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출근길에 읽는 책은 '엔도 슈사쿠'의 <침묵> 이다. 일본이 천주교를 박해했던 시기에 고문을 당해 배교했다는 페레이라 신부에 대한 소문은 사실인지, 그렇다면 신부가 하나도 남지 않은 일본의 천주교도들은 어떻게 지내는지 알아보고자 페레이라 신부의 제자인 로드리고 신부가 오랜 시간 항해를 거쳐 일본으로 간다. 혹여 정부에 들켜 고문 당하지 않을까 두려운 마음에 천주교 신도들은 자신들끼리 조용히 신앙 활동을 이어가며 언젠가는 우리를 이끌어줄 신부가 나타나지 않을까 기다리고 있던 터, 그 때 로드리고 신부를 맞이하고 다들 환영하고 감사한다. 우리는 신부님이 필요했어요. 그러나 일본의 감시는 철저했고 로드리고 신부도 결국 악명 높은 순사에게 끌려가 고문을 당할 위기에 처한다.
이 책을 읽기 전부터 이 책이 주는 물음은 '우리가 고통을 당할 때 신은 어디에 있었는가' 라는걸 알고 있었는데, 그 질문에 대한 것은 신을 믿는 이나 안믿는 이나 간혹 묻게 되는 것일테다. 단지 천주교를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감옥에 갇히고 고문을 당하고 심지어 사망까지 하게 되는데, 그들이 고통으로 내몰리고 죽어가는 상황에 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을 구원하지 않는가, 이대로 죽어가면 정말로 더 행복해지는 것인가, 죽고 나면 천국은 있는가. 로드리고 신부 조차도 다른 이들이 고문과 고통속에 죽어가는 걸 보면서 자기가 믿는 신을 의심하게 된다. 신은 지금 어디에 있는걸까.
이 책에 대한 정보를 좀 검색하다 보니 '그러나 신은 우리 주위에 항상 계셨다' 는 얘기로 끝날 것 같긴한데,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신념이란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필립 로스'의 <네메시스>를 읽을 때에도 신념에 대해 한참을 생각했더랬다. 나의 신념을 지켜나가는 것, 그것이 옳은 방향을 향하고 있다고 내가 확신해도 그것은 언제나 선한 결과를 가져오는가? 왜 옳다는 걸 믿고 행했는데 결과는 악인 것인가, 에 대해서. 그렇다면 신념을 계속 굳건하게 지키고 가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침묵> 을 읽으면서도 자꾸 생각하게 된다.
나는 그 사람이 믿는 것, 거기에 힘이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내가 믿는 게 하나님이라면 하나님은 나를 살피실 것이고 그 믿음은 어떤 형태로든 내 눈에 보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 힘은 내 믿음이고 내 믿음은 곧 내 힘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믿는 게 자연의 힘이라면, 그 자연으로부터 힘을 받을 것이다. 내가 믿는 게 무속인이라면, 그 무속인은 나에게 힘을 가질 것이고, 그리고 그 무속인의 말대로 삶의 기적들이 순간 보일 거라고 생각한다. 내가 믿는 건 내 운일 수도 있고 내가 믿는 건 그저 내 힘일 수도 있다. 내가 무얼 믿건, 내가 믿는 건 나의 힘이다.
이미 천주교라는 종교를 택해 그것을 믿고 그것으로 위안을 얻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힘을 가질 것이고, '너의 신을 부정해라' 라거나 '너의 종교를 버려라' 는 말에 '아니' 라고 말하게 될 것이다. 내가 무엇을 믿건 그것은 내가 결정한 일이고 나만의 이유가 있었을 터, 게다가 믿고 보니 그것이 나에게 힘을 주고 내 삶에 기둥이 되어준다면, 누군가 '그것을 버려' 라고 할 때 당연히 '싫다' 라고, '아니'라고 할 것이다. 그것을 버리라는 강요에는 맞설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버리라고 고문이 가해진다면? 내 믿음을 버리라는 고문은 고문하는 가해자가 당연히 나쁜 것이지만, 그 고문은 일단 나에게는 괴로움이고 고통이다. 책 속에서는 일단 네가 살고 싶으면 성화를 밟으라고 시작한다. 그러나 이 천주교도들은 그들의 그동안 신앙이 마음 속에 있는 터라 차마 성화를 밟고 지나갈 수가 없다. 그럴 경우 고문을 당하게 되는데, 나무 기둥에 묶어 바닷물에 며칠간 세워두기도 하고(죽음에 이르게 된다), 구멍 매달기 고문도 한단다. 구멍 매달기 고문이 뭔지 찾아봐도 잘 모르겠는데, 이것 때문에 페레이라 신부는 배교를 했다는 거다. 로드리고 신부는 아무리 감추려해도 천주교도인게 들통나 잡혀가는 사람들에게 '성화를 밟으라'고 얘기한다. 그래야 살테니까. 그러나 신도들은 그걸 잘 할 수가 없다. 성화를 밟는 것을. 그것은 어쩐지 안되는 것 같은 그 마음.
일본의 천주교 박해는 오랜 시간 이어졌다고 한다. 오랜 시간 신부였던 사람까지 배교시킬 만큼 고문은 처참하고 끔찍한 것이었고. 여기엔 성화도 밟고, 천주교도가 있다고 신고도 하는 비열한 캐릭터 '기치지로'가 나오는데, 그가 중간에 그런 말을 한다. 나는 강한 사람이 아니라 고문 같은 걸 견딜 수 없다, 나는 약하다, 만약 내가 박해 받지 않는 시대에 태어났다면 누구보다 열정적인 신자가 될 것이다, 라고. 나는 기치지로가 하는 말이 어떤 건지 너무나 잘 알 수 있었다. 고통을 주지 않는다면 나도 잘 믿을 수 있어, 하는 그 마음.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약하지 않을까. 내가 아는 인간은 부조리하고 불완전한데.
나는 이 고통스런 고문 앞에서도 결코 자신의 종교(혹은 신앙)를 버리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 마음이 복잡해졌다. 믿음은 무엇인가. 나는 책 속에 고문이 등장할 때면 고문 당하는 게 나라면? 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나라면? 만약 나라면 고문 당할 때 정치적 이념이 같아 함께 반정부 활동을 했던 동료들의 이름을 대지 않고 차라리 죽음을 맞닥뜨리게 될까? 만약 나라면 고문 당할 때 독립운동가의 이름을 대지 않을 수 있을까? 만약 나라면 고문 당하면서 내 믿음을 버리지 않겠노라 끝까지 버틸 수 있을까? 그게 가능할까? 처참한 고문 속에서도 끈질기게 자신의 믿음 혹은 신념 혹은 의리를 지켜낸 사람들은 정말이지 대단한 사람이지만, 내가 그런 대단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조지 오웰'의 <1984> 에는 자유연애 하던 남자가 잡혀 취조를 당하는 장면이 나온다. 자신의 연애와 연애 상대를 부정하던 남자는 그러나 그의 눈앞에 쥐를 놓자 하는 수 없이 다 불어버린다. 그에게 쥐는 정말 너무나 너무나 무섭고 끔찍한 것이었고, 그는 다른 건 몰라도 쥐는 견딜 수 없었던 거다. 외부에서 다른 사람이 본다면 '어떻게 쥐 때문에 다 불어버리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그에게 쥐는 세상 그 무엇보다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 남자에겐 쥐였지만 다른 사람에겐 그 쥐 대신 다른 것이 될 수도 있을테다. 자신이 가장 싫어하고 두려워하고 끔찍하게 생각하는 그 무엇. 그런 상황에서도 꿋꿋하게 자신의 신념을 지켜나갈 수 있을까? 그 누구보다, 내가?
나는 '내 목에 칼이 들어와도 그건 하지 않아' 라고 하는 말을 신뢰하지 않는 편이다. 내 경우엔 그걸 바꿔 말하겠다. 나는 그걸 하지 않겠지만 그러나 '목에 칼이 들어오면' 달라진다고. 나는 내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서까지 내 신념을 지켜갈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다. 지금으로서는 나에게 나의 삶이, 앞으로의 남은 삶이 가장 소중한 것이기에, 내가 그 삶을 잃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그걸 잃어가며 지켜야 하는 신념이란 무엇인가 싶어지는 거다. 그 어떤 이념이나 믿음이 내 목숨보다 소중할까? 물론 어떤 이들에게는 그렇다는 것을 안다. 신념을 부정하는 것은 그간 자신의 삶을 부정하는 것이라며 굳세게 맞설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안다. 그런데, 나는 내가 그럴 것 같지가 않다. 내가 지금 다른 사람들로부터 약속을 지킨다, 행동으로 보여준다, 하는 말을 들을 수 있는 것은 그것에 어떤 커다란 위협이 가해지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절박한 상황에서라면 나는 내가 어떻게 될 지 알 수 없다. '나는 절대로 동료의 이름을 불지 않아' 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그렇다 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가 없다. 지독한 고통이 내 눈 앞에 놓인다면, 글쎄...내가 그렇게까지 강한 사람일까?
자신이 약하다고, 그렇게 끝까지 반항할 수 없노라고, 다소 비열하고 비굴해 보이는 기치지로 쪽이 오히려 내가 닮은 인간 아닐까?
이제 절반 조금 넘겨 읽고 있는데 이 책 너무 좋다. 참 좋다. 일본의 천주교 박해에 대해 알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어서도 좋지만, 어떤 사람들은 고통 앞에 굴복하지 않는다는 것, 물론 어떤 사람들은 고통 앞에 자신을 부정하기도 한다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은 역시나 소설이 줄 수 있는 앎이고 깨달음이다. 인간이란 무릇 그런 것이다. 고통 앞에 굴복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 인간이 다른 사람과 섞여 살면서 마땅히 늘 좋은 사람이라는 법도 없는 것, 그것이 세상 아닐까. 로드리고 신부가 고통 당하는 신도들을 보면서 그리고 자신에게 닥칠 고통을 상상하면서 신을 부정하고 싶어하는 것, 그러다 다시 신에게 매달리고 안도하는 것,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흐름일 것이다.
나는 엄마 뱃속에 있을 때부터 교회를 다녔고 세례를 받았지만, 게다가 아주 충실하게 교회를 다니며 피아노 반주도 하고 주보도 나눠주고 전도도 했지만, 중학교 2학년 때부터 갑자기 교회를 끊었다. 도나 해러웨이가 <해러웨이 선언문>에서 인터뷰를 하며 '신(교회였나, 기억이 정확하지 않다)을 믿었던 사람의 증오는 믿지 않았던 사람의 증오보다 훨씬 크다' 라는 뉘앙스의 말을 했었는데, 나는 그것이 뭔지 너무나 잘 안다. 그렇게나 열심히 다녔기 때문에 나의 교회에 대한 증오와 미움은 더 큰 것 같다. 그러나 내가 교회를 미워한다고 해서 종교와 신앙까지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걸 믿고 싶다, 라는 것과는 다르다. 여성학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언어에 대해 공부하고 싶어졌고 최종적으로는 우리가 결국 공부해야 할 궁극적인 학문은 철학이 아닌가, 생각했지만, 그러나 그 사이에 신학 혹은 종교학이 있지 않나 싶어졌던 거다. 지금의 세상을 살면서 불평등과 부조리를 인지하고 알아나가면서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을 고민하면서 신학은 자연스레 함께 공부해야 할 것이 되어가는 거다. 종교학이나 신학을 전공으로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을 때는 그런 사람들은 다들 종교인을 꿈꾸는 건줄만 알았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 자체가 학문이며 어떤 이들은 그걸 공부하고 파헤쳐보고 싶어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푹 빠져 공부하게 되는 건 아니라도 여성학으로 시작해 철학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종교에 대한 것도 알고 싶다고,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종교인도 비종교인도 이 책 읽어보면 너무 좋을 것 같다. 소설, 이야기가 가진 힘도 충분하지만 아마 읽는 중간중간 각자의 자리에서 생각해볼 것들이 많지 않을까. 나는 끊임없이 그들에게 그리고 내게 물었다. 그렇게까지 고통스러우면서도 믿음을 버리지 않아야 해? 그건 나에게 어떤 가치가 있어? 이 책 한 권을 다 읽을 때면 거기에 대한 답을 할 수 있을까? 그러면 좋겠지만 설사 그러지 못한다고 해도 충분히 좋은 물음이었다고 생각한다. 여러분, 이 책 읽자요!!
어제는 출근부터 퇴근까지 정말 열심히 일했고 퇴근 무렵에는 너무 지쳤더랬다. 와인 한 잔 생각이 간절했는데, 마침 거래 증권사에서 방문해 내게 와인을 주고 갔다. 와인 냉장고에 와인이 가득 차있지만, 선물 받은 와인이 내가 산 와인보다 좀 더 좋겠지. 나는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가 와인을 마셨고, <뜻밖의 여정> 을 좀 보았다.
윤여정은 지금 다른 젊은 여성들에게 아주 좋은 롤모델이 되고 있다. 젊은 시절 엄청난 고생이 있었으리라는 것은 우리가 그의 삶을 잘 알지 못해도 충분히 짐작 가능한 터, 그런 시간을 겪고 지금 이렇게 후배들의 존경을 받는 위치에 왔을 것이다. 어떤 여자든 일을 하면서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가 되기까지는 결코 쉽지 않은 시간이 흘렀을테니까.
그 시간은 저렇게 커다란 미국의 집을 렌트할 수 있게 했겠지. 윤여정을 좋아하고 아끼고 존경하는 지인들이 윤여정을 만나기 위해 찾아와서 함께 이야기하고 맛있는 걸 나눠 먹는 걸 보는 게 너무 좋았다. 나도 꼭 저렇게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아끼고 좋아하는 친구들이 찾아와 함께 먹고 마시고 이야기 나누는 일을, 나도 꼭 하고 싶다고. 윤여정 처럼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진 않겠지만 ㅋㅋㅋㅋㅋㅋㅋㅋㅋ(윤여정 쌤은 넘나 넘사벽..) 그래도 몇 명은 되지 않을까. 그렇게 시간을 내어 다정한 이들을 만나면서 지나온 시간을 얘기하고 현재를 얘기하고 또 미래를 얘기하며 살아가고 싶다.
그리고 자기 전에는 노래를 들었다. 아이유의 <밤편지> 였는데, 어제 들었기 때문인지 오늘 출근길에도 생각나 계속 들었다.
오늘은 걸으면서 들으니 자연스레 가사에 더 집중하게 됐다.
이 밤 그날의 반딧불을
당신의 창 가까이 보낼게요
음 사랑한다는 말이에요
나 우리의 첫 입맞춤을 떠올려
그럼 언제든 눈을 감고
음 가장 먼 곳으로 가요
난 파도가 머물던
모래 위에 적힌 글씨처럼
그대가 멀리
사라져 버릴 것 같아
늘 그리워 그리워
여기 내 마음속에
모든 말을
다 꺼내어 줄 순 없지만
사랑한다는 말이에요
어떻게 나에게
그대란 행운이 온 걸까
지금 우리 함께 있다면
아 얼마나 좋을까요
크- 우리의 첫 입맞춤을 떠올리면 가장 먼곳으로 간다는 가사를 듣는데, 그렇지, 뭔지 알지, 그렇지, 알아 알아, 하다가, 음.. 그렇지만 나는 가장 먼 곳으로 가진 않아, 강남역... 세상 가깝다. 지금은 서초구 그 때는 강남구... 가까워. 그리 멀지 않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하다가 '어떻게 나에게 그대란 행운이 온 걸까' 에 또 꽂힌다. 나는 이 생각을 정말 정말 많이 해서. 처음 만난 순간부터 함께 했던 시간들 중에도 하고 한참 후에도 계속 그렇게 돌이킨다. 어떻게 너같은 사람이 나한테 왔을까, 하고. 지금 우리 함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가사에서는 최근에 SNS 에 올려진 좋은 풍경들을 함께 떠올린다. 저렇게 좋은 곳에 나는 너랑 같이 갈 순 없는 거지, 내 삶에 그건 없는 걸까. 크-
와인 마셔서 겁나 피곤해가지고 아아 역시 평일에 술 먹지 말자고 결심하기가 하루 이틀 사흘~ 여름 가고 가을 가고 조개 줍던 해녀의 무리 사라진 겨울 이 바다에... 가 아니고, 여튼 그랬는데, 또 밝은 해가 있고 너와의 첫 입맞춤을 떠올렸다가 가장 먼 곳이 아니라 엄청 가까운 곳에 가고, 허밍으로 아이유를 따라 부르고.. 그러다보니까 또 다 괜찮아지는 것 같다.
여동생은 언제나처럼 오늘 나의 컨디션이 어떠냐 물었고, 나는 괜찮다고 했다.
죄란, 인간이 또 한 인간의 인생을 통과하면서 자신이 거기에 남긴 흔적을 망각하는 데 있었다. - P136
"선교사들이 그렇게까지 괴로움을 끼쳤습니까?" "받고 싶지도 않은 물건을 억지로 밀어 넣는 것을 고마운 폐라고 하오. 그 뜻은 고맙지만 그것 때문에 오히려 곤란해지는 것을 말하오. 가톨릭의 가르침은, 이 강제로 밀어 넣은 고마운 폐와 매우 흡사하단 말이오. 우리에게는 우리대로의 종교가 있소. 새삼스럽게 이국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생각은 없소. 나도 신학교에서 신부들의 학문을 배웠지만 결국 우리에게는 전혀 필요하지 않은 것이었소." - P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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