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창원에 갔을 때 나를 포함해 친구들까지 네 명이서 중식당에 갔다. 우리는 런치코스 요리를 주문했는데 별도의 요리를 하나 더 주문하기로 했다. 함께한 친구들중에 비육식인들이 있었는데 우리가 주문한 코스요리에는 탕수육이 들어있기 때문이었다. 우리 모두 유산슬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알면서도 그 코스를 주문했고, 그러나 탕수육은 비육식인들이 먹지 못할테니 가지 요리를 하나 더 주문하자 하였던 것이다.
유산슬은 오랜만이었고 나는 각자의 접시를 가져와 차례차례 한명씩 덜어주었다. 그런데 먹으면서 깜짝 놀랐다. 그 안에 채 썬 고기가 들어있었던 거다. 유산슬이.. 고기 들어있는거야? 나는 물었고 다른 친구들 역시 고기 들었는줄은 몰랐는데, 하고 당황해했다. 지금 검색해보니 육류든 해물이든 가늘게 채썬 요리를 말하는 것 같았다. 그동안에 내가 먹어왔던 유산슬에도 다 고기가 들어 있었는데 내가 지금에야 인지한걸까?
간식으로는 내가 준비해간 대전 성심당 부추빵을 먹었다. 부추빵을 처음 먹어보는 게 아니었는데도 먹다가 그 안에 부추가 아닌 다른게 들어 있어서 놀랐다. 이건 뭐지? 하고 꺼내보니 소세지였다. 부추빵에 원래 소세지 들어 있었어? 부추빵이 지금에야 새롭게 만들어진게 아닐텐데 나는 이제야 부추빵에 소세지가 들어간 걸 눈치챘다.
유산슬에서도 부추빵에서도 나는 그럴거라 생각하지 못했다가 어김없이 고기를 만났다. 나야 육식인이니 예상치 못한 곳에서 고기가 나왔다한들 그 이유로 안먹지는 않지만, 그런데 비육식인들은 이럴 경우 어쩌란 말인가. 비육식인으로 살아가기 참 힘들겠구나, 새삼 생각했다. 중식에도 빵에도 고기는 어디에나 있으니.
나는 채식주의자가 아니고 앞으로도 채식주의자가 될 거라고 생각하진 않으며 설사 그렇다해도 내가 채식주의자라고 선언하진 못할것 같다. 일전에도 페미니스트에 대해 같은 얘길 한 적이 있는데, 선언하는 순간 다른 사람들은 그 선언자에게 완벽을 기대하며 검열하기 시작한다. 페미니스트라며 왜그래, 무슨 페미니스트가 그래, 니가 무슨 페미니스트야? 채식주의자도 마찬가지. 나와 같은 생각을 이 책의 공저자중 한명인 '박규리'도 했다.
그래, 이모저모 채식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드는데, 갑자기 고기를 다 끊고 야채만 먹으라니 생각만으로도 지루하고 섭섭하다. 스스로 ‘채식주의자‘라는 간판을 내건 순간 더 이상 육류나 유제품 메뉴는 쳐다볼 수도 없다는 게 어처구니없게도 나의 자유의지를 스스로 침해하는 듯 분하다.
그럼 어쩐담? 계산해보니 한 명이 마음먹고 1년 내내 완전 비건일 때와, 7명의 육식주의자가 일주일에 한 번씩 고기를 안먹을 때 환경 영향은 대략적으로 비슷하다는 셈이 나온다.
비건 한 명 × 365일 = 365
일주일에 한 번씩 채식 × 7명 × 52주 = 364
오호라! 혼자서 완전채식을 선언하고 고군분투하느니, 친구들 6명을 잘 모아서 일주일에 한 번 이상만 실천하면 한 명의 완전채식에 버금가는 긍정적인 변화를 만들 수 있다니 자신감이 생긴다. - P114 (박규리)
이라영 역시 완벽한 채식주의자 보다는 여러 사람들이 함께 좀 더 덜육식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어떤 사람들은 패션으로써 비건을 흉내낼 뿐 ‘진정한' 비건이 아닌 사람들을 비난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흉내내기도 반복하면 습관이 되고 인생은 결국 습관의 모음이다. 부분적으로 시도하는 사람들을 완벽하지 않다는 이유로 배척하기보다는 궁극에는 함께 갈 동지로 보는 게 낫다. 완벽한 소수가 투쟁하며 희생하는 사회보다는 불완전한 다수가 공감하며 연대하는 사회가 구조를 바꾸기 더 쉽다. 작심 3개월, 아니 작심 3일도 좋다. 실패하면 또 작심하면 된다. - P24 (이라영)
이라영을 비롯한 여러명의 공저자가 쓴 이 책을 읽노라니, 이 사람들에겐 윤리의식이 과도하단 생각이 들었다. 왜 약자와 동물을 생각하는가, 의 윤리의식이 아닌, 육식주의자들의 기분을 거스르지 말자는 것에 대한 윤리 의식. 그러니까 육식이 만연한 이 사회에서 내가 채식주의자라고 선언했다가 그들이 상대적으로 비도덕적으로 느낄 수도 있고 불편해할 수도 있으니 분위기를 어떻게 좋게 할것인가, 에 대해 다들 고민해보고 해결방법을 내고 있는 것이다. 이건 페미니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페미니즘 얘기하면서 페미니스트가 아닌 혹은 온건한 페미니스트인 사람들의 기분을 거스릴까봐 조심스레 말하고 상대의 기분을 살피는 걸 보면 나는 사람들이 지나치게 착하고자 하는 열망이 있는게 아닌가 싶어지는 거다. 내가 성평등을 주장하겠다는데, 그게 좀 과격한들, 그래서 듣는 상대로 하여금 기분 나쁜들 그게 뭐 그렇게 신경쓸 일인가? 내가 고기를 안먹겠다는데, 그래서 사람들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 '나는 고기 안먹어!'라고 말하는게, 그로 인해 다른 사람들이 '뭐야 지 혼자 선한척이야' 하며 기분 나빠하는게 뭐가 어떻단 말인가. 왜 내가 어떤 신념을 가지고 있고 그것이 혹여 다른 사람들에게 불편할까봐 조심조심 해야하고 고민해야 할까? 내가 가진 식습관을 육식에서 비육식으로 가져가는 데에는 에너지가 들고 신경을 써야 한다. 수시로 내가 옳게 가고 있나도 생각해야 할것이고 가끔은 내가 이렇게 고생한다고 세상은 나아지는건가 고민하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그런 고민과 더불어 다른 사람들 기분 상하지 않게 해야지, 라는 고민까지 해야 한다니. 너무 힘들잖아요. 만약 내가 성평등을 과격하게 주장하는 게 기분나쁘다고 하는 사람이라면, 내가 고기를 먹는것에 자기가 더 불편해하는 사람이라면, 뭐 내치면서 가도 되지 않을까 하는게 내 생각이다. 사실 검열에 있어서도 그렇다. 너는 완벽한 페미니스트가 아니야, 너는 완벽한 채식주의자가 아니야, 채식주의자가 왜 만두를 먹어? 등등 검열하려는 사람들은 자기는 아무것도 안하면서 상대에게 완벽하지 못한 걸 지적하는 거 아닌가. 나는 그런 것들이 지겨워 굳이 선언하지 말고 행동을 하자, 고 생각하는 사람이지만 그렇게 나를 검열하고 지적하고 불편해하는 사람이라면 뭐 툭툭 버리고 가도 된다. 그러다보면 나랑 뜻이 맞는 사람들이 옆에 있을 것이고 또 그렇게 툭툭 중간에 내던져진 사람들은 아오 쟤 불편해 하고 다른 사람 만났다가 세상의 흐름에 발맞추어 그곳에서도 역시 나는 고기 안먹어! 라고 하는 사람을 만날 것이고, 이게 반복되면 '어쩌면 고기를 나도 좀 줄여야 되지 않을까?' 하게 될 수도 있다.
실은, 내가 그런 사람이었다.
나는 고양이를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고양이를 싫어한다고 말하기에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고양이 싫어 라고 단호하게 말하는 것을 자제하게 되었다. 심지어 가끔 길고양이 마주치면 가방에 있던 고양이 간식 꺼내어 주기도 한다. 오, 신이시여.
내가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어느날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와 샤라라랑~ 너는 이제 바뀔 것이야, 한 게 아니라, 내가 숱하게 만나온 주변인들 덕분이었다. 고양이를 사랑하는 친구들이 하나씩 둘씩 주변에 생기고 그들의 맹목적인 고양이 사랑과 또 길고양이에 대한 관심을 자꾸 목격하게 되니, 고양이 싫어!! 하던 내가 좀 누그러졌달까.
고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나는 고기를 너무나 너무나 사랑하고 매일 고기를 먹는 사람이었으며 밀가루는 끊어도 고기는 못 끊는다고 한결같이 말해온 사람이었다. 고기를 먹으면 성질 나빠진다는 오래된 말에 대고 나랑 친구들은 '우리는 고기를 안 먹으면 성질 버려' 라고 깔깔대고 말해오기도 했던 터다. 그런 나였기에 비육식을 선언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을 처음 맞닥뜨렸을 때 역시 기분 나쁘기도 했고 불편하기도 했다. 메뉴 선정에 제약이 생기는 것도 불편했고, 이 책에서도 언급되는데, '동물은 불쌍하고 식물은 안불쌍하냐?' 뭐 이런 얘기도 하고 그랬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예, 제가 그랬습니다.
그러나 주변에 한명씩 두명씩 비육식인들이 늘어가면서 어느 순간 함께 고민하게 되는 것이다. 만약 내 주위에 여전히 육식인들만 있었다면 나는 여전히 식물은 안불쌍하냐? 이런 한심한 소리 하고 다니는 사람이었을 수도 있다. 윽.. 부끄럽다. 역시 사람은 다른 사람들 만나고 살아야 한다.
이 책 저자들의 착함 혹은 지나친 윤리나 도덕에 대해 아까 언급했는데, 비육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다들 그걸 권하는 이유로 하나같이 동물권과 환경 얘기를 한다. 다음 세대를 위해 라고 말한다. 물론 그것이야말로 궁극적인 그들의 목적이었을 것이고 목표였을 것이며 설득하기에 좋겠다 말할 수도 있을테지만, 나는 거기에 그저 순수히 개인의 건강을 위해서 그것을 제1목적으로 잡아도 되지 않나 싶다. 내가 건강하기 위해 하는 행동이 동물과 지구를 위하기도 한다면 좋지 않은가. 다들 너무 착해버리는 것..
결론적으로 나는 육식을 조금 더 줄여보고자 한다.
면생리대를 쓰는 것이 일회용 생리대를 쓰는 것보다 환경에 더 낫다는 걸 알았고 그래서 실천해야지, 라고 하면서도 늘 뒤로 미루던 터에, 내 몸에 이상이 생기면서 비로소 나는 면생리대로 바꿨었다.
주변 사람들 덕에 고기를 덜 먹는 것이 동물들과 환경을 위해서 더 낫기 때문에 실천해야 한다고 늘 생각해왔지만, 내가 결심을 하는 건 사실 나 때문이다. 고기를 지나치게 많이 먹기 때문에 내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아서. 그래서 비로소 결심하게 된다. 결심은 늘 흔들리고 무너지지만 그럴 때면 이라영의 말처럼 다시 결심해보도록 하겠다. 혼자 먹는 끼니에서는 가급적 고기 들어가지 않은게 무얼까 고민하는 게 그래서 그걸 선택하는 게 현재로서 내가 선택한 방법이다. 게다가 이렇게 생각하는 나에게 이라영도 박규리도 힘을 주었다. 한 명의 완벽한 채식주의자보다는 고기를 덜 먹는 다수가 더 영향을 미친다는 그들의 말이 내게 결심을 더 굳히게 한다. 비육식인 친구가 어느날은 '내가 이런다고 뭐가 달라지는지 모르겠어' 라고 한 적이 있는데, 달라졌다. 만약 그 친구가 아니었다면 그리고 다른 친구들이 아니었다면, 나는 내 건강을 위해서 비육식이 낫지 않을까? 라는 생각까지 나아가지 못했을 수도 있으니까.
무조건 고기를 안먹는 것도 답이 아니고 고기 흉내낸 단백질이 오히려 건강을 해칠 수도 있으며 비건 개인의 건강을 우선시해야 한다고 적어준 '이의철' 의 글이 좋았고,
제일 좋은 글은 '조한진희'의 글이었다. 채식이 궁극적으로 옳은 답이라 해도 누구나 그걸 '선택'할 수는 없다, 각자의 위치성이 있다고 말해주는 글이었다. 그리고 조한진희는 이런 얘기도 한다.
처음 채식을 구체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한 것은 ‘여성이 몸으로 환원되는 현실처럼 ‘동물이 고기‘로 환원되는 현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성 불평등이 종 불평등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을 때 느꼈던 혼란과 자책감이 그 출발이었다. -P157 (조한진희)
크- 우리, 이거 '캐럴 J. 아담스'의 《육식의 성정치》에서 만났잖아.
도살을 통해 동물은 부재 지시 대상이 된다. 동물의 이름과 신체는 고기로 존재하는 동물에게는 부재하는 무엇이다. 동물의 생명은 고기에 앞서고, 따라서 고기라는 존재를 가능하게 한다. 살아 있는 동물은 고기가 될 수 없다. 따라서 도살을 통해 죽은 몸이 살아 있는 동물을 대체한다. 동물이 없다면 고기를 먹는 일도 없게 된다. 그러나 동물이 고기라는 음식으로 전환되기 때문에 동물은 고기를 먹는 행동에서 부재하는 무엇이다. -캐럴 J. 아담스, 《육식의 성정치》, P.104
동물의 죽은 몸이 고기에 관련된 우리의 언어에 부재하듯이, 남성의 문화적 폭력에 관한 묘사에서 여성은 부재하는 지시 대상이다. 특히 성폭행이라는 단어는 글자 그대로 여성이 겪은 일을 지시하지만, 또한 폭력적인 유린의 다른 사례들, 1970년대 초반의 생태학 저술에 자주 나온 지구를 대상으로 한 '성폭행'이라는 표현처럼 다른 대상에도 비유적으로 사용된다. 이렇게 여성의 경험은 다른 억압을 묘사하는 매개 수단으로 쓰인다. 여성, 곧 여성의 몸에 가장 빈번하게 가해지는 현실의 성폭행은, 이 성폭행이라는 단어가 다른 대상에 은유적으로 쓰일 때는 부재 지시 대상이 된다. 이런 용어는 '여성' 자신이 아니라 여성이 겪은'경험'만을 환기시킨다. - -캐럴 J. 아담스, 《육식의 성정치》,p.106
조한진희의 글은 글 자체를 그냥 다 베껴쓰고 싶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 또 받으며 살아간다.지금 당장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것 같아도 나의 말과 행동은 시간이 지난후에라도 누군가에게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것을 보게 만드는 일을 할 수가 있다. 내 주변 친구들 그 누구도 나에게 '고양이를 싫어하지마' 라고 말한 적도 없고 '고기를 먹지마' 라고 말한 적도 없다. 그들이 그저 옳다고 믿는 걸 행동함으로써 내게 보여주었고 나는 그들을 보았다.
나를 어떤 정의된 존재로 구분하게 될 때 우리는 모두 실수하고 자만하기 쉽다. 내 범주에 속한 것 외에는 받아들이지 않게 되며 그 범주 밖의 타자를 우리도 모르게 구분 짓게 된다. ‘비건‘
이라고 속단할 필요도, ‘비건‘이 되기 위해 많은 것을 한 번에 바꿀 필요도 없다. ‘비건‘이라서 우월할 이유도 없으며 ‘비건‘이 아닌 사람을 가르치려 해서도 안 된다. ‘비건‘은 인생의 수많은 선택과 취향, 경험 중 하나다. 나는 슬프고 강제하는 비거니즘보다 즐겁고 자유로운 비거니즘이 좋다. 사람들에게 비건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가 있다면 즐거운 것들을 말한다. 공장식 축산의 암울함보다 담백하게 먹고 간결하게 사는 삶의 즐거운 방향에 대해 말한다. 변화의 시작은 내면의 인식이기에 슬프고 어두운 공장식 축산의 현실에 대해 알아가는 것은 각자의 선택이다. 이런 정보들은 채식에 대해 조금만 관심을 쏟는다면 생각보다 빨리 접한다. 누군가를 바꾸고 설득하기 위한 말보다 때로는 나에게 집중하고 좋은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을 때, 그런 사소한 것들이 좋은 영향을 주게 된다. - P171-172 (강하라)
한 방에 동물성 식품을 아예 졸업할 수 있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하지만 저 모든 것을 거의 매일 하던 사람이 저걸 다 안 하거나 부분적으로라도 안 한다고 생각해보자. 그리고 그런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얘기가 달라진다. 오십보백보‘ 정도가 아니라 천 보, 만 보 이상의 차이가 난다면 그 집합적 효과는 괄목할 만할 것이다. 뭐라도 실천하는 것이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 낫다는 논리는, 내 현 상태를 지나치게 정당화하거나 나보다 더 잘하는 사람들을 부정하는 데 쓰이지 않는 이상 특별히 문제시될 것이 없다. 과도한 육식을 하는 사람보다 지구를 생각해 육식을 줄이는나를 독려하되, 식습관은 물론 다방면에 걸쳐 삶을 친환경적으로 사는 사람들을 우러러보며 머무름이 없이 계속해서 그 방향으로 스스로를 발전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이제는 음식 문제로 기분 나빠할 때가 아니다. 모두가 자기 몫을 함으로써 생태적인문명으로 함께 나아가야 할 때이다.(김산하) - P39
현재 한국의 비건 운동은 ‘탈육식‘에 맞춰져 있다. 어떤 방법으로든 사람들의 동물성 식품 섭취를 줄일 수 있다면, 환경을 위해서나 동물의 권리를 위해서나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이는 동물성 식품을 최대한 본뜬 순수 식물성 식품을 소개하는 방식의 활동으로 이어진다. 우유와 설탕이 주성분인 아이스크림을 대체할, 식물성 지방과 설탕이 주성분인 ‘비건 아이스크림‘을 소개하고, 튀긴 소고기 패티가 들어간 햄버거 대신 튀긴 식물성 고기(대체육)가 들어간 버거에 환호한다. 돈가스 대신 ‘비건 콩가스스를 권하고, 버터·계란·우유가 안 들어간 달고 기름진 비건 디저트와 베이커리 제품들이 정말 맛있다고 홍보한다. 고기나 동물성 식품 없이도 얼마든지 이전과 비슷하게 달고 기름진 맛의 ‘비건 음식‘을 즐길 수 있으니, 탈육식‘을 하자는 것이다. 심지어 이런 비건 음식들을 ‘건강한 음식‘이라고 홍보하기도 한다. (이의철) - P133
그러나 비건 활동가들이 이런 화려한 ‘비건 음식‘들로 배를 채우면, 얼마 가지 않아 다양한 만성질환으로 의료 기관을 찾게 될 가능성이 커진다. 환경과 동물, 지구의 아픔에 공감할 줄 아는 활동가들이 역설적이게도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자기 자신만 학대하는 격이 되는 것이다. 이런 운동은 지속되기 어렵다. 어떤 가치를 지향하는 사람들의 건강이 시들해지면, 그 가치도 시들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축산-낙농업자들과 그들의 후원을 받는 전문가들은 기가 막히게 이런 문제를 파고들어 언론 플레이를 한다. 따라서 비건 활동가들과 언론은 ‘탈육식‘의 필요성뿐 아니라 ‘건강한 탈육식‘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이의철) - P134
미국의 ‘비욘드 미트Beyond Meat‘, ‘임파서블 버거ImpossibleBurger 등이 엄청난 주목을 받고 있다. 언론에서는 이런 ‘대체육이 탈육식‘의 주된 무기가 될 것으로 예상한다. 국내에서도 ‘비욘드 미트‘가 수입되어 버거와 피자 등에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비욘드 미트‘는 ‘이름값을 하지 못한다. 고기를 뛰어넘는 것이 아니라 고기 흉내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임파서블 버거‘ 또한 마찬가지다. 적색육의 가장 큰 특징인 헴heme(육류를 붉은 색으로 보이게 만드는 철분 함유 성분)을 본뜬 식물성 헴을 자신의 장점으로 강조한다. 하지만 고기와 비슷한 맛과 모양을 흉내 내려면 육류와 비슷한 지방과 단백질, 나트륨 구성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 그 결과, 건강에 미치는 영향 또한 점점 닮아가게 된다. 참고로 헴 성분은 당뇨병, 심혈관질환, 대장암, 위암, 식도암, 유방암, 자궁내막암 등 다양한 질병의 발생 위험을 증가시킨다는 다수의 연구결과들이 있다. (이의철) - P135
나도 ‘비욘드 미트’ 출시 소식이 반가워서 주문해 맛을 봤다. 하지만 다시 주문하기가 부담스러웠다. ‘비욘드 미트‘를 먹고나면 속이 더부룩해지고 몸이 무거워지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과도한 포화지방과 단백질로 인해 소화가 안 되고, 피부를 비롯한 몸의 다양한 부위에 염증 초기 반응이 나타났으며, 다음날 화장실에서도 배변 변화가 느껴졌다. ‘비욘드 미트’만 그랬던건 아니다. 대체육과 채식 치즈, 계란 등 동물성 식품을 모방한 국내외 다양한 채식 제품들이 대부분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다. 과거에 한국인들이 어쩌다 한 번씩 고기를 먹었듯이, 이런 음식들은 아무리 순수 식물성 성분이라도 어쩌다 한 번씩 먹어야 탈이 안 난다. (이의철) - P135
대체육이 환경에 이로운 것만은 분명하다. ‘비욘드 미트‘ 버거 패티를 먹으면 같은 크기의 소고기 패티를 먹을 때보다 온실가스 배출 90%, 물 사용 99% 이상, 토지 사용 93%, 에너지 사용 46%를 줄일 수 있다. 이렇다 보니 소고기 패티 대신 ‘비욘드 미트‘ 버거를 더 많이 먹어야 할 것 같고, 주변에도 적극적으로 권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 수밖에 없다. 심지어 건강에도 좋을 거라 믿고 싶어지기까지 한다(물론 일부 긍정적 효과가 있다). 충분히 이해가 되는 상황이다. 정크푸드와 육식에 중독된 사회에서‘비욘드 미트‘나 각종 고기 흉내 음식들이 없다면 육류 소비를 줄이기 어려울 수 있다. 건강한 채식으로 가기 위한 훌륭한 징검다리 역할을 해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비건 활동가들이 건강하고 활기차야 비건 활동가들이 지향하는 가치들도 우리 사회에서 더욱 활기차게 확산될 수 있다. (이의철) - P138
혹시라도 ‘고기 흉내 음식을 먹다가 불편한 증상이 느껴진다면,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기보다는 좀 더 건강한 채식을 고민해야 한다. 동물과 환경을 위해 본인의 건강을 무시하는 실수를 저질러서는 안 된다. (이의철) - P138
나는 대학생이던 1990년대부터 페미니즘은 물론 채식에 대한 다양한 지식에 접근할 수 있었다. 그런 정보와 환경에 노출된다고 누구나 그것에 귀 기울이는 것은 아니지만, 1990년대는 물론 지금도 여전히 그런 정보와 환경을 경험할 기회나 여력이 별로 없는 이들도 있다. 그리고 나의 일상적인 관계 안에서 채식을 하는 것에 대해 눈치를 주거나 비난하는 이들은 거의 없다. 게다가 나는 경제적으로 빈곤층에 속하지만 빈곤을 크게 두려워하지않을 수 있는 일종의 사회자본을 가지고 있으며, 시간 빈곤자이지만 일주일에 하루 이틀은 작은 텃밭에서 김을 매며 생명의 순환을 경험할 수 있는 정서적 여유를 가지고 있다. 나의 ‘실천‘이 가능했던 환경과 위치성에 대해 놓쳐서는 안된다고 자주 되뇐다. 무심함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비인간 동물을 착취하는지 모르고 살았던 시절이 있었듯, 그 위치성의 차이를 간과할 때, 타인의 고통과 존재성을 지울 수 있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조한진희) - P157
이것을 놓치지 않는 게, 다른 존재들과의 연결을 구체적이고 두껍게 할 수 있는 기반이 된다. 나는 채식이 단순히 고기를 먹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님은 물론이고, 고기를 먹는 게 ‘악‘이고 먹지 않는 게 ‘선‘이라는 이분법을 뛰어넘는 일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우리는 계속 다른 존재의 죽음 위에서 유지되는 존재다. 나는 2004년 팔레스타인의 농장을 목격한 이후, 텃밭에서 진드기를 죽이거나 배추벌레를 잡으며 한번씩 ‘비스밀라‘를 읊조린다. 토마토 나무가 겨울이 와서 자연사하기 전, 그러니까 여름이 지나 더 이상 토마토 열매를 맺지 않게 되어 다른 작물을 심기 위해 뽑아버릴때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한다. 나는 종교가 없고, 처음에는 내마음 편하자고 따라해봤던 것인데, 현재는 내가 죽이는 존재‘들과 연결되는 나름의 방식이 되었다. 다른 존재와의 그물망 위에 내가 존재한다는 점을 망각하지 않고, 지구와의 관계에서 인류의 한 명으로서 책임감을 느끼는 행위이다. (조한진희) - P158
우리가 연결되어 오래된 미래를 복원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이며, 어떤 과정이어야 할까. 나는 처음으로 종차별에 연루되어 있음을 깨달았을 때의 혼란과 떨림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우리가 채식을 한다는 것은 사회의 여러 문제들에 보다 민감해지며, 더 많은 질문을 품게 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채식이 트렌드나 라이프스타일이 된 시대라고 하지만, 그것을 넘어야 자기 만족적 행위가 아니라 우리의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채식주의자들의 목소리가 개인의 식탁에 초점이 맞춰지는 방식으로 강화되어서는 안 된다. 채식은 나은 선택지를 가진 이들의 고귀한 윤리적 액세서리가 아니다. 나는 채식이 다른 존재의 고통을 줄이고, 파편화된 관계를 연결시키며, 기후 위기로부터 우리 스스로를 구하고, 지구를 살리는 거대한 협업에 동참하는 행위라고 여긴다. (조한진희) - P159
어느 날 갑자기 모든 사람이채식을 하게 되는 사회보다, 누구에게나 채식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지는 곳이 더 나은 사회다. (조한진희) - P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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