그렇게 못 느낄수도 있겠구나 란 생각이 들기도 하구요. 세상엔 내가 생각지 못한 부분에서 고통 받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많구나...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아이 키우는 부모가 한 번쯤은 읽었으면 하는 책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우리가 늘상 이럴거야 라고 당연하게 생각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걸 자각하고 사람을 더 폭넓게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책이예요. 반 정도 읽은터라 이 정도 느꼈던 것 같아요. 알라딘에서 온 메일을 체크하다가 어?! 내가 지금 읽고 있는 책인데! 반가워서 몇 글자 남기고 갑니다. ^^ 다락방님의 평 중에 아이에게 동화책을 읽어줄 때의 이야기는 저도 읽고 한 대 탁! 맞은 느낌이 들었어요. 그 부분을 읽으며 아이에게나 모든 사람들에게 어떤 말을 할 때 한 마디를 하더라도 신중히 해야겠다...고 생각했죠. 그 생각이 잘 지켜지지 않아서 문제지만요;;^^ 잘 보고 갑니다~~~
 
헬페미니스트 선언, 그날 이후의 페미니즘
윤김지영 지음 / 일곱번째숲 / 201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요즘에는 눈웃음청년과 페미니즘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그는 내게 페미니즘에 대해 '묻는다'고 하지만, 사실 나는 그와의 대화로부터 배우는 것도 많다. 오늘은 '각자의 페미니즘'에 대해 얘기했다.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이 과연 좋은 것인가, 옳은 것인가, 하는 얘기를 시작해서 각자의 페미니즘 쪽으로 결론이 났는데, 그러니까 지난 토요일 북콘서트에서 누군가 그런 얘길 한것이다. 요즘 서점에 가면 페미니즘 책이 많지만, 실상 그들이 서로 다른 얘기를 하는 것 같지가 않다, 온건하다, 고. 그러자 윤김지영 쌤은, 그게 우리 출판계가 딱 그만큼까지를 허락하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얘기를 하신거다. 더 극단적인, 래디컬한 페미니즘에 대한 책 소개까지는 아직 할 수 없는, 아직은 이만큼까지만 소개할 수 있는 딱 그정도. 쌤은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은 사실 말이 되지 않는 것 같다 하셨다. 이를테면, 흑인 인권운동을 위해 싸운다고 할 때, 그것이 과연 기득권이었던 백인에게도 좋을까, 기득권인 백인은 불편할 것이다, 하는 얘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이것이 '옳기' 때문에 '모두를 위한' 게 될까? 페미니즘 역시 마찬가지로 '모두를 위한다'는 건 좀 아니지 않나, 하는 거였다. 성평등에 가기 위해서는 기득권의 불편함은 당연히 따라올 터, 그것이 과연 '모두를 위한다'고 할 수 있겠느냐는 거였다.



페미니스트 라고 자신을 정의하는 사람들도 모두 각자가 페미니즘에 대해 생각하는 바가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페미니스트들이 서로 싸우기도 한다. 자신이 생각하는 페미니즘이 더 옳다고 믿고 주장하기 때문인데, 그렇다면 페미니즘 내부에서 이렇게 서로 자기 주장을 피력하는 것은, 페미니즘의 모순일까?



아니,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우리 모두가 궁극적으로 한 방향을 보느니만큼 다같이 어깨동무하고 사이좋게 가면 더 빨리 닿을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결국 지향하는 바에 닿기 위해서는, 갈등은 필연적으로 따라올거라 생각한다. 그래서 눈웃음청년과 나는 '각자의 페미니즘'에 대해 생각했다. 내가 생각하는 페미니즘, 내가 지향하는 페미니즘과, 내 친구 a가 생각하는 페미니즘, 내 친구 b 가 지향하는 페미니즘은, 성평등을 향해 나아가되, 조금씩 다를 수 있다. 우리는 살아온 환경과 각자의 경험이 모두 다르니까. 같은 책을 읽어도 느끼는 바가 다른 것처럼, 우리는 같은 페미니즘 책을 읽어도 서로 다르게 소화해낼 것이며, 받아들이는 게 다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페미니즘이라는 걸 자기 나름대로 받아들이고 인식할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의 갈등은 결코 '모순'으로 표현되어져서는 안되는 것 같다. 갈등은 모순과 다르니까. 



토요일에 만난 친구는 정희진 쌤의 말에 대부분 동의한다고 했지만, 벨훅스도 읽었지만, 아, 뭔가 어딘가 다른 걸 더 듣고 싶어서, 뭔가 더 있지 않을까 싶어서 윤김지영 쌤의 북콘서트에 오게 됐다고 했다. 나 역시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발언을 듣고 싶었다. 내가 페미니즘을 지향하고 페미니스트가 된다고 했을 땐, 그건 이미 유명한 페미니스트 하나만을 모델로 두고 가는 게 아니다. 다양하게 읽으면서 또 다양한 강의를 들으면서, 거기에서 내가 느끼는 바와 생각하는 바를 정리하고 내 자신을 성찰하며 끊임없이 나 자신에게 어느것이 옳고 그른지, 어디를 향해 나아갈건지 물어야 한다. 페미니즘은, 내가 생각하기에,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내가 옳게 가고 있는지를 끊임없이 묻는 것. 이런 페미니즘에 있어서 내부 갈등은 필수적이지 않을까. 나 하나의 개인을 놓고 봐도 내적 갈등이 수시로 오고가는데, 하물며 페미니즘이라는 성평등을 주장하는 사상이 어떻게 아무 잡음 없이 앞으로 앞으로 쭉쭉 내달을 수 있겠는가.




윤김지영 쌤은 이 책에서 그간 헬페미니스트가 어떻게 생겨났는지 그리고 어떤 액션을 취해왔는지를 잘 정리해주었다. 이미 내가 보고 듣고 알고 있던 바를 차근차근 정리해둔 그런 책이다. 게다가 틈틈이 내가 궁금해했던 것들에 대한 언급도 있어서 지금까지 내가 여기 있는 이유에 대해 다시 돌이켜볼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개인의 내적갈등과 집단의 내부 갈등을 어쩔 수 없이 끌고 가야 하는 것도 고개 끄덕이며 인정할 수 있었고.



페미니즘이 매력적인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나는 페미니스트들이 끊임없이 행동한다는 데 있다고 본다. 이 책에서도 언급되어진 것들, 몰카를 몰아내고자 하고 리벤지 포르노의 용어를 바꾸는 것들을, 페미니스트들이 해왔다. 언젠가의 페미니즘 강연에서 이현재 선생님은 그간 온건파 페미니스트로 살았는데 아무것도 바꾸지 못해, 이제 자신도 래디컬로 돌아서기로 했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는데, 이렇게 지극히 당연한 것들을 이만큼 바꾸는 데에는 지옥을 헤쳐나가려는 의지가 필요한 것 같다. 헬페미니스트들의 행동력이 없었다면, 그들의 강한 나대기가 없었다면, 우리는 아직도 몰카에 시달리고, 여자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마치 잘못해서 복수를 당하는 것마냥 리벤지 포르노란 용어를 쓰고 있었을 것이다. 


일전에 페이퍼에서 언급한 적 있던 '혐오'라는 단어에 대해 눈웃음 청년과 이야기를 나눴다. 만약 다른 사상이었다면, 페미니즘이 아닌 다른 부분에서였다면, 많은 사람들이 지나치게 과격한 단어라고 했을 때, 혐오라는 단어를 버리고 다른 단어를 선택하려 했었을텐데, 페미니즘은 끝까지 혐오라는 단어를, 다른 사람들 입맛에 맞춰 버리는 게 아니라 가져간다는 것에 대해 그는 감동한다고 했다. 나는 페미니스트가 세상을 바꾸기 위해 취해야 할 자세는 바로 이런 데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건 너무 심해', '그건 아니야' 라는 숱한 말들에 물러서지 않는 것. 지금처럼 계속 나대고 시끄럽게 쿵쾅대는 것. 그래야 조금, 아주 조금 바뀌니까. 



언젠가 친구들과 할머니 페미니스트가 되자, 라고 말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의 친구들에게 나는 이제 이렇게 말하고 싶다. 우리 할머니 헬페미니스트 들이 되자고. 영화 매드맥스에서처럼, 후손에게 씨앗을 건네줄 수 있는 전사 할머니가 되고, 공격에 맞서 싸우는, 그런 할머니가 되자고. 헬페미니스트라니, 정말 좋다.




아래 올리는 밑줄긋기는 모두들 다 읽어보았으면 한다.







리벤지revenge포르노-헤어진 연인이나 부인의 신체, 성행위를 찍은 사진이나 동영상을 여성의 동의 없이 온라인에 유포하는 범죄 행위-라는 용어에 대한 헬페미니스트의 비판을 살펴봅시다. ‘리벤지‘라는 단어는 사적 영역에서 여성이 저지른 잘못에 대한 남성의 사적 복수, 사적 정의 구현이라는 함의를 가지고 있으며, ‘포르노‘라는 단어는 피해자인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시선의 연장이므로 헬페미니스트는 ‘리벤지 포르노‘라는 단어 자체가 남성 중심적인 관점임을 지적합니다. (p.38)

때문에 헬페미니스트는 리벤지 포르노란 용어를 파기하고 ‘디지털 성범죄digital sexual crime‘라는 새로운 용어를 제안해 널리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의 잘못에 방점을 찍어 이것을 사회적 문제로 부각함으로써 적극적 해결책을 촉구하는 것이지요. 소라넷 폐쇄를 이끈 DSO(디지털 성범죄 아웃)팀은 영상 유출자만이 아니라 이를 유통시키고 소비하는 자들 역시 디지털 성범죄의 공범자라는 점을 지적합니다. 이러한 공범성을 분명히 드러내기 위해 동영상 유포, 재생산 행위를 ‘유포 강간‘으로, 영상소비행위를 ‘시청 강간‘으로, 악성 댓글로 조롱, 협박하는 것을 ‘온라인 강간‘으로 명명합니다. 강간이라는 의미의 외연을 확장함으로써 디지털 성범죄가 어떠한 방식으로 한 사람을 사회적 죽음-사회로부터의 백안시, 배제, 열외, 비하, 협박에 의해 이민을 가거나 직장과 학교를 그만두는 것등-은 물론 생물학적 죽음-디지털 성범죄 영상유출 후 자살 등-으로 내모든 구조인지를 드러내는 것이지요.(p.40-41)

이후 데스티니 차일드 게임 일러스트 중에서 송 작가의 그림이 지워집니다. 송미나 작가가 사용한 한남충이라는 용어가 메갈리아라는 징표로 받아들여져 집중공격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넥슨 사태 때와 마찬가지로 남초 커뮤니티딜의 소비자 집단주의가 시작되면서, 소강기로 접어들었던 메갈 사냥이 재점화된 겁니다. 김치녀와 된장녀라는 용어는 남초 커뮤니티가 골고루 사이좋게 나누어 가지며 확대 재생산되고 농담처럼 용인되지만, 한남이나 한남충이란 용어는 메갈리아의 전유물로 규정되어 금기와 외설의 언어가 되어버리는 사태가 재연된 것입니다. 단지 여성이 남성을 호명하는 용어를 발명해 냈다는 이유만으로 여성 성우는 목소리를, 여성 일러스트 작가는 그림을 몰수당하게 된 것이지요. (p.76)

이런 질문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 ‘강간문화‘라는 단어는 형용모순은 아닌지 라는 것이 그것입니다. 어떻게 강간이라는 흉물스런 폭력과 문화라는 고상한 단어가 조합될 수 있을까요? 하지만 문화라는 개념은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의미만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문화는 자연과 야만, 미개성의 영역을 설정해야만 존립 가능한 개념입니다. 문화는 자연에 대한 조작과 통제, 이용을 통해 형성되며, 이러한 정복 행위를 문명화라고 부르는 것이지요. 문화란 타자에 대한 폭력을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남성들 간의 결속과 담합으로 이루어진 문화가 타자로 설정하고 있는 대상은 바로 여성입니다. (p.98)

폭로divulgation는 자족적 독백이 아니며 비림의 봉인을 풀어 공론장 안에 던져 넣고 변화를 촉구하는 주체적인 발화양식입니다. 오늘의 문명 안에서 누군가가 누리는 특권이 다른 누군가를 짓밟음으로 이루어져 온 것임을 밝힘과 동시에, 문명의 밑바닥에 설치된 가부장제의 음험하고도 비루한 하수구를 철거하려는 행위입니다. 또한 기존의 가치와 의미체계에 편입되지 않는 새로운 가치의 들끓음이기도 합니다. 당연히 이것은 기성 질서가 제어할 수 있는 규칙을 벗어나는 것으로, 세련되기보다 난장판에 가깝고 통제되지 않은 소란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폭로는 고백을 듣는 청자로 ‘정의로운 남성‘의 자리를 남겨두지 않음으로써 모두를 진창으로 끌고 들어갑니다. 성폭력을 폭로하는 행위자는 여성 포식 구조인 강간문화를 방관해 온 남성에게 비판의 활시위를 당깁니다. 여기서 무지의 권력이란 그들 역시 여성을 향한 폭력을 폭력으로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무지無知의 권력‘을 누리는 공범자이기 때문이빈다. 그러한 무지는 단지 둔감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여성에 대한 성폭력은 ‘알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몰라도 된다고 믿는 특정 문화의 소산입니다.(p.108)

이제 여성들은 일상의 고통과 상처의 목록을 꺼내들고 주저함 없이 그것들의 부당함을 폭로하기 시작했습니다. 여성들은 더 이상 자기검열 구조에 갇혀 ‘내 탓이오‘를 외치며 착한 죄인으로 고백의 값을 받아내려 하지 않습니다. 폭로 행위자들이 자신이 감내해온 고통의 강도가 얼마만한 것인지, 자신이 받은 상처의 깊이가 어떠한 것인지에 오롯이 집중하며 말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이 세상은 폭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여성혐오사회의 긴 터널을 무너뜨리는 다이너마이트이자 새로운 사회를 상상하는 폭죽입니다. 폭로는 바로 해방의 언어 그 자체인 것입니다. (p.111)

밀실에서 거리로 여성들의 공간 이탈을 가능하게 한 것은 통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통감通感이라는 정동 역학은 어떻게 개념화될 수 있을까요? 통감의 축자적 의미는 ‘마음에 사무치게 느낌‘입니다. 이에 한정하지 않고 새로운 윤리적 감각으로 이론화한다면, 통감은 고통의 감각이 나를 오롯이 관통하는 ‘가로지름‘의 감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p.153)

나아가 통감은 타자의 고통을 경청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온몸으로 절절히 반응하게 합니다. 타자의 고통을 관망하지 않고 그것에 반응하며 행동하는 전신全身의 행위자가 되게 합니다. 지금까지 여성 살해에 대한 반응은 공감에 가까웠으며, 대부분 죽은 여성에 대한 안타까움에 그쳤습니다. 심지어 피해자 여성의 행실을 의심하는 일도 빈번했습니다. 5·17 페미사이드를 "강남역 유흥가 살인 사건"으로 보도하는 방식이 그러한데, 여기에는 ‘유흥가‘라는 적절치 못한 곳에 여성이 있었기에 죽임을 당했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보도에 대한 비판적 관점이 제시되고서야 유흥가라는 당너가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즉 여성의 죽음은 살아남은 여성들에 대한 경고이자 공포정치의 효과적 표본이 되어왔기에 여성 살해는 추모의 연대와 분노의 저항으로 적극적으로 이어지지 못했던 것입니다. (p.156)

통감은 어느 한 사람의 고통에 다른 이가 먹혀버리는 것, 일방적 흡수행위가 아닙니다. 어느 누구도 변이와 이행의 에너지에 온전한 자리를 담보 받을 수 없는 것, 이러한 차이의 회오리로 빨려들어가 변신의 파동에 일렁여 새로운 행위를 구성하도록 하는 것이 통감입니다. 즉 감정적 전염은 감정적 매몰에만 그쳐 어떠한 행위도 구성할 수 없도록 하지만, 통감은 타자의 고통에 대한 공명뿐만 아니라 이에 대한 행위화로 이행해가는 인식의 차원 또한 내포합니다. 또한 통감은 감정과 사유의 섬세한 뉘앙스가 진동하는 접촉의 양식이자 생이 약동하는 계기입니다. 새로운 행위의 존재 진동을 낳는다는 점에서 감정적이자 인식적 차원 모두를 포함하는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p.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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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las 2017-07-05 1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동안 원론적인 페미니즘 책에 조금 지쳐있었는데 좀 새로워 보이네요 :) 사러갑니다

다락방 2017-07-05 13:51   좋아요 1 | URL
네, 잘 정리되어 있어서 좋았어요. 그것보다 또다른 페미니스트의 글을 읽는 것도 기뻤고요. 헬라스님은 어떻게 읽으실지 궁금하네요. 얼른 읽어주세요!
 
남자란 무엇인가
안경환 지음 / 홍익 / 2016년 11월
평점 :
절판


제목 그대로,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그리고 다 읽고 책장을 덮은 후에도, '도대체 이 책을 왜 썼을까?' 하는 의문을 가졌다. 이 책은 대한민국에서 여자로 살아가는 내가 읽기에도 아무것도 없고 그렇다고 남자가 읽는다고 해서 뭔가 위로를 받는다거나 재미있다거나 하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 안경환은 누구보다 현실 혹은 현상 파악에 능하다. 과거에 대한민국을 비롯한 세계의 남자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잘 알고 있고 또 지금은 어떻게 달라졌는지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이 변화의 과정에는 페미니스트들과 페미니즘의 영향이 있었다는 것도 알고 있고. 페미니즘을 지양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그것이 당연한 시대의 흐름이라는 인정도 하고 있다. 만약 그 인정을 좀 더 설득조로 썼다면 지금과 같은 문제(?)는 없었을 것 같은데, 그렇게 현상 파악을 잘 하고 있으면서도 단지 현상 파악만을 책에 기술했기 때문에 이 책은 문제가 된다. 게다가 처음부터 남자의 뇌와 여자의 뇌는 다르다고 주장한다. 아니, 주장이 아니다. 그냥 그렇다는 현상을 기술한다. 이 책의 가장 큰 문제점은, 나는 그 기술, 단순한 기록에 있다고 생각한다. 숱한 명사의 숱한 책 혹은 말에서 가져와 이 책을 구성하는 거다. 남자와 여자의 뇌과 다른데, 이렇게 달라, 하면서 여기저기에서 인용문 가져오고, 그래서 남자가 이런 본능을 가지고 있고 이렇게 행동하는데, 하면서도 여기저기서 인용문을 들입다 갖다 박는다. 위에 언급한대로, 그것은 '문제적'이고 지독한 차별에서 지금처럼 변할 수 있었던 것은 여성활동가들의 운동 덕이라고 하는데, 그것도 그냥 다 출처를 밝힌 인용문이다. 결과적으로 지금 세대의 남자들은 기존의 남자들과 다른 삶을 살아야 한다고 얘기하지만, 그것이 '옳기' 때문이 아니라 그보다는 '살아 남아야 하기 때문'이라는 시선을 가진듯 보이고, 이 역시도 강하게 주장을 하는 게 아니라 현상을 나열하는데 그친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분노하는 문장들을 비롯해서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할 수 있는 문장들까지도, 대체적으로 인용문이다. 



만약 지금과 같은 상황이 아닌 상태에서 이 책을 읽게 된다면 '읽거나 말거나 아무 상관없는' , '삶 혹은 일상에 영향을 1도 안미치는', 그야말로 '읽으나마나 한' 책이었을 거다. 정말 이 책을 왜 쓴걸까?



이 책은 지금 화제가 되었든 안되었든 내가 읽고싶어할 만한 책은 아닌데, 여당 의원들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악의적으로 발췌'하여 사람들이 비난한다고 하고 또한 '맥락을 읽지 못하고 발췌만 가지고 판단한다'고 하길래, 정말 그런가 싶어 읽게 되었다. 어디, 맥락을 파악하면 그 모든 발췌문들이 다르게 느껴질까? 해서 시작한 거다. 그리고 다 읽으니 발췌독만 읽었을 때보다는 '덜' 분노하게 된다. 그러나 이 맥락이 '분노하지 않을만한' 것은 아니다. 과거의 남자들이 가진 문제와 지금의 남자들이 가진 문제, 이 사이에 페미니스트들의 역할까지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처음에 언급했듯이, '남자와 여자의 뇌가 다르다'고 심하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이 모든 '남자들의 문제'를 '남자들의 문화'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이 사람이, 지금 욕먹을 만큼 '차별주의자'는 아닌 것 같은데(오히려 문제 파악을 잘하고 있다), 왜이렇게 읽는 내내 찜찜할까를 고민했는데, 그가 적어낸 문장에서 나는 그 답을 찾았다.




여군의 선호도가 높아지는 데는 유엔 평화유지군 활동의 비중이 커지는 영향 때문이기도 했다. 파견국 주민과의 유대를 강화하는 데 여성 군인이 장점이 많다. 최소한 성매매나 성폭력과 같은 전형적인 남자문화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전자책 p.237)



남자의 문제를 조목조목 다 짚어내면서, 그것을 '문화'로 보고 있는 거다. 성매매나 성폭력은 '범죄'다. 그것을 범죄로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전형적인 남자문화'라고 받아들이다보니 현상 파악을 잘 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 책이 문제시 될 수밖에 없다. 저런것을 남자들의 문화로 받아들이고 있으니, 여자의 '아니오'가 아니오라는 것을 말하면서도, 아내와의 섹스는 내가 필요할 때마다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말하면서도, 성소수자를 차별하면 안된다고 얘기하면서도, 우울증은 정신적 질환이므로 병원에서 치료 받아야 하지 숨길 게 아니라고 말을 하면서도, 거기에 별로 설득력이 실리질 않는 것이다. 오히려, 이렇게 잘 알고 있는데, 이걸 왜 이렇게밖에 표현을 못하지? 하게 되는 것이다. 이 사람에겐 어차피 남자들의 생래적 본능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그걸 인정하고 가기 때문에, 차별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에 힘이 실리질 않는다. 쉽게 말하면 '남자의 성욕을 다스려야' 한다고 말하지만, '남자의 성욕은 본능이다'를 인정해버리고 있는 거다. 애초에 본인이 멀리 떨어진 제삼자의 입장에서 쓰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렇게 본인의 주장은 거의 '없고' 인용문으로 현상만 나열한 글이 된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저자는 실생활에서 다른 남자들보다는 차별하지 않는 삶, 평등에 가까운 삶을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남자의 성적 본능'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책은 어느 한 쪽에 가까운 책이 되지 못하고, 이도저도 아닌, 그저 인용문 나열에 그친다. 



이 책에 인용된 책은 장르도 다양한데, 이렇게 책도 많이 읽고 평등한 시선으로 세상을 보려고 하는 남자조차도, '남성의 성욕 본능' 같은 거, '젊은 여자를 간절히 원하는 본능' 에 대해서 '남자는 원래 그렇게 생겨먹었다'는 걸 인정해버리고 시작하다니, 이것은 그저 남자들이 가진 어쩔 수 없는 한계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리뷰의 제목을 '중년 남자의 한계' 혹은 '한국 남자의 한계' 같은 걸로 쓰고 싶었는데, 자극적인 걸 지양하자는 나만의 신념에 따라 자제하도록 한다. 




이 책은 왜 썼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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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17-06-15 1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게 한계인가 싶어요. 다른 부분에서는 진보(?)라고 여겨지는 남자(!)들이 유독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한계를 보이네요.
사실 좀 실망이긴 합니다. 맥락을 이해한다고 해도 말이죠.

다락방 2017-06-15 16:00   좋아요 0 | URL
저는 책을 읽고나니 이분이 여성을 바라보는 인식이 잘못됐다기 보다는, 어쩌면 본인도 남성이기 때문인지 남성에게 굉장히 기울어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굉장히 안타까운 시선으로 남자들을 바라보기 때문에, 저랑은 다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레와 2017-06-15 1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해를 못 하는걸까, 안 하는 걸까?

다락방 2017-06-15 16:00   좋아요 0 | URL
‘남자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쓰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던걸까... 이렇든 저렇든 안읽어도 되는 책임.

블랙겟타 2017-06-15 1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핫(?)한 책을 얼른 읽어보셨군요 다락방님,
나름 안 내정자는 보통의 남성들 중에선 진보적인 관점을 많이 가졌을꺼라 봐요. 하지만 그것과는 관계없이 이 책이 접근하는 방식부터가 에러네요. ˝ㅎㅎ 우리가 원래 이렇게 생겨먹은 놈이잖아. 어쩌겠니?˝ 라는 투의 관점으로 대부분의 문제들을 사회적 맥락을 무시한채 생물학적인 본성으로 접근해버리면 남성들의 본능이나 인식을 스스로 바뀔때까지 여성들은 기다려야만 하나요? 이런식의 접근이 아무리 현실의 한계를 고려해서 썼을지라도 얼마든지 잘못된 결론으로 이어질수 있을 가능성이 있기때문에 잘못된 접근이라고 생각해요.

다락방 2017-06-15 16:03   좋아요 1 | URL
네 맞아요, 블랙겟타님. 진보적인 관점을 갖고 있고 페미니즘에 대한 것도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지금의 이 사회를 이만큼까지 끌어올린게 성평등을 주장하는 여성들이라는 것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더라고요. 지금의 젊은 남성들에 대한 안타까움도 역시 가지고 있는데, 글 자체가 뭐랄까, 뭘 어쩌라는건지 잘 모르겠어요. 남자는 왜 젊은 여자를 안고 싶은 것도 본능이고 여자끼고 술마시는 것도 다 본능인걸까요... 본능은 대체 뭐란 말입니까!

블랙겟타 2017-06-16 14:03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언론사에서도 서평을 썼더라구요 ㅎㅎ
‘프레시안‘의 서평인데요 시간되시면 읽어보셔요 ㅎㅎ
https://goo.gl/X1Si3j

다락방 2017-06-16 14:15   좋아요 1 | URL
잘 읽었어요. 은하선에 대한 평가부분은 저도 ‘이게 왜 자기가 평가할 일인가‘ 하고 리뷰에 언급할까 하다 말았는데(밑줄 그어놨어요), 프레시안 서평에서도 언급하네요. 올려주신 리뷰의 뉘앙스는 제가 쓴 리뷰랑 같네요. 그렇지만 뭐랄까, 저보다 훨씬 잘썼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질투난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알려주셔서 고마워요, 블랙겟타님.
잘 읽었어요.
블랙겟타님, 제가 응원합니다. (뭘?)
아무쪼록 열심히 읽고 써주세요. 그리고 여기에도 자주 오셔야해요!!

안전가옥 2017-06-15 1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른 발췌한 글에서 나름 좋게 봐서 주문할라고 왔는데.... 리뷰보고 어떤책인지 딱 각이 나오네요... 제목의 선입견을 뛰어넘지 못했군요. 어쩐지 제목부터가 좀 껄쩍지근한 느낌이 있어서 들고 다니거나 책장에 꽂아두기 좀 그렇겠다 걱정했는데..
리뷰 잘 봤습니다.

다락방 2017-06-15 16:05   좋아요 0 | URL
분명히 남성의 성적인 본능만 가지고 책 전체를 채우지는 않아요. 리뷰에 쓴것처럼 오히려 세상을 보는 눈은 다른 남자들보다 더 낫다고 보여집니다. 그렇지만 분명한 ‘문제‘를 ‘문화‘로 이해해버리면, 발췌독 가지고 사람들이 분노하는 데에 대해서 딱히 변명할 순 없다고 보여져요.
이런 책은 왜 쓴건지..모르겠어요.

2017-06-15 14: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7-06-15 16:06   좋아요 0 | URL
어휴, 정말 지치네요. 한자리 차지하기 위해서는 착하게 살아서는 안되는가 봅니다.
착하다는 건 뭔지...

비공개 2017-06-15 17: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전자책으로 사서 읽다가 재미가 너무 없어서 때려치웠는데, 다락방님은 다 읽으셨군요. 남성들이 지금까지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해온 범죄행위들이 어쩔수 없는 본능에서 비롯된 것이니 이해는 해주자 라는 생각을 기저에 깔고 있는 대한민국 대표 남성분. 아.. 답이 없네요. 핵심을 짚어주심에 감사합니다.

다락방 2017-06-16 08:39   좋아요 0 | URL
저도 전자책으로 사서 읽었어요.
이 책이 재미도 없고 의미도 없더라고요. 다른 책들 짜집기한 책을 읽는 기분이랄까요.
누구를 위한 책인지, 왜 쓰게 된 책인지 모르겠어요. ㅠㅠ

자강 2017-06-15 1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제목과 내용이 매치가 안되는 책이었습니다

다락방 2017-06-16 08:39   좋아요 0 | URL
자강님도 읽어보셨군요.
맞아요. 그러고보니 남자란 무엇인가....란 물음에 대한 답은 그냥...본능적으로 성욕을 갖고 태어난 동물이다..밖에 안되는거네요. -_-

2017-06-15 23: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Arch 2017-06-16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간극을 어찌할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남성‘의 심정을 토로?하기 위해 쓴 게 아닐까요. 방향도 의미도 사람까지 다 빻았는데 저자와 출판사만 모르고 있었던 어떤 그러한 것

다락방 2017-06-16 11:15   좋아요 1 | URL
뭐 딱히 또 토로?한 것 같진 않고요. 뭔가 이 책은 그냥 이도저도아닌 책인 것 같아요. 단순한 짜집기의 나열... 뭐라 설명할 순 없고, 아치 말대로, ‘어떤 그러한 것‘이 가장 적절한 표현인 것 같아요. 아 웃겨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어떤 그러한 것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맞다. 아치, 나 그 책 샀어요. 부엌 에세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Arch 2017-06-16 22:00   좋아요 0 | URL
어떤 그러한 것. 진짜 다락방은 이런거 잘 찾아내

샀을 것 같았어요. 맘에 들길. ^^

책한엄마 2017-06-17 1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분하네요.이 책 사고 말아서-ㅠㅠ사지 말걸..

다락방 2017-06-17 10:45   좋아요 1 | URL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안타깝네요 ㅠㅠㅠㅠㅠ
 
페미니스트 모먼트
권김현영 외 지음 / 그린비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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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훈이 '무뇌아적 페미니미스트'에 대한 언급을 할때만 해도 나는 내가 페미니스트라고 내 자신을 정의하게 될 줄은 몰랐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면서 페미니즘은 내 관심밖의 영역이라고 생각했는데, 우습게도 단 한순간에, 뭔가 잘못됐다, 라는 걸 인식하자마자, '페미니즘을 공부하자' 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리고 그 잘못됐다는 인식은, 내 주변의 어떤 일에 대한 것이 아니라, 책 속 등장인물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책 속에 등장하는 여성들과 남성들 때문이었는데, 왜 이렇게 여자들이 불공평한 삶을 살아냈지, 이거 왜이러는거지, 이거 너무 화나는데, 혹시 내가 페미니즘을 공부하게 되면, 그러면 이 답답함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게 될까? 했던 거다. 그리고 그 책은, 몇 번 언급했지만, '최명희'의 《혼불》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김태훈의 칼럼 때문에 또 누군가는 장동민의 발언 때문에 분노했을텐데, 나는 혼불 속의 강모 때문에 이미 딥빡침이 왔던 거다. 아아, 독서는 이렇게 어디로 나를 데려갈지 모른다. 최명희는 그 글을 쓴 의도가 어찌했든간에, 나를 페미니즘으로 이끌어버린 것이여. 어쩌면 그것은 최명희가 의도한 바로 그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지난주말에는 한 남자사람이 내게 페미니즘에 대해 내 생각을 물었다.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있는 남자사람이었고, 혼자 책을 읽다가 머릿속에 고민이 쌓이고, 그러다보니 내게 말을 걸게 된 것이었는데, 내가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있다고 공공연히 얘기하고 있고, 또 떠오르는 생각을 말하고 정리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누군가 내게 의견을 묻는다는 것은 조금 긴장되고 두려운 일이었다. 나는 명징한 답을 주기보다는, 그 답을 알았다기 보다는, 그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점점 더 답에 근접해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정답은 아닐지 몰라도 어떤 방향을 잡게 된다고 할까. 페미니즘에 대해 물을만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었고, 내가 그것을 잘해낼 수 없을 것 같아 조심스러웠는데, 페미니스트가 어떤 정답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라는 것을 내가 스스로에게도 계속 얘기해야 겠다고, 그 대화 후에 생각했다. 확정된 답, 정해진 답이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추구하는 그 방향을 계속 보면서 그러나 수시로 '잘 가고 있나', '맞게 가고 있나'를 확인해야 겠다고 생각한 거다. 



여섯명의 공저자가 쓴 《페미니스트 모먼트》를 읽으면서, 이 사람들, 이렇게나 자기 자리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말하고 쓰고 있구나 싶어서 고마워졌다. 그리고 나 역시 궁극적으로는 이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러지 않으려고 하지만, 진짜 내가 그런거 싫어하지만, 또 잠깐동안, 대학교를 다시 들어가거나 대학원에 진학해서 본격적으로 여성학을 공부해볼까, 하는 생각을 해버리고 말았다. 안돼... 나 학교 다니고 숙제 하는 거 싫어하는 사람이야..... 괜히 등록금 날리지마. 이십년전에 대학 다닐 때 등록금 날린 거로 이미 내 생애 등록금은 다 날린 거야... 지금처럼만 해, 지금처럼만... 욕심내지 마....



지금처럼만 하자고 생각하면서도, 내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서, 더 발전이 없는 것 같아서 초조하다. 더 많이 아는 사람이었으면 좋겠고, 어떠한 물음에도 답할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고, 더 넓은 시야를 가졌으면 좋겠고, 더 확장된 사고를 하고 싶은데, 그러기 위해서는 좀더 전문적인 공부가 필요한 게 아닐까? 싶어지는 거다.


아니야, 학교갈 생각하지마. 방통대 자퇴한 거 떠올려봐...




'되돌아갈 길은 없다'는 책의 표지에 적힌 문구는, 모두에게 그렇겠지만, 내게도 역시 그러하다. 나는 되돌아갈 길은 없고 되돌릴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이미 페미니즘의 세계로 들어와버린 이상, 나는 다시 예전의 내가 될 수가 없어. 그렇지만 멈춰 있고 싶지도 않고 앞으로 나아가고 싶은데, 내가 한 걸음도 앞으로 나가고 있지 못할까봐 조바심이 난다. 그래서 지금처럼 하는 공부지만, 본격적인 공부랄 수도 없지만, 멈추지 말아야지, 책장을 덮으며 생각했다. 




이 여섯명의 공저자가, 이미 페미니스트로 책을 쓸 수도 있는 이 사람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내가 페미니스트인가', '앞으로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가' 하고 고민하는 게 너무 좋았다. 페미니스트는 고민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들도 과거의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잘못 알았다고 반성하고 후회하며, 그리고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은 어떤 것일까를 또 끊임없이 고민한다. 나도 내 자리에서 계속 나를 들여다보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무거운 다리를 들어올려야겠다. 그리고 그 길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함께라면 더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친구라면 친구들이, 연인이라면 연인이, 페미니즘을 향해 걷고 있는 길에 함께였으면 좋겠다.



2015년, '코르셋'을 벗어 던진 이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만연한 여성혐오에 딴지를 걸기 시작했다. 과거에 그랬듯이 적지 않은 사람들은 이들이 딴지 거는 방식이 과격하다고 진단 내리는 중이고 이들이 말하는 핵심(몰래카메라 근절, 성차별 금지, 성폭력 근절 등)을 버릇처럼 외면한다. 어떤 이들은 메갈리아를 '여자일베'라고 부르는 일('여자'라는 접두어를 붙이는 일)을 서슴지 않으면서 성에 따른 차별이 난무한 사회구조를 뭉개고 '상호혐오'로 퉁쳤다. 언론은 메갈리아를 남성혐오 집단으로 몰아가는 일에 톡톡히 기여 중이다. 이런 걸 보면 지금의 한국사회는 분노를 기각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나의 스무 살때보다 더 세련됐고 더 고약해졌다. '그 정도로 화가 나 있었구나. 그동안 여성혐오를 이렇게까지 방치했다니. 이제부터라도 같이 바꿔 보자'라는 정도의 공감과 이런 수준의 연대를 기대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적어도 메갈리안이 한국사회에 왜 등장했는지에 대해서 질문해 보고, 단 몇 분만이라도 이분법적 젠더 위계로 구획된 세계에 대해 숙고해 볼 기회가 되지 않겠는가 하는 기대는 있었다. 그리고 그런 기대는 보기 좋게 빗나갔다. 사람들은 여성들의 분노를 기각하고 '여성이 (감히)분노했다'는 것에 더 격하게 분노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여성들의 분노에 대한 1997년의 응답이 '어리둥절'이었다면, 2016년 한국사회는 분노한 여성에 대한 '응징'으로 답한다. 누가 너희에게 분노해도 된다고 허락했느냐며 버럭 하는 모양새다.

2015년 5월 메르스 갤러리의 문이 열린 후 여기저기 페미니즘에 눈뜬 이들이 메갈리아로 몰려들기 '시작'할 때, 그러니까 성차별적 사회를 알아 가기 시작한 사람들이 메갈리아로 채 몰려들기도 전에 이미 사람들은 메갈리아를 부정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곳곳에 메갈리아를 비난하지 못해 안달난 이들이 즐비했다. '메갈리아는 처음부터 끝까지 혐오에서 시작해서 혐오로 망할 것'이라는 진단 속에서, 사람들은 '분노해도 될지 말지'를 생각하고, 설사 분노하기로 결정하더라도 그 다음에는 메갈리아로 몰려들지 말지를 두고 머뭇거렸다. 메갈리아가 일평생 미러링(만)을 할 건지, 성-비하(만)를 쏟아 내다 망할 건지, 어떻게든 결국 망할 건지, 아니면 움직이는 시도들 속에서 분화하고 논쟁하고 숙고하고 변화할 것인지 알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메갈리아에 대한 사망선고는 생후 3개월을 넘기지 않고 일어났다.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확신에 차서 말할 수 있었던 건지 나는 여전히 궁금하다. 모든 것은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변화하고 이동하는 것일 텐데 사람들은 왜 메갈리아의 필멸(必滅)을 탄생 한 달 후부터 줄기차게 예측하고 있었던 걸까. 마치 메갈리아의 죽음을 선언하기 위해 처음부터 죽이기로 결정한 것처럼, 그렇게 세상은 작정한 듯 한통속으로 메갈리아를 궁지로 몰아갔다.

결국 많은 사람들이 예측한 대로, 혹은 목표한 바대로 '메갈리아'는 그 이름을 잃어 가는 중이다. 우르르 몰려들어 함께 분노하고, 그 분노를 어떻게 조직화하고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를 이야기하기도 전에 그 공간은 오명에, 오명에, 오명을 뒤집어썼다. 성폭력 생존자들의 네트워크이자, 언어를 갖지 못해 입 없이 살던 이들이 언어를 찾은 공간이고, 지지받지 못해 온 이들이 힘 받는 공간이면서, 먼저 코르셋 벗은 이들이 알려 주는 소소한 노하우로 키득거리던 공간은 이쯤에서 변태를 꿈꿔야 할지도 모르겠다. (김홍미리, p.155-158)





'메갈리안이 페미니스트냐 아니냐'라는 질문은 참 의미 없지만, 굳이 물어 오고 또 굳이 답해야 한다면, 그렇게 묻는 이의 의도에 맞추어 '물론 그러하다'라고 답해야겠다. 메갈리안은 특정되지 않는다. (메갈리안은 누구이고, 페미니스트는 누구란 말인가?) 메갈리아를 방문하거나 메갈리아에 관심 있는 모두가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로 자처하지 않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와 반대로 모두가 페미니스트가 아닌 것도 아니다. 때문에 그 질문은 메갈리안과 페미니스트 둘 다를 물화시킨다는 점에서 위험할 뿐 아니라 그 둘의 분할을 시도한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더욱이 페미니스트는 인증을 통해 확인받는 자격증이 아니다. 페미니즘은 젠더로 구획된 세상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하고, 질문하기를 시작한 이상 삶의 장소로서 세상이 나를 향해 던져 오는 질문에는 끝이 없다. 그래서 페미니스트는 '나는 페미니스트 맞나?'라는 질문 속에서 산다. 질문을 시작한 이상 누군가가 나를 페미니스트로 부르든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정하든 그건 그리 중요하지가 않다. 페미니스트 '이다/아니다'라는 타인의 진단이 나를 규정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김홍미리, p.164-165)

여성심리학자의 창시자인 카렌 호나이(1885-1952)는 성차별적 환경의 영향으로 남자들은 업적을 통해 성취를 이루려고 하는 반면, 여자들은 사랑을 통해 성취를 이루려 한다는 경향이 있다고 보았다. 대문에 여자들이 자신의 재능과 꿈을 밀고 나아가기 위해서는 때로는 주변의 평가에 개의치 않겠다는 태도가 필요하다. 같은 시기 영미문학에서 대단한 명성을 누리던 헨리 제임스는 조르주 상드에 대해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상드의 재능이 천재적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없는 사실이다. 여성에게 천재성을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의심스러운 것은 상드가 정말 여자인가 하는 사실이다."
당시 상드의 친한 친구였던 그는 자신이 상드에게 최고의 찬사를 바쳤다고 생각했지만 이 말은 여성의 천재성을 전혀 인정할 수 없어 하는 대표적인 문장으로 두고두고 비아냥거리가 되었다. 조지 엘리엇은 "나는 확실히 여자들이 어리석다는 걸 안다. 신이 여자를 (어리석은)남자에게 어울리게 만들었으니 당연하다" 라며, 여자들이 어리석은 존재라면 남자 또한 반드시 그러할 것이라며 여자를 폄하하는 남성비평가들을 비웃었다. (권김현영, p.23-24)

인도의 탈식민주의 페미니스트 찬드라 탈파드 모한티의 표현대로 무지는 그 자체로 ‘특권‘이다. 누가 이 상황을 참아 내고 있는지 모를 수 있는 것, 이 모든 것을 자연스러운 과정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특권을 가진 이들에게만 가능하다. 서 있는 위치를 바꾸어 보기면 하면 얼마든지 다른 질문이 만들어지고, 다른 질문은 다른 지식으로 우리를 안내하 간다. 때로는 질문이 문제가 아니라 대답이 문제가 되기도 한다. ‘왜 위대한 여성예술가, 여성철학자는 없지?‘라는 질문에 천재성은 남자들의 것이기 때문이라고 답했던 헨리 제임스가 있었는가 하면, 미국의 급진주의 여성미술 단체 게릴라걸스와 여성철학자들은 이 질문을 추적하던 중 기존 미술사에서 대가로 칭송받은 남성 예술가들이 자신의 딸과 애인의 작품을 가로챘다는 걸 발견하기도 했다. (권김현영, p.39)

이 글의 모든 참고문헌은 여자들의 말과 글로 이루어졌다. 분리주의나 자매애 때문이 아니다. 내게 필요했던 대부분의 지식은 여자들이 만들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쓰다 보니 어느새 이렇게 되었다. (권김현영, p.44)

여하튼, 덕분에 여성학과에 진학하고 언니네트워크 활동을 병행했던 약 5년여 동안 아버지와 남동생을 제외하고는 인생에 남자가 주요 인물로 전혀 등장하지 않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여성들만으로도 충분했고, 완전했다. (전희경, p.201)

(대담중에서)
권김: 그러면 덧붙여서 잠깐, 미디어 비평을 하시기도 하니까, 김태훈 같은 칼럼니스트가 ‘무뇌아적 페미니즘‘에 관해 쓴 칼럼에 대한 코멘트를 들어보고 싶기도 한데요. (웃음) (p.238)

손: 사실 그 칼럼의 의미는 2015년까지의 한국의 페미니즘 지형이랄까, 아니면 문화적 지형이랄까, 여혐 지형도를 분명하게 보여 주는 징후적 칼럼이었다는 점에 있는 것 같아요. 그야말로 페미니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아무 말이나 해도 괜찮은 사회. 그게 한국사회이자, 한국 사회의 페미니스트 혐오였던 거고요. 여러 가지 현실적인 상황들이 중첩되면서 염증을 느끼고 있던 여성들이 드디어 ‘악!‘하고 소리를 지르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해준 것 같아요. 그리고 저 같은 경우에는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글을 써도 남자들은 부끄럼 없이 지면을 쓰는구나. 그러니까 우리도 부끄러워하지 말자‘이런 생각을 하기도 했고요. 우리는 그런 어처구니없는 글은 안쓰잖아요. (웃음) 그리고 그때부터 더 적극적으로 ‘지면은 기회가 오면 무조건 잡아서 누그든지 내가 동료라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나눈다‘라는 생각을 했어요. ‘저 사람들이 더 이상 그런 식으로 활개를 치게 놔두면 안 된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됐던 것 같아요. (p.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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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슨 2017-06-15 0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우리나라에서 페미니즘이 인정받을 수 있는 방법을 하나만 알려드리면 여성의 의무군복무에 대해 적극적으로 찬성하면 됩니다
그런데 페미니스트 분 가운데 여성의 군복무, 최소한 공익근무에 대해서도 언급하는 분은 한 분도 없는게 페미니즘 발전의 가장 큰 장벽이예요.

다락방 2017-06-15 10:17   좋아요 1 | URL
페미니즘을 1도 모르는 댓글이네요.
공부좀 하셔야 할 것 같아요.
최소한 제가 페미니즘 관련 책 리뷰 쓴 것만 읽었어도 이렇게 댓글 쓰진 못할텐데요.
실망입니다.

제이슨 2017-06-15 17:50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여기에 대해서는 대부분 페미니스트들이 거의 같은 반응을 하는것 같아요
컨텐츠에 대해서는 함구...

다락방 2017-06-15 18:19   좋아요 1 | URL
여성들도 군대에 가야 한다고 헌법소원 제기한 게 여성이라는 사실은 알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페미니스트들을 다 만나보셨어요?
페미니즘 책 조금만 읽어도 군대에 대해 얘기하는 페미니스트들 좌르륵 나오거든요?
그리고 어디 페미니스트한테 페미니즘 인정받는 방법 얘기를 해요... 지금 뭘 잘못한건지 감이 전혀 안잡히세요?
‘알지도 못하면서‘ 맨스플레인 하고 계십니다 지금.

2017-06-15 23:0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