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를 공부하러 간다고 했을때 주변에서 했던 얘기는 한국 책을 들고가지 말라는거였다. 응? 한국책을 왜 안들고가, 들고가야지. 한국어로 책 읽고 싶어! 그러나 그들은 한결같이 영어만 쓰는 환경에 나를 놓아두어야 한다는 거였다. 그래야 영어 공부한 의미가 있다고, 그래야 영어 실력이 는다는 거였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만 음, 그래 그게 맞겠지만, 그래도 어떻게...
하아. 나는 한국책을 가져왔는데, 사실 몇 권 가져오지는 못했고, 나중에 집계약을 하면 그 때 책 사진도 찍어볼 생각이지만, 어쨌든 그래서 책을 몇 권 넣었고, 6개월 살아갈 옷도 넣고, 누룽지도 넣고, 신발도 넣고.. 캐리어 큰 거 두 개가 꽉 차고 무거웠다. 그걸로도 부족해서 여행용 천가방에도 가벼운 것들을 조금 넣었다. 공항에 도착하니 무게가 두 개 다 초과한다며 조금 빼기를 직원이 권하더라. 그런데 그걸 어떻게 뺀단 말인가. 그냥 추가요금 낼게요, 하니 한 개당 75,000원인데 너무 아깝잖아요, 25.5 까지는 그냥 해드릴테니까 2kg 씩만 빼세요, 하시더라. 저쪽가서 빼서 저울에 달아본 뒤에 그냥 저한테 바로 오세요, 라고 직원분이 말씀하셨다. 그나마 모닝캄이라 두 개를 실을 수 있기에 망정이지 하.. 아무튼 그렇게 무거운 캐리어를 들고 나는 지금 싱가폴에서 거주지를 찾아 방황중인 것이다.. 하아-
내일이 학교 가는 첫날이고, 집주인은 학생 비자가 완벽하게 나와야 계약해준다고 하고.. 어쩔 수 없이 방황자의 모드로 며칠 살아야 할 것 같은데, 내가 아무리 역마살 있고 외출을 좋아하고 여행을 좋아해도, 이 방황자 모드.. 안좋아. 잭 리처 생각을 했다. 잭 리처, 어떻게 일정한 거주지 없이 살아갈 수 있어요? 어떻게 그러죠, 어떻게?
아무튼 그래서 오늘이 사흘차인가. 사흘동안 한국어를 못하는 삶을 살고 있다. 여행에서 한국어 못하는거야 물론 당연하지만 나는 앞으로 이렇게 계속 지내야 한다. 식당 직원, 까페 직원하고 대화도 물론 영어로 해야겠지만, 하아, 오늘 앤드류랑도 영어로만 얘기해가지고.. 그리고 길을 걷다 들리는 말들도 영어(때로는 중국어)여가지고.. 내가 기가 빨린다. 한국어로 속시원히 수다 떨고 싶다. 아마도 그래서 나는 알라딘에 글을 자주 쓰게 되지 않을까 싶다. 돈 되는 데에다 써야 되는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앤드류로부터 식당을 찾았다는 연락을 받고 확인도 안한채 20분이면 갈것 같아 하고 숙소에 맥북을 두러 갔고, 그리고 지도를 검색하니 얼라리여~ 걸어서 25분 거리였다. 나는 그 지도를 캡쳐해서 그에게 보냈다. 미안해, 지금부터 25분이야, 라고. 그러자 그는 괜찮다고 하면서 지도를 보니 자기가 내 쪽으로 오겠다는거다. 그래, 그러면 중간에서 만나자, 해가지고 우리는 더운날 걸어서 중간에서 만났다. 친구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는 이 낯선 나라에서 만날 사람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지. 그래서 나는 내 감정을 잘 다스려야 했다. 그가 나의 현재까지 싱가폴 첫친구, 유일한 친구이기 때문에 약하게 되면 안되겠다고, 의존하게 되면 안된다고 몇 번이나 마음을 먹었다.
그가 봐두었다는 인도네시안 레스토랑을 가면서 그는 '그 식당에서 내가 살게' 라고 했는데 나는 '아니야 같이 내' 라고 했다. 그러자 그는 알았다고 했다. 흐음, 사겠다고 재차 말하진 않네? 사실은 살 생각이 없었던건가? 라고 속으로 생각하면서 레스토랑에 도착했다. 걷는 동안 매우 더워서 시원한 레스토랑이 너무 좋았다. 직원이 메뉴를 주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아무도 오지 않아 물어보니 우리가 차려진 요리를 직접 선택하는 식이었다. 메인으로 소나 닭 혹은 돼지 그리고 베지터블 두 개. 나는 인도네시안 식당이 처음이라서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다고 하니 앤드류는 내가 먼저 할테니까 보고 할래? 물었고 그래서 나는 좋다고 했다. 그렇게 나란히 주문을 마치고 식사를 앞에두고 마주 앉았다.

밥 위에 뿌려진 소스도 그렇고 고기도 그렇고 양념이 좀 매웠다. 나는 다 먹지 못했다. 그는 물을 주문했고 나는 하지 않았는데 이미 물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고, 낮술이나 한 잔 할까 했더니 여기는 맥주를 안파는 것이었습니다. 앤드류는 밥 다 먹고 맥주 마시러 가자고 했다. 음식은 맛있었지만 나는 간신히 밥만 다 먹었네. 그런데 가격이 매우 합리적이어서 이 레스토랑은 기억해뒀다 앞으로 또 가도 될 것 같다.
그리고 우리는 무작정 걸어보다가 안되겠다 싶어 구글맵에서 맥주를 검색해 찾아 들어갔다. 하하 놀랍게도 한국 맥주집이었다. 한국인 직원은 없었지만, 게다가 한국 맥주라는데 내가 아는 맥주도 하나도 없었어. 껄껄.

그는 코스터에 쓰진게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나는 you're druken it's so happy 라고 말해주었는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깜짝 놀라면서 그래? 나는 술 너무 많이 마시지 말라는 뜻일거라고 생각했어! 라고 하는게 아닌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니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무튼 그는 세 잔째를 주문하고 나는 한 잔을 천천히 마셨는데 내가 취하고 싶지 않아서 천천히 마시겠다고 했다. 나중에 그의 세번째 잔은 그가 나눠 마시자고 해서 나눠마시고 나왔는데, 음, 참 인상적이었다. 음,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일단 그는 오늘 나를 만나서 인사를 나누자마자, 에이전트 만난다는 건 어떻게 됐냐고 물었다. 나는 학생비자 정식으로 발급받아야 된다고 해서 계약이 미뤄졌어 라고 말했다. 그러자 하나 더 묻고 싶은게 있다고 하더니, 내가 한국에서 쓴 책은 어떤 종류냐고 물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네네, 제가 어제 영어 공부하는 이유가 영어로 책 쓰기 위해서라고 했다. 세계적 베스트셀러를 쓸거야, 한국에서 책 썼는데 안팔렸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나 이거 한국 오기 전에 간 안과 닥터에게도 말해가지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안과 닥터가 책 산다고 해서 이제 품절이에요, 하니까 "알라딘 중고서점에선 구할 수 있겠죠?" 하더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음. 앤드류와 내가 나눈 대화는 영어였고, 그에게 영어는 일상적인 언어이고 모국어이지만, 나에게는 아니었다. 그는 내가 하는 말을 거의 100프로 이해할 수 있었겠지만(어쩌면 아닐지도) 나는 그의 말을 100프로 이해했다고 확신하지 못한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냐면, 내가 그가 했던 일, 앞으로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해 기억을 전혀 하지 못한다는 거다. 미안해, 앤드류.. 그런데 그는 내게 어제 나눈 대화에서 또다른 질문을 해낸거다. 이건 사실 그가 유리한 지점이기는 했다. 그는 영어사용자이고 나는 아니니까. 오늘만해도 나는 그가 내게 한 말을 백프로 이해하지 못한 것 같다.
어쩌면 내가 색안경을 끼고, 편견을 가지고 그를 보는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참 나이스하다. 같이 걸을 때도 그렇고 대화를 나눌 때도 그렇고 내내 신경을 쓰는게 느껴진다.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내 옆으로 차가 지나가자 '너 나랑 자리 바꾸자' 하면서 얼른 그 차옆으로 내 대신 섰다. 나는 고맙다고 했다. 매너가 몸에 밴 사람이구나 했다. 그러니까 태도나 관심 같은 것이 친절하고 다정한 것이 참 나이스하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그런 지점은 좋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런거에 홀딱 반할 만큼 내가 금사빠인 사람도 아니다.
나는 그와 사랑에 빠지지 않았다.
다만 그가 친절하고 나이스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싱가폴에 와서 처음 사귄 친구이고, 어제 몇시간 같이 있었고 오늘도 몇시간 같이 걷고 먹고 마시고 했다. 나는 그와 사랑에 빠지지 않았고, 사실 앞으로도 그럴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친구로서 대화하는건 얼마든지 환영이지만, 글쎄다. 나는 각자의 숙소를 가지고 만나서 이야기하고 웃고 그러다 헤어지는 지금의 관계가 나에게 제일 잘 맞는 것 같다. 그리고 나는 그 역시 나와 마찬가지의 감정일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내가 잘못 생각한 것 같다. 그래서 내가 그에게 '아니'를 말해야 했고, '나는 이제 그만 가보는 게 좋을 것 같아' 라고 말해야했는데, 인상적인건 이 때부터였다. 그는 바로 '알았다' 라고 하는거다. 내가 너를 upset 하게 만든것 같다고 걱정했다. 아니야, 괜찮아. 걱정하지마, 라는 내게 배웅해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헤어지면서 오늘 정말 즐거웠다고 말했다. 나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그를 대하고 싶었다. 사실 문제는 없었으니까. 그리고 그에게 내일 저녁에 만나기로 한 것을 상기시키며 시간과 장소를 내가 보내줄게, 라고 말했다. 지하철 타고 갈거야? 물어서 아니, 걸어갈거야, 라고 하니 알겠다고 했다. 그리고 헤어졌는데, 헤어지는 길에 그로부터 톡이 왔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오늘 정말 즐거웠고 너를 uncomforble 하게 만들었다면 미안하다고 했다. 그리고는 you're very beautiful to me! 라고 했다.
나는 아무 걱정도 하지말라고 너 좋은 사람이라고 나도 즐거웠다고 보냈다. 그리고 바로 이때부터 속이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그가 나를 다른 식으로 생각해서가 아니라, 그나 내게 아름답다고 해서가 아니라, 그가 나의 어떤 말에도 '알겠어'를 해주었기 때문에. 나의 yes 에도 나의 i will 에도 알겠다고 하지만, 나의 no 에도 즉각적으로 알겠다고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래서 속이 시끄러워졌다. 은근한 압박이나 조름이나 삐짐없이 바로 알겠다고 하는 사람이라서 자꾸 생각난다. 이렇게 어떤 압박 없이 '아니'가 진행되는게, 너무나 당연한 것이지만 인상적이었다. 그래서 속이 시끄러워졌다. 많이, 아주 많이 속이 시끄러워졌단 말이다.
나는 그에게 반하지 않았고 그와 사랑에 빠지지 않았는데, 그런데 그의 이 오케이가 자꾸 생각난다.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그는 내게 몇차례나 임프레시브 하다고 했는데,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영어만 하루종일 하느라 기가 빨린 상황에서 그의 태도가 자꾸 생각난다. 내가 예스를 말하든 노를 말하든 어떤 pressure 없이 오케이를 말할 수 있다는 게 강하게 남는다.
하하.
아까 너무 웃긴거 있었는데,
길을 걸으면서 너무 더워가지고 ㅋㅋㅋ걸을 때도 그렇고 횡단보도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릴 때도 그렇고 '그늘로 가자'고 해야되는데 '그늘'이 도무지 생각이 안나는거다. 그래서 계속 댓 웨이 이런 식으로 그늘 가자고 했는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안되겠다 싶어서 나중에 횡단보도 기다리면서 그늘에 서서는 '이거 뭐라고 하지? 나 단어 생각이 안나. 낫써니한거' ㅋㅋㅋㅋㅋㅋㅋ그러자 그가
shade!
라고 말해주었다. 맞아 맞아 아이 노오 아이 노우 벗 아이 캔낫 리멤버 더 워드 ㅋㅋㅋㅋㅋㅋㅋ하면서 웃었다. 하 근데 나 오늘 영어로 수다 졸라 잘 떨었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게다가 그가 전여친과 헤어진 사연과 감정도 다 이해했다. 나 연수 끝!! 집에 갈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자, 오늘부터는 책을 읽어볼까, 하고 책 들고 호텔 로비로 왔는데 도무지 책이 읽힐 것 같지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