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득》, 《오만과 편견》, 《노생거 사원》, 《에마》.
나는 제인 오스틴의 책들 중 위의 네 권을 과거에 읽었었다. 딱히 제인 오스틴은 내 취향의 작가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네 권이나 읽었다니, 대단하다.. 하긴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알랭 드 보통의 책도 엄청 많이 읽었다. 아무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읽었던 제인 오스틴의 책들 중에서는 노생거 사원이 제일 재미있었다. 제인 오스틴의 등장인물의 입을 빌어 소설 예찬을 할 때 짜릿했던 기억이 남아있는 거다. 에마.. 는 너무 싫어했다. 에마의 오지랖과 자기 모순이 너무 싫었던 거다. 이 남자 저 여자랑 소개해줘야지, 해놓고 그 남자가 자기 좋아하니까 어떻게 감히!! 이러는데 너무 싫었음. 자기가 싫은 남자를 왜 다른 여자한테 소개해준담? 에마는 제인 오스틴의 소설 중 제일 싫은 소설이다. 설득은 아주 오래 전에 친구로부터 선물 받아 읽었었는데 그 당시 내 감상은 뭐, 오만과 편견의 또다른 이야기네.. 정도였다. 그러니 내가 다시 읽을 생각도 없던 책이었고 오래전에 팔아버린 책이었는데 ㅋㅋ 미래는 예측불허 그리하여 생은 의미를 갖는 것, 책과 내가 만나는 것도 다 운명. 나는 최근에 한 책을 읽게 되고 그 책을 읽은 나의 감상을 읽은 알라디너의 감상을 읽은 내가(뭔 소리여...) 설득을 다시 읽어보고 싶어진 것이다. 나는 행동파! 행동으로 말하는 사람! 바로 설득을 사서 읽기 시작했는데, 아니, 이거 왜케 재미있어. 처음부터 너무 재미있어서 중간에 놓을 수가 없는 나의 마음. 아니, 출근길에는 가부장제의 창조 읽어야 해서 자기 전에 읽는데 읽을 시간 별로 없고 그런데 너무 재미있고 고통... 그래서 어제는 똭! 좀 마음 잡고 읽었다. 짜짠.
저 유리그릇에 담긴게 이번에 알라딘에서 산 갈비맛 육포.
나는 맥주를 좋아하지 않아서 작은 캔 하나 먹는 것도 좀 힘들었다. 그런데 육포 먹으려면 맥주를 마셔야 되잖아? 하는수없이 맥주 마셨는데 역시 나는 맥주를 좋아할 수 없어.. 자, 다시 책 이야기로 돌아가자.
'앤'은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 언니와 함께 산다. 아버지는 준남작으로서 자신의 지위를 등에 없고 엄청 자만심에 뿜뿜대는 사람이고 하필이면 얼굴도 잘생겨서 세상 사는거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사람이다. 언니인 엘리자베스 역시 일찍 어머니가 돌아가셔 집의 안주인 노릇을 하는데, 아버지를 닮아 미모도 훌륭하고 자기의 체면이라는 것도 중요하게 생각해서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처럼 그리고 특히 자신의 아버지처럼 자기들보다 돈 없고 지위가 낮은 사람들을 무시한다.
여동생 메리는 일찍 결혼해서 아이들도 낳고 살고 있는데 메리는, 자주 아프다. 이게 진짜 아픈게 아니라 나는 아파.. 하고 아파서 누가 관심을 보여주면 또 금방 낫는다. 너무 아픈데 우리 집(남편, 시부모, 시누이들, 아이들, 집 도우미들)의 누구도 나에게 관심이 없어! 언니가 나를 돌봐줘! 해가지고 앤은 메리를 돌봐주러 메리의 집에 간다. 아마 당시의 결혼하지 않은 여자는 대부분 이렇게 살았을 것이다. 결혼을 하지 못하면 재산을 가질 수 없고 딸만 있는 집의 아버지 재산은 친척 남자에게로 넘어가버리고.. 정말 똥같은 상황에서의 집안의 둘째 딸이란...
그러나 앤은 누구보다 현명하고 지혜로운 사람이었고 사람을 보는 눈도 있는 사람이었다. 앤이야말로 촉을 가진 사람이어서, 남들이 다 좋다고 하는 사람을 보면서 '어딘가 마땅찮아..' 하는 느낌을 받고 그 사람은 영락없이 싸이코인 것으로 드러나...
아무튼 앤은 메리네 집에 가는데, 나는 또 메리 때문에 엄청 스트레스를 받는다. 사치와 낭비가 심하고 허영심이 가득찬 앤의 아버지와 언니를 보는 것도 스트레스였는데, 집 안에서 계속 아파아파 이러는 메리를 보는것도 너무 스트레스. 그런데 이 메리의 아픔은 사람들이 기분만 맞춰주면 괜찮아지는 것이다. 그러니 꾀병이라 보일 수도 있을 것이고, 저사람은 왜 저렇게 자꾸 아프다는거야, 할 수도 있을 것인데, 나도 그런 마음이 되어 스트레스 받다가 불현듯 프로이트 생각이 났다.
프로이트가 처음 치료했던 환자들은 신경 관련 질환을 앓고 있던 빈의 중상류 계층 여성들(남성들도 일부 포함되어 있었지만)이었다. 당시 유럽과 미국에는 신경성 질환이 널리 퍼져 있었는데, 신경성 질환은 진단이 어려웠을 뿐 아니라 여성이라는 성性 과 현대 도시 생활이 주는 스트레스와 긴밀하게 관련된 것으로 이해되었다.
당시 신경증 환자의 수가 눈에 띌 정도로 급격히 증가하는 상황에 주목한 영국의 한 주석가에 따르면, "신경증과 연관된 문제들은 처음에 여성들에게서 발견되었다. 1890년대에 사람들은 매일 신경증 환자와 신경 쇠약자, 히스테리 환자들을 목격했다. …… 모든 대도시에는 신경 전문의들이 넘쳐났고, 그들의 사무실은 환자들로 가득찼다."(Showalter 1985:121) 19세기 동안 신경증은 그 범주를 정확하게 규정하기 어려운 상황이었고, 그 때문에 육체적 원인이 분명하지 않은 병은 일단 신경성 질환으로 명명되는 경우가 잦았다. -《프로이트 콤플렉스》, 파멜라 투르슈웰, p.43
나는 메리가 앓던 병이 바로 이 신경성 질환이 아닌가 싶어졌던 거다. 신경성 질환. 베티 프리단 식으로 말하면 이름 붙일 수 없는 병, 바로 그 병이 아닌가!
1950년대와 1960년대에 문제를 느낀 여성들은 결혼 생활이나 자기 자신에게 잘못이 있다고 생각했다. 다른 여성들은 자기 생활에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부엌 바닥에 윤을 내면서 불가사의한 성취감을 느끼지 못한다면 도대체 자기는 어떻게 된 여성이란 말인가? 그런 여성은 자기 불만을 인정하는 행동을 너무 부끄러워했다. 그래서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같은 불만을 지니고 있는지 결코 알 수 없었다. 남편에게 말해보려고 애썼지만 남편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자신조차도 정말로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15년 넘게 미국 여성들은 섹스보다 이 문제를 이야기하는 게 훨씬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신과 의사들조차 이런 증상에 이름을 붙일 수 없었다. 많은 여성들이 그랬듯이 정신과 의사에게 도움을 구하러 간 어느 여성은 "무척 수치스러워요" 또는 "전 절망적일 정도로 신경질적이에요"라고 말했다. 교외의 어느 정신과 의사는 불안해하며 말했다. "요새 여자들이 뭐가 문제인지 통 모르겠어요. 우연찮게도 환자가 대부분 여성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은 알겠어요. 성적인 문제는 아니라는 것도 알겠는데……." 그러나 이런 문제를 가지고 있는 여성들은 대체로 정신과 의사에게 가보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계속 되뇌었다. "정말 문제될 게 없어. 아무 문제도 없단 말이야."
1959년 4월의 어느 날 아침, 나는 뉴욕에서 15마일 떨어진 교외의 새 주택가에서 주부 네 명과 커피를 마시다가 아이가 넷 있는 엄마가 절망적인 어조로 조용히 '그 문제'를 언급하는 것을 들었다. 나머지 부인들은 그가 남편이나 아이들 또는 가정에 대해 말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이내 알아차렸다. 그 자리에 있던 여성들은 자신들이 모두 똑같은 문제, 설명할 수도 없는 그 문제를 같이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갑작스레 깨달았다. 그들은 주저하면서도 그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나중에 아이들을 보육원에서 데려와서 낮잠을 재운 두 명은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순수한 안도감에 울음을 터뜨렸다. -《여성성의 신화》, 베티 프리단 지음, p.67-68
자, 메리를 보자.
한때는 우아했으나 사계절과 두 아이들의 등쌀에 점차 허름해ㅐ져 가는 소파 위에 누워 있던 그녀는 앤이 도착하자 이렇게 말했다.
"아이고, 언니, 드디어 왔네! 다시는 언니를 못 만나는 게 아닌가 생각하던 참인데. 너무 몸이 안 좋아서 말도 간신히 하는 거야. 아침 내내 인간이라고는 단 한 명도 못 봤다고!"
"몸이 그렇게 안 좋다니 안 됐구나." 앤이 대답했다. "목요일만 해도 아주 잘 지내고 있다고 소식을 보냈었잖니!"
"그래, 좋은 방향으로 생각하려고 했지. 난 항상 그러잖아. 하지만 그날도 실은 몸이 좋지 않았어. 그런데 오늘 아침 내내 얼마나 아팠는지, 이렇게 아픈 적도 없었던 것 같아. 아무 도움도 못 받고 이렇게 혼자 있으면 정말 안 되는 상태야. 내가 갑자기 끔찍한 발작이라도 일으켜서 벨도 못 울린다고 생각해 봐!"
(중략)
"오! 찰스(남편)는 사냥을 나갔어. 7시 이후론 얼굴도 못 봤어. 내가 얼마나 몸이 안 좋은지 얘기를 했는데도 꼭 사냥을 가야만 했던 거지. 오래 있진 않겠다고 했어. 하지만 벌써 1시가 다 되어 가는데 그사이에 한 번도 돌아오지 않네. 정말이지 오늘 아침 내내 사람 하나 구경 못했어."
"애들을 데리고 있지 않았어?"
"응, 좀 데리고 있었는데 어찌나 떠드는지 참을 수가 있어야지. 너무 말을 안 들어서 도움이 되기는커녕 해만 된다고. 찰스(아들1)는 내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고, 월터(아들2)도 점점 제 형을 닮아 가는 것 같아." -p.58~59
다른 많은 식구들과 함께 사는데도 메리의 기분을 헤아리거나 메리의 옆에 있어주려는 사람이 없고 게다가 메리는 사실 신분이 높은 사람이라 딱히 노동을 하지도 않는다. 당시엔 여자 혼자 외출을 하거나 걸을 때는 반드시 누군가 옆에 있어야 했다. 앤도 파티에 참석후 집에 혼자 걸어가겠다고 하자 부득부득 제부가 데려다주겠다고 하는거다. 메리의 행동은 얼만큼이나 제약이 있었던걸까. 메리가 할 수 있었던 건 무엇이고 할 수 없는 건 또 무엇이었을까. 제인 오스틴 조차도 1816년에 완성된 이《설득》을 쓸 당시 메리가 앓는 병에 대해 잘 알지 못했던 것 같다는 생각을 나는 한다. 이런 일들을 신분이 높고 결혼을 했으며 자녀가 있는 여성이 겪고 있다, 는 정도만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 그리고 메리가 겪었던 일은 1890년대에 프로이트에 의해 신경성 질환 으로 불리고 1959년에 베티 프리단에 의해 '그 문제'가 된게 아닐까.
위에서도 잠깐 노생거 사원에 대해 언급했지만, 제인 오스틴은 소설에 대해 그 누구보다 탁월한 견해를 갖고 있었고 또 주장할 줄도 알았다. 설득에서 메리의 사례만 보더라도 제인 오스틴은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관심을 갖고 들여다보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의 작품 해설에 보면 제인 오스틴이 받은 교육 이라고는 '일곱 살 때부터 열 살 때까지 약 삼 년여 동안 근처의 기숙 학교에 다닌 것이 공식적으로 받은 교육의 전부'(p.366) 였다고 하는데, 어린 시절 삼년의 교육이 전부인 사람이 이렇게 사람의 감정을 캐치하고 시대 상황을 관찰한 소설을 쓴다? 만약 이 사람이 삼 년이 아니라 삼십년 공부를 한 사람이었다면 어떤 글을 썼을까? 그게 너무 안타까운 거다. 공부를 많이 하는게 반드시 더 좋은 글을 쓰는 걸 보장하는 건 물론 아니지만, 이런 사람이, 이미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 만으로도 이만큼의 글을 쓸 수 있었던 사람이 더 많은 걸 누릴 수 있었다면 보고 듣고 배우고 느끼는 그 모든 것들의 폭이 더 커졋다면, 그랬다면 더 많은 글을 더 깊은 글을 쓸 수 있지 않았을까? 물론 제인 오스틴은 지금으로도 너무 유명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이야기되고 있고 또 영화화되고 연구되는 작가이지만, 이조차도 어떤 제약적인 면 때문에 덜한게 아닌가 싶은거다. 아아 제인 오스틴이여, 그 시대의 남자들처럼 같은 교육을 받았더라면, 당신은 우리에게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그게 너무 안타깝고 아쉽더라. 이렇게나 명민한 사람이 이렇게나 사람에 대한 감도 좋은 사람이 더 공부했다면, 더 교육을 받았다면!!!!!
안타깝다.
8년전, 앤에게는 사랑하는 남자가 있었다. 그 남자도 앤을 사랑했고 앤도 그 남자를 사랑했지만 둘의 사랑은 앤의 가족들이 반대하는 바람에 이뤄지지 못했다. 앤의 지위는 높은 반면 남자인 엔트워스는 신분도 낮고 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직 어렸던 앤은 자신이 믿고 의지하는 엄마 친구의 조언을 받아들여 그에게 이별을 말하지만, 그 뒤로 그만큼 되는 남자를 만난 적이 없다. 8년여의 시간 동안 더 돈이 많고 신분이 높은 남자로부터 구애를 받은 적도 있지만 앤은 다 물리쳤다. 역시 그 남자만한 남자는 없군. 그리고 8년의 시간이 흘러 엔트워스가 돌아왔다. 그는 해군으로서 몇 개의 업적을 쌓고 훌륭해져가지고 돈도 많이 벌어서 돌아온 것. 엔트워스는 과거의 앤으로부터 상처 받았고 이제 적당한 여자를 만나 결혼을 해야겠다 생각하며 싱글인 여자들을 만나고 있었다. 그러나 엔트워스 역시 어떤 여자를 만나도 아, 앤 만한 여자가 없어, 앤이 최고야.. 를 생각할 수밖에 없게 되고, 질투와 염려와 걱정과 불안 등등을 느끼다가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서로 여전히 사랑한다는 사실을, 잊은 적이 없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으로는 이 자리를 채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거다. 그 사이에 엔트워스가 많은 돈을 벌고 사회적으로 성공을 했기 때문에 이제 앤의 주변 사람들도 그 결혼을 반대하지 않을 수 있지만, 그 사이에 앤 역시 성장하고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이 생겼으므로 이제는 설사 주변에서 같은 이유로 반대한다고 해도 거기에 '아니' 를 외치고 자신의 사랑을 선택할만한 사람이 되었다. 앤과 엔트워스에게 그 8년반의 이별의 시간은 어쩌면 서로에 대한 확신을 갖기 위해 필요했던 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세상 일은 대체적으로 왜 그렇게 일어나는지 알 수 없게 될 때가 많은데, 왜 어떤 사람들은 만나서 일 년만에 결혼할만큼 서로에게 확신을 갖게 되고(물론 그것이 오래 결혼생활로 이어지는가는 별개의 문제이지만) 왜 어떤 사람에게는 8년반의 떨어지는 시간이 필요한건지 모르겠다. 그런데, 세상은 그렇게 돌아간다. 어떤 사람들은 만나서 반짝이는 시간을 경험하게 하고 인생의 최고치를 경험하게 한 뒤에 떨어뜨려서 아아 그 때가 제일 좋았던 거였어, 그 사람이 최상이었어, 를 굳이 오래 깨닫게 하고 다시 만나게 하다니. 세상 일은 정말이지 알 수가 없지만, 분명 그렇게 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시간이 그들에게 필요했을 것이다.
앤은 엔트워스에 대한 마음이 변하지 않았고 그것은 이런 문장으로 표현된다.
과거를 잊는 일, 그것은 얼마나 자연스럽고 또 확실한 일인가! 팔 년이라는 세월은 그녀의 삶에서 거의 3분의 1에 해당했다.
딱한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했음에도 그녀는 한 가지 감정을 오래 간직하는 사람에게는 팔 년이 단 한순간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p.92
아니, 제인 오스틴 인생 몇회차... 인생 삼 분의 일을 한가지 감정을 간직하고 살았다니. 크- 그런 한편, 팔 년이 인생 삼분의 일이라니 좋겠다 나는 몇분의 일이냐..... 생각하다가 눈물이 그렁그렁 ㅠㅠ
자, 앤이 말하는 여자의 특권, 사랑에 대해서 들어보자. 이 부분도 나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전 남자도 결혼 생활 중에 모든 위대하고 좋은 일을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남자도 목적만 있다면 모든 중요한 노력을 기울이고 모든 가정적 관용을 베풀 능력이 있다고요. 다시 말해서 남자가 사랑하는 여인이 살아 있고, 또 그 남자를 위해 살고 있다면 말이지요. 제가 여자에 대해서 주장하는 특권은 (그건 부러워할 만한 게 못 되는, 탐내실 필요가 전혀 없는 특권이지요.) 상대나 희망이 사라진 뒤에도 오래오래 사랑하는 특권입니다." -p.340
내가 위 부분에서 감탄한 이유는 여성의 특성을 정말 잘 지적했기 때문이었다. 상대나 희망이 사라진 뒤에도 오래오래 사랑하는 걸 앤이 '특권' 이라고 말한 건 나로서는 유감스러운 부분이지만, 시대적 배경을 생각해보면 충분히 이해가 되는 단어의 선택이다. 다만, 그건 특권 이 아니라 특징 혹은 성질 이라고 바꿔 말해야 하지 않을까. 왜냐하면 정희진은 자신의 책에서 이런 예를 들었기 때문이다.
《남자-지구에서 가장 특이한 종족》의 저자 디트리히 슈바니츠는 많은 여성들이 남자와 연애할 때 느끼는 사랑의 감정을 상대방으로부터 유래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고 말한다. 여성들은 자신 속에 내재된 풍부한 감성과 사랑의 능력을, 상대 남자의 매력으로 오인한다는 것이다. - 《페미니즘의 도전 (구판)》, 정희진, p.104
앤의 입을 빌어 제인 오스틴이 말한 여성의 '특권'은 그보다는 여성의 능력일 것이었다. 그 능력이 그 사랑을 지속하게 만들었나니...
앤은 현명하고 지혜로운 여성이었다. 다른 사람들보다 특히 더 그러했다. 그녀는 자신의 실수를 인정할 줄 알았고 이제는 어떤 것들을 자신이 거절해야 하는지도 알았다. 그런 반면 엔트워스는 좀 멍청했다. 멍청해서, 멍청한 결정을 내릴 뻔했다. 레이디 러셀은 어떻게 과거에 앤을 선택했던 남자가 지금은 저 여자를 선택하지? 하고 경멸하는데, 나는 그 때도 좀 통쾌했다. 멍충이 바보 똥구멍 같으니라고.
설득을 읽기 시작할 때, 8얼 9일생 앤이 행복하다면, 나 역시도 행복해질 것이라고 최면을 걸었다. 그리고,
앤은 행복해졌다.
나도 행복해질 것이다.
후훗.
"모든 직업이 다 필요하고 나름대로 존경받을 가치가 있지만, 건강과 훌륭한 외모라는 축복을 최대한 누릴 수 있는 분들은 오로지 직업을 갖지 않아도 되는 분들뿐이라는 걸. 전원에 살면서 시간을 마음대로 쓰고 취미 생활을 즐기며 당신 소유의 영지에 사시는 분들, 수입을 늘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 않아도 되는 그런 정상적인 삶을 사는 분들한테만 그런 축복이 주어지는 거죠. 그렇지 않은 분들치고 한창때를 넘긴 뒤까지 매력적인 풍모를 잃지 않은 분들은 뵌 적이 없어요." - P34
그는 그녀를 열렬히 사랑했고, 그 사건 이후 다시는 그녀에 견줄 만한 여자를 만나지 못했다. - P94
레이디 러셀은 침착하게 듣기만 하다가 그들이 행복하기를 바란다고 말했지만, 속으로는 스물세 살 때 앤 엘리엇의 가치를 조금이라도 알아본 듯 행동했던 사람이 팔 년 뒤에 루이자 머스그로브 따위에게 마음을 빼앗겼다는 사실에 화가 났으며, 동시에 만족감도 느꼈다. 하지만 만족감돠 동시에 진한 경멸감이 차오르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 P182
그녀는 그의 청혼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건 그녀가 아직도 한 사람을 제외한 다른 남자를 좋아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또한 그와 맺어질 가능성을 진지하게 고려해 볼 때 그를 완전히 신뢰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 P234
이 모든 성찰의 결론은 엔트워스 대령의 훌륭함을 알아본 여성이 다른 남자를 더 좋아하게 되었다 해도 더 이상 놀랄 일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엔트워스 대령이 이 일로 친구를 잃은 것만 아니라면 안타까워할 만한 무언가를 잃은 것도 아니라는 것이었다. 아니, 웬트워스 대령이 매인 데 없이 자유로워졌다는 생각에, 침착하려고 애를 씀에도 앤의 가슴이 뛰고 얼굴이 붉어지는 것은 안타까움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는 스스로 들여다보기 부끄러운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기쁨, 부질없는 기쁨이었다! - P244
루이자 머스그로브와 결합해 보려던 (홧김의) 시도에 대해서는 마음속으로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고, 자기는 루이자를 좋아하지도 않았고, 좋아할 수도 없었다고 힘주어 말했다. 물론 그날까지는, 그날 이후, 시간을 두고 숙고할 때까지는 루이자에 비해서 그녀가 얼마나 완벽하게 뛰어난 사람인지, 그리고 그녀의 마음이 얼마나 완벽하게 그의 마음을 독점하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날 그는 원칙의 확고함과 방자한 고집이, 부주의한 만용과 침착한 사람의 단호함이 다르다는 것을 배웠다. 그날 목격한 것들로 인해 그는 자기가 잃었던 여인이 얼마나 뛰어난 사람인가를 새삼 깨달았고, 자기 앞에 다시 나타난 그 여자를 새로 얻고자 노력할 수 없도록 만든 자신의 자존심과 어리석음과 멍청한 양심을 한탄하기 시작했다. - P349
남자 형제들이 옥스퍼드와 왕립 해군사관학교에서 목사나 장교가 되는 정식 직업 교육을 받은 것과 달리 제인은 언니 커샌드라와 함께 일곱 살 때부터 열 살 때까지 약 삼 년여 동안 근처의 기숙 학교에 다닌 것이 공식적으로 받은 교육의 전부였다. 거기서 귀족가의 여자에게 요구되는 음악, 미술, 자수, 외국어 등을 배웠는데, 티푸스의 유행으로 그마저 중단하고 학교를 옮기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 P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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