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이화의 한국사 이야기 4 - 남국 신라와 북국 발해 이이화의 한국사 이야기 4
이이화 지음 / 한길사 / 1998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남국 신라와 북국 발해> 편이다.

우리 고대사의 마지막 이야기, 다 알고 있는 거 같아도 새삼스러운 역사들이다.

 

원효, 의상, 최치원, 도선과 후삼국의 영웅들이 나온다.

견훤을 이 책에선 '진훤'이라고 하네. 甄자가 성으로 쓰일 때는 '진'으로 발음한다는 것이다.

왕건의 수하 유검필은 도대체가 패배를 모르는 맹장이었나 보다.

진훤도 끝은 초라했지만 희대의 영웅이었을 거다. 역사에 남은 패자(敗者)의 기록이 이다지도 화려한 걸 봐서는.

 

민심을 얻지 못하는 세력은 반드시 망한다는 걸 이 시대 역사도 보여주고 있다.

요점 정리와 같은 마지막 세 페이지만 옮겨 보자.

 

 

신라는 결국 골품제의 모순으로 붕괴되었다. 새로운 시대에 맞추어 골품제를 개혁하지는 않고 더욱 권력과 재부를 독점하려고 왕위 쟁탈과 권력 투쟁을 벌여 스스로 붕괴한 것이다. 신라의 왕족과 귀족들은 창조적 활동이나 생산능력 없이 사치와 방탕으로 일관하였다. 낮은 귀족인 6두품이나 지방의 호족들은 신분상승의 기회를 박탈당하여 불만이 점점 높아졌다.

 

귀족들은 광대한 토지를 소유하고도 더 늘리려고 토지를 불법으로 점거하고 약탈을 일삼았다. 승려와 사찰도 여기에 끼어들었다. 귀족들은 녹읍에서 가혹한 수취를 하였고 고리대라는 수법을 통해 악랄하게 농민들을 압박했다. 재부의 편제는 농민을 떠돌이로 만들었고, 유망민들은 도둑 또는 농민군으로 재편되었다. 낮은 벼슬아치와 호족들도 점차 신라의 왕실세력에서 떨어져나갔다.

 

불교의 선종은 낮은 귀족이나 호족과 연결되었고, 새로 일어난 유학자들은 새 질서로 새 가치관을 추구하며 새 사회 건설을 제창하였다. 또한 도참풍수사상은 일반 민중과 연결되어 새로운 세력을 키워나갔다.

 

신라의 실정(失政) 중에 무엇보다도 백제와 고구려 유민의 반감을 계속 유발한 사실을 꼽을 수 있다. 신라는 자체의 골품이나 귀족의 독점체제만을 고수한 것이 아니라 두 지역 주민의 중앙정계 진출을 봉쇄하였고, 지방의 성주·장군이 되는 길도 거의 열어주지 않았다. 이는 골품제 귀족제도 아래에서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의 장벽이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조세·공물·군역의 의무는 가혹하게 지웠다. 궁예와 왕건, 진훤은 모두 이런 분위기에 편승하여 등장하였다.

 

궁예는 지나친 복수심과 폭정으로 신라에 불만을 지닌 세력을 흡수하지 못하였고, 민심을 얻지도 못하였다. 진훤은 초기에 인심을 끌어모아 막강한 힘을 축적하고도 신라의 제도를 고수하는 따위 개혁을 도모하지 못하였고 경애왕을 죽여 아무런 정치적 효과도 거두지 못하면서 신라 주민의 반감을 불러 일으켰다. 후백제는 끝내 자체 분열의 길을 걸었다.

 

왕건은 궁예의 휘하에 있었으나 시운을 타고 고려를 건국하였다. 고려는 신라의 제도를 고수하는 따위 보수 성향을 보였으나 신라 주민의 민심을 모으는 데에는 성공하였다. 그는 최소한의 정복전쟁을 벌이면서 내정 개혁에 중심을 두었다. 왕건은 온건한 정책으로 신라의 낮은 귀족과 지방호족, 유학세력, 풍수세력, 선종세력을 끌어들이는 데에 성공하였다.

 

당시 지방의 성주와 장군은 도둑을 막는 따위 지휘권을 가지고 있었는데, 왕건은 이들을 효과적으로 이용하여 힘을 키웠다. 또 10분의 1세를 고수하여 호족과 농민들의 환심을 샀다. 그는 자신의 성품이 겸손하고 온유하다는 이미지를 심어주었고, 회유와 환심을 사는 데에도 능란하였다. 그는 신분이나 지역에 따라 여러 갈래로 겹혼인을 맺어 자기 세력을 만들었다. 결국 왕건은 이름과 실제에 걸맞은 군주가 되었고, 고려는 통일국가가 되었다. 고려는 한국사의 본격적인 중세사회를 열었다. (307-30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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