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이화의 한국사 이야기 4 - 남국 신라와 북국 발해 이이화의 한국사 이야기 4
이이화 지음 / 한길사 / 199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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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남국 신라와 북국 발해> 편이다.

우리 고대사의 마지막 이야기, 다 알고 있는 거 같아도 새삼스러운 역사들이다.

 

원효, 의상, 최치원, 도선과 후삼국의 영웅들이 나온다.

견훤을 이 책에선 '진훤'이라고 하네. 甄자가 성으로 쓰일 때는 '진'으로 발음한다는 것이다.

왕건의 수하 유검필은 도대체가 패배를 모르는 맹장이었나 보다.

진훤도 끝은 초라했지만 희대의 영웅이었을 거다. 역사에 남은 패자(敗者)의 기록이 이다지도 화려한 걸 봐서는.

 

민심을 얻지 못하는 세력은 반드시 망한다는 걸 이 시대 역사도 보여주고 있다.

요점 정리와 같은 마지막 세 페이지만 옮겨 보자.

 

 

신라는 결국 골품제의 모순으로 붕괴되었다. 새로운 시대에 맞추어 골품제를 개혁하지는 않고 더욱 권력과 재부를 독점하려고 왕위 쟁탈과 권력 투쟁을 벌여 스스로 붕괴한 것이다. 신라의 왕족과 귀족들은 창조적 활동이나 생산능력 없이 사치와 방탕으로 일관하였다. 낮은 귀족인 6두품이나 지방의 호족들은 신분상승의 기회를 박탈당하여 불만이 점점 높아졌다.

 

귀족들은 광대한 토지를 소유하고도 더 늘리려고 토지를 불법으로 점거하고 약탈을 일삼았다. 승려와 사찰도 여기에 끼어들었다. 귀족들은 녹읍에서 가혹한 수취를 하였고 고리대라는 수법을 통해 악랄하게 농민들을 압박했다. 재부의 편제는 농민을 떠돌이로 만들었고, 유망민들은 도둑 또는 농민군으로 재편되었다. 낮은 벼슬아치와 호족들도 점차 신라의 왕실세력에서 떨어져나갔다.

 

불교의 선종은 낮은 귀족이나 호족과 연결되었고, 새로 일어난 유학자들은 새 질서로 새 가치관을 추구하며 새 사회 건설을 제창하였다. 또한 도참풍수사상은 일반 민중과 연결되어 새로운 세력을 키워나갔다.

 

신라의 실정(失政) 중에 무엇보다도 백제와 고구려 유민의 반감을 계속 유발한 사실을 꼽을 수 있다. 신라는 자체의 골품이나 귀족의 독점체제만을 고수한 것이 아니라 두 지역 주민의 중앙정계 진출을 봉쇄하였고, 지방의 성주·장군이 되는 길도 거의 열어주지 않았다. 이는 골품제 귀족제도 아래에서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의 장벽이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조세·공물·군역의 의무는 가혹하게 지웠다. 궁예와 왕건, 진훤은 모두 이런 분위기에 편승하여 등장하였다.

 

궁예는 지나친 복수심과 폭정으로 신라에 불만을 지닌 세력을 흡수하지 못하였고, 민심을 얻지도 못하였다. 진훤은 초기에 인심을 끌어모아 막강한 힘을 축적하고도 신라의 제도를 고수하는 따위 개혁을 도모하지 못하였고 경애왕을 죽여 아무런 정치적 효과도 거두지 못하면서 신라 주민의 반감을 불러 일으켰다. 후백제는 끝내 자체 분열의 길을 걸었다.

 

왕건은 궁예의 휘하에 있었으나 시운을 타고 고려를 건국하였다. 고려는 신라의 제도를 고수하는 따위 보수 성향을 보였으나 신라 주민의 민심을 모으는 데에는 성공하였다. 그는 최소한의 정복전쟁을 벌이면서 내정 개혁에 중심을 두었다. 왕건은 온건한 정책으로 신라의 낮은 귀족과 지방호족, 유학세력, 풍수세력, 선종세력을 끌어들이는 데에 성공하였다.

 

당시 지방의 성주와 장군은 도둑을 막는 따위 지휘권을 가지고 있었는데, 왕건은 이들을 효과적으로 이용하여 힘을 키웠다. 또 10분의 1세를 고수하여 호족과 농민들의 환심을 샀다. 그는 자신의 성품이 겸손하고 온유하다는 이미지를 심어주었고, 회유와 환심을 사는 데에도 능란하였다. 그는 신분이나 지역에 따라 여러 갈래로 겹혼인을 맺어 자기 세력을 만들었다. 결국 왕건은 이름과 실제에 걸맞은 군주가 되었고, 고려는 통일국가가 되었다. 고려는 한국사의 본격적인 중세사회를 열었다. (307-30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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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의상전교조' 중에서
삼국유사
일연 지음, 김원중 옮김 / 민음사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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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연의 <삼국유사>를 읽는다는 건 그저 역사를 읽는 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알에서 난 왕과 닭부리 입술을 하고 태어난 왕비의 신화를 읽는 것이고,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여기저기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한 가지에 나서 가는 곳을 모르는구나!"라고 읊었던 애절한 향가를 읽는 것이며, '괴력난신(怪力亂神)'이란 이유로 말해지지 못했던 수많은 기이하고도 재미있는 옛이야기들을 읽는 것이기도 하다.

 

연오랑과 세오녀는 바위를 타고 바다를 건넜고, 무왕은 용의 아들, 견훤은 지렁이의 아들이었다.

어떤 왕의 음경은 한 자 다섯 치여서 짝을 찾기 어려웠고, 또 어떤 왕은 수 많은 뱀들과 함께 잤다고 하지. 

쥐가 사람의 말로 조언을 하고, 천신은 한밤중에 내려와 석굴암을 완성했단다.

비형은 귀신을 시켜 여우로 둔갑한 길형을 붙잡았고,  문희는 언니 꿈을 산 뒤에 때마침 집에 온 김춘추를 꼬셔서 왕후가 되었다. 

화랑 김현은 탑돌이 하다가 처녀로 둔갑한 호랑이와 만나서 원나잇 아니 '조용한 곳으로 가서 정을 통'했다. 

대나무 피리를 불면 적군이 물러나고, 병이 낫고, 가물 때는 비가 내리고, 장마 때는 비가 그쳤다고 하네.

용왕도 탐냈다던, 아니 가는 곳마다 탐냈다던 수로부인의 미모는 도대체 어느 정도였을까.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을 시험했던 스무 살 가량의 아름다운 낭자는 또 어떻고.

 

그리고 시도때도 없이 나와서 점을 치는 일관(日官)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승려들.

비단천으로 절을 짓고 풀로 오방신상을 만들어 당나라 군대를 물리친 명랑,

법당 지붕을 뚫고 극락왕생한 여자종 욱면, 지팡이를 날려 마을에서 시주를 받았던 양지 스님, 대현과 법해가 겨루었던 기이한 법력 대결, 귀신들이 두려워했던 밀본과 귀신을 부려 마귀를 쫓은 혜통의 이야기는 신기하다.

책에 쓰인 내용에 입각해서 본다면 의상대사는 이른바 '허공답보'를 시전했던 경공술의 대가이며 밀본법사는 '일양지'와 '허공섭물'을 구사할 수 있었던 고수였을 것이다.

이렇듯 <유사>에서는 원광, 자장, 의상과 원효, 진표를 필두로 수많은 승려들의 전기와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또 '탑상편'에서는 장인과 승려들이 빚고 지어낸 무수한 불상과 탑들과 그에 얽힌 전설까지 열거되어 있으니 삼국의 종교사나 미술사 연구자에게 절대적인 문헌이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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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서 인상 깊었던 설화 두 가지만 옮겨 본다.

신주편 혜통항룡조를 보면 혜통이 출가한 계기가 이렇게 소개된다.

 

(승려 혜통이 속인이었을 때) 어느 날 집 동쪽 시냇가에서 놀다가 수달 한 마리를 잡아 죽이고는 뼈를 동산에 버렸는데 이튿날 아침에 그 뼈가 없어졌다. 그래서 핏자국을 따라갔더니 그 뼈는 옛날에 살던 굴 속으로 들어가 다섯 마리의 새끼를 끌어안고 웅크리고 있었다. 혜통이 그것을 바라보고는 한참 동안 놀라워하고 탄식하며 머뭇거리다가 마침내 속세를 버리고 출가하여 이름을 혜통으로 바꿨다. (513)

 

그리고 저 유명한 탑상편 조신의 꿈 이야기.

사랑하는 것이 곧 고뇌의 시작임을 가르치는 이 슬픈 설화는 유명하다고는 해도 정확한 내용을 모르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좀 번거롭지만 책에서 전문을 옮겨 본다.

 

옛날 신라가 서울이었을 때, 세달사의 장원이 명주 날리군에 있었다. 본사에서는 승려 조신을 보내 장원을 맡아 관리하게 했다.

 

조신은 장원에 이르러 태수 김흔의 딸을 깊이 연모하게 되었다. 여러 번 낙산사의 관음보살 앞에 나가 남몰래 인연을 맺게 해 달라고 빌었으나 몇 년 뒤 그 여자에게 배필이 생겼다. 조신은 다시 관음 앞에 나아가 관음보살이 자기의 뜻을 이루어 주지 않았다고 원망하며 날이 저물도록 슬피 울었다. 그렇게 그리워하다 지쳐 얼마 뒤 선잠이 들었다. 꿈에 갑자기 김 씨의 딸이 기쁜 모습으로 문으로 들어오더니, 활짝 웃으면서 말했다.

 

"저는 일찍이 스님의 얼굴을 본 뒤로 사모하게 되어 한순간도 잊은 적이 없었습니다. 부모의 명을 어기지 못해 억지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었지만, 이제 [죽어도] 같은 무덤에 묻힐 벗이 되고 싶어서 왔습니다."

 

조신은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르며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 40여 년을 살면서 자식 다섯을 두었다. 그러나 집이라곤 네 벽뿐이요 콩잎이나 명아주국 같은 변변한 끼니도 댈 수 없어 마침내 실의에 찬 나머지 가족들을 이끌고 사방으로 다니면서 입에 풀칠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10년 동안 초야를 떠돌아다니다 보니 [옷은] 메추라기가 매달린 것처럼 너덜너덜해지고 백 번이나 기워 입어 몸도 가리지 못할 정도였다. 강릉 해현령을 지날 때 열다섯 살 된 큰아들이 굶주려 그만 죽고 말았다. 조신은 통곡하며 길 가에다 묻고, 남은 네 자식을 데리고 우곡현에 도착하여 길가에 띠풀로 엮은 집을 짓고 살았다. 부부가 늙고 병들어 굶주려 일어날 수 없게 되자, 열 살 난 딸아이가 돌아다니며 구걸을 했다. 그러다가 마을의 개에 물려 부모 앞에서 아프다고 울며 드러눕자 부모는 한탄하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부인은 눈물을 씻더니 갑자기 말했다.

 

"내가 처음 당신을 만났을 때는 얼굴도 아름답고 꽃다운 나이에 옷차림도 깨끗했습니다. 한 가지 맛있는 음식이라도 당신과 나누어 먹었고, 몇 자 되는 따뜻한 옷감이 있으면 당신과 함께 해 입었습니다. [집을] 나와 함께 산 50년 동안 정분은 가까워졌고 은혜와 사랑이 깊었으니 두터운 인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몇 년 이래로 쇠약해져 병이 날로 더욱 심해지고 굶주림과 추위도 날로 더해오는데, 곁방살이에 하찮은 음식조차 빌어먹지 못하여 이 집 저 집에서 구걸하며 다니는 부끄러움은 산과 같이 무겁습니다. 아이들이 추위에 떨고 굶주려도 돌봐 줄 수가 없는데, 어느 겨를에 사랑의 싹을 틔워 부부의 정을 즐기겠습니까? 젊은 날의 고왔던 얼굴과 아름다운 웃음도 풀잎 위의 이슬이 되었고, 지초와 난초 같은 약속도 회오리바람에 날리는 버들솜이 되었습니다. 당신은 내가 있어서 근심만 쌓이고, 나는 당신 때문에 근심거리만 많아지니, 곰곰이 생각해 보면 옛날의 기쁨이 바로 근심의 시작이었던 것입니다. 당신이나 나나 어째서 이 지경이 되었는지요. 여러 마리의 새가 함께 굶주리는 것보다는 짝 잃은 난새가 거울을 보면서 짝을 그리워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힘들면 버리고 편안하면 친해지는 것은 인정상 차마 할 수 없는 일입니다만 가고 멈추는 것 역시 사람의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고, 헤어지고 만나는 데도 운명이 있는 것입니다. 이 말에 따라 이만 헤어지기로 합시다.“


조신이 이 말을 듣고 기뻐하여 각기 아이를 둘씩 나누어 데리고 떠나려 하는데 아내가 말했다.

“저는 고향으로 향할 것이니 당신은 남쪽으로 가십시오.”

그리하여 조신은 이별을 하고 길을 가다가 꿈에서 깨어났는데 희미한 등불이 어른거리고 밤이 깊어만 가고 있었다.

아침이 되자 수염과 머리카락이 모두 하얗게 세어 있었다. 조신은 망연자실하여 세상일에 전혀 뜻이 없어졌다. 고달프게 사는 것도 이미 싫어졌고 마치 백 년 동안의 괴로움을 맛본 것 같아 세속을 탐하는 마음도 얼음 녹듯 사라졌다. 그는 부끄러운 마음으로 부처님의 얼굴을 바라보며 깊이 참회하는 마음이 끝이 없었다. 돌아오는 길에 해현으로 가서 아이를 묻었던 곳을 파 보았더니 돌미륵이 나왔다. 물로 깨끗이 씻어서 가까운 절에 모시고 서울로 돌아와 장원을 관리하는 직책을 사임하고 개인 재산을 털어 정토사를 짓고서 수행했다. 그 후에 아무도 조신의 종적을 알지 못했다.


다음과 같이 논평한다.
“이 전을 읽고 나서 책을 덮고 지난 일을 곰곰이 돌이켜 보니, 어찌 반드시 조신의 꿈만 그러하겠는가? 지금 모든 사람이 인간 세상의 즐거움을 알아 기뻐하면서 애를 쓰지만 특별히 깨닫지 못할 뿐이다.”
(380-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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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의 설화들은 그저 단순히 재미난 이야기로 그치지 않고 여러 가지 맥락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주고 있다. 고대사와 문학을 다룬 수많은 저서와 논문들에서 이 책은 늘 중요한 문헌으로 구구절절 인용되고 있으며, 또 이 책이 아니었다면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역사의 내용들이 한둘이 아니다. 그러니 <삼국유사>를 읽지 않고 우리 고대 역사와 사상, 문학과 예술에 대해 말할 수 있는 방법은 아마 없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특히 승려의 저술인 만큼 불교의 신앙대상과 사상, 종파 등에 관한 자료가 많이 실려 있어서 삼국과 통일신라시대 불교의 여러 단면들을 폭넓게 엿볼 수 있는 사료가 되었다.

 

이번에 통독한 것으로 그냥 덮어둘 게 아니라 옆에 두고 되풀이하여 읽어야겠다. 그리고 여러 가지 관점과 맥락에 따라 초록과 질문, 논평을 정리해 두어야 다시 활용할 수 있겠다. 이건 책에 밑줄만 친다고 되는 게 아니다. 

줄거리만 파악하는 게 아니라 자료로써 사용하기 위한 독서야 되어야 한다. 그러니 나는 엊그제 <유사>를 다 읽었지만 사실은 아직도 <유사>를 다 읽은 것이 아니다.

고전이란 게 읽으면 읽을수록 새로운 맛이 난다고 하지 않는가. 게다가 다른 독서와 체험들이 쌓이고 나면 똑같은 책인데도 그 안에서 완전히 새로운 것들이 읽히게 된다. 

 

 

* 민음사 <삼국유사>가 두 종류가 있는데, 나는 원문이 필요했기 때문에 이 책으로 읽었다. 굳이 원문을 살필 이유가 없다면 세계문학전집에 있는 <삼국유사>을 읽어도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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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런 시가 하필
    from 突厥閣 2015-02-24 01:27 
    문득 펼친 시집에서 하필 이런 시가 눈에 띄어서 적어 본다. 엊그젠가 <유사>에서 조신의 꿈을 옮겨 적어서 그런가 보다. 글끼리 서로 끌어당긴 거 같기도 하고... 참 신기하기도 하지. 30년, 하고 중얼거리다고교 졸업 30주년30년, 하는 제 소리에 놀라그는 퍼뜩 꿈에서 깬다교련복을 챙기고 도시락을 싸고서둘러야 할 시간웬 생시 같은 꿈!서울로 어디로 떠나 대학생이 되는 꿈 취직하는 꿈 술 담배 배우고 여자도 배우는 꿈 자취로 하숙으로 과
 
 
붉은돼지 2015-02-22 1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배창호 감독의 아마도 안성기가 조신역으로 나오는 ˝꿈˝이란 영화도 있었죠...

돌궐 2015-02-22 18:06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 좀 뒤져봐야겠습니다.^^

cyrus 2015-02-22 1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팟캐스트 방송 명로진 권진영의 고전읽기에서 몇 주 전부터 삼국유사를 소개하기에 오랜만에 삼국유사를 읽어보려고 했어요. 그런데 읽을 게 너무 많아서 시작하는 마음을 접었어요.. ㅎㅎㅎ

돌궐 2015-02-22 18:23   좋아요 0 | URL
저처럼 일종의 의무감으로 읽지 않으면 참 읽기 힘든 책이란 건 인정합니다.ㅎㅎ
그나마 김원중 선생 번역이라서 저도 간신히 읽은 거 같아요.
다음은 삼국사기인데 역시 머나먼 여정이 되겠죠.

yamoo 2015-02-23 1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알라딘 중고서점에 을유판 삼국유삭 널려있더이다. 두꺼운 책이 3천원 정도 하던데...일단은 사두어야 겠네요..ㅎ 문고본으로 2종이 있긴 하지만 페이퍼를 보니 을유사판을 갖고 있어야 할 듯 합니다~ㅎ

돌궐 2015-02-23 13:26   좋아요 0 | URL
나중에 혹 필요한 절판도서가 생기면 yamoo 님께 맨 먼저 문의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
메리 앤 섀퍼.애니 배로스 지음, 신선해 옮김 / 이덴슬리벨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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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 시절에 한 여학생에게 편지를 보낸 적이 있다. 당연히 누구인지 알고 보냈다. 해마다 있던 환경미화 때문에 여학생들 교실에 올라가 못질 해주다 알게 된 애니까. 등교 시간에 버스 정류장에서 매일 보던 건 덤이었고, 함께 혼성 합창부 활동을 했던 건 편지를 보내고 난 다음이므로 절대로 우연이다. 그러나 얼굴이 하얗고 아담한 키와 날씬한 몸매에 머리를 늘 두 갈래로 단정하게 땋고 다니던 그 애한테 편지를 보낸 건 분명히 내 의도에 따른 것이었다.

 

나는 당시 친하게 지내던 친구와 남들 눈에 잘 안 띄는(적어도 그렇게 믿었다) 그 조용한 아이가 같은 중학교를 나온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중학교 졸업 앨범을 발견하고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훑어보다가 뒷쪽 주소록에서 그 아이 주소를 '매의 눈'으로 찾아냈다. 그리고 친구 몰래 속으로 그 주소를 달달 외웠다. 기말고사 시작 1분 전에 필사적으로 영어 단어를 외우듯이. 달달.

 

그렇게 외워 온 주소를 집에 와서 경건한 마음으로 적어 두고는 아마도 얼마 뒤엔가 편지를 썼을 것이다. 정말 답장은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냥 어린 마음에 객기를 부렸다고나 할까. 어차피 답장도 안 올건데 뭐, 이런 마음으로. 그래서인지 나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알고 지내는 친구인 양 별 시덥지도 않은 얘기를 편지에 썼었다. 같잖은 사랑 고백이나 되도 않는 허세를 다 빼고 그냥 내 일상과 간단한 소개 정도를 휘갈겨 썼던 것 같다. 글씨를 잘 쓰려고 노력하지도 않았고, 좋아한다느니 만나고 싶다느니 하는 부담스럽고 낯간지러운 말 같은 건 정말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한 1주일 쯤 뒤인가 답장이 왔다.
지금도 그 순간이 기억난다. 엄마가 우편함에서 가져온 편지들 가운데 하나를 건네주며 "너한테 편지 왔다. 근데 걔 누구니?"하던 그 순간. 방에 들어가서 조심스럽게 봉투를 뜯어서 편지지를 꺼내 읽던 그 순간.
내가 그랬던 것처럼 무겁지 않게 자기소개를 하는 편안한 편지였다. 그리고 나를 어떻게 아느냐고, 왜 나한테 편지를 썼냐고 물어보더라. 여기서 냉큼 너를 좋아한다고 답장을 하면 안되는 거다. 그거야 말로 바보 같은 짓이다. 좋아하더라도 그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여자에겐 결정적인 순간이 필요한 것이다, 라고 나이 든 지금의 내가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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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에서 도시 애덤스는 생판 모르는 줄리엣에게 편지를 보낸다. 한때 줄리엣의 소유였던 찰스 램의 책을 자기가 갖고 있으며, 이 작가가 마음에 드는데 책을 더 구할 수 없느냐고. 자기가 살고 있는 건지 섬은 책을 구하기가 어렵다면서 그는 찰스 램의 이야기를 빗대어 자기 소개를 한다. 책을 다 읽고 나서 도시 첫 편지를 다시 읽는다면 찰스 램 이야기가 결국 도시와 건지 섬의 이야기라는 걸 알 수 있다.

 

독일군 점령하에서도 저는 찰스 램 덕분에 웃을 수 있었습니다. 특히 돼지구이에 관한 글이 압권이지요. 우리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도 독일군에게는 비밀로 해야 했던 돼지구이 때문에 탄생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찰스 램이 더 친근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성가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찰스 램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보다는 실례를 무릅쓰는 편이 나을 것 같았습니다. 그의 글을 읽다 보니 찰스 램과 친구가 된 것 같거든요. (19)

 

여기서 나는 도시가 '실례를 무릅쓰고' 줄리엣에게 편지를 쓴 이유는 찰스 램 때문만은 아니었다고 본다. 그건 내가 옛날 그 여자애한테 별 시덥지도 않은 얘기로 편지를 썼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찰스 램은 핑계였을 뿐이다. 근거는? 추신에 나와 있다.

 

추신. 제 친구 모저리 부인도 한때 당신의 것이던 소책자를 구입했답니다. 제목은 《불타는 떨기나무는 과연 존재했을까? 모세와 십계명을 위한 변론》이죠. 모저리 부인은 당신이 여백에 남긴 메모가 마음에 든다고 합니다. '신의 말씀? 아니면 군중통제의 수단?' 어느 쪽인지 결론이 났습니까? (19)

 

여기서 도시는 모저리 부인의 핑계를 대긴 했지만 자신도 역시 줄리엣의 메모가 마음에 든다고 한 거나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도시가 줄리엣에게 하고 싶었던 얘기는 결국, 찰스 램을 읽는 사람이며 또 다른 책에다는 저런 의미심장한 메모를 남겼던 "당신을 알고 싶어요"가 아니었을까?


추신에 굳이 줄리엣이 남긴 글을 언급하면서 그 결론이 궁금하다고 한 것은 고도의 시네루(이런 말밖에는 생각이 안 나서 수준을 드러내는 것 같지만)였다. 물론 스스로 시네루를 준다고 생각하고 쓴 것은 아닐지라도, 결과적으로 그 편지는 엄청난 회전이 들어간 白球가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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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로 돌아가 보자. 우리는 그 후로도 죽 편지를 교환했다. 음악 얘기도 했다. 나는 클래식을 좋아한다고 했고, 그 애는 헤비메탈을 좋아한다고 했다. 그렇게 조용하고 공부도 잘 하는(전교 1등이었다) 여자애가 헤비메탈이라니! 난 그 의외성에 더욱 빠져들었다. 그래서 나는 그 애가 말했던 임펠리테리(Impellitteri) 앨범부터 사서 듣기 시작했다. 임펠리테리 하면 보통 화려한 기타 속주로 잘 알려진 명연주곡 <Somewhere over the Rainbow>를 떠올리지만 난 1번과 2번 트랙 <Stand in Line>과 <Since You've Been Gone>을 가장 좋아했던 거 같다. 너무 들어서 테잎이 늘어질 때까지 들었다.

 

 

Impellitteri - <SInce You've Been Gone>

 

각설하고, 도시에게도 줄리엣은 의외였을 것이다. 그녀가 그저 책이나 더 구해주고 선심 좀 써서 찰스 램에 대한 추가 정보를 알려주는 정도의 기대에 걸맞은 사람이었을 뿐이라면 이렇게까지 편지 왕래가 계속될 일이 없었겠지. 나중에 줄리엣이 자기는 작가라는 걸 밝히고 건지 섬의 북클럽에 대해 글을 쓰고 싶다고까지 하니 도시는 더더욱 놀랐을 것이다. 어쩌면 도시는 편지를 쓰면서 단순한 정보 이상의 뭔가를 더 기대했을 가능성이 있다. 모저리 부인 소유 책에 적힌 그녀의 필체를 통해 젊은 여성임을 간파했다든지, 아니면 막연한 대화 상대가 필요했을지도 모르겠다. 왜 안 그렇겠나. 아무리 전쟁 뒤의 힘든 상황이지만 한창 혈기왕성한 남자 아닌가.

도시에게 보낸 첫 답장에서 줄리엣은 독서와 자신의 메모에 대해 이렇게 적는다.

 

그래서 제가 독서를 좋아하는 거예요. 책 속의 작은 것 하나가 관심을 끌고, 그 작은 것이 다른 책으로 이어지고, 거기서 발견한 또 하나의 단편으로 다시 새로운 책을 찾는 거죠. 실로 기하급수적인 진행이랄까요. 여기엔 가시적인 한계도 없고, 순수한 즐거움 외에는 다른 목적도 없어요. (22)

추신. 모세에 관한 건 도무지 결론이 나질 않네요. 아직도 고민 중이랍니다. (23)

 

게다가 친절하게도 줄리엣은 《찰스 램 서간집》에 나오는 재미난 구절('술, 술, 술, 짠, 짠, 짠, 벌컥, 벌컥, 벌컥, 팽, 팽, 팽, 어질, 어질, 어질, 쾅! 난 결국 구제 불능이 되고야 말겠지. 이틀을 내리 술만 들이켜고 있으니. 내 도덕관념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신앙심도 희미해져가(원문: Buz, buz, buz, bum, bum, bum, wheeze, wheeze, wheeze, fen, fen, fen, tinky, tinky, tinky, cr'annch! I shall certainly come to be comdemned at last. I have been drinking too much for two days running. I find my moral sense in the last stage of a consumption and my religion getting faint)')까지 일부러 소개를 해주고, 돼지구이 만찬의 비밀과 감자껍질파이의 정체에 대해 질문까지 했으니 이제 쌍방향 교류의 전용선이 깔린 셈이다.

말하자면 도시의 "당신을 좀더 알고 싶어요"라는 물음에 줄리엣은 "저도 당신이 궁금해요"라고 화답한 것이다. 내 뜬금없는 편지에 망설이거나 얌전 빼지 않고 답장을 해 주었던 그때 그 아이처럼.

 

요즘에는 컴퓨터를 켜고 이메일을 보내거나 특정 사이트에 접속해서 알고 지내는 사람(사실은 id)에게 쪽지를 보내거나 그들이 쓴 글에 덧글을 다는 것만으로 손쉽게 대화를 나눌 수 있다. 그러나 겨우 20년 전까지만 해도 이렇진 않았다. 겨우 pc통신만 몇 개 있었지 인터넷은 흔히 쓸 수 없었던 시대였다. 요즘은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속 깊은 대화를 하기 위해 가장 요긴한 통신 수단은 '편지'였다. 그러고 보니 편지를 써 본 지도 너무나 오래 되었구나. 어쩌다가 이렇게 각박하게 살고 있는 건지.

 

#
도시가 줄리엣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에는 돼지 구이 파티의 유례와 몇 가지 부탁, 그리고 1944년 <펀치>에 실린 만화에 대한 질문을 적었다. 그 가운데 엘리자베스에 대한 얘기가 나오는데, 이후 엘리자베스는 거의 이 책의 중심인물로 부각된다. 독서회를 시작하게 된 것도,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의 시작과 끝은 결국 엘리자베스였다.

 

이건 짐작일 뿐이지만, 나는 도시가 엘리자베스를 사랑했으리라 생각한다. 그가 편지에 엘리자베스에 대해 쓴 내용들을 보면 그렇다. 책에서는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아도 만일 내가 도시였다면 엘리자베스를 사랑했을 것 같고, 독일군 의무관이자 친구가 된 크리스티안과 엘리자베스가 서로 깊은 사이라는 걸 알았을 때는 크게 절망했을 것 같다. 하지만 그 둘을 모두 좋아하는 입장에서는 속으로만 삭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가 나서서 엘리자베스의 딸 킷을 보살펴 온 사실이나(심지어 그는 줄리엣이 킷을 낳을 때 에번과 이솔라, 아멜리아와 함께 아이를 받는다) 뒤에 프랑스 여인 레미를 건지 섬으로 애써 데리고 와서 성심껏 보살핀 이유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단순한 동정이나 측은지심이었다고 설명할 수만은 없지 않은가.

크리스티안과 친구가 된 이후, 도시가 어느 날 엘리자베스와 크리스티안이 연인이란 걸 깨닫는 장면은 편지에 이렇게 적혀 있다.

 

그 후로도 그는 종종 제가 물 나르는 걸 도와주었습니다. 일을 마친 후에는 담배를 권했고, 우리는 길거리에 서서 담배를 피우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건지 섬의 아름다움이나 역사에 관해, 책이나 농장 일에 관해 대화를 나누었지만 현재의 상황에 대한 이야기는 결코 꺼내지 않았습니다. 늘 전쟁과 아무 상관 없는 이야기만 했지요. 한번은 우리 둘이 그렇게 서 있는데 엘리자베스가 자전거를 타고 이쪽으로 덜컹덜컹 달려오더군요. 그날 하루 종일 그리고 전날 밤도 거의 꼬박 새우며 간호 일을 한 터였고, 주민 대부분처럼 그녀의 옷도 옷이라기보다는 누더기에 가까웠어요. 그렇지만 크리스티안은 갑자기 말을 멈추더니 그녀가 오는 걸 멍하니 바라보더군요. 엘리자베스가 가까이 다가와 섰습니다.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표정을 본 저는 서둘러 자리를 떴습니다. 그제야 그 둘이 아는 사이라는 걸 알아챈 겁니다. (158)

 

마음은 찢어지게 아팠겠지만 그는 기꺼이 두 사람을 축복했으리라 본다. 건지 섬에 온 줄리엣이 도시한테 크리스티안에 대해 물었을 때 대답한 말에서 그런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당신이 상상하는 독일인과 비슷할 거예요. 키가 크고 금발이고 눈동자는 푸른색인, 다만 그는 고통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었지요(원문: He looked like the German you imagine - tall, blond hair, blue eyes - except he could feel pain). (256)

 

'고통을 느낄 줄 아는' 크리스티안이었기 때문에 도시는 그를 엘리자베스의 연인으로 인정해줄 수 있었을 거다. 그리고 그들의 딸인 킷도 마치 자신의 딸인 양 사랑해 줄 수 있었겠지. 도시가 킷에 대해 쓴 글을 보자.

 

킷이 엘리자베스를 많이 닮은 건 아니지만 회색 눈동자와 집중할 때의 표정만은 쏙 빼닮았어요. 무엇보다도 엘리자베스의 심성을 그대로 이어받았지요. 감정이 아주 격렬해요. 거의 젖먹이 시절부터 그랬습니다. 킷이 악을 쓰면 창유리가 흔들리고, 그 조그만 손으로 제 손가락을 움켜잡으면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였지요. 저는 아기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지만 엘리자베스가 가르쳐주었습니다. 저더러 천생 아빠가 될 운명이라며, 자신은 제가 아이들의 성장에 대해 더 많이 알게 할 책임이 있다고 했습니다. 엘리자베스는 크리스티안을 많이 그리워했습니다. 그건 자신 때문만이 아니라 킷을 위해서기도 했습니다. (198)

 

나만 그런 건지 몰라도, 이 정도면 도시가 엘리자베스에게 숨겨왔던 감정이 무엇이었는지 충분히 알 수 있지 않은가. 
차마 말하지 못하는, 그리고 바라볼 수밖에 없는 남자의 쓸쓸한 심정을 나는 저 담담한 글 속에서 읽을 수 있었다. 그런 심정은 글로 적혀 있기에 읽히는 게 아니라 글 속에 숨겨진 진실에서 우러나오기 때문에 읽히는 것이다.

 

#
레미 지로가 건지 섬의 북클럽 회원들에게 보낸 편지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고 싶다. 다만 레미가 등장한 이후 도시의 심정은 어떠했을지 짐작해 볼 필요가 있다. 그는 자기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곧바로 깨달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도시가 줄리엣에게 이제 막 품기 시작한 감정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도시와 줄리엣의 감정이 무르익어 가려던 결정적 순간에 때마침 건지 섬을 방문한 마크가 마차에서 뛰어내리며 줄리엣을 부르고, 도시는 망연히 마크와 줄리엣이 키스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도시는 여행가방 빌려줘서 고맙다는 얼척 없는 말을 남긴 채 서둘러 그곳을 떠난다.
캐릭터를 가만히 놔두지 말라는 소설작법이 떠오르는 장면이다. 여기서 여자들은 "안 돼~~~!" 라고 할 것이며, 남자들은 "이런 제기랄! 이 자식은 왜 하필 지금 온 거야?"라고들 하겠지.


하지만 여기서 도시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었다. 자기는 줄리엣에게 아무 것도 아닌 존재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저 마크란 놈은 한 눈에 보기에도 타고난 외모와 엄청난 재력을 지닌 사람인 것 같았을 텐데. 도시가 크리스티안이나 마크와 같은 매력적인 남자들에게 느낀 열등감은 줄리엣이 섬으로 오기 전 보냈던 1946년 4월 2일 편지에 여실히 드러난다. 그나마 도시의 감정이 확실하게 나타나는 문장이다.

 

건지 섬에 멀쩡한 남자는 별로 없었고, 재미있는 남자는 아예 없었습니다. 우리 대부분이 지치고 초라하고 수심 가득하며, 남루하고 신발도 없이 더러웠습니다. 우리는 패배자였고, 그렇게 보였습니다. 즐거움을 추구하기엔 시간도 돈도 에너지도 없었지요. 건지 섬 남자들은 매력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독일군 병사들은 그렇지 않았어요. 제 친구의 표현에 따르면 그들은 키 크고 금발에 잘생기고 피부는 구릿빛이었습니다. 흡사 신의 이미지였지요. 그들은 화려한 파티를 열고 명랑하게 열성적으로 어울렸으며, 차가 있고 돈도 있고 밤새 춤을 출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병사와 데이트하는 아가씨들 중 일부가 아버지에게는 담배를, 가족에게는 빵을 가져다주었습니다. 파티에서 돌아올 때면 롤빵, 파이, 과일, 완자, 젤리 등을 핸드백에 담아 집으로 가져왔고 그 가족은 다음 날 진수성찬을 만끽할 수 있었어요. (147-148)

 

도시는 또 다시 절망을 느꼈을 게 분명하다. 모르긴 몰라도 이제 엘리자베스를 잊고 새로 시작해 보려는데 어디선가 또 훤칠한(하지만 크리스티안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녀석이 나타나서 그녀를 나꿔채 갔으니 오죽 했을까. 과연 이런 게 자기 운명이려니 하면서 크게 낙담했을 법하다. 문득 건지 섬에 온 레미가 북클럽에서 '운명 예정설' 토론 중에 했던 말이 생각난다.

 

"만약 운명이 예정된 것이라면, 신은 악마입니다." (374)

 

도시는 레이가 겪었던 끔찍한 불행과 비극에 견준다면 자신의 이 사소하고 개인적 불행은 아무 것도 아니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전쟁이 인간에게 가져다 준 충격과 참상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레미의 저 짧은 말로도 충분히 대변된다.
도시는 그런 레미를 보살펴야 한다고 생각했겠지. 게다가 줄리엣은 애초부터 자기와 맞지 않는, 접근도 불가능한 존재였을 뿐이며 한때 흔들렸던 마음은 이제 정리해야 한다고 결심했을 것이다. 그런 그의 자조적인 마음을 둔감한 줄리엣은 알아채지 못하고 소피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나 썼다.

 

도시에 대한 너의 질문들은 방향을 잘못 잡았어. 킷한테 가야 한다고. 아니면 레미나. 요즘은 도시를 거의 만나지 못할뿐더러 아주 가끔 마주칠 때도 그 남자는 당췌 말이 없어. 그것도 로체스터(《제인 에어》의 남자 주인공)처럼 로맨틱하게 생각에 잠겨 침묵하는 게 아니고, 반감을 표하는 근엄하고 냉정한 침묵이야. 뭐가 문젠지 모르겠어. 정말 몰라. 처음 건지 섬에 왔을 때 도시는 내 친구였어. 함께 찰스 램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섬 여기저기를 산책했지. 나는 누구보다도 그 사람과 함께 있을 때 가장 즐거웠어. 그런데 해안 절벽에서의 그 끔찍한 밤 이후로 그가 입을 다물어버렸어. 어쨌든 나한테는 말을 걸지 않는다고. 지독하게 실망스러운 일이지. 서로 마음이 통하던 그 감정이 그립지만, 그 감정 역시 처음부터 나 혼자만의 착각이었다는 걸 깨달았어. (353)

 

도시가 왜 그렇게 근엄하고 냉정한 침묵을 지켰겠는가. 별 다섯 개 주려고 리뷰까지 쓰고 있는 소설책의 여주인공한테 할 만한 얘긴 아니지만, 정말 뭐가 문제인지 모르는 여자다.

 

#
이 책에서 도시가 줄리엣에게 쓴 편지는 사실 몇 편 안된다. 그 외에는 줄리엣이 서술한 도시나 다른 사람들이 도시에 대해 얘기한 내용들로 그의 상황과 마음을 짐작할 수밖에 없다. 도시의 속마음을 드러내는 문장이라고는 거의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도 나는 그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편지를 보내는 남자의 마음을 알기 때문이다.

 

레미를 만나러 프랑스로 갔을 때 도시는 줄리엣에게 조언을 구하는 편지를 쓴다. 그건 심지어 마크와 줄리엣이 키스하는 모습을 보고 난 이후다. 편지를 쓰면서 도시가 느꼈을 복잡한 심정을 상상하기는 어렵다. 아마도 그 편지는 줄리엣에게 자신의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던 마지막 몸부림이었을지도 모른다.

 

이후의 줄거리는 생략한다. 이건 책 줄거리 소개가 아닌 한 등장인물에 관한 고찰이므로 거기에 집중하는 게 나을 성싶다. 나는 변죽만 울리는 편지글들 속에서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도시 애덤스의 감정을 짐작해 보았을 뿐이다. 그리고 그걸 유추할 수 있을 만한 개인적 경험이 마침 책을 읽으면서 기억났기 때문에 서평이랍시고 끄적여 보았다.

 

들은 얘긴데, 이 소설이 곧 영화로도 만들어진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은 엘리자베스와 줄리엣에 누가 캐스팅될 것인가 궁금하겠지만 난 그들보다 도시 역할로 누가 선정될까, 그리고 이 남자의 모습은 영화에서 어떻게 표현될지가 더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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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02-12 2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판테라, 메탈리카도 아니고 임펠리티면 그당시 웬만한 건 다 섭렵했다는 건데ㅎ
정신분석적으로 편지 등의 욕망에 대한 분석글들 읽으면 정말 인간의 모든 것이 와장창하는 기분이 들더군요.
저는 알라딘 서재도 건지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전쟁과 떨어져 있는 모습이 아름답기도, 서글프기도 하고 그래요

돌궐 2015-02-12 23:29   좋아요 0 | URL
그랬죠. 그 아인 그랜드마스터급 메탈덕후였어요. 물론 팝도 많이 들었구요. 나중에 신촌 모롹카페에서 같이 헤드뱅잉도 했어요.ㅋㅋㅋ
와장창하는 정신분석은 언제 한 번 소개해 주세요. 재밌을 거 같아요.
음... 알라딘 서재가 건지라는 말씀은 의미심장 하군요.^^ 그럼 Agalma 님의 줄리엣은 어디에 계실까요?

AgalmA 2015-02-12 2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일을 다시 시작해서 서재리뷰 올리기가 쉽진 않을 거 같지만 줄리엣 다리도 다 사라지고 구두만 남기 전에 차곡차곡 걸어가려 합니다. 만날 것이 꼭 사람이 아닐 수도 있겠다 싶기도 하지만요...허헛;

돌궐 2015-02-12 23:59   좋아요 1 | URL
줄리엣 다리는 사라지고 구두만 남았네. - 난해한 시를 읽는 거 같습니다.ㅎㅎ
리뷰는 저 죽기 전에만 천천히 해 주세요.ㅋ

다락방 2015-02-24 1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정성스런 리뷰를 읽으니 이 책을 다시 읽고 싶어졌어요. `케이트 윈슬렛`이 나온다고 들은것 같은데, 어떤 역할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잘 읽었습니다, 돌궐님.

돌궐 2015-02-24 12:53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다락방 님, 덕분에 본문 읽다가 잘못 쓴 거 하나 고쳤네요.^^; 감사합니다.
2번 트랙은 <Since You`ve Been Gone>이었습니다. 이 노래도 참 좋아요.
내친김에 동영상도 바꿧어요. 리뷰에도 어울리는 거 같아서.. ㅎㅎ
 
묵자, 사랑과 평화의 철학 살림지식총서 469
박문현 지음 / 살림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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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논어> 3종(김원중, 신창호, 이을호)을 갖추고 천천히 읽고 있다.

구구절절 무릎을 치는 곳도 있지만 갸우뚱하게 만드는 내용도 있었다.

글이란 것은 그 흐름에 따라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저자의 논지에 수긍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원래 그런 걸 찬성하지 않는데도 그렇다.

따라서 이 사람과 다른 의견을 가진 또 다른 저자가 있으면 함께 읽어보는 것도 괜찮다.

 

마침 유가에 반대했던 묵자에 관심이 가길래 살림지식총서에 있는 짧은 개설서를 찾아 읽어 보았는데, 묵가 사상의 전반적인 내용이 잘 정리되어 있었다.

묵가는 대단히 진보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권위적이고, 틀과 체계를 중시한 사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래에 묵자가 유가를 비판한 내용을 조금 옮겨본다.

 

묵자는 유가의 이념에는 나라를 망칠만한 네 가지 정책(四政)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첫째, 하늘과 귀신의 존재와 작용을 믿지 않는 것. 둘째, 장례를 후하게 하고 상기(喪期)를 오래 하는 것. 셋째,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하고 춤추면서 음악을 즐기는 것. 넷째, 운명이 있다고 믿는 것이다.
묵자는 ‘사정’이 사회를 해롭게 하고 천하를 망치는 것이라 확신하고 비판한 것이다. 그러면서 이 네 가지 병폐를 고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한다. ‘천지’ ‘명귀’ ‘절장’ ‘비악’ ‘비명’의 주장이 그것이다. ‘사정’을 포함해 묵자가 유가에 대해 비판하는 사상은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다.


첫째, 유가의 비생산적인 성격에 대한 비판이다. 묵자는 말하기를 “유자들은 예악을 번거롭게 꾸며 사람들을 음탕하고 어지럽게 하고, 오랜 상기 동안 거짓 슬퍼함으로써 부모를 속인다. 운명을 믿어 가난에 빠져 있으면서도 고상한 척하고, 잘난 체하고, 근본을 어기고 할 일은 버리고서 태만하게 편안히 지내며, 먹고 마시기를 탐하면서 일을 하는 것은 게으르다. 그래서 굶주림과 헐벗음에 빠지고 얼어 죽거나 굶어 죽을 위험에 놓여 있으면서도 이를 벗어날 수가 없다”고 한다. 그러면서 묵자는 부잣집에 초상이 나기를 기다리며 일하지 않고 게으르게 사는 유자들을 가리켜 “거지와 두더지, 숫양, 멧돼지와 같다”고 공격한다. 『묵자』의 다른 편에서는 묵자가 유자들을 이렇게까지 극렬하게 비판하는 대목을 찾아볼 수 없다.


둘째, 유가의 형식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유자들은 말하기를 “군자는 반드시 옛 의복을 입고, 예스런 말을 써야만 인자(仁者)라 할 수 있다”고 한다. 이에 대해 묵자는 반문하기를 “이른바 옛 말, 옛 의복이라고 하는 것도 오늘날에 와서 옛것이 된 것이지, 처음에는 모두 새것이었다. 이렇게 보면 옛 사람이 입었던 의복과 옛 사람이 사용했던 말은 모두가 새로운 것이었으니 옛 사람은 모두 군자가 아니었단 말인가? 그렇다면 의복은 반드시 군자의 의복이 아니요, 말 또한 군자의 말이 아니어야만 비로서 어진 사람이라는 것인가?”라고 한다.

유가는 예악을 중시해 당연히 복장이나 형식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묵자는 하는 일을 중시해 형식주의를 배척한다. 따라서 군자가 되고 안 됨에 있어 복장이나 언어가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뚜렷한 근거도 없는 유가의 형식주의를 비판한 것이다.


셋째, 유가의 ‘술이부작(述而不作)’에 대한 비판이다. 유자인 공맹자(公孟子)가 말하기를 “군자는 창작하지 않고 옛것을 계승할 뿐입니다”라고 하니 묵자가 이에 대해 “옛날의 훌륭한 것은 계승하고, 지금 필요하고 좋은 것은 창작해야 좋은 것이 더욱 많아진다”고 반박한다. 공자는 “옛 것을 배워 권하기는 하되 창작하지는 않으며, 옛 것을 믿고 좋아하니 속으로 나를 노팽(老彭)에 비기는 바이다”라고 했다. 이를 보면 공자는 전통을 고집한 보수주의자였음에 틀림없다. 이에 비해 묵자는 『詩』와 『書』의 교육을 받은 인물로서 형식적인 예와 악을 반대할 뿐 『시』와 『서』에 대해서는 이것들을 자주 인용하고, “옛 성왕의 사적(事蹟)에 근본을 둔다”고 하여 옛 것을 숭상하면서도 현재 백성들의 이목을 중시한다. 그리고 그것으로 문제를 찾아내 개선하고, 마지막으로 실용화하려 한다. 이는 곧 ‘술이차작(述而且作)’이라 할 수 있다.
묵자는 유자들이 “군자는 옛 사람의 뒤를 쫓을 뿐 창작하지는 않는다(君子循而不作)”고 말한 데 대해, 활이나 배, 수레를 처음 만든 사람들이 모두 소인이라면, 그 발명자들의 뒤를 좇아 지금 그것들을 만들고 있는 사람들도 모두 소인이라며 논리적으로 반박한다.


넷째, 유가의 수동적 태도에 대한 비판이다. 공자는 말하기를 “발분하지 않으면 계도해 주지 않고 답답해하지 않으면 일러주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묵자는 유가의 이러한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태도를 비판한다. 즉, 공맹자가 묵자에게 “군자는 자기를 건사하고 기다리다가 물으면 말을 하고, 묻지 않으면 가만히 있는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종과 같은 것이니 두드리면 울리고, 두드리지 않으면 울리지 않는 것입니다”라고 말한 것에 대해, 임금이나 부모가 “좋은 일을 하면 칭찬하고, 허물이 있을 때는 잘못을 고치도록 직언하는 것이 어진 사람의 도리”라고 말한다. 묵자는 이러한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태도가 임금이나 부모를 이롭게 한다는 것이다.


이상에서 묵자는 유가의 공리적인 면이 부족함을 지적한다. 그리고 유가가 도덕적인 예와 악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반면, 경험적인 지식은 경시하는 태도, 즉 이지적 태도의 결핍을 지적하고 비판한다. 또 유가는 이상을 설정해놓기는 했지만 그 이상에 접근하는 방법에는 비교적 소홀하다는 것이다. 정리하면, 묵자는 이지적이고 진보적인 실용주의 원칙에 입각해 유가를 비판한 것이라 볼 수 있다. (17-21)

 

가만히 앉아 남이 알아주길 기다리고만 있으니 유가들은 죄다 게을러 터졌단다.ㅋ

따지고 보면 그것도 맞는 말 같고... ㅎㅎ

 

왜 춘추전국시대에 유가와 묵가가 서로 경쟁하며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고 하는지 조금은 알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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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2-09 2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논어를 제대로 파고난 뒤에 도가, 묵가 사상 순으로 진도를 나가야겠습니다. ^^

돌궐 2015-02-09 22:45   좋아요 0 | URL
저도 노장은 읽고 싶은데 묵자까지는 엄두가 안나요.^^;
뭐 죽기전에는 읽을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만 합니다. 읽어야죠.
 
한국 과학사 이야기 세트 - 전3권 한국 과학사 이야기
신동원 지음, 임익종 그림 / 책과함께어린이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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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림지식총서의 <묵자-사랑과 평화의 철학>을 읽다가 조지프 니덤 책까지 알게 되었다.

그러다가 생각난 책이 우리나라 과학사를 소개한 『한국과학사이야기』1-3 세트인데 예전에 써두었던 독후감이 있어서 옮겨온다.

 

#

초등생한테 맞게 나온 과학사 책이라고 하는데, 내용도 꽤 깊이가 있어서 청소년이나 어른이 보기에도 좋다.

 

각 권의 내용 구성을 살펴보자.

먼저 1권과 2권부터 보자(3권은 뒤에 나와서 독후감도 나중에 썼다).

 

먼저 1권에서 <하늘>과 <땅>을 주제로 천문학과 여러 가지 측량과학, 수학, 풍수지리와 지도, 광물지식, 파발과 봉화 등을 얘기하고 있고,

2권에선 <생명>과 <몸>을 주제로 옛날 동물과 식물, 곤충에 관한 주제와 우리나라 의학의 발달사를 다루고 있다.  

 

이렇게 간단히 말하면 무척 딱딱하고 지루하고 어려운 책일 듯한데, 읽어 보면 매우 재미있다.

물론 정보가 많이 담긴 책이라 한꺼번에 독파하기는 버겁겠지만 군데군데 재미난 이야기와 삽화가 있고, 문헌자료와 고미술품 같은 시각자료도 많이 담고 있어서 책 보는 즐거움이 있다.

좋은 어린이 책을 쓰기 위해 상당히 노력했음을 알 수 있겠더라. 다만 이런 거 찾아 읽는 애들은 별로 없다는 게 문제긴 하다.

 

글은 선생님이 쉬운 말로 가르쳐주는 형태로 썼고,

어려운 한자말이나 문헌제목들은 따로 풀이를 보여주면서 학생들이 쉽게 이해하도록 했다. 

각 장 끝에는 참고한 책이나 글들을 제시해서 좋았고, 문헌에 나오는 중요한 구절이나 옛이야기들도 많이 소개하고 있다.

 

이를테면 당시 동아시아 뿐만 아니라 세계 최고의 역법이었던 <칠정산> 내외편에 대한 문헌자료는 이렇게 인용하고 있다.

 

1432년 세종은 정인지에게 말씀하셨다.

'고려 때 원나라 수시력을 가지고 들어와 그걸로 예측했다. 조선을 세우고도 일식, 월식, 오성의 궤적을 계산하지 못해서 중국의 수시력을 그대로 썼다. 수학에 밝은 그대가 정초와 더불어 고전을 연구하고, 관측기구를 제작하여 이 문제를 풀도록 하라. 우리가 중국 문명의 수준에 도달했는데, 유독 하늘을 관찰하는 공부와 기구가 부족하구나. 한양에서 본 북극을 기준으로 해서 새 역법을 만들라.'

명령을 받들어 정초, 정흠지, 정인지가 고전을 공부하여 수시력의 수학적 이치를 깨달았다. 또 이천으로 하여금 각종 관측기구를 제작토록 했고, 장영실로 하여금 자격루와 옥루를 제작토록 했다.

마지막으로 이순지, 김담이 명나라에서 새로 들어온 역법과 아라비아 역법을 더 연구하여 마침내 1442년 우리의 역법 <칠정산> 내편과 외편을 만들어 냈다.

이윽고 예측을 했더니 딱 들어맞았다.

  

역법이란 건 결국 달력을 만드는 기술이라고 하겠는데, 달력이 없다면 농사일이고 뭐고 얼마나 불편했겠나.

근데 이 달력을 만들려면 별자리의 이동을 알아야 하고 그것을 정확하게 계산할 수 있는 수학도 발달해야 한다.

아무나 할 수 있는 그런 학문은 아니다. 그래서 역법과 수학을 제왕학이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해마다 중국에서 주는 달력을 받아서 쓰다가 <칠정산> 이후에는 조선만의 고유하고 더욱 정확한 달력을 만들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밖에도

고인돌이나 고구려 고분벽화의 천문 지식, 첨성대 이야기, 고려와 조선의 천재지변 기록, 자격루와 혼천시계, 한국 수학의 역사 따위 이야기들이 첫 번째 책 1부 <하늘>편에 실려 있다.

2부 <땅>편은 풍수지리부터 소개되었는데, 풍수지리는 아주 간략하게만 나오고 있고 대부분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같은 지도 이야기로 채웠다.

 

2권 1부 <생명>편에서는 암각화에서 시작해서 우리 역사에 보이는 동물과 식물에 대한 연구사를 소개하고 있다.

쌀과 채소, 김치 이야기와 감자 고구마 같은 구황작물 이야기, 인삼과 후추, 담배, 차 등 식물 분야와 매, 말과 소, 물고기와 곤충학, 옷감의 역사 따위를 소개하였고,

2부 <몸>편에는 삼국시대부터 시작한 우리나라 의학의 역사에 대해 소개한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이르면 중국과 달리 우리만의 '향약'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었고, 이런 전통이 결국 <향약집성방>과 <의방유취>를 거쳐 <동의보감>을 탄생케 했다고 한다.

잘 몰랐었는데 <의방유취>는 15세기 세계 최대의 의학 백과사전이었고, <동의보감>도 17세기 동아시아 의학을 집대성한 책으로서 한글 약 이름까지 쓰여져서 민중들한테까지 널리 의학을 보급할 수 있었던 저술이었단다.

의녀 이야기와 약방 이야기도 재미있었다.

 

책을 읽다 보니 "시치미 뗀다", "산통 깬다", "학을 뗀다"라는 말이 어디에서 유래했는지도 알 수 있었다.

어쩌면 나만 몰랐던 건지도 모른다. 인터넷 검색하면 다 나온다. 

  

하여튼 두 권 다 유익하고 재미있는 책이다.

학생들에게 조금씩 읽어주면서 역사 지식을 알려주기에도 좋겠다.

초등 고학년이 읽거나 읽어주기 알맞겠고(단 '정액', '성병'이란 낱말이 나오니까 참고), 중학생이나 고등학생들도 충분히 볼 수 있을 만큼 내용이 충실했다.

 

다음으로 3권을 살펴보자.

 

1부에선 우리나라 문화재에 담긴 과학을 잘 설명하고 있다.

성덕대왕신종, 석굴암, 금속활자, 청자, 한지, 수원 화성, 석빙고, 훈민정음 등이 나온다.

과학적 측면에서 문화재를 설명해 주니까 재미있었다.  

2부는 우리나라 근현대 과학 100년 역사를 다루고 있다.

언뜻 보니까 과학의 업적만 칭송한 게 아니라 통일벼 심기의 어두운 면이나 산업화 시대에 전태일 등 노동자들의 희생도 비중있게 다루고 있어서 꽤 균형잡힌 시각을 보여주고 있다.

 

1부에서 석빙고를 소개할 때 한겨울에 얼음 캐는 빙역으로 고생한 백성들 얘기도 나온다. 

노찾사의 <사계> 가사(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도 소개되어 있더라.

산업화 시대의 우리 과학사를 다룬 8장 마지막 단락은 이렇게 끝난다.

 

이처럼 우리나라의 산업화는 과학 기술계의 노력과 발전만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야. 어려운 환경 속에서 일했던 노동자들과 우리 국민들의 눈물과 피땀 어린 노력이 더불어 이루어진 거란다. (344)

 

또 2부 2장 우리 나라 개항과 개화기 시대 과학 기술에 대한 평가를 한 프랑스 학자의 글을 인용하여 평가한 부분도 눈여겨 볼만 하다.

 

지금까지 살펴본 개항과 개화기 시대의 과학 기술은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1888년에서 1889년 조선의 내륙 지방을 여행한 프랑스 지리학자이자 민속학자인 바라의 말로 끝을 맺자꾸나. 바라는 다른 서양인 여행자와 달리 자신이 매우 식견 높은 여행자라고 자처한 사람이야. 조선인의 불결과 게으름, 무지와 무능을 비난한 서양인 여행자와 사뭇 다른 견해를 내놓았지. 보통 한양이나 금강산만 보고 떠나는 여행자와 달리 최초로 한양에서 부산으로 여행길을 택한 인물이기도 해. 조선의 내면을 보려는 의도였어. 그는 『조선기행』에 여행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이 교육열이라고 썼단다.

 

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글을 쓸 줄 아는 이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교육이 얼마나 중요시되고 있으며, 만약 우리 유럽의 새로운 문물이 제대로 유입되기만 한다면 조선인들이 얼마나 급속도로 발전하게 될지 짐작할 수 있었다.

 

또 그는 대구에서 부산으로 이르는 여정에서 전봇대를 본 자신의 감상을 이렇게 표현했어.

 

바야흐로 우리는 한양에서 부산에 이르는 직통 행로로 접어든 셈이었는데, 놀랍게도 가도에는 일본이나 중국처럼 최근 설치된 것으로 보이는 전봇대들도 몇 개 세워져 있었다. 왠지 이 조선이라는 나라는 그 발전 도상에서 머지않아 자신들의 이웃 국가를 따라잡게 될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역사적으로 자신들이 가르쳐왔던 일본인들에게 비록 지금은 산업적으로나 예술적으로 뒤져 있는 조선인들이지만, 윤리적인 우월함 덕분에 가까운 미래에 반드시 그들을 따라잡고 결국엔 저만치 따돌릴 수 있을 것이다. 조선인 특유의 가족 제도와 강한 연대성, 그로 인한 끈질긴 노동력과 지난 몇 년 동안 이룩한 놀랄 만한 발전상을 감안하면 나의 이런 생각은 충분히 설득력을 가지리라. 저 가도에 늘어선 전봇대들이 말해 주듯, 문명의 연결선들이 조선이라는 나라의 땅덩어리 방방곡곡으로 퍼져 나갈 그날이 그리 멀지많은 않은 것이다.

 

바라는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의 문화적 자존심과 교육열, 가족애와 끈질긴 노동력에 매우 후한 점수를 줬어. 갓 가설된 전봇대를 보면서 말이야.

바라의 글을 보면, 근현대에 벌어진 우리 과학사의 놀라운 발전이 꼭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어. 다만 늦게 시작했을 뿐, 과학 기술의 급진적인 발전을 일으킬 만한 조선인 고유의 정신적 힘을 지니고 있었다는 거지. (211-213쪽)

 

2부 4장은 일제에 의해 우리나라 산업과 기술이 발달했다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있고, 5장에서 7장까지는 일제강점기에서 해방 이후 우리 과학자들을 소개하고 있다.

 

이렇듯 과학의 역사를 통해 우리 근현대사를 되짚어 볼 수 있어서 초등 고학년이나 청소년들이 보기에 괜찮을 거 같고 어른들이 읽기에도 재미있다.

각 장마다 끝부분에 더 읽을거리와 참고문헌도 소개하고 있어서 유용한 책이다.

 

위 3권에서 애써 책 속의 구절들을 인용한 이유는

1. 한국인들이 지나치게 자기비하에 빠지고 별다른 근거도 없이 스스로 한심한 족속이라고 평가절하하는 경우와

2. 우리나라의 경제 발전과 산업화의 성공을 마치 몇몇 얼토당토 않은 인물과 재벌 덕분이라고 주장하는 꼴이 보기 싫어서이다.


왜 어르신들은 스스로 피땀 흘려 일궈낸 성과를 인정하지 않고 박통과 새마을 운동과 재벌 타령만 하는 걸까.
교육열만 봐도 그렇다. 나라에서 교육정책을 제대로 이끌어 준 적이 과연 있기나 한가 말이다.

우리들의 이 '대단한' 교육열은 어찌 보면 조선시대부터 면면히 이어져 오는 전통인지도 모른다.

 

교육열 하면 떠오르는 김홍도 그림 하나 덧붙인다.

 

 

<자리짜기>, 김홍도,《단원풍속도첩》, 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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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병통치약 2015-02-08 2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조지프 니덤 책은 침만 흘리고 있고 그림으로 보는 중국 과학사만 쟁여 놓고 있습니다. ^^ 한국 과학사도 찔끔식 접하는데 이 책도 마음에 드는군요.

돌궐 2015-02-08 22:58   좋아요 0 | URL
니덤 책이 지금도 시리즈로 나오고 있다지요. 묵자한테 뻑가서 중국과학사를 연구했다는 얘기가 신선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