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사람은 다 알겠지만, 나는 대도시를 좋아한다. 여행을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굳이 어디를 가고 싶냐고 물으면, 나는 늘 대도시를 얘기했었다. 나는 도시에 가서 그 도시 사람들의 삶을 그대로 느껴보고 싶다. 마트와 우체국과 백화점을 가보고 싶고, 지하철을 타보고 싶고, 서점과 레코드샵과 커다란 빌딩을 돌아다니고 싶다. 길에서는 수많은 사람들과 마주치고 스쳐지나가고 어깨를 부딪치고도 싶다. 패스트푸드점과 커피숍에서 어쩌다 한가한 자리를 발견하면 거기가 마치 내 자리인듯 앉아서 책도 읽고 싶고, 눈이 피곤하면 고개를 들어 바쁘게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멍하니 보고 있고 싶기도 하다. 내가 휴식을 취하고 싶은 곳은 바다나 산이 아니라 대도시의 어느 귀퉁이 쯤이 될 것 같다. 그리고 나는 지금, 이 책을 읽고있다.
"불평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여기가 좋아요. 이곳에 온통 빠져 있답니다. 소도시적 환경 말이에요. 난 대도시와 복잡한 성적 관계에서 벗어나고 싶어요. 열기 말이죠. 내게 대도시란 바로 그걸 뜻한답니다. 기차에서 내려 역 바깥으로 걸어나오면 후끈 몰아치는 열풍을 맞죠. 대기와 차들과 사람들의 열기. 음식과 쎅스의 열기. 거대한 빌딩들의 열기. 지하철과 터널에서 흘러나오는 열기 말이에요. 대도시에서는 기온이 항상 화씨 15도쯤 더 높아요. 열기가 인도에서 올라오고 오염된 하늘에서 떨어지죠. 버스들은 열기를 내뱉고, 열기는 쇼핑객들과 사무원들에게서도 발산되구요. 기반 시설 전체가 열에 바탕을 두고 필사적으로 열을 소모하고 더 많은 열을 발생시키죠." (p.21)
책 속의 머레이 라는 등장인물이 하는 말인데, 머레이가 대도시를 싫어하는 바로 이런 이유로 나는 대도시를 좋아한다. 대도시와 복잡한 성적 관계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그 말이, 열기, 라고 표현될 수 밖에는 없는 대도시가 나는 좋다. 어쩔 수 없이. 그리고 이 책도 좋다. 아직 200페이지 가량 밖에 읽지 못했는데 아주 마음에 드는 문장들이 많이 나온다. 이를테면, 이런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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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당하기만 하다면 큰 몸집에는 정직함이 깃들어 있다고도 암시했다. 사람들은 어느정도 몸집이 있는 사람을 신뢰하는 법이라고. (p.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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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몸에는 정직함이 깃들어 있다. 사람들이 나를 유독 신뢰하는 이유는 (응?) 아마도 나의 몸집에 있는 것 같다.
『시크릿 가든』이라는 아주아주 유명한 드라마를 나는 토요일과 일요일 이틀동안 처음으로 봤다. 토요일 방송분에서는 현빈과 하지원이 한 침대에 누워있었다. 꽤 오래 (함께 자자고) 실랑이를 벌이는 장면이었다. 나는 마침 그때 우리집에 놀러온 여동생과 조카와 제부를 포함하여, 아빠 엄마 남동생까지 다 함께 텔레비젼 앞에 모여앉아 족발을 먹고 있었고, 술을 한잔 하고 있었는데, 그 장면을 보는 것이 개인적으로는 무척 만족스러웠지만, 가족 구성원으로서는 조금 뻘쭘했다. 제대로 화면을 쳐다보지 못하고 조카에게 시선을 돌렸다가, 족발을 집어 먹다가 했다. 제부는 나에게 말했다.
"처형, 저 장면 제대로 못 쳐다보는데요?"
나는 뭔가 들킨것 같아 그저 하하하, 하고 웃음으로 얼버무리는데, 옆에서 남동생이 말했다.
"모르죠, 우리 큰누나가 엊그제 저런짓을 하다가 집에 왔는지도. 그래서 뻘쭘한지도."
푸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아 이 드라마가 사람 죽이네, 진짜. 그리고 나는 문득 생각했다. 현빈 같은 남자가 옆에 누워있는 건 대체 어떤 기분일까? 그 눈과, 그 코와, 그 귀와, 그 입을 가진 남자가 내 옆에 그렇게 바싹 얼굴을 갖다 대고 누워있다면, 그렇다면 '김수한무거북이와두루미~' 어쩌고는 내가 읊어야 하지 않을까. 아니, 읊고 자시고를 떠나서 부담스러워서 나는 침대를 박차고 나올 것 같다. 너처럼 찬란하게 빛나게 생긴 남자의 옆에 어떻게 감히 내가 눕니. 후아- 숨쉬는 방법을 나는 잊을지도 모르겠다.
『빅토리아 시크릿 2010』패션쇼를 어제 케이블에서 봤다. 와- 진짜 입이 떡 벌어진다. 대체 저 여자들은 뭘 먹고 살까? 이슬? 풀? 저 여자들도 고기를 먹고 술을 마실까? 저 여자들도 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지만 미친듯이 빡시게 운동하는걸까? 가릴곳만 간신히 가린 속옷을 입고 길고 길고 긴 다리로 런웨이를 행진하는 그녀들을 보는데 내 가슴이 다 뛴다. 멋지다. 여자로 태어난 이상, 죽기전에 한번쯤 저런 몸매로 살아봐야 하지 않을까? 저런 몸매였다면, 내 연애 이력도 좀 달라져있지 않을까? 저런 몸매였다면, 내 인생에 짝사랑 따위는 없지 않을까?
그리고 크리스마스, 나는 나에게 줄 선물로 반지를 샀다. 나는 얇고 단순한 반지를 그러나 반짝거리는 반지를 내 손에 끼워주고 싶었다. 심플하고 우아한 반지를. 그러나 그런 반지를 손가락에 껴보니 어울리지 않았다. 나는 내 손가락이 얼마나 짧고 굵은지를 미쳐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씨양). 반지들을 이것저것 끼워보고 나서야, 아뿔싸, 내가 생각한 옷이 나에게 맞지 않는 것처럼, 내가 생각한 반지도 나에게 맞지 않는구나, 하는 씁쓸함을 느꼈다. 그래서 끼워볼 생각도 안했던 유치한 반지를, 여동생의 강권에 못이겨 끼워봤다가, 샀다. 여동생이 자기가 추천한 반지라는 말을 사람들에게 하고 다니라고 했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크리스마스가 지나갔다. 아무일도 없이. 그렇지만, 괜찮다,
고 생각하기로 했다. 왜냐하면 크리스마스는 내년에 또 올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