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페미니스트 선언, 그날 이후의 페미니즘
윤김지영 지음 / 일곱번째숲 / 201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요즘에는 눈웃음청년과 페미니즘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그는 내게 페미니즘에 대해 '묻는다'고 하지만, 사실 나는 그와의 대화로부터 배우는 것도 많다. 오늘은 '각자의 페미니즘'에 대해 얘기했다.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이 과연 좋은 것인가, 옳은 것인가, 하는 얘기를 시작해서 각자의 페미니즘 쪽으로 결론이 났는데, 그러니까 지난 토요일 북콘서트에서 누군가 그런 얘길 한것이다. 요즘 서점에 가면 페미니즘 책이 많지만, 실상 그들이 서로 다른 얘기를 하는 것 같지가 않다, 온건하다, 고. 그러자 윤김지영 쌤은, 그게 우리 출판계가 딱 그만큼까지를 허락하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얘기를 하신거다. 더 극단적인, 래디컬한 페미니즘에 대한 책 소개까지는 아직 할 수 없는, 아직은 이만큼까지만 소개할 수 있는 딱 그정도. 쌤은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은 사실 말이 되지 않는 것 같다 하셨다. 이를테면, 흑인 인권운동을 위해 싸운다고 할 때, 그것이 과연 기득권이었던 백인에게도 좋을까, 기득권인 백인은 불편할 것이다, 하는 얘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이것이 '옳기' 때문에 '모두를 위한' 게 될까? 페미니즘 역시 마찬가지로 '모두를 위한다'는 건 좀 아니지 않나, 하는 거였다. 성평등에 가기 위해서는 기득권의 불편함은 당연히 따라올 터, 그것이 과연 '모두를 위한다'고 할 수 있겠느냐는 거였다.



페미니스트 라고 자신을 정의하는 사람들도 모두 각자가 페미니즘에 대해 생각하는 바가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페미니스트들이 서로 싸우기도 한다. 자신이 생각하는 페미니즘이 더 옳다고 믿고 주장하기 때문인데, 그렇다면 페미니즘 내부에서 이렇게 서로 자기 주장을 피력하는 것은, 페미니즘의 모순일까?



아니,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우리 모두가 궁극적으로 한 방향을 보느니만큼 다같이 어깨동무하고 사이좋게 가면 더 빨리 닿을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결국 지향하는 바에 닿기 위해서는, 갈등은 필연적으로 따라올거라 생각한다. 그래서 눈웃음청년과 나는 '각자의 페미니즘'에 대해 생각했다. 내가 생각하는 페미니즘, 내가 지향하는 페미니즘과, 내 친구 a가 생각하는 페미니즘, 내 친구 b 가 지향하는 페미니즘은, 성평등을 향해 나아가되, 조금씩 다를 수 있다. 우리는 살아온 환경과 각자의 경험이 모두 다르니까. 같은 책을 읽어도 느끼는 바가 다른 것처럼, 우리는 같은 페미니즘 책을 읽어도 서로 다르게 소화해낼 것이며, 받아들이는 게 다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페미니즘이라는 걸 자기 나름대로 받아들이고 인식할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의 갈등은 결코 '모순'으로 표현되어져서는 안되는 것 같다. 갈등은 모순과 다르니까. 



토요일에 만난 친구는 정희진 쌤의 말에 대부분 동의한다고 했지만, 벨훅스도 읽었지만, 아, 뭔가 어딘가 다른 걸 더 듣고 싶어서, 뭔가 더 있지 않을까 싶어서 윤김지영 쌤의 북콘서트에 오게 됐다고 했다. 나 역시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발언을 듣고 싶었다. 내가 페미니즘을 지향하고 페미니스트가 된다고 했을 땐, 그건 이미 유명한 페미니스트 하나만을 모델로 두고 가는 게 아니다. 다양하게 읽으면서 또 다양한 강의를 들으면서, 거기에서 내가 느끼는 바와 생각하는 바를 정리하고 내 자신을 성찰하며 끊임없이 나 자신에게 어느것이 옳고 그른지, 어디를 향해 나아갈건지 물어야 한다. 페미니즘은, 내가 생각하기에,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내가 옳게 가고 있는지를 끊임없이 묻는 것. 이런 페미니즘에 있어서 내부 갈등은 필수적이지 않을까. 나 하나의 개인을 놓고 봐도 내적 갈등이 수시로 오고가는데, 하물며 페미니즘이라는 성평등을 주장하는 사상이 어떻게 아무 잡음 없이 앞으로 앞으로 쭉쭉 내달을 수 있겠는가.




윤김지영 쌤은 이 책에서 그간 헬페미니스트가 어떻게 생겨났는지 그리고 어떤 액션을 취해왔는지를 잘 정리해주었다. 이미 내가 보고 듣고 알고 있던 바를 차근차근 정리해둔 그런 책이다. 게다가 틈틈이 내가 궁금해했던 것들에 대한 언급도 있어서 지금까지 내가 여기 있는 이유에 대해 다시 돌이켜볼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개인의 내적갈등과 집단의 내부 갈등을 어쩔 수 없이 끌고 가야 하는 것도 고개 끄덕이며 인정할 수 있었고.



페미니즘이 매력적인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나는 페미니스트들이 끊임없이 행동한다는 데 있다고 본다. 이 책에서도 언급되어진 것들, 몰카를 몰아내고자 하고 리벤지 포르노의 용어를 바꾸는 것들을, 페미니스트들이 해왔다. 언젠가의 페미니즘 강연에서 이현재 선생님은 그간 온건파 페미니스트로 살았는데 아무것도 바꾸지 못해, 이제 자신도 래디컬로 돌아서기로 했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는데, 이렇게 지극히 당연한 것들을 이만큼 바꾸는 데에는 지옥을 헤쳐나가려는 의지가 필요한 것 같다. 헬페미니스트들의 행동력이 없었다면, 그들의 강한 나대기가 없었다면, 우리는 아직도 몰카에 시달리고, 여자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마치 잘못해서 복수를 당하는 것마냥 리벤지 포르노란 용어를 쓰고 있었을 것이다. 


일전에 페이퍼에서 언급한 적 있던 '혐오'라는 단어에 대해 눈웃음 청년과 이야기를 나눴다. 만약 다른 사상이었다면, 페미니즘이 아닌 다른 부분에서였다면, 많은 사람들이 지나치게 과격한 단어라고 했을 때, 혐오라는 단어를 버리고 다른 단어를 선택하려 했었을텐데, 페미니즘은 끝까지 혐오라는 단어를, 다른 사람들 입맛에 맞춰 버리는 게 아니라 가져간다는 것에 대해 그는 감동한다고 했다. 나는 페미니스트가 세상을 바꾸기 위해 취해야 할 자세는 바로 이런 데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건 너무 심해', '그건 아니야' 라는 숱한 말들에 물러서지 않는 것. 지금처럼 계속 나대고 시끄럽게 쿵쾅대는 것. 그래야 조금, 아주 조금 바뀌니까. 



언젠가 친구들과 할머니 페미니스트가 되자, 라고 말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의 친구들에게 나는 이제 이렇게 말하고 싶다. 우리 할머니 헬페미니스트 들이 되자고. 영화 매드맥스에서처럼, 후손에게 씨앗을 건네줄 수 있는 전사 할머니가 되고, 공격에 맞서 싸우는, 그런 할머니가 되자고. 헬페미니스트라니, 정말 좋다.




아래 올리는 밑줄긋기는 모두들 다 읽어보았으면 한다.







리벤지revenge포르노-헤어진 연인이나 부인의 신체, 성행위를 찍은 사진이나 동영상을 여성의 동의 없이 온라인에 유포하는 범죄 행위-라는 용어에 대한 헬페미니스트의 비판을 살펴봅시다. ‘리벤지‘라는 단어는 사적 영역에서 여성이 저지른 잘못에 대한 남성의 사적 복수, 사적 정의 구현이라는 함의를 가지고 있으며, ‘포르노‘라는 단어는 피해자인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시선의 연장이므로 헬페미니스트는 ‘리벤지 포르노‘라는 단어 자체가 남성 중심적인 관점임을 지적합니다. (p.38)

때문에 헬페미니스트는 리벤지 포르노란 용어를 파기하고 ‘디지털 성범죄digital sexual crime‘라는 새로운 용어를 제안해 널리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의 잘못에 방점을 찍어 이것을 사회적 문제로 부각함으로써 적극적 해결책을 촉구하는 것이지요. 소라넷 폐쇄를 이끈 DSO(디지털 성범죄 아웃)팀은 영상 유출자만이 아니라 이를 유통시키고 소비하는 자들 역시 디지털 성범죄의 공범자라는 점을 지적합니다. 이러한 공범성을 분명히 드러내기 위해 동영상 유포, 재생산 행위를 ‘유포 강간‘으로, 영상소비행위를 ‘시청 강간‘으로, 악성 댓글로 조롱, 협박하는 것을 ‘온라인 강간‘으로 명명합니다. 강간이라는 의미의 외연을 확장함으로써 디지털 성범죄가 어떠한 방식으로 한 사람을 사회적 죽음-사회로부터의 백안시, 배제, 열외, 비하, 협박에 의해 이민을 가거나 직장과 학교를 그만두는 것등-은 물론 생물학적 죽음-디지털 성범죄 영상유출 후 자살 등-으로 내모든 구조인지를 드러내는 것이지요.(p.40-41)

이후 데스티니 차일드 게임 일러스트 중에서 송 작가의 그림이 지워집니다. 송미나 작가가 사용한 한남충이라는 용어가 메갈리아라는 징표로 받아들여져 집중공격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넥슨 사태 때와 마찬가지로 남초 커뮤니티딜의 소비자 집단주의가 시작되면서, 소강기로 접어들었던 메갈 사냥이 재점화된 겁니다. 김치녀와 된장녀라는 용어는 남초 커뮤니티가 골고루 사이좋게 나누어 가지며 확대 재생산되고 농담처럼 용인되지만, 한남이나 한남충이란 용어는 메갈리아의 전유물로 규정되어 금기와 외설의 언어가 되어버리는 사태가 재연된 것입니다. 단지 여성이 남성을 호명하는 용어를 발명해 냈다는 이유만으로 여성 성우는 목소리를, 여성 일러스트 작가는 그림을 몰수당하게 된 것이지요. (p.76)

이런 질문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 ‘강간문화‘라는 단어는 형용모순은 아닌지 라는 것이 그것입니다. 어떻게 강간이라는 흉물스런 폭력과 문화라는 고상한 단어가 조합될 수 있을까요? 하지만 문화라는 개념은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의미만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문화는 자연과 야만, 미개성의 영역을 설정해야만 존립 가능한 개념입니다. 문화는 자연에 대한 조작과 통제, 이용을 통해 형성되며, 이러한 정복 행위를 문명화라고 부르는 것이지요. 문화란 타자에 대한 폭력을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남성들 간의 결속과 담합으로 이루어진 문화가 타자로 설정하고 있는 대상은 바로 여성입니다. (p.98)

폭로divulgation는 자족적 독백이 아니며 비림의 봉인을 풀어 공론장 안에 던져 넣고 변화를 촉구하는 주체적인 발화양식입니다. 오늘의 문명 안에서 누군가가 누리는 특권이 다른 누군가를 짓밟음으로 이루어져 온 것임을 밝힘과 동시에, 문명의 밑바닥에 설치된 가부장제의 음험하고도 비루한 하수구를 철거하려는 행위입니다. 또한 기존의 가치와 의미체계에 편입되지 않는 새로운 가치의 들끓음이기도 합니다. 당연히 이것은 기성 질서가 제어할 수 있는 규칙을 벗어나는 것으로, 세련되기보다 난장판에 가깝고 통제되지 않은 소란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폭로는 고백을 듣는 청자로 ‘정의로운 남성‘의 자리를 남겨두지 않음으로써 모두를 진창으로 끌고 들어갑니다. 성폭력을 폭로하는 행위자는 여성 포식 구조인 강간문화를 방관해 온 남성에게 비판의 활시위를 당깁니다. 여기서 무지의 권력이란 그들 역시 여성을 향한 폭력을 폭력으로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무지無知의 권력‘을 누리는 공범자이기 때문이빈다. 그러한 무지는 단지 둔감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여성에 대한 성폭력은 ‘알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몰라도 된다고 믿는 특정 문화의 소산입니다.(p.108)

이제 여성들은 일상의 고통과 상처의 목록을 꺼내들고 주저함 없이 그것들의 부당함을 폭로하기 시작했습니다. 여성들은 더 이상 자기검열 구조에 갇혀 ‘내 탓이오‘를 외치며 착한 죄인으로 고백의 값을 받아내려 하지 않습니다. 폭로 행위자들이 자신이 감내해온 고통의 강도가 얼마만한 것인지, 자신이 받은 상처의 깊이가 어떠한 것인지에 오롯이 집중하며 말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이 세상은 폭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여성혐오사회의 긴 터널을 무너뜨리는 다이너마이트이자 새로운 사회를 상상하는 폭죽입니다. 폭로는 바로 해방의 언어 그 자체인 것입니다. (p.111)

밀실에서 거리로 여성들의 공간 이탈을 가능하게 한 것은 통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통감通感이라는 정동 역학은 어떻게 개념화될 수 있을까요? 통감의 축자적 의미는 ‘마음에 사무치게 느낌‘입니다. 이에 한정하지 않고 새로운 윤리적 감각으로 이론화한다면, 통감은 고통의 감각이 나를 오롯이 관통하는 ‘가로지름‘의 감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p.153)

나아가 통감은 타자의 고통을 경청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온몸으로 절절히 반응하게 합니다. 타자의 고통을 관망하지 않고 그것에 반응하며 행동하는 전신全身의 행위자가 되게 합니다. 지금까지 여성 살해에 대한 반응은 공감에 가까웠으며, 대부분 죽은 여성에 대한 안타까움에 그쳤습니다. 심지어 피해자 여성의 행실을 의심하는 일도 빈번했습니다. 5·17 페미사이드를 "강남역 유흥가 살인 사건"으로 보도하는 방식이 그러한데, 여기에는 ‘유흥가‘라는 적절치 못한 곳에 여성이 있었기에 죽임을 당했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보도에 대한 비판적 관점이 제시되고서야 유흥가라는 당너가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즉 여성의 죽음은 살아남은 여성들에 대한 경고이자 공포정치의 효과적 표본이 되어왔기에 여성 살해는 추모의 연대와 분노의 저항으로 적극적으로 이어지지 못했던 것입니다. (p.156)

통감은 어느 한 사람의 고통에 다른 이가 먹혀버리는 것, 일방적 흡수행위가 아닙니다. 어느 누구도 변이와 이행의 에너지에 온전한 자리를 담보 받을 수 없는 것, 이러한 차이의 회오리로 빨려들어가 변신의 파동에 일렁여 새로운 행위를 구성하도록 하는 것이 통감입니다. 즉 감정적 전염은 감정적 매몰에만 그쳐 어떠한 행위도 구성할 수 없도록 하지만, 통감은 타자의 고통에 대한 공명뿐만 아니라 이에 대한 행위화로 이행해가는 인식의 차원 또한 내포합니다. 또한 통감은 감정과 사유의 섬세한 뉘앙스가 진동하는 접촉의 양식이자 생이 약동하는 계기입니다. 새로운 행위의 존재 진동을 낳는다는 점에서 감정적이자 인식적 차원 모두를 포함하는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p.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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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las 2017-07-05 1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동안 원론적인 페미니즘 책에 조금 지쳐있었는데 좀 새로워 보이네요 :) 사러갑니다

다락방 2017-07-05 13:51   좋아요 1 | URL
네, 잘 정리되어 있어서 좋았어요. 그것보다 또다른 페미니스트의 글을 읽는 것도 기뻤고요. 헬라스님은 어떻게 읽으실지 궁금하네요. 얼른 읽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