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별,인종,계급,지식 자원 등에서 사회적 약자의 언어는 이미 지배 담론과 매체에 포섭되어 있었다. 당연히 설득력이 떨어지고, 오해받고, '말더듬이 바보'에, 흥분하거나 화가 난 것처럼 보인다. 오랫동안 약자였던 집단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세상은 이들에게 요구한다. 너의 의견을 논리적으로, 세련되고, 우아하게 말하라고. 동시에, 네 주장은 시기상조이며 말하는 너의 존재가 무섭다고, 우리는 펜을 쓰는데 너희는 칼을 쓴다고 비난한다. 여성이나 유색인종이 그들의 시각이 반영된 언어로 말한다면, 사람들은 불편해하고 불쾌해한다. 게다가 가장 심각한 문제는 못 알아듣는다는 점이다. (p.106-107)
이게 아닌것 같은데, 이러면 안되는 것 같은데, 이건 아니잖아, 하는 생각들만이 머릿속에 가득하고 그걸 누가봐도 논리적으로 정리할 수 없어 답답했던 날들중에, 천연덕스럽게 리벤지 포르노를 보는 사람이 되었고, 성매매에 대해 옳고 그름조차 분간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있었던 나는, 그래서 고꾸라졌다. 내가 공부가 부족했던 건 사실이지만, 나는 나를 비난한 이의 말이 옳다는 생각이, 결코 들질 않았다. 성매매에 대한 옳고 그름을 '내가' 분간하는 게 '맞는'건가? 그래도 '되는건가?' 백번 천번 생각해고 또 생각해도 내게는 '저건 아닌것 같은데' 하는 느낌이 가득했다. 이걸 설명할 수 없어 답답했다. 논리적으로 이걸 정리할 수 없는 내가 너무 싫었다.
여성들이 흔히 경험하는바, 익숙하게 들리므로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뭔가 불쾌하고 분한 감정이 드는 말을 들으면 이에 대해 당황하고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자신을 스스로 탓하게 된다. 이것이 정치이며, 이 느낌이 바로 정치의식이다. 물론, 이는 논리나 지식과 같은 개인의 역량 문제가 아니다. 내가 사회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따로 공부해야 하는 문제다. 누구나 논쟁에서 이기고 싶어 한다. 이것은 자기가 옳다는 믿음 혹은 차별은 부당하다는 인식에서 나오는 당연한 욕망이다. 상대방이 하는 말이 분명 틀렸는데, 부정의한데, 기분 나쁜데, 내게는 대응할 논리가 없을 때처럼 억울한 일은 없다. (p.108)
그런 시간들 속에 책을 읽고, 강연을 듣(거나 보)고, 친구나 지인들과 대화를 나눴다. 내가 페미니즘을 대하는 방식은 나의 '경험'과 '공감'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그러던 차에 학문적인 페미니즘 앞에서 고꾸라진 것. 학문과 지식으로 무장한 소위, '올바른 페미니즘'을 아는 사람들의 말도 여기저기서 볼 수 있었다. 지금의 페미니즘 시류가 걱정스럽다는 염려섞인 발언들을 내뱉은 이들은 모두, 페미니즘을 비롯하여 다른 것들까지 너무나 많이 공부하고 잘 알고 있고 스스로 논리적이라 생각하는 이른바 '지식인'들이었다. 참, 똑똑하기들도 하지.
페미니즘은 시각이지 하나의 분과 학문이 아니다. (p.109)
며칠전에 TED 강연을 봤다. <나쁜 페미니스트> 라는 제목을 가진 강연이었다.
강연은 여기 ☞ 나쁜 페미니스트
화면정리는 여기 ☞ 나쁜 페미니스트 (글로 읽으실 분은 여기로 가시면 됩니다)
강연중에 비욘세를 언급한 부분이 나온다. 가져와보겠다.
제가 여신이라 부르는 비욘세를 예로 들게요. (웃음) 최근에 확실한 페미니스트로 부상했습니다. 2014년 MTV 영상음악 시상식에서 "페미니스트"라고 10피트 높이에 있는 표시앞에서 공연을 했습니다. 이런 팝스타가 공개적으로 페미니즘을 옹호하고 젊은이들에게 페미니스트가 되는 것은 축하할만한 것이라고 알리는 모습을 보는 것은 영예로운 장면이었어요.그 순간이 끝나자 문화 평론가들은 끝없이 논쟁하기 시작했어요. 비욘세가 정말 페미니스트인지 여부에 대해서요. 그들은 비욘세의 페미니즘을 평가했어요. 성공한 다 큰 여성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요. (웃음) (박수) -강연中
다른 사람의 행동을 비난하며 옳고 그름을 가르고자 하기는 쉽다. 그러나 자신의 신념을 사람들 앞에서 드러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신념을 드러내놓고 거기에 맞게 행동하고자 해도, 인간안에는 자기 모순이 있어 신념대로 백프로 곧게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의 나는 페미니즘에 관심이 많아 공부를 하고, 페미니스트 키링을 가방에 달고 다니지만, 내 가족과 내 연애에 들어왔을 때, 이것이 페미니즘과 일치하지 않는 것 같아 종종 고민하곤 한다. 그런데 '그런건 페미니즘이 아니야' , '넌 잘못하고 있어' 라고, '페미니스트가 아닌' 사람들이 비난하는 것은, 대체 뭔가. 이것이, 그들의 그 비난이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데 어떤 역할을 하는가?
저 강연에서 강연자는 마지막에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눈에 띄는 페미니스트를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들이 완벽하길 바라지요. 우리를 실망시키면 존경받는 위치에서 기꺼이 끌어내리지요. 말씀드렸죠, 저는 엉망이라고요. 저를 높이 보시기 전에 거기서 이미 떨어진 사람이라고 생각하세요.
우리는 페미니스트에게 완벽함을 요구합니다. 아직도 여러가지로 투쟁하고 있고 원하는게 많고 필요한게 많기 때문이죠. 우리는 건설적인 비판을 훨씬 넘어서 어떤 여성의 페미니즘을 아무것도 남지 않을 때까지 분해하고 갈가리 찢어놓습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어요. 나쁜 페미니즘, 혹은 보다 포용적인 페미니즘이 출발점입니다.
우린 또한 대담하게 페미니즘을 주장할 수 있습니다. 좋든 나쁘든, 아니면 중간이든요. 제 책 "나쁜 페미니스트"의 마지막 줄에 이렇게 썼습니다. "페미니스트가 되지 않기 보다는 나쁜 페미니스트가 되겠습니다." -강연中
나는 완벽한 사람이, 당연히, 아니다.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긴 하지만 그게 제대로 되는지도 잘 모르겠다. 그러므로 페미니스트라고 스스로 선언하면서도, 내가 내 삶을 대함에 있어 그 안에 얼마나 많은 모순이 섞여들까 두렵기도 하다. 또한 누군가 그런 모습을 비난할까봐 걱정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두렵고 또 내가 완벽하지 못한 것에 스스로 실망할까봐 걱정되어서 '페미니스트가 아니다' 라고 말하고 싶진 않다. 나는 저자의 말에 힘입어 똑같이 말하고 싶다.
나는,
페미니스트가 되지 않기 보다는 나쁜 페미니스트가 되겠습니다.
저 강연은 요즘 TED 강연으로 공부중인 칠봉이가 보내줬다. 강연 좋더라, 너도 좋아할 것 같아, 라면서 링크를 보내줬는데, 이 강연도 좋았지만 이 강연을 보고난 후, 내게 이 강연을 '남자사람'인 칠봉이가 보내줬다는 것도 무척 좋았다. 적어도 나의 가까운 남자사람이 내가 뭘 고민하는지를 알고 어떤걸 걱정하는 지를 알고 있다는 게 좋았고, 그리고 이런 강연을 듣는 사람이라는 것도 좋았다. 내가 진짜 좋은 사람을 옆에 두고 있다고 감탄하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내가 아니었다면, 칠봉이 옆에 있는 사람이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랬더라도 TED의 수많은 강연들 중, 칠봉이가, 하필이면 이걸 택했을까? 그러자 가슴 가득 뿌듯함이 차올랐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좋은 영향을 받을 때 그러한것처럼, 다른 사람에게도 좋은 영향을 줄 때 기분이 좋아지는 법.
최근에 페미니즘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한 사람들은, 나를 포함해서, 페미니스트에 대한 오해를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우리가 '오해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이제 막 시작하고 발검을을 뗀 만큼, 우리는 실수하기도 할 것이고 고꾸라지기도 할것이다. 학문과 지식 혹은 교양이라는 말들의 벽에 부딪쳐 고꾸라져서 한동안의 내가 그랬던것처럼 너덜너덜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우리가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그럼에도 우리가 페미니스트인 것이 페미니스트가 되지 않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그래, 이 책을 읽고 있다는 것은 이 책을 샀다는 뜻이다. 그러니까..키링..을 받았다는 것이다. 아아, 고민은 고작 이틀뿐이었던가. 아니, 이틀도 채 되지 않았던가. 책이 왔고, 키링이 왔다.
후훗. 키링을 받아들고 어서 빨리 인증샷을 올리고 싶어 미치는 줄 알았다. 그런데 나는, 여름에는 에코백을 들고 다니질않나. 그러니 이 키링을 걸어둘 데가 없는 거다. 하아, 어쩔까, 이 키링을 어떻게 활용하나, 고민하다 내가 선택한 방법은?
바로바로,
가방을 사는 것이었다. 꺅 >.<
정말이지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 라는 키링을 꼭 달고 싶은데, 별 수 있나. 가방을 사야지. 가방은 매일 들고나니니, 매일 키링을 걸어둘 수 있지 않나. 움화화화핫.
키링 받기 위해 너, 어디까지 해봤니? 난 가방까지 사봤어.
그리고 이 가방에 키링을 달았다.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자태다. 움화화화핫.
(이 가방 완전 저렴하고 지갑까지 셋트로 줍니다. 구매의사 있으신 분은 말씀하시면 링크 드릴게요. ㅋㅋㅋㅋㅋ)
신이난 마음에, 그래, 패디큐어를 받자, 싶어서(응? 왜?) 어제 네일샵에 갔는데, 예약도 꽉 찼을 뿐더러 패디큐어 받을 때는 쪼리를 신고 와야 한단다..아..그래? 할수없지. 하고 돌아서 그냥 집에 간 뒤, 그냥 내가 발랐다. 움화화화핫.
위에 링크한 강연에서도 강연자가 말한다. 자기는 핑크색이 좋다고. 나도 핑크색이 좋다. 예쁜 샌들이 좋고 팔랑거리는 치마가 좋다. 남자친구가 좋고 존대말 하기를 꺼려하지 않는다. 나는 술 마시는 게 좋고, 술 마시기 전에 안주를 뭘 먹을까 생각해보는 것도 좋아한다. 그러는 틈틈이 계속해서 나는 내가 페미니스트임을 자각할 것이다. 아니라고 생각되면 아니라고 말할 것이고, 아닌 것 같다고 생각되면 역시 아닌 것 같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는 과정에 논리로 똘똘 뭉치는 순간은 아마도, 빌어먹게도, 뭐 거의 없겠지만, 대부분을 흥분이 대신하겠지만, 계속 그렇게 살 것이다. 계속 고민하고 계속 앞으로 나갈 것이다. 계속 대화하고 계속 읽고 계속 듣고 볼 것이다. 그러다 거대하고 높은 벽을 만나 후려갈김을 당하면 또 고꾸라지겠지만, 벌떡 일어날 것이다. 나는 계속 생각할 것이고, 시끄럽게 설치고 나댈 것이다. 여러날을 고민했지만, 이게 맞는 것 같다.
그나저나, 점심은 뭘 먹을까?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