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질적으로 바뀌지 않는 습성이란 게 있다. 내게는 그것이 읽지도 않은 책을 가방에 넣고 다니는 것일텐데, 그러니까 오늘 내 가방에는 소설 책 한 권과, 여성학 책 한 권이 있었고 출근하면서는 우편함에서 내 앞으로 배달되어 온 시사인을 꺼내왔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회사를 그만두고 내 집, 내 방 책상에 이 모든 책들을 다 꺼내어두고 그냥 파묻히고 싶다고. 그러나 책을 사기 위해서, 계속 읽기 위해서라도 나는 돈을 벌러 나와야 한다. 내게 돈을 주는 사람은 나 밖에 없어, 나를 책임질 사람은 나 뿐이다..
시사인을 읽는 이유는 앎을 위해서인데, 그러니까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기 위해서인데, 그것을 아는 일이 기쁘지가 않다. 대부분 슬픔 뿐이다. 분노는 기본이고. 언제나 그렇듯이 맨 뒤에서부터 읽다가 어느 순간 앞으로 돌아와 책장을 넘기는데, <화성외국인 보호소>에서 보호중이던 M 에 대한 직원들의 폭력이 기사로 실려 있었다.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새우꺾기' 자세로 외국인은 폭력과 학대를 당했는데, 시사인에 이 사진이 실려 있었다. CCTV 에 찍힌 장면을 캡쳐한 것이었다. 나는 폭력적인 영상을 보는 것도 너무 힘들어 내 의지로는 다 패쓰하는 편이고(굳이 영상 보지 않아도 잔인한 거 다 알잖아), 사진 역시도 보고 싶지 않다. SNS 의 타임라인을 통해 내 의지와 다르게 그런 영상들이 공개되면 너무 괴롭다. 시사인을 넘기다가 이 새우꺾기의 사진을 보게 될 줄도 몰랐다. 나는 이 사진을 올리진 않겠다. 다만 손과 발이뒤로 꺾여 묶인 자세라고만 첨언하겠다.
왜 이런 자세를 사람이 사람에게 하는걸까. 얼마나 굴욕적일지는 굳이 M 의 말을 듣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 가능하다.
이 영상이 공개되어 이슈가 된 모양인데, 보호소에서는 '지시 불응'에 대한 외국인에 대해 이런 조치를 취한다고 했다. 나는 어떻게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그것도 지금 약자로 있는 사람에게 저런 행위를 할 수 있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그런 한편 이 M 이 보호소에서 난동을 부리는 장면을 보호소에서는 내보낸 모양이다. 이렇게나 난동을 피워서 어쩔 수 없었다, 고.
기사에서는 그렇다면 이 M 이 보호소에서 왜 난동을 부렸는지에 대해 묻고 있다. 난동을 부리는 장면을 보고 그 사람을 욕하기는, 그 사람의 탓을 하기는, 그러므로 그 폭력을 합리화 하기는 쉽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식으로 폭력을 이해하고 수용하기 보다는, 그렇다면 그는 왜 지시에 불응했는가, 왜 난동을 부렸는가에 대해 생각해 봐야한다.
M씨는 난민 신청 체류 연장기한을 하루 놓쳐서 문제가 된 경우다. 난민 신청자 비자는 3개월마다 갱신해야 한다. 체류 연장 허가 수수료는 갱신 때마다 6만원이다. 그에겐 부담스러운 금액이었다.
가급적 3개월을 꽉 채워 체류를 연장하는 것이 그나마 돈을 아낄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 3개월을 잘못 계산한 M씨는 기한을 하루 넘겨 출입국관리사무소로갔다. 사무소 측은 범칙금을 내야 한다고 경고했다. 이에 놀란 M씨는 별다른 조처를 하지 못한 채 일하던 공장으로 돌아가면서 미등록 체류자로 전락했다. 그의 이런 처지를 악용한 사장은 월급을 주지 않았다. M씨가 월급을 달라고 요청하자 사장은 곧바로 그를 출입국관리사무소에 신고했다. M씨는 그 자리에서 체포돼 화성외국인보호소에 구금됐다.
유엔난민기구 구금 가이드라이은 난민 신청이 범죄행위가 아니므로 무기한 강제구금이 금재돼야 한다고 권고한다. 난민법 전문가인 이일 변호사(공익법센터 어필)는 "가두지 않아야 할 사람들을 가두면서, 갈등이 발생한다. 공무원들은 '왜 말을 안듣지?' '왜 한국에서 안 나가지?'라는 시각하에 수용자들을 대하는 경우가 많다. 이에 수용자들은 단식 ·소란 등의 방식으로 저항한다"라고 말했다. -P.37
오래전 첫 직장은 출판사였다. 학회지와 다이어리를 주로 출판하는 곳인데, 겨울에 일이 몰리면 전 직원이 파주 제책사로 가 포장이나 가름끈 붙이기를 함께 해야했다. 제책사에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많았고, 우리 회사가 고용한 아르바이트 생들과 함께 작업을 하면서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그 때 한 알바생이 일이 끝나고 난 후 돌아가는 차 안에서 말했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한국 오면 제일 처음 배우는 말이 '때리지 마세요' 래요" 라고. 그 대화가 제책사에서 만난 직원들로부터 들은 것인지, 아니면 어디서 듣고 온것인지에 대해서 출처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그 말을 들었을 이십여년 전의 그 당시, 그렇겠구나 하고 빠르게 수긍했던 걸 보면, 한국에서 외국인노동자가 어떤 대우를 받고 있는지에 대해서 사람들은 다들 어느 정도 알고 있지 않았나 싶다.
체류 연장 허가 수수료가 갱신 때마다 6만원이라는 것, 그 돈을 3개월마다 지불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 몰랐다. 돈을 아끼려다가 미등록 체류자가 되어버리는 것도 내게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 약자가 된다는 것을 공장의 사장은 알았다. 일한 임금을 달라는 정당한 요구에 그의 지위를 이용하여 신고해버리는 일이, M 이 한국에서 당한 일이었다. 좀 더 나은 삶을 살아보고자 이곳에 왔을텐데 그가 당한 일이 그것이었고, 그렇게 가두지 않아야 할 사람을 가둬버림으로써 난동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런 사람의 손과 발을 뒤로 묶어 굴욕을 안겨주었다.
내가 나로 태어난 것, 여기에서 이렇게 태어난 것은 내가 선택할 수 없었던 부분이다. 태어난 이상 좀 더 잘 살아보고 싶은 것, 가난과 고통 그리고 불행으로부터 빠져나가고 싶은 것은 자연스런 욕망이다. 그런데 그렇게 살려고 했더니 그러지 말라고 가두고 폭행한다. 인간 세상은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된 것일까?
장 지글러의 책을 생각했다. 나는 자꾸만 지금과는 다른 삶을 꿈꾸게 된다. 불행에 빠진 사람들, 자신의 고통으로부터 빠져나오려는 사람의 옆에 서고 싶어진다. 세상에 고통 받는 사람의 수를 그리고 그 고통의 강도를 줄이는 데 한몫을 하고 싶다.
오지원 변호사의 글도 좋았다.
오지원 변호사는 어린 시절 성폭행당할 뻔한 경험이 있었노라 고백하며 글을 시작했다.
그 일이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자신이 그 때는 미처 몰랐다는 것도 함께.
나는 열두 살 때 낯선 아저씨에게 유인당해 성폭행당할 뻔한 경험을 했다. 그의 협박대로 나는 서른 살이 넘을 때까지 그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었다. 이렇게 피해자가 피해 사실을 꽁꽁 숨기고 있는 동안 어떤 일이 일어날까. 외부 세계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존재했던 사건을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만들기 위해 내 내면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것이 내 감정과 일상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몰랐다.
어른이 되어 외부 세계에서 이룬 성취와 밝고 명랑한 생활에도 불구하고 혼자 있을 때는 알 수 없는 불안감과 불행감이 배경음악처럼 흐르고 있었다. 그 주된 원인이 성폭력 경험에서 기인한 것인지도 몰랐다. 그저 내가 왜 이럴까 답답해하고 자책하거나 가까운 사람들을 탓했다. - P50
이런 일은 나도 모르게 나의 어떤 일에 영향을 미친다. 나는 그것을 안다.
어른이 되어서까지도 그것이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아주 오래, 나의 어떤 행동이 어디로부터, 무엇으로부터 온 것인지에 대해서는 모른다. 어쩌면 알고 싶지 않았던 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왜, 어떻게 시작된 것인지 알아야 비로소 그 다음으로 한 걸음 내딛게 되는 것 같다.
오지원 변호사는 법정에서 자신이 당한 것과 유사한 피해를 당한 어린 아이를 만나게 된다. 법정에서 증언하는 일은 피해자 아이의 부모가 반대했다. 상처도 크고 그 일로 인한 아이의 장래가 걱정된다는 이유였다. 아마 내가 부모였어도 그런 선택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피해자는 법정에 나왔다.
증인신문 기일, 아이가 못 오나 했는데 법정 문이 열렸다. 아이가 왔다. 아이는 씩씩하게 증언을 했다. "엄마는 증언을 반대했지만 저는 하고 싶었습니다. 저 같은 사람이 또 생기면 안 되거든요. 제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두려워해서도 안 될 것 같아서요. 저 사람이 저를 강간하려고 했던 사람이 분명합니다."
나는 눈물을 참았다. 너무 안타깝고 미안했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말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마음도 들었다. 그날 밤 야근을 하다 밤새 울었다. 내가 아주 깊이 억압해둔, 존재했으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기고 싶었던 내면의 기억이 수면 위로 완전히 떠올랐다. 물론 그다음 날도 아무 일 없다는 듯 웃고, 떠들며 살았지만 나는 그날 이후 내 피해 경험에 대해 아주 추상적으로나마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스스로 말해도 안전한지, 상처받지 않을 수 있는지, 아주 느린 걸음으로 조금씩 나와 타인의 반응을 확인하면서 상처를 인정하고 들여다보게 되었다. 법정에서 용기를 내어 말해준 그 아이 덕분에. - P50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자신을 구원함으로써 다른 사람을 구원하기도 한다. 오래 상처입고 지낸 한 사람에게 이 어린 피해자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손을 내밀어 주었다. 우리의 어떤 작은 행동들은 그런 식으로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시사인 정기구독을 다시 신청했다. 이번 호수가 재신청 후 처음 받아보는 시사인이다. 딱히 정기구독을 다시 신청할 생각은 없었는데 며칠전 낯선 핸드폰 번호가 전화기에 뜨는게 아닌가. 받아보니 시사인이었고, 일전에 정기구독 해주었던 것에 대한 감사와 더불어 다시 좀 해주면 안되겠냐는 거였다. 나는 망설였다. 할까말까. 정기구독을 몇 년하다 해지한것은 내가 밀리기 때문이었다. 어느 순간 밀리고 있더라. 다시 신청하면 역시 밀리지 않을까. 그러나 결국은 다시 구독하겠노라 하였다. 가끔, 이슈되는 일들에 대해 더 알고 싶어지면 따로 시사인을 구매해 읽었던 터였다. 그래, 매주 배달되는 걸 읽자.
처음 시사인 정기구독은 몇년전이었다. 시사인 정기구독을 하고 싶다, 라고 생각했지만 딱히 내가 신청하지는 못한 상태에서, 누군가 내게 시사인 정기구독을 선물해주면 그 사람에게 영혼을 바치겠노라 했었는데, 몇해전 연애 초기의 상대가 그 글을 기억하고 있다가 내게 시사인 정기구독을 해준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이제 네 영혼은 나의 것이다."
그는 나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내 영혼을 가져가고 싶어했다. (응?) 나를 흡수하고 싶어했고 그렇게 했다. (네?) 이 얘기는 19금이니까 그만 하도록하자. 19금 잘못 풀면 39금 된다. 그때 그가 흡수한 내 영혼의 일부는 아직 찾아오지 못하고 있다. 인생..
오늘 아침 시사인을 읽으면서 언젠가 시사인 정기구독을 선물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제는 내가 시사인 정기구독을 선물할 차례라는 생각이 들었다. 맞춤한 상대가 나타난다면, 나는 시사인 정기구독을 선물하겠다. 너무 좋은 선물인 것 같다. 아무튼 현재는 내가 나에게 선물했다. 내 선물은 내가 가장 잘 챙길 수 있다.
그건그렇고,
이번달 같이읽기 도서인 '뤼스 이리가라이' 《하나이지 않은 성》시작했는데 이거 왜이렇게 어려워.. 글자 크고 얇다고 내가 너무 가볍게 대했구나..
여러분, 이거 후딱 읽겠다, 이런 생각으로 다들 시작 안하고 있죠?
아니다, 그거 아니야.. 여러분 그러면 안돼... 무슨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는 내용들이 처음부터 펼쳐진다... 커밍 순.....
책 샀다. 지난주에 온 책들이다.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와 《잔류 인구》는 다정한 알라디너들의 선물이다. 아이참 왜 이러세요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니 내가 나 좋자고 제2의 성 읽었는데, 잘했다고 칭찬한다고 잔류 인구 선물 해주시고 ㅋㅋㅋㅋㅋㅋㅋㅋ에이모 토울스 신간 선물해주고 싶었는데 언제 번역될지 모르겠다고 내가 읽고 싶어한 책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 선물해주시고 막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다정한 알라디너들 ♡
아무튼 나머지는 내가 샀고, 황정은 의 일기 살거다. 누구도 날 막을 수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