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어른이 될 수 없었다
모에가라 지음, 김해용 옮김 / 밝은세상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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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싫어하는 이야기가 있다. 어렸을 적에 서로 너무 좋아하다가 어른이 되어서도 상대를 그리워하고 우연히 다시 만나 사랑을 이루어간다는 얘기. 그런 한편 내가 정말 너무 좋아해서 찾아다니는 이야기가 있다. 성인이 되어 자기 삶을 살다가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고, 그 사람과 헤어져도 계속 마음속에 그 사람을 품고 살다가, 결국은 돌고 돌아 제자리를 찾는 이야기. 내가 싫어하는 이야기와 좋아하는 이야기가 어느 시점에 만나고 다시 돌아오느냐에 대한 시기적 차이만 있을 뿐 결국은 같다 보여지지만, 그러나 언제 시작되느냐가 나에게는 좋고 싫고를 가르는 기준이 된다. 나는 아이었을 때 만난 사람을 '어릴 때 그 소녀' 혹은 '어릴 때 그 오빠' 이런식으로 살면서 내내 가져가다가 애인되고 부부되는 게 너무 싫다. 왜, 그런 거 있잖아. 그 뭐지..제목은 생각 안나는데 청소년기부터 주인집 딸 좋아해서 그 소녀의 보디가드가 되고, 그 소녀가 어른이 되어서도 그녀를 위해 삶 전부를 내던지는... 그 조폭 나오고, 변호사 나오고...뭐 아무튼 그런 식. 진짜 너무 싫어 싫어. 소꿉친구 로망도 싫고요..



지난 주에 서점에 가서 책들을 훑어 보다가 이 책을 보게 됐다. 제목도 처음 들어보는데 트윗에 연재하던 이야기가 폭발적으로 인기를 끌어 소설로 출판하게 되었다고 하더라. 책 뒤의 표지를 보니 이 이야기는 내가 좋아하는 바로 그 이야기인듯 했다. 이십대 시절 만난 상대를 나 자신보다 더 사랑하고 그러나 뜻하지 않게 헤어졌다가 거의 이십년이 지나 페이스북에서 다시 만나게 되는 이야기. 그리고 그런 상대에게 무려 '페친'을 신청한다는 게 아닌가. 와- 이건 진짜 딱 내가 좋아할만한 이야기야! 나는 이 책을 사고서는 사두고 읽지 않은 숱한 책 중에 가장 먼저 집어들었다. 나는 이런 이야기 너무 좋아, 얼마나 할 말이 많아질까, 나는 얼마나 하염없이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까...



그러나 책의 첫장부터 '어랍쇼?' 하게 되더니 마지막까지 '이게 뭐야' 하면서 기분이 나빠졌다. 저자는 이 책에 분명 '나 자신보다 더 사랑한' 여자를 등장시켜놓고, 그러나 그 여자에게 딱히 어떤 역할을 부여하지 않는다. 책 소개는 과거의 사랑을 다시 만나 어쩌고 진행되는 걸로 보였는데, 그 과거에 '나 자신보다 사랑한' 여자가 나 자신의 삶에 크게 영향을 미쳤고, 어떤 여자도 그 여자만큼은 사랑할 수 없다고 하면서, 그러나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이나 하는 것들은 전혀 보여지지 않는다. 대체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남자는 현재 마흔이 넘었고 그간 방송계에서 꾸준히 일해 경력을 쌓았다. 책의 처음에는 그런 남자에게 접근해 하룻밤을 보내는 여자가 나온다. 연예인으로 크게 되고 싶은 꿈을 가진 그녀는 하룻밤을 보낸 그에게 '내 꿈은 이뤄질까요?' 같은 문자를 보내고. 현재에서 간혹 과거의 여자, 즉 '나 자신보다 더 사랑한 여자'를 회상하면서 지금으로 이어지는 이야기인데, '나 자신보다 더 사랑한 여자'와도 딱히 한 건 없다. 그녀가 자신의 인생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미쳐서 지금의 자신이 있을 수 있게 되었고, 그녀 이후로 그녀만큼 사랑하는 다른 누구도 만날 수 없었다고 하지만, 그녀와 만나는 동안 그가 한 일이라곤 그녀와 공기도 탁한 러브호텔에 가는 게 전부였다. '나 자신보다 더 사랑한' 여자가 인도로 여행을 가게 되었을 때는, 암흑계 보쓰의 애인인 성매매여성과 친해져서 그녀의 집에서 잠도 자고. 그런 남자가 어린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여자는 동네 성매매 여성이었다. 그러니까 이 책에는 '나 자신보다 더 사랑한 여자' 외에는 성매매 여성만이 나온다. 성을 도구로 이용해서 꿈을 이루려고 하거나 돈을 버는 여자들. 그리고 그녀들은 자신의 삶을 딱히 싫어하지 않는다. 싫어하지 않는게 다 뭐야, 어떤 여자는 '나는 지금의 삶이 좋아'라고 말한다. 작가는 자신의 머릿속에서 성매매 여성에 대한 편견을 쌓아두고는, 그러나 이런 편견은 옳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 같은데, 그보다 더 잘 보이는 건, '여자를 대하는데 편견없는 이렇게 힙한 나!' 이다. 완전 자기뽕에 차있어. 



글은 글을 쓴 사람의 사상과 생각을 드러낸다. 그것을 세련되게 포장하는 수도 있지만 전혀 그렇지 못해 원래 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글에 다 드러나게 되어버리고 만다. 내가 박범신의 [은교]를 졸라 싫어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박범신의 [은교]에 은교는 없었다. 자아를 가진 은교는 존재하지 않고, '나이 들어가지만 여전히 근육키우고 글도 잘 써서 질투도 받는 멋진 늙은 나'만 있다. 그렇게 자기뽕에 차서 십대 소녀를 성적대상화 시키고만 있는데, 작가는 그 글을 단숨에 써내려갔다고 한다. 왜 아니겠는가. 자기 머릿속에 '이렇게 멋진 늙은 나'가 있는데... 문제는 그게 자기 자신에게만 멋지다는 거. 그리고 이 책의 작가 '모에가라' 역시 '이렇게 힙한 나'에 가득 취해있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나 자신보다 더 사랑한 여자'외에는 성을 도구로 하는 여성만 가득 나오는 소설을 쓸 수있나. 게다가 암흑가 조직 보쓰의 '오늘 밤 나랑 잘래?'란 말에 좋다고 씐나하던 여자가 그 보쓰가 경찰에 끌려가자 '성폭행을 당했다'고 뉴스 인터뷰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걸 보면서 남자는 어이없어하는 장면. 자기가 웃으며 허락한 그녀를 기억하는데....



그러니까 이 책은 띠지의 광고 <그 시절 연인보다 더 좋아하는 사람을 만났나요?>로 사람을 낚아놓고는 사실 그 얘기는 별로 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찝찝해. 

이야기는 그런 게 아니다. 이야기는 분명 힘이 있고 전달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작가가 써내려낸 이 고백식의 글은 이야기랄 수도 없는 자기의 찌질한 삶의 토로인데, 그것은 어디에서도 힘을 얻지 못한다.


얼마전에 호주 코미디언 '해나 개즈비'의 스탠드업 코미디쇼 <나의 이야기>를 시청했다. 해나 개즈비는 그 쇼에서 초반에 웃음을 주다가 마지막에 분노한다. 분노하면서 외친다. "백인남성들이여, 분발하세요!"


나는 이 책의 작가 모에가라와 더불어 숱한 남성들에게 그 외침을 똑같이 들려주고 싶다. 분발하라!

이런 식으로 글을 쓰면 안된다. 이런 식의 이야기를 이야기로 내놓아서는 안되는 것이다. 납작하게 두 종류의 여성만 그려내놓고는 뭐 세상 힙한 척 하고 있나. 게다가 작가가 여자를 보는 시선은 '나는 모두를 똑같이 대하는 남자야'를 보여주려고 하지만 이미 상당히 뒤로 쳐져있다. 작가여, 공부하라. 공부해서 좀 바른 의식을 갖자. 자기 자신에게 취해있어서는 안된다. 처음에도 하룻밤 대상이 되는 여자가 나와서 찝찝한데, 어린 시절의 그에게 '이런 거 본 적 없지?' 하고 가슴 보여주는 스트립걸이 나와서 짜증나고, 후반에는 '쵸이스 당했다고 좋아했으면서 성폭행으로 폭로한' 여성이 나온다. 아이고야...그러면서 계속 끈질기게 '나 자신보다 더 사랑한' 여자를 집어 넣는다. 러브호텔 간 얘기, 질투한 얘기 같은 거... 도대체 뭘 보고 나는 이 남자가 그녀를 '나 자신보다 더 사랑했다'고 알 수 있고 믿을 수 있단 말인가.



다시, '해나 개즈비'는 자신의 이야기가 전달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나 역시 그녀의 이야기가 전달되기를 바란다. 그녀의 이야기에는 힘이 있었고 삶이 있었다. 그러나 이 책의 이야기는 전달될 필요가 없고 쓸데도 없다. 뭐 어쩌라는건지... 그래서 페친 신청해서, 뭐? 



나는 여전히 '파트릭 모디아노'가 [지평]에서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 서점을 찾아가는 이야기를 기억한다. 그 마지막 장면은, 결국 제자리를 찾게 되는 것에 대한 이야기로 내 안에 아름답게 기억되고 있다. '페르귄트'는 자신의 자리를 너무 늦게 알아서 '솔베이지'에게 육신만 도달하게 된다. 어디서 젊은 시절 좋은 건 낭비하고 껍데기만 솔베이지를 찾아와, 내내 기다리던 솔베이지를 속상하게 했어. 우리는 우리의 제자리가 어디인지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너무 늦지 않게 가야해. 어차피 그곳이 제자리라면 얼른 찾아가야지, 괜히 게으름 부려 늦게 도착하면 서로 속상하고 서운하잖아. 그리고 그곳이 제자리라면, 가급적 서운하지 않게 해야 하잖아. 



이렇게 기억되고 이야기되어질 만한 게 이 책에는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오히려 예쁜 여자 만나면 위축되는 자신만 나오는데, 심지어 그 예쁜 여자는 나를 좋아해?! ㅎㅎㅎㅎ 진짜 ... 할 말 없게 만든다. 자기 이야기에 갇혀서 발전을 모르는 진짜 어른이 되지 못한 남자의 이야기다. 마흔이 넘었는데 어른이 안돼...어른이 못돼... 어른이 되려면 이대로는 안된다. 자기 머릿속 이야기에 갇혀서, 자기 뽕에 취해서 아무리 써대면 뭐하나. 그래봤자 발전없는 쓰잘데기 없는 이야기일 뿐인데. 분발하라. 공부하라. 공부하고 분발해서 뭔가 좀 기본적인, 인간의 인간에 대한 예의도 좀 장착하고, 입체적인 여자에 대해서도 새기고, 여자에게도 자아가 있다는 걸 좀 알아라. 




수는 시원스러운 눈매와 검고 짧은 헤어스타일이 인상적인 미녀였다. 그녀는 가냘픈 몸매치고는 풍만한 가슴이 잘 드러날 수 있도록 타이트한 흰색 셔츠를 입고 있었다. 나는 모델이나 영화배우처럼 생긴 여자를 보면 나와는 전혀 다른 세계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 자동적으로 마음의 셔터를 내려버리는 성향이 있었다. 왠지 기분이 저절로 위축되며 계속 자리에 앉아있기가 무척이나 거북살스러웠다. ( p.138)



위의 문장에 이 남자의 온갖 못남, 발전하지 못함이 다 들어가있다. 가냘픈 몸매와 풍만한 가슴의 여자, 그 멋진 여자 앞에서 위축되는 자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몰카를 보는 남자 심리라고 했던가, 여자들에게 무시당했을 때 화장실 몰카를 보며 '저여자들도 나랑 똑같은 사람이다' 뭐 이런 식의 대꾸를 본 게 생각났다. <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에서도 사랑하는 여자를 포기하기 위해 요강 훔치는 이야기가 나왔었지. 아 짜증나... 이 남자는 가냘픈 몸매 풍만한 가슴의 여자에게 위축되고 그렇다면 못생긴 여자 앞에서는 당당해지는가. 아, 그러고보니 그가 '나 자신보다 사랑한' 여자는 못생겼다는 언급이 두어번쯤 나온다. 진짜 어처구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예쁜 여자 많이 만나지만 못생긴 여자를 사랑하는 세상 힙한 나. 꺼져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진짜 너무 싫다.



제자리를 찾는 아름다운 이야기인줄 알고 이 책을 샀는데 이거 뭐 이럼? 여러분, 이 책 읽을 시간에 '해나 개즈비'의 <나의 이야기>를 듣고 보자. 그 편의 여러분의 삶을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게 할 것이다.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가 굳이 앞으로 나아가기 위함은 아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진짜 어른이 되지 못한 마흔 넘은 남자의 이야기를 굳이 볼 필요가 없다.

헤어지는 순간에 우리는 안녕이라는 말을 전하기 어렵다. 어딘가에 굵은 글씨로 헤어질 때 써먹기 위해 근사한 말을 준비해둔다고 하더라도 막상 이별해야 할 상대가 눈앞에 있으면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p.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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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처럼 아름다운 수학 이야기 - 개정판
김정희 지음 / 동아일보사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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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수학은 내게 닿지 못할 영역에 있다. 더이상 수학을 배우지 않아도 되는 직장인이라는 것이 다행인 한편,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학에 대해서는 어떤 미련 같은 것이 남아있다. 내가 수학문제를 푼다는 등위 행위는 일절 하고 있지 않지만, 수학 문제를 잘 푸는 사람, 수학을 잘했던 사람에 대한 동경은 대단한데, 실제로 나는 수학문제를 풀어낸 노트를 보면, 그 노트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도대체 무엇이 문제이고 무엇이 답인지 알아채지도 못하면서 이미 정신을 잃을 정도로 푹 빠져버리고 만다. 그래서 나는 나를 '수학 문제 푸는 것에 페티시'가 있는 사람이라고 결론 내렸다.


어떤 하나의 동경 혹은 페티시가 있다는 것은, 나에게는 그것이 부재함을 의미하는 거란 생각을 했다. 내가 전완근에 반하는 것, 등근육에 반하는 것은 내게 그것들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만들기 위해서는 꾸준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도 알고 있고. 수학도 마찬가지. x 와 y 를 넘어선 기호들을 제멋대로 좌르륵 써나갈 수 있다는 것은, 나에게는 너무나 불가한 일이다. 도대체 머릿속에서 어떤 사고가 펼쳐지기에 숫자와 기호를 넘나드며 문제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는 걸까! 그렇게 나는 수학을 싫어하지 않는다. 다만 못할 뿐. 못하면서 싫어하지 않는다는 것, 이게 나를 미치게 만드는 것 같다. 못하면서 싫어하지 않기 때문에 돌아버리는 거야. 못하면서 싫어하지 않기 때문에 나는 그걸 잘하는 사람에게 아낌없이 존경과 동경을 보내고야 마는 것이다. 남자든 여자든 수학을 잘하는 사람을 보면 두 눈이 하트가 되어버려...그리고 전완근과 등근육에도..



대체 전완근과 등근육은 무슨 상관??



어쨌든, 그것이 내가 이 책을 집어들게된 이유였다. 내가 못하지만 그러나 싫어하지 않기 때문에, 나는 수학과 화해하고 싶었다. 조금 더 접근하고 싶었다. 언제까지 잘하는 사람들을 부러워만 하며 살것인가. 나도 조금쯤, 내 스스로 친해져도 좋지 않은가, 하고. 그것은 운동과도 닮아 있다. 언제까지 등근육과 전완근 가진 사람을 보며 침만 질질 흘리고 있을 것인가. 그것을, 그 멋진 것을 내가 가진다면 더 좋지 않겠는가. 그러나 등근육이 좀처럼 만들어지지 않듯이, 이 책을 읽었다고 내가 수학과 성큼 가까워진 기분도 전혀 들지 않았다.



물론 이 책을 읽는 것은 나로 하여금 '자 이제 수학과 조금 더 친해져볼까'하는 의욕을 불러일으켰다. 중학생정도를 대상으로 한 책이어서인지, 처음에 나오는 것들은 어렵지도 않았고, 툭 튀어나오는 식과 풀이를 눈으로 보면서 '음, 이정도는 나도 할 수 있겠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서서히, '고등학교 때도 전혀 풀지 않고 새것으로 남겨두었던 수학의 정석을 이제 나도 사서 풀어도 좋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까지 하게 만들었지. 그러니 조금 더 넘겨보니 내가 풀 수 없는 문제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책의 마지막에 가면, 중학교 3학년 정도가 풀 수 있는 문제이니 한 번 풀어보자고 문제를 내줬는데, 나는 이 책 한 권을 충실히 잘 따라 읽어왔지만 그 문제들 앞에서 또 뇌가 꼬여버리기 시작했다. 나는..수학 돌머리인가?



나는 수학을 못하지만, 내가 수학을 못하기 위해 태어난 건 아니라고 생각하고, 태어날 때부터 수학을 못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이 책에서도 저자는 수학을 공부하는 것은 몸의 근육을 키워나가는 것과 같다고 했는데, 처음 계단을 오르지 않고 저 위에 도달할 수 없는 것처럼, 서서히 기초부터 다져야한다고 하는 거다. 나는 그것을 꽤 잘해왔다고 생각했다. 어느 정도까지는. 그러니까 국민학교때의 수학이란(산수지만) 내가 특별히 못하는 영역이 아니었다. 사실 뭐 국민학교야 내가 못하는 게 없었지. 심지어 이어달리기 선수도 했다니까? 가슴이 커지는 바람에 달리기 망해버렸지...중학교에 가서도 내가 특별히 고민하는 과목이 수학은 아니었다. 중학교 1학년 때 영어 때문에 속썩었지만, 그러나 영어... 팝송 들으면서 듣기평가까지 완전정복하는 영어 똑똑이가 되었었지. 그리고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남들이 다 수학 고등학교때 포기한다는데, 나는 고등학교 1학년 1학기 때까지만 해도, 수학이 어렵지가 않은 거다.


'남들 다 이 때 포기한다는데, 훗, 나는 괜찮네?'


이렇게 자만심 뿜뿜이었다. 내가 다니는 학교는 월요일이면 주요과목의 시험을 쳤었는데, 수학 시험을 보는 날, 문제는 다섯 개였고 풀이과정까지 다 써서 제출해야 했었다. 이 때 학급의 많은 아이들이 다 틀리거나 하나 맞았고, 두 개 맞힌 아이들이 많았고, 전교에 다 맞힌 애는 한명인가 둘이었고, 그리고 우리 반에 세 개 맞힌 애가 두 명인가 세 명이었는데..반장을 포함애서 내가 그 세 개 맞힌 아이들중 한 명이었다. 훗. 고등학교 올라와도 나는 수학 잘해..같은 마음같은 게 내 고딩1년 시절에 있었단 말이야? 그러나 왜때문에..도대체 언제, 무엇이 계기가 된건지 모르겠지만...1학년 2학기때는 재시험 보는 부류에 내가 속해있었다...재시험도 간신히 커트라인 넘는 사람이 되어있었고, 나는 내가 그런 사람이란 걸 안 순간....수학을 놓아버렸어.



잘가..



그 뒤로 수학은 내게 없었다. 중간고사나 기말고사에 수학 과목 들은 날은, 어차피 수학을 포기할것이니 다른 과목을 공부할 시간이 늘어나는, 내가 바로 그런 아이었어.. 수학 너무 멀었지...

이런 나와는 다르게 내 여동생은 생물을 전공했고 수학을 부전공했다. 두 과목 모두에 교사자격증을 가지고 있고, 아이들에게 생물을 혹은 수학을 가르친다. 여동생이 대학생이던 시절 수학 문제를 풀다가 자기 친구랑 통화하며 이거 어떻게 풀었냐고 열심히 얘기하는데, 나는 이 아이는 지금 다른 곳에 존재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연습장에 빽빽한 기호와 숫자들..심지어 교재도 원서였어...



얘기가 너무 길어졌는데, 어쨌든 나는 수학을 못하지만 미워하지 않는다는 거다. 수학을 못하지만 싫어하지 않아. 그러므로 나는 수학과 화해하고 싶었다. 그렇게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는데, 아직 수학은 나를 받아들일 준비가 안되어있는가보다. 그러나, 내가 더 노력하면 돼. 어떻게? 구몬수학..신청할까? 하다가 서랍 가득 처박힌 밀린 구몬영어 생각나서 때려치기로 한다..



저자는 책의 마지막에 중3이 풀수 있는 문제를 냄으로써, 성인이라면 이 정도는 차근차근 풀 수 있을 것이다..를 생각한 것 같은데, 그러니까 이 책을 집어들은 사람이라면 수학에 관심이 잇을 것이고 이 정도의 문제는 풀 수 있을 것이다, 라고 생각한 것 같은데, 나는 그 문제들을 보고나니 서점에 가고 싶어졌다. 서점에 가서, 초등학생용 문제집을 사야겠다. 덧셈 뺄셈부터 시작해서 기초를 단단히 해놔야지, 이렇게 중3 문제 봤다가는 다시 수학에게 우리는 아닌 것 같아 하고 뒤돌아 설 것 같아.



저자는 수학을 취미 삼아 하고 있다. 가벼운 노트와 연필을 가지고 다니면서 언제든 수학문제 푸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거기에서 기쁨을 찾는 사람이야. 나는 내가 그렇게까지 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어느 무료한 날은 책상 앞으로 가 차분한 마음으로 수학문제를 풀고 싶다. 이 때 풀어내야 스트레스가 풀리지 이 문제가 도대체 뭘 어쩌라는 거냐...하면 스트레스를 더 받겠지. 그러기 위해서라도 기초부터 탄탄히 다져야겠다.



저자는 '소설처럼' 아름다운 수학이라고 했지만, 나는 수학이 가진 아름다움은 소설과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수시로 내가 주변인들에게 '클래식은 수학의 영역인 것 같다'고 말해왔는데, 저자 역시 이 책에서 몇 번이나 음악과 수학의 연관됨을 얘기한다. 에피톤의 발라드는 시적 감수성이지만 바흐의 클래식은 아무리 생각해도 수학의 영역이야. 이 정도를 내가 스스로 판단하고 있다는 것은 어쩌면 내게도 발현되지 못한, 저 깊이 숨겨져 아직 제 빛을 보지 못한 수학적 능력 혹은 수학적 뇌가 있는 게 아닐까 싶다. 나는 문제풀이를 못하고 식도 외우지 못해 수학 점수가 형편 없었던 사람이지만, 그러나 수학이란 것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는 사람인 것 같아. 수학 문제를 이해는 못하지만 수학은 이해한달까. 그래서 수학이 아름답다 생각한다. 소설과는 다른 부분으로.



이 책은 수학에 다가갈 수 있는 의욕을 충분히 톡톡 건드려준다. 누군가는 이 책을 보고 수학의 정석을 샀다는데, 나는 정석까지는 아니고 문제집은 하나 사고 싶어졌다. 그리고 저자가 그랬듯이 수학을 취미 삼아 노트와 연필을 가지고 다니며 문제 풀기를 할 순 없겠지만, 책상 한 구석에 문제집을 놓아두고 싶다. 수학을 잘 하는 방법에 대해 말하지만, 사실은 삶을 단단히 꾸려가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게으르고 정리 안되는 삶을 살다가, 그런 자신을 다잡기 위해 수학 문제 풀기에 집중했던 일. 그리고 근육을 키우듯 수학을 키워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어느 한 부분 틀림이 없다.



저자는 사실 다른 부분에 대해서도 취미가 많은 사람이었지만, 어쨌든 취미를 가진다는 것은 삶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데 분명한 도움이 된다. 나는 취미가 다양하진 않고, 이렇게 공부하고 싶은 생각이 들어도 반짝 그 때뿐이지만, 지금 삶이 무료하고 지겨운 사람에게는 취미를 가지라고 나 역시 권하고 싶다. 수학이 취미가 된다면, 적어도 내게는 너무 멋진 일이고.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취미를 가져라, 직장이나 업무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풀어낼 다른 것을 가지는 것은 정말 필요한 일이다, 주된 것이 아니라 보조적인 무언가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얘기하곤 했다. 이것이 아닌 저것도 꼭 필요해! 그것이 수학이 되는 것도 정말 좋을 것 같다. 서핑을 하고 달리기를 하고 요가를 하고 요리를 하고 책을 읽고 모두 다 좋지만, 거기에 수학문제 풀이가 더할 수 있다니, 내가 그간 생각하지 못했던 건데 너무 근사하지 않은가. 나에게 수학은 아직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지만, 그래도 싫어하지 않으니 가까이 가기 위해 조금 더 노력해봐야겠다.



수학, 난 너를 싫어하지 않아.










음악은 미술보다 수학과 더 친해서, 음악을 잘하려면 먼저 수학을 잘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학창 시절에 화성음 같은 음계 때문에 고생한 경험을 떠올려 본다면 음악과 수학이 얼마나 잘 통하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음악 소리는 진동들의 배열이다. 아주 간단하게 말하면 손뼉 치며 박자를 맞추는 행위는 매우 수학적인 것이다.(p.43)

수학을 단순히 숫자를 다루는 학문이라고 오해하기 쉽다. 때문에 암산을 잘하는 사람을 보면 수학의 천재라고 치켜세우기부터 한다. 그러나 역사 속의 수학 천재들 가운데 암산 실력이 계산기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뛰어났던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암산에 능한 것은 기계적인 기능이지, 수학적 깊이와는 무관하다. 암산과 암기를 잘하는 사람들은 똑똑해 보이지만, 진실로 수학적이라고 하긴 어렵다. (p.44-45)

그 어느 것도 파스칼의 수학에 대한 열정을 잠재울 수는 없었다. 그는 아버지가 하지 못하게 하는 수학을 어린애가 만화책 보듯이 숨어서 공부했으며, 놀라운 기하학적 재능을 키울 수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까 어린아이 혼자 종이접기를 통해 삼각형의 세 각의 합이 180도라는 것을 증명해 냈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파스칼의 이러한 재능을 보고 유클리드의 《기하학 원론》을 읽게 했고, 이로써 파스칼은 수학과 기하학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게 되었다.
파스칼은 천재성을 인정받아 14세 때 프랑스 수학자들의 모임에 참석하게 되었다. 16세 때 <원뿔곡선시론>이라는 논문을 발표햇는데, 아무도 파스칼이 그 논문을 썼다는 것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아마도 아버지가 썼을 것이라는 의심을 받기도 했을 정도로 이 논문은 어린 소년의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p.165)

여기서 언급하지 않은 수많은 수학자한테서도 생활의 작은 것들을 본받을 수 있다. 파스칼은 《팡세》에서 아마추어 수학자로서 철학과 문학에도 깊은 조예를 드러내 귀감이 되었다. 1946년의 초보적인 디지털 컴퓨터와 관련된 튜링(Alan M.Turing, 1912-1954)은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Murakami Haruki, 1949~ )처럼 달리기 마니아였다. 하루키나 튜링이나 뛰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정신적인 노동을 하는 사람들에겐 육체의 움직임이 많은 도움을 줄 듯하다. (p.184)

누구나 마음속에 살리에르를 감추고 있다. 재능 있는 사람에 대한 질투, 그 사람의 재능을 훔치고 싶은 욕망, 역사와 영화, 혹은 소설속에서 우리는 그런 인물들을 종종 만나게 된다. 그 인물은 바로 평범한 사람들의 가슴속에도 존재하며 어떤 순간 갑자기 날을 퍼렇게 세우기도 한다. (p.195)

달랑베르는 줄리 드레스피나스라는 여인과 동거를 하게 된다. 달랑베르에게 만족하지 못한 줄리는 모라 후작, 기베르 백작 등과 연애를 했으며 끝내는 달랑베르에게 돌아와 그의 품에서 숨을 거둔다. 달랑베르는 사랑하는 여인 줄리를 위해 <마드모아젤 드레스피나스의 영혼에게>라는 글을 쓴다. (p.200)

‘그래, 수학을 취미 삼자. 수학은 내 마음속의 지도를 읽는 것에 그치지 않고 발을 옮겨 길을 더듬어갈 수 있도록 도와줄 거야.‘ (p.213)

클래식은 공부에 여러모로 도움이 되는 장르이다. 잔잔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면서 사람의 목소리로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일도 없어 공부할 때 좋은 배경음악이 되어 준다. (p.238)

수학은 몸의 근육과 같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근육을 발달시키고, 몸을 단단하게 만드는 방법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실천하는 사람은 드물고, 실제로 멋진 근육을 갖게 되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그들은 자신의 게으름과 나태함을 극복하고, 남들이 귀찮아 하는 일에 과감하게 매일을 투자한 사람들이다. 꼼꼼하고 성실한 사람만이 멋진 근육을 갖게 된다.
매일 조금씩, 꾸준히, 집중해서 공부한다면 멋진 수학 실력을 갖출 수 있다. 시험 때만 되면 공부하는 벼락치기 방식에서 벗어나 매일의 주어진 시간을 이용하는 것이 훨씬 부담도 없고, 시간도 여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지름길이다. (p.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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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동물원
진 필립스 지음, 강동혁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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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처음부터 긴장감이 시작되어 내내 유지되는데, 그래서 다음장을 빨리 넘길 수밖에 없다. 한 번 손에 들면 내리 읽어낼 수밖에 없을만큼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2. 동물원에서 총을 쏘고 다니는 이들 때문에 무서웠는데, 그들이 혹여라도 맹수 우리를 파손해 맹수들을 풀어낼까봐 그것도 두려웠다. 아, 진짜 밤에 읽기는 너무 안좋아. 나는 밤새 악몽을 꾸고 뒤척였어 ㅠㅠ 밤에 읽지 마세요 ㅠㅠㅠ


3. 긴장되고 흥미로운 채로 읽을 수 있지만 그렇다 해도 마지막에 언급하지 않는 한 존재 때문에 좀 마음이 안좋았다. '나라면 달랐을까, 나라 해도 어쩔 수 없이 그러지 않았을까' 싶지만, 그래도... 그 존재 생각 때문에 책장을 덮고서도 계속 찜찜함이 남아있다. 그래서, 그 존재는요?


제발 살아있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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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매춘, 한국을 벗기다 - 국가와 권력은 어떻게 성을 거래해왔는가 인사 갈마들 총서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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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작정하고 여자를 팔아먹는 역사의 기록을 보면서 '대한민국의 성별은 남자'로구나 생각했다. 모든 성들이 함께 모여 사는 곳이 아니라, 남자들만이 인간으로 대우받는 곳. 이 적나라한 기록을 읽는 일을 그래서 열뻗치는 일인데, 그렇다해도 이 기록을 읽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오늘 책 주문할 때 강준만의 또다른 기록, 《룸살롱 공화국》도 주문했다.


또한, 이 책이 지금 '다시' 쓰여진다면 더 의미있을 거라 생각되었다. 성매매 합법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기록뿐만 아니라, 그것이 왜 합법화 되면 안되는지, 성매매 반대를 외치는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의 목소리, 현재를 사는 여자들이 어째서 '성구매자만 처벌'을 원하는지에 대한 목소리도 충실히 기록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어쩌면 강준만이 이미 하고 있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강준만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땅에서 여자가 인간일 수 있게 되는 날은 언제 올까.

나는 그 날을 되도록 앞당기고자 눈에 보이는 모든 곳에 여자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투표를 할 것이다. 그런 마음으로 여자들을 응원할 것이고.







원래 이름이 순이건, 순자건, 순희건, 에레나는 집을 떠나 도시를 방황하다 기지촌으로 흘러든 수많은 젊은 여성을 상징하는 이름이었다. 에레나는 그녀들을 기지촌으로 보내지 않으면 안 되는 한국 사회의 가난과 또 보내놓고 손가락질하는 한국 사회의 이중성을 고발하는 이름이기도 했다. (p.65)

일국의 정신문화를 책임지는 자리라고 볼 수 있는 문교부 장관이 감히 매매춘을 애국적 행위로 장려하는 발언을 공개적으로 할 수 있었다는 건 당시 대한민국이 목적을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병영 국가‘ 체제였다는 걸 웅변해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실제로 박(정희) 정권은 매매춘 여성들에게 안보 교육을 포함하여 자신들이 국가 경제를 위해 얼마나 중요한 일을 하는가에 대한 교양 교육을 시행하여 외국인에게 최대한 서비스를 하도록 독려하였다. 그 교육 내용은 "일제강점기 정신대를 독려하였던 독려사와 너무 흡사하여 ‘신판 정신대 결단식‘ 같았다." (민경자, 한국매춘여성운동사)
물론 박 정권의 그러한 매매춘 장려 정책은 ‘수출 정책‘의 일환이었다. 방종성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p.86)

"정부는 외채의 압박을 줄이고 무역 적자 폭을 해소하기 위한 정책 자원을 국내에서 발견하는 데 성공한다. 그것은 바로 관광산업의 개발이었으며, 이를 핑계로 외화 획득의 원천은 이제 기생 관광의 루트를 통해 부분 해소되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서 관광산업의 정책적 육성은 짧은 시일에 더 많은 외화를 벌어들일 수 있는 가장 용이한 방법으로 통용될 수 있었고, 많은 관광산업 유형 가운데에서도 기생 관광은 자금의 회전과 비축이 가장 손쉬운 수단으로 파급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때 아닌 기생 문화의 복원. ……1970년대 한국 관광산업의 본질은 바로 이렇게 사라진 전통문화 가운데 성을 수단으로 하는 ‘원색의 소재‘를 통해 그 치부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것도 하필 일본인을 주 고객으로 하는 신종 매춘으로 관광 기생업이란 명칭이 보편화된 것이다. (p.87-88)

"유신 직후, 한국 정부는 관광 진흥 정책에 따라 관광진흥법에 근거를 두었던 국제관광협회(현재의 한국관광협회)에 ‘요정과‘를 설치하고 관광 기생들과 관광 요정 문제에 관한 본격적 실무에 착수한다. ‘윤락행위등방지법‘(1961.11.9)제정 10여 년 만의 일이었다. 일본 제국 군대의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 공창제도를 미 군정이 폐지하고 한국의 군사정부가 이를 새로운 법으로 대체한 지 10여 년 만에 정부는 그들 스스로 떠나보낸 자들을 다시 불러들여 유린의 대가를 긁어모으려는 ‘악의 논리‘와 공모·타협하기 시작했다. 요정과의 업무 방향은 사실상의 ‘매춘 허가증‘과 다름없는 접객원 증명서를 발부하고 교양 교육을 시행하면서 전국 관광 기생들의 행정적 존재 근거를 합법화하는 데 맞춰졌다." (p.88)

일본인을 대상으로 한 매매춘 여성들을 애국자라고 치켜세웠으면 이왕 매매춘의 국책 사업화를 시도한 김에 그들이 큰 돈이라도 벌 수 있게끔 보호 장치까지 만들어줬어야 했을 게 아닌가. 그러나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렇게 결코 쉽지 않은 과정을 거치면서 일본 남성을 상대로 갖은 수모와 모욕을 당해가며 번 수입임에도 관광 기생에게 돌아오는 ‘화대‘는 여행사 커미션, 호텔 통과세, 밴드 악사비, 요정 종업원 팁, 버스 운전사 급료, 요정 지배인 몫, 접대 화대, 마담에 대한 사례, 호텔 객실 담당 팁, 교통비 등의 무수한 중간 착취자에 의해 거의 착취당하고 손에 쥐는 것은 생계비도 될까 말까 한 정도에 불과하다."
대부분은 총수입의 80퍼센트를 중간 착취당했으며, 정부는 화대 착취 구조를 묵인했다. 왜 그랬을까? 그 이유에 대해 박종선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p.89-90)

"70년대 국가가 이렇게까지 해서 정책의 전환을 의도했던 이유는 어디까지나 국내에서 외국인들이 많은 돈을 쓰고 가게 하자는 기묘한 이기심에서 비롯된 것이었을 뿐, 진정으로 기존의 매춘 여성들이나 빈곤 여성들을 끌어안아 범사회적으로 인간다운 삶의 조건을 조성해주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70년대 기생 관광 문화를 즐긴 주 고객들이 일본인이었다는 역사의 아이러니는 해방 공간 속에서마저 단절되지 않고 존속된 과거 일제 공창 문화의 잔재와 이를 ㅅ스스로 척결하지 못했던 우리 자신들의 사회 의식적,실천적 한계를 반증하는 것이었다. 전도된 성 문화를 강화시키고 기생의 사회적 수요를 팽창시킨 한국의 관광정책은 결국 기생 관광을 일본에 역수출하는 새로운 현상까지 야기시킨다." (p.90)

리영희는 다음과 같이 개탄한다.
"정부나 국가가 그 여성 국민에게 통행금지 면책특권을 주면서까지 외국인 사나이들을 끌어들이는 정책은 딸을 바치고 그 대가로 부자가 되는 아비와 얼마나 도덕적 차이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 그 돈으로 국민이 얼마나 부해지며 국가가 얼마나 경제 발전을 이룩할 수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사회와 국민의 도덕적 타락, 비인간화를 돈벌이의 수단으로 삼지 않고서는 경제 발전을 못 한다는 말일까. 그렇게까지 해서 외국인을 끌어들이고 외화를 벌어야 할까.…… 이 통에 10여 년을 지켜 내려오던 ‘4·19의 4월‘이었던 달이 금년에는 갑자기 ‘관광의 4월‘로 탈바꿈했다. 어제도 오늘도 신문에는 일본의 무슨 재벌, 무슨 사장이 서울과 지방의 어디 어디에 몇 층의 호텔 건설을 약속했다는 기사가 자랑스럽게 보도되는 것을 읽으면서 나는 우울해지는 것이다." (p.94)

박 정권의 적극적임 매매춘 국책 사업화에 대해 집단적으로 들고 일어난 건 오직 여성계뿐이었다. 1973년 7월 2일부터 5일까지 서울에서 열린 한일교회협의회에서 한국교회여성연합회 대표 이우정은 기생 관광 문제를 거론하면서 기생 관광 반대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1973년 11월 30일에는 ‘관광객과 윤락 여성 문제에 대한 세미나‘를 통해 대응 방안을 토론하였고, 12월 3일에는 교통부 장관과 보건사회부 장관에게 섹스 관광의 시정과 건전한 관광 사업책의 강구를 요구하는 건의문을 발송하였다. 또 《매춘 관광의 실태와 여론》이라는 소책자를 만들어 배포하기도 했다.
이러한 운동은 대학생에게도 영향을 끼쳐 이화여대, 한신대, 서울대 학생의 섹스 관광 반대 시위로 이어졌다. 이화여대 학생들은 김포공항에 도착하는 일본 관광객을 상대로 ‘섹스 애니멀 고 홈‘ 이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반대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이에 호응하여 일본에서도 스물 두 개 여성 단체가 연합하여 일본인의 한국 내 섹스 관광 반대 운동을 전개하였다. (p.95-96)

1972년부터 본격화된 보수 진영의 반대 운동은 마치 부슨 독립운동이라도 하는 것처럼 필사적으로 전개되었다. 1972년 8월 25일 전국유림대표자회의는 ‘500만 유림의 총의‘로 가족법 개정을 반대하는 결의를 표명하였고, 1972년 10월 5일엔 유도회 주관으로 가족법 개정을 반대하는 34만 명의 서명날인을 받은 원본을 국회 사무처에 제출하였다. 그리고 뒤이어 가족법 개정안에 대한 반대 건의서를 제출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매매춘의 국책 사업화에 대해선 그 어떤 반대의 목소리도 내지 않았다. 여성을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로 간주한다면 그렇기 때문에 더욱 여성을 보호해야 하는 게 아닌가? 그러나 그것도 아니었다. 만약 그들이 진실로 매매춘 여성들을 ‘애국자‘로 간주해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하는 데 앞장서왔다면 또 모르겠다. 오직 남성 우월주의적 기득권만을 지키려는 이들의 이런 이중 잣대는 조선조를 지배한 이른바 ‘열녀烈女 이데올로기‘의 변형은 아니었을까? (p.108)

1985년 올림픽조직위원회는 미국의 잡지 《더 스포팅뉴스The Sporting News》에 별책 부록으로 서울올림픽을 홍보하는 광고를 무려 46면에 걸쳐 내보냈다. 그런데 그중 한국의 젊은 여성들이 기생 관광의 메카라 할 요정에서 외국 남성들에게 안주를 먹여주는 컬러 사진이 44면과 45면, 두 면에 걸쳐 천연덕스럽게 실렸다.
단순한 음식 시중을 드는 것이 아니라 한 손님 옆에 한 사람씩 앉아 젓가락으로 외국인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는가 하면 자지러지게 웃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이른바 ‘기생 파티‘를 연상시킨다는 것이 이 사진을 본 사람들의 공통된 소감이었다.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는 이 특집을 위해 《더 스포팅뉴스》에 거액을 지급했을 뿐만 아니라 1984년 11월 취재팀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모든 취재 편의를 제공한 것으로 알려졌다. (p.116)

이에 분노한 한국교회여성연합회, 한국여성의전화 등 여성 단체들은 본격적인 기생 관광 반대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공개 질의서를 통하여 여성을 이용해 관광 수입을 올리려는 정부를 비난하는 한편 정부 당국과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의 해명, 사과와 함께 올림픽 정책의 시정을 요구했다.
한국여성의전화는 1985년 3월에 인신매매 조직이 대거 검거되자 이 문제를 사회문제로 여론화하기 위한 작업으로 ‘인신매매를 고발한다‘는 공개 토론회를 처음으로 개최한 바 있다. 여성에 대한 모든 폭력을 ‘성폭력‘으로 개념화한 한국여성의전화는 인신매매 과정에서 여성이 성적인 도구로 전락한다는 점을 강조하며 인신매매를 성폭력의 한 형태로 보았다. 토론회는 인신매매의 유형 사례 발표에 이어 당시 한국교회여성연합회에서 섯ㅇ매매 반대 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이우정이 성매매의 비인간성에 대해 발제했다. 그리고 지은희가 ‘매춘의 사회 구조적 원인‘에 대해 그리고 박인덕이 ‘매춘 여성 문제를 여성의 힘으로‘ 해결하자는 취지의 발제를 하였다. (p.116-117)

그러나 전두환 정권은 그런 항의에 아랑곳하지 않고 1986년 1월 기생 관광으로 이미 명성이 자자하던 11개 대형 요정 업체에 총 20억 원이나 되는 돈을 특별융자 형식으로 지원해주었고, 국제관광공사에서 발행하는 외래 관광객용 지도에도 기생 관광 장소인 요정의 위치를 각국어로 친절하게, 또 상세하게 밝혀놓기도 했다. (p.117)

기생 관광 이벤트는 주도면밀했다. 올림픽 개최일이 다가오면서 외국 관광객들의 숫자가 늘어나기 시작하자 접대부 아가씨들에게 이른바 소양 교육이라는 것을 실시했는데, 물론 이 소양 교육의 핵심 메시지는 국가를 위해 외국 관광객들에게 최대한 편의와 서비스를 제공하라는 것이었다. 소양 교육을 담당한 강사들은 "아가씨들이 벌어들이는 외화가 우리 경제 발전의 밑거름이 되고 있다"거나 "전후 일본의 경제가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일본 여자들이 자신들의 성을 팔아 벌어들인 달러의 덕"이라는 미담도 잊지 않았다. (p.117-118)

한 외국인의 증언이다.
"비행기에서 내려 발을 땅에 딛자마자 뚜쟁이가 달려들어요. 세계의 여러 공항깨나 출입해봤습니다만, 뚜쟁이가 공항에서부터 일하는 곳은 내가 알기는 김포밖에 없습니다. 설마 이런 일들이 정부의 인정 없이 벌어지는 일이라고는 하지 않겠죠?"(강견실, 매춘 관광과 한국 여자 재인용p.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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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8-06-07 15: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술술 넘어가는 강준만 선생님의 서술을 따라 읽는다해도 ‘한국 매매춘의 역사‘를 읽는건 정말 힘들거예요.
뭐, 이런 놈의 나라가 있나...
너무나 당연시했던 기생관광을 결국 근절시키는데 여성들의 힘겨운 투쟁이 있었다는 걸, 인용해주신 글 보면서 다시 한 번 확인하네요.
그냥 쉽게 되는 게 하나 없죠..... ㅠㅠ

다락방 2018-06-07 15:51   좋아요 1 | URL
이 나라는 계속해서 여자를 인간으로 대우하지 않았고 그게 어느 한 남자가 그런게 아니라 나라 전체가 그런 거였어요. 그리고 그럴 때마다 여성들은 반발했고요... 지금과 다르지 않은 모습이네요.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할지... 읽다가 너무 분하고 화가나서 미치겠더라고요.

단발머리님, 이 나라가 여자들한테 왜이러는걸까요?

6/9 시위에 가서 소리치고 와야겠어요.

블랙겟타 2018-06-14 1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예전 룸살룸 공화국 책을 나왔을 때 바로 사서 읽었었거든요.
그당시 강준만씨 책을 꽤 샀던 시절이라..
저는 정치교양 서적으로 생각하면서 읽었었는데 다시 꺼내서 한번 읽어봐야겠네요.
다락방님이 표현하신 ‘대한민국의 성별은 남자‘에 저에게도 생각이 많이 들게 하네요..

다락방 2018-06-15 08:51   좋아요 1 | URL
일단 룸살롱 공화국 샀는데 아직 읽기는 전이고요..이걸 읽다보면 또 내가 얼마나 빡이칠까...생각하고 있습니다. 저걸 읽기 전에 소설 몇 권을 좀 더 읽어둬야 할 것 같아요. 아무래도 시간차가 있으니 블랙겟타님이 지금 ‘다시‘ 룸살롱 공화국 책을 읽는다면 그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고 또 그때와는 다른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요? 조만간 제가 읽고 페이퍼 쓰면 우리 그 때 또 이야기 나눠요!
 
피프티 피플 - 2017년 제50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
정세랑 지음 / 창비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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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승국의 허벅지에 고개를 얹고, 그것만으로 불안했는지 앞발로 바지를 잡고 테이는 잠들었다. 덕분에 승국은 불편해 보이는 정장 바지를 갈아입지도 못했다. 형제는 볼륨을 낮춘 채 티브이를 봤다. 한 아이돌 가수가 그룹에서 탈퇴한다는 연예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나는 탈퇴하는 아이돌들 이해가 가. 같은 회사를 7년, 8년 다니면 그만둘 수도 있는 거지, 욕할 문제가 아닌 거 같아."

"그러게 말이다." (p.83)



'정세랑'의 《피프티 피플》을 읽으면서 '아, 소설은 이야기였지!' 하고 다시 생각했다.


그렇다. 소설은 이야기였다. 나를 둘러싼 주변 사람들, 혹은 나와 관계없는 저 먼 곳의 사람들, 또한 나의 이야기. 각자가 가지고있는 저마다의 이야기들이 짧게 짧게 그려지는데, 그 일들마다 섬세함이 살아있어, 작가는 이 오십명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전조사를 했을까, 그 노고에 감탄했다.


이야기는 이야기마다의 힘을 갖고 있다. 모든 인물들이 저마다의 이야기를 갖고 있는데, 그 이야기가 어느 하나 허투루 버릴 것이 없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상실의 아픈 이야기도 나오지만, 기본적으로 이야기들이 선하다. 선한 의지를 갖고 선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래서 내게는 '너무 착하다'고 생각하는 이야기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펼쳐진다.


위의 인용문은 늙고 병든 개가 허벅지에 고개를 얹었기 때문에, 불편해도 그 자세를 유지하는 '승국'의 이야기다. 이야기는 시종일관 이렇게 착하고 아름다운 사람들로 가득한데, 내가 소설을 읽을 때 '착하기만한 이야기'에 대해서 딱히 매력을 느끼는 편은 아니지만, 이렇게 착한 이야기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처음부터 한글로 쓰여진 소설이라는 것은 한국 소설이 갖는 가장 큰 장점이다. 술렁술렁 잘도 넘어간다. 오십명이나 되는 인물들이 나와서 모두들 어딘가에서 만나고 연결되어 지는데도 '아 아까 이렇게 나왔던 인물이구나' 알면서도 이름은 까먹게 되긴하지만, 이 책을 읽기 바로 전에 읽었던 《마당이 있는 집》과 연달아 읽노라니, '아 한국소설 읽는 거 너무 즐거운 경험이다'라는 생각을 하게된다.



다양한 이야기들이 섬세하게 펼쳐지는 게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생각하지만, 또 무시할 수 없는 장점이 있으니, 저마다의 이야기가 자꾸 다른 기억들을 불러낸다는 데 있다. 작가가 보여주는 사건이나 사고에 있어서도 그렇지만, 소소한 일상에 있어서도 그렇다. 소개팅을 한 남녀가 그 후로 두 번 더 만났다가 끝내는 어그러지고 마는, 각자 다른 사람을 만나 결혼하게 되는, 정말 지극히 작고 아무것도 아닌,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그 소소한 이야기 앞에서 나는 한참을 머물렀다. 아주 오래된 내 소개팅이 떠올랐고, 한 번 더, 라는 그의 답에 그러마고 답해 한 번 더 만나놓고, 사소한 이유들로 '계속 만나자'는 그에게 '나는 아닌 것 같다'고 말했던 일이 떠올랐다. 내게 있었던 그 일이 내게 무슨 상처로 남아있거나 한 것도 아니고, 그 남자의 이름과 얼굴마저 잊을만큼 별 거 아닌 일이긴 했지만, 대체 인연이란 건 어디서 어떻게 얽히는 것이고 어떻게 어긋나는 것인가에 대해 한참 생각한 것이다. 사실, 그 이야기 말고도 나를 머무르게 한 이야기는 이 책 곳곳에 숨어 있었다. 대체로 작은 일들에 대해서.



모든 인물들이 한데 얽히는 마지막에서, 나는 바라는 결말이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제발 그렇게 되는 결말을 쓰지는 말아줘'라고 바랐달까. 만약 결말이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내내 재밌게 읽었지만 작가를 미워하게 됐을 것 같다. 작가를 미워하지 않을 수 있는 결말이어서 다행이라고,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정세랑 작가의 책은 이번이 세 번째다. 《지구에서 한아뿐》,《보건교사 안은영》을 몇 해전에 읽었었고 그 후에 가장 최근에 읽은 게 이 책, 오십명에 대한 이야기인데, 가장 최근에 읽은 책이 내가 읽어본 작가의 전작들보다 좋았다. 그리고 최근작이 더 좋다는 것이 나는 어쩐지 더 좋았다. 나랑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고 나랑 비슷한 세대(나보다는 훨씬 젊지만!)의 작가가, 더 성숙해진 것 같아서이다. 자꾸 자라는 느낌. 같이 자라자고, 우리 같이 나아가자고 하고 싶다. 작가의 발전이 눈에 보였다. 나는 착하기만 한 소설에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고 앞서 밝힌 바 있지만, 그래도 작가가 지금처럼 착한 이야기들을 자꾸 자꾸 써주었으면 좋겠다. 예의 그 세심한 시선도 유지하면서.




"극장 들어오면 영화 보고 싶네요."
이번엔 정말요, 마저 나오지 않았다.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영화 좋아하는군요, 말고 뭐 좀 똑똑해 보이는 말 없나. 게다가 도넛을 입에 너무 많이 넣고 씹고 있었기에 리액션을 할 타이밍을 놓쳤다.
"제가 도넛 샀으니까, 다음에 극장 문 열면 영화 보여주실래요?"
"네."
천재소녀가 두번째 데이트를 제안했다. 혁현은 천재소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성큼 대답했다. 그 빠름이 좀 민망할 정도였다. 사실 혁현은 도넛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 순간 그대로 멈춰 평생 도넛만 먹어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데이트겠지? 이거, 데이트겠지?
"데이트예요."
혁현의 머릿속을 읽은 것처럼 천재소녀가 말했다 뒤늦게 카페인이 몸에 도는지 귀가 울렸다. 천재소녀가, 채원이 수술이 있다며 먼저 병원으로 돌아갔다. 병원까지 쫄래쫄래 따라가고 싶은 걸 가까스로 참았다. 도넛 가게의 화장실에서 앞발을 흔들며 춤을 추었다. 그럴 만한 날이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깨달았다. 알고 있었어, 내가 좋아한다는 걸. 내가 내내 좋아하고 있었다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언제부터 알았을까?
아마도, 눈만 보고. (p.99-100)

"그럼, 저 맨입으로 고맙다 하지 말고 맛있는 거 사줘요."
그러자 천재소녀의 똑똑하고 조그만 머리가 혁현을 향한 채 가만 멈추었다. 알아들은 것이다, 데이트 신청이라는 걸. 혁현은 발바닥에까지 땀이 나는 걸 느꼈다. 병원 바닥이 무너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만화처럼 아래층으로 도망가고 싶다고 말이다.
"그럼 내일 아침 7시 반에 옆 건물에 있는 도넛 가게 괜찮아요?"
"네, 좋아요."
그날밤 혁현은 거의 자지 못했다. 천재소녀가 아침을 사주겠다고 한 이유는 무엇인가. 수술이 8시에 시작인데 7시 반이라니. 물론 바빠서겠지만 선 긋기가 아닐까. 빵 쪼가리나 먹고 빨리 헤어지자는 그런 이야긴가. 도넛을 좋아하는 것인가. 혁현을 싫어하는 것인가. 도넛을 좋아하며 혁현을 싫어할 수도 있다. 가슴이 거대한 도넛에 눌리는 듯해 얕게 잠들었다. 잠들었다 깼다를 반복하니 아침이었다. 안 그래도 별로 잘생긴 얼굴은 아닌데 거울을 보니 처참했다. (p.98)

호감. 가벼운 호감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일들이 시작되는지. 좋아해서 지키고 싶었던 거리감을 한꺼번에 무너뜨리고 나서 스스로를 한심하게 여겼는데, 어쩌면 더 좋은 기회가 온 것인지도 몰랐다. 혜련은 기가 막혀서 혼자 더 웃었다. (p.248)

"아니. 각자 결혼했지. 다른 건 안 무서워해도 자기 아버진 무서워했거든. 성질이 똑같은 데 더 센 분이었어. 부잣집에 시집갔는데 남편이 금방 요절해버려서 힘들게 살았다더라고."
"저런."
이번엔 세훈이 저런, 하고 옛날 사람처럼 말했다. 약간 쑥스러워서 얼굴이 붉어졌지만 쪽문 식당은 어두워 티가 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가 연락할 수는 없잖아. 나도 가정이 있었으니까. 아내와 사별하고, 3년을 넘겨 예의를 지킨 다음에 연락했는데 뭐 너무 늦은 거였지. 몇번 만나지도 못하고." (p.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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