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력할 땐 아리스토텔레스 땐 시리즈
다미앵 클레르제-귀르노 지음, 김정훈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철학책이란 게 처음에는 적응이 잘 안된다.

일단 쓰이는 단어들이 일상 생활과 거리가 있는 편이고, 문장들도 개념적이어서 짱돌을 마구 굴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글 맥락에 익숙해지면 또 빠른 속도로 읽을 수 있기는 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만 읽어봤을 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좋아하는 철학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의 철학(윤리학) 전반을 이 책을 통해 파악하면서 더 좋아졌다.

내가 살면서 생각해왔던 문제들, 그리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고민하게 되는 삶의 질문들과 그 해법이 제시되어 있다.

리처드 세넷 <장인>을 읽으며 크게 공감했던 논조가 아리스토텔레스에서도 뚜렷하게 드러나서 재미있었는데, 알고 보니 세넷의 스승인 한나 아렌트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계승하고 있단다.

 

결국은 행동하라는 얘기다.

욕망과 쾌락을 위해 종사하는 행동을 하지말고, 행동 자체가 즐거움이 되는 경지에 이르라는 말이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즐겁게 실천하라는 것이다.

말이 쉽지 이게 사실 어려운 경지다.

하지만 "무엇을 할지 알 때까지 기다라는 것은 피아노 연주를 시작하기 위해서 피아니스트가 되기를 기다리는 격이다.(143)"

지금 바로 움직이고, 좋은 습관을 들이고, 자신을 성찰하라, 모자라지도 지나치지도 말라는 가르침은 늘 마음 속에 새겨둘 만하다.

 

그래서 정말 사는 게 다 지겹고 '무력할 땐' 아주 괜찮은 책인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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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에 인용하는 구절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위 책, 그러니까 다미앵 클레르제 귀르노 책의 구절들이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의 재인용도 있다. 이 경우 글자색을 다르게 했다.

 

 

그러나 '최고로 좋은 것'을 이상적으로 좋은 것으로 변형시키는 일은 건강한 욕망을 포기하는 일이 되기 쉽다. 이렇게 지나친 엄격함 때문에 우리는 완벽한 모델만을 따라 맹렬하게 달려가면서 다른 것들은 그것의 창백한 모방일 뿐이라고 여기고 추구하는 것을 포기하다가 진정 좋은 것들을 잃게 되는 것이다. 행복을 위한 모든 것이 우리에게 있는데 말이다. 아아! 더 완벽하고 더 크고 더 위대한 다른 것을 향해 가야 한다고 믿은 나머지, 지나친 열의 때문에 우리는 기회를 놓쳐버리고 불행을 위해 노력을 하고 만 것이다.

얼마나 많은 이가 진정한 사랑을 기다리고 있다는 핑계를 대며 사랑을 하지 않으려고 했던가? 노래하는 내일의 약속을 만족시키려고 얼마나 많은 행복한 시간을 단념했던가? 저 대단한 것들을 쫓으려는 갈망은 우리를 세상에 대한 혐오 속에 빠뜨리고, 그렇게 하여 좋은 것들 하나하나가 주변의 평범함과 시시함 속에 둘러싸인다. (50)

 

그러나 그 반대 또한 진실이다. 때로 행복의 추구는 만일 우리가 강박 때문에 눈이 멀지 않았더라면 결코 탐내지 않았을 것들을 욕망하게 만든다. 어떤 사이클 선수는 확실한 승리를 위해서 스테로이드를 사용하자는 제안에 동의한다. 자신의 전 생애의 성과가 그 승리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떤 혁명가는 자신의 정적을 가차 없이 제거한다. 그들은 완벽한 사회를 만드는 일을 방해하는 장애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날씬해지려고 하다가 병에 걸리는 소녀도 있다. 예뻐지는 것이 좋은 것 중에 최고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열망 가운데 어떤 것도, 이런 욕망 가운데 어떤 것도 그 자체로 비난을 받을 만한 것은 아니다. 반대로 이는 그저 자신에게 맞는 가장 좋은 것, 다른 모든 것보다 더 중요한 '최고로 좋은 것'의 자리에 있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를 보여줄 뿐이다. (50-51)

 

"즐거운 것들을 지나치게 추구하는 사람, 혹은 즐거운 것들을 지나치게 추구하되 선택을 통해 추구하는 사람, 그것도 즐거움으로부터 나오는 것 때문이 아니라 즐거움 자체 때문에 추구하는 사람, 바로 이런 사람이 무절제한 사람이다." (『윤리학』, Ⅶ, 1150a 19-21) (62)

 

가장 굳건한 우정은 그러니까 오랜 만남을 먹고 자라나는 것이다. 우리가 사실에 따라서 다른 사람을 평가하면 갑작스레 실망을 한다거나 갑자기 싫증을 느낀다거나 하는 일이 줄어들 것이다. 그래도 매일 아침 같은 얼굴을 다시 보는 일에 익숙해지고 그게 습관이 되면 즐거움이 고갈된다. 즐거움은 모자람을 먹고사는 법이다. 그래서 더 이상 모자람이 없는 사람을 오래 사랑하기가 힘든 것이다. (66)

 

만일 어린아이가 스스로 자기를 평가하는 것을 아주 어려워한다면,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평가를 몹시 필요로 한다면("엄마, 이것 좀 봐요!"), 이는 그가 아직은 많은 부분에서 미완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가 미완성의 느낌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삶이 아직 그에게 완성의 기회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는 아이에게 유효한 것이 여전히 우리에게도 해당된다. 어른이 되었다고 해도 우리는 자신의 삶이 불만스러운데, 지금 자신의 모습이 우리에게 예정되어 있다고 느끼던 모습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의 불만족은 언제나 끈질기게 찾아드는 이런 미완성의 인상에서 비롯된다. 우리가 살게 될 것이라고 믿던 것과는 다른 모습으로 살고 있기에 불쾌한 느낌이 더욱 오래도록 이어지는 생활을 하고 있다. 우리 안에 있는 무언가는 우리가 행동을 통하여 자신을 펼치고 장애물이 있더라도 자신을 표현하기를 요구한다. 우리는 자신의 현재 모습이 우리가 될 수 있는 모습과 아직 맞지 않는다고 느끼는 것이다. (84-85)

 

"포부가 작은 사람은 본인이 좋은 일들을 할 만한 사람임에도 자신이 할 만한 것들을 스스로 박탈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그 좋은 일들을 할 만하지 않다고 평가함으로써 어떤 나쁨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자기 자신을 모르고 있는 사람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실제로 좋은 것이었으며, 자신이 할 만했던 그것들을 추구했을 테니까. 그래도 이들은 어리석은 사람으로 보이기보다는 위축된 사람으로 생각된다." (『윤리학』, Ⅳ, 1125a 20-24)

그러므로 이런 열등감은 자기 자신을 제 가치로 평가하지 못하는 무능력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이런 자기 비하는 다른 사람에게 지나친 중요성을 부여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우리는 모든 것을 내어주면서 자신을 숨기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자비와 호의를 불러일으켜 우리가 자신을 사랑하는 것보다 그가 우리를 더욱 사랑하도록 만들기를 소망한다. 친절은 결코 공짜가 아닌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남에게 모든 좋은 것을 바쳤으니 남도 우리를 사랑해야 한다는 의무를 부과하는 어떤 방식이라는 점에서 스스로 속죄소가 되고자 한다. 우리는 그리하여 우리 자신을 되찾아달라는, 자신에 대한 저평가를 그의 사랑으로 회복시켜달라는 무거운 부담을 그에게 부과하고 있는 것이다. (96-97)

 

"포부가 큰 사람은 (……) 다른 사람에 의존해서 살 수 없다. 그렇게 하는 것은 노예 같은 일이니까. 그런 까닭에 모든 아첨꾼은 고용된 일꾼이며 비천한 사람들은 아첨꾼인 것이다. 포부가 큰 사람은 쉽게 경탄하는 사람도 아니다. 그에게는 어떤 것도 대단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또 나쁜 일들을 오래 기억하는 사람도 아니다. 지난 일들을 기억해서 불편해하는 것, 특히 나쁜 일들에 대해 그러는 것은 포부가 큰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니니까. 차라리 눈길을 주지 않는 것이 포부가 큰 사람의 특징이다. 그는 또한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는 자도 아니다. 그는 자기 자신에 관해서도 타인에 관해서도 말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칭찬을 받는 일에도 다른 사람이 비난을 받는 일에도 모두 신경을 쓰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칭찬하는 사람도 아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험담을 하는 사람도 아니다. 심지어 적이라 하더라도, 오만 때문이 아니라면 그는 험담하는 사람이 아니다." (『윤리학』Ⅳ, 1125a 1-9) (98-99)

 

당신이 싫어하는 사람을 떠올려서 곰곰이 생각해보라. 당신이 아무런 관심도 없는 누군가를 싫어하기는 아주 어렵다는 사실을 알겠는가? 미움은 뭔가 모숩된 사랑을 많이 닮았다. 싫어하는 것도 일종의 관심이다. 다른 이에게 해를 끼치고 악착같이 뒤쫓는 것, 이것은 상대로 하여금 자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만일 우리를 괴롭히는 사람이 우리에게 몹시 심하게 대한다면, 이는 그가 우리를 무시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104)

 

만일 탁월성이 이기적인 것이라면, 이는 탁월성이 다른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우리가 시도한 일이 거둔 성공 속에서, 우리 안의 무언가를 자유로이 펼쳐서 이루어낸 행동의 즐거움에서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행동하기에서 즐거움을 누리는 것으로 충분한데 왜 쾌락을 위해서 행동을 해야 하겠는가? (107)

 

그러므로 실천은 우리가 하고 있는 일에서 즐거움을 누리는 태도이다. 실천에는 행위 전체에 외적인 목적으로 부가될 즐거움 같은 것이 없기 때문에 실천은 우리의 타고난 무절제와는 아주 거리가 멀다. 즐거움은 행위 자체에 있고, 그 자체로 충분하며, 그것 이외의 다른 목표나 외적인 목적은 없다. 바로 이것이 실천이다. 춤추는 즐거움, 헤엄치는 즐거움, 글 쓰는 즐거움, 기도하는 즐거움, 그러니까 행동하는 즐거움.

"제작은 그것 자체와는 다른 목적을 갖지만, 실천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실천의 목적은 바로 잘 실천하는 것 자체이니까." (『윤리학』, 1140b 6-7) (110)

 

우리가 활동에서 느끼는 즐거움은 집중력을 생기게 하고 주의가 흐트러지는 것을 막아주기에 한층 더 일이 잘 진척되도록 해준다.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은 실제로 산만한 경향을 보인다. 날아다니는 파리만 봐도 눈이 돌아가고 틈만 있으면 일에서 벗어날 구실을 찾는다. 그러고서는 뭔가 도락가 근성 같은 것이 생겨나더니 구상 단계에만 즐거움을 주었던 많은 계획 속으로 스며들어간다. 행동을 시작하자마자 지겨움이 우리를 사로잡는다. 우리가 사실 아주 좋아했던 계획인데도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실행하려는 행동이 길어지자마자 갑자기 그 매력이 사라져버린다. 음악가가 되거나 6개 국어를 유창하게 말할 수 있다면 누구나 좋아할 것이다. 이는 잘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연습은 금세 지겨워지고 매일 훈련하기도 지친다. 얼마간 시간이 지나면 맘먹고 산 기타는 한구석에 처박혀 있고 교본은 책장 깊숙이 어딘가로 사라져버린다. 기다렸던 즐거움이지만 너무 오래 기다렸던 것이다.

만일 엉터리로 기타를 치거나 외국어를 더듬거리는 일에서 처음부터 즐거움을 느낀다면, 결과는 분명히 달라졌을 것이다. 언어를 가장 잘 배우는 사람은 몇 마디 말을 배우자마자 우스꽝스럽게 보이는 것을 겁내지 않고 배운 것을 써보는 일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즐겁게 들이대고, 구문이나 문법을 완벽하게 구사하는 단계를 기다리지 않고 대화를 시도한다. 그는 서툰 아마추어 음악가가 소품곡 연주를 기대하며 오랫동안 시끄러운 소음을 만들면서 좋아라 하듯이 그렇게 즐거워한다. 그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서 이미 즐거움을 누리고 있기 때문에 다른 것으로 넘어갈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주의가 흐트러질 일이 없으니 실력도 빠르게 향상된다. (113-114)

 

… 그리하여 인정을 받고자 하는 강박적인 욕구로 일을 하는 공인公人은 명성을 얻을 수만 있으면 됐지 그 명성이 어디서 오는지 잘 알아볼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다. 이 사람의 눈에는 텔레비전에 나와 한심한 미사여구를 연발하며 허세를 부리는 즐거움이 교양 있고 성숙한 대중을 만나는 더 까다로운 즐거움과 동등한 것으로 보인다. 더 나쁘게는 만일 재주가 모자라 더 어려운 형태의 인정을 바랄 수 없게 된다면, 그는 주목을 얻기 위해 기꺼이 사악한 명성으로 자신을 만족시키려고 할 것이다. 참을 수 없는 무명의 그늘 속에 머물러 있느니 차라리 강경한 사람으로 통해서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그에게는 더 나은 일인 것이다. (116)

 

… 우리가 존재하는 모든 시간 동안 그 삶을 통해서 행동하고 있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 그것이 무엇이건 우리가 결정을 내리자마자 행위의 자리가 생겨난다. 아침에 빵집에 빵을 사러 가겠다는 결정이나 결혼을 하겠다는 결정, 세차를 하거나 텔레비전을 끄겠다는 결정, 이 모든 것 또한 행위이다. 그 속에서 우리의 탁월성을 나타낼 수 있는 행위인 것이다. 행위라고 해서 뭔가 위대하고 놀라운 것을 상상할 필요는 전혀 없다.

오히려 우리 일상이 수많은 행동의 기회를 제공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하지만 행동하는 것은 단순한 결정 이상의 것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활동 덕분에 얻을 수 있는 다른 뭔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를 위해서 활동을 하기로 결정할 줄도 알아야 한다. 우리가 해내는 일을 행동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도록 제공된 기회로 여기자. 간단히 말해 우리는 외적인 목표의 신임장을 기다리지 말고 우리가 시도하는 행동 하나하나에 고유한 가치를 부여해야 한다. (118-119)

 

인정하자. 행위는 어떤 위험, 우리 자신에 대한 기대가 착각이었음을 발견하게 될 위험, 우리가 우리 자신의 열망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될 위험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것이 정말 위험인가? 그래 좋다. 우리가 하는 행위는 우리가 지닌 열망의 묘비이다. 그러나 행위는 놀라운 계시자이기도 하다! 실패에는 많은 가르침이 들어 있다. 우리는 시련을 겪으면서 다른 어떤 방법보다도 훨씬 효과적으로 자신에 대해 알게 된다. 우리가 행위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행위를 하면서 자신을 노출할 위험을 무릅쓰기 때문이다. 행위의 패는 언제나 승리한다. 서슴없이 감행한다면.

행동하는 수고를 감행하기 위해 무엇을 할지 알 때까지 기다리는 것은 피아노 연주를 시작하기 위해서 피아니스트가 되기를 기다리는 격이다. 그러나 우리의 성향을 만드는 것은 우리가 하는 행동이다. 그러므로 더 분명히 알기 위해서 이 성향을 수정하는 일은 먼저 행동하기를 요구한다. 자신의 탁월성을 발견하기를 원한다면 행동으로 시작해야 하지 탁월성을 지닐 때까지 기다렸다가 조금 행동해보겠다는 식이어서는 안된다.

구체적으로 말해 이는 행동의 기회는 모두 붙잡을 만한 가치가 있다는 뜻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는 많은 활동은 스스로 선택했던 것이 아니다. 우리가 선택했다고 해도 깊이 생각하지 않고 대충 순응하여 그렇게 한 것이다. 살다 보면 눈에 띄는 대로 일을 맡게 되고 일이 요구하는 대로 응하게 된다. 직업도 그렇고 가정생활의 이런저런 요구에서도 그렇다. 비록 그것들이 꼭 자기에게 딱 맞는 일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이런 행동의 계기는 자신을 시험할 소중한 기회이다. 탁월한 사람처럼 행동할 수 있는 기회이다. 그것은 우리가 지닌 탁월성의 시험대다. 행동을 하는 덕분에 우리는 마침내 자신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를 진정으로 알게 된다.

물론 이는 쉬운 일이 아니다. 자신의 행위에서 얼굴을 돌리게 만들고 지금 맡아서 하는 활동에 쉽게 전력을 다하지 못하게 하는 많은 장애물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장애물을 제거하는 것, 아주 작은 행동 하나에도 차고 넘치게 마음을 쏟는 것, 바로 이것이 우리가 배워야 할 일이다. (142-144)

 

… 아마도 똑같은 모습을 바라보는 습관은 마침내 그 모습을 지겨운 것으로 만들어버릴 것이다. 보는 습관은 바라보는 일을 분명 그만두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더 잘 보도록 도와주기도, 오랫동안 눈에 띄지 않았던 세부사항과 결함으로 보였던 것에서 갑자기 새로운 매력을 찾아내 즐거워하도록 도와주기도 한다. 처음에는 추해 보였는데 익숙해지면서 점점 진정한 깊이를 지닌 모습을 보이는 경우도 있다. 처음에 눈길을 사로잡은 표면적인 아름다움을 지나 점점 그 사람의 존재에 깃들어 있는 매력을 바라보는 일에 빠져드는 것, 이것이 진정한 사랑이 아닐까? (150-151)

 

당신이 갖고 있는 새로운 습관을 하나 생각해보고 활기찬 계획을 세워보라. 모호한 결심만 해두고서 만족하지 마라. 정확하게 계획을 세워두면 당신이 열망하는 것에 그만큼 더 애착을 갖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운동 습관을 들이고 싶다면, 먼저 일주일에 몇 차례 그것을 할 예정인지를 스스로 물어보자. 그런 뒤에 달력 위에 표시해두고 일정표를 조정하여 바꾸지 마라. 습관이 되지 않은 일은 강한 규칙 위에다 받쳐놓아야 한다. 어떤 행위가 습관이 되기를 원한다면, 그 행위를 의식으로 만드는 법을 알아야 한다. (157-158)

 

당신이 버리고 싶은 습관을 생각해보라. 그것이 또 다른 습관과 연결되어 있는가? 때로 나쁜 습관을 버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습관과 슬그머니 연결되어 있는 다른 습관을 공격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계속 군것질을 하는 습관은 텔레비전을 보는 습관과 연결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 후자를 먼저 떨쳐내지 않는다면 전자를 떨쳐내기가 아주 어려울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전략적으로 잘 고른 한 가지 습관을 끊으면 다른 많은 습관도 없앨 수 있다. (158)

 

그러므로 우리가 길러야 하는 감성은 요컨대 심미적인 감성이다. 사정이 이렇다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예술을 부단히 접하는 것을 가장 효과적인 수양의 수단으로 보았다는 것은 전혀 놀랍지 않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 모든 윤곽, 선, 형태, 색깔을 느낄 수 있는 법을 배우고자 한다면 그림 연습보다 더 좋은 것이 무엇이겠는가? 세상을 보고, 정말로 그것에 주의를 기울이고, 너무 바쁜 행인처럼 눈이 대상의 표면을 스치고 지나가는데 그치지 않으려면 이보다 더 좋은 것이 무엇이겠는가?

마찬가지로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은 살아가면서 겪지도 못할 많은 상황이 눈앞에 지나가는 것을 본다. 이렇게 해서 그는 오래도록 도움이 될 일련의 삶의 정경을 축적하고, 이는 인간관계의 한없는 복잡성을 성급한 판단으로 빈약하게 만들어버리는 유혹으로부터 그를 지켜줄 것이다. 문학은 경험을 주지는 않는다. 문학에서 미성숙의 치유책을 찾을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위험할 것이다. 문학은 우리가 해보지 않은 어떠한 경험도 대신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이미 해본 모든 경험을 훨씬 잘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주고, 그리고 우리가 나중에 겪을 경험도 더 잘 느낄 수 있도록 해준다.

바라보는 법을 배우는 가장 좋은 방법, 그것은 역시 손을 써서 눈을 기르는 것이다. 그저 감상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몸소 그림을 그리면서 우리는 능동적으로 보는 법을 배운다. 어떤 형식의 예술에서든 작품을 가장 잘 평가할 수 있는 사람은 실제로 해봐서 아는 사람이다. 평가를 할 수 있으려면 만들어봐야 한다. 작가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말의 균형을 더 잘 느끼기 위해 시도하는 글쓰기, 음악가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소리의 조화로 귀를 교육하기 위해 해보는 악기 연주, 무용가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몸을 다르게 볼 수 있기 위해 추는 춤. (165-167)

 

우리가 내려야 하는 결정은 긴급히 내려야 하는 결정이다. 최선의 결정이라고 해서 언제나 절대적으로 가장 좋은 결정은 아니다. 더 많은 시간을 들였으며 아마도 더 잘 숙고했을 테고 최종적으로 결심했던 것과는 다른 쪽을 택했을 것이다. 돌이켜보면서 후회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결정을 오래 기다릴 수 없는 상황일 때에는 너무 꼼꼼하게 따지면서 망설이다가 길을 잃지 않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다. 행동해야 한다면 확실해지기를 기다라는 것은 최선의 선택지가 아니다. 적절한 순간을 놓쳐버릴 위험이, 행동의 기회가 눈앞에서 사라져버릴 위험이 있다. 행동에는 제 때가 있다. 이는 언제나 완벽하게 무르익은 숙고에 알맞은 그런 때는 아니다. 이런 불확실성을 받아들이는 것, 실수를 저지를 위험을 무릅쓰는 것, 저 '행동하기'란 이런 것이기도 한다. (183)

 

습관의 도움을 받으면 행동하면서 생각하는 것이 점점 더 수월해진다. 생각이 행동을 앞서는 대신에 생각이 마침내 행동에 합류하고, 생각의 선율이 행동에 깃든다. 처음에는 행동하기 전에 생각하는 데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고 나면 조금씩 우리의 감정적 성향이 버릇을 들인다. 이성의 노력에 더욱 너그러워지고 이성에 반대하는 대신 이성을 보조한다……. 바로 이것이 실천적 지혜를 가진 사람의 커다란 장점이다. (207-208)

 

굳이 헤아려보지 않아도 얼마나 많은 결점이 사실은 탁월성이 과하게 된 결과인가? 비겁함은 결점이지만 아무 싸움에나 앞뒤 안 가리고 달려드는 무모함이 더 낫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인색함은 결점이지만 돈을 물 쓰듯 하는 낭비벽이 더 권할 만한 것도 아니다. 우둔함은 결점이지만 거드름을 피게 만드는 거만함은 그에 못지않은 어리석음이다. 우리는 종종 어떻게 하기를 너무 바라던 나머지 아무것도 안 하기로 결정했을 때 못지않게 우스운 꼴이 되고 만다. 얌전함이 보기에도 딱한 심한 수줍음이 되고 경건함이 광신으로 변하고, 문예에 대한 사랑이 속물 교양이 되고 지나친 친절이 천한 아첨을 닮아간다.

"함께 삶을 통해서, 또 말과 행위를 서로 나눔으로써 이루어지는 교제에서, 즐거움을 위해 모든 것을 칭찬하고 반대는 절대로 하지 않으면서 누구를 만나든 괴로움을 주지 않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속없이 친해지려는 사람'들로 보인다." (『윤리학』Ⅳ, 1126b 12-14) (219)

 

시험을 준비하는 학생이 멋지게 합격하려는 야심 때문에 실패하는 경우도 가끔 있다. 보기에 딱한 일이다. 좀더 소박한 야심을 가졌다면 크게 고생하지 않고 확실히 합격했을 텐데 말이다. 당신은 어떤가? 그저 잘하려고 노력하기보다 최고가 되기를 바라는 경향이 있지는 않은가? 절도를 지키는 것, 이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어느 정도인지를 분명하게 평가하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우리는 언제나 더 잘하려는 열망을 가져야 하겠지만 그 열망만큼 능력도 가지고 있어야 한다. (227)

 

탁월성의 원동력은 우리가 준수해야 하는 이름 없는 법이 아니라 우리가 모방하고 싶어 하는 영웅이다. '의무'도 '복종'도 전혀 없다. 공손함은 잊어라! 탁월성은 우리의 눈에 뛰어남과 아름다움의 모델로 나타나는 이에게 필적하려는 열망이다. 그것은 정복의 기백과 열정이 넘치는 신나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자기도 모르게 영화나 소설의 인물과 자신을 동일시할 때 느끼는 것과 똑같은 열정이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런 완성의 모델이라고 말하는 실천적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연구실에 틀어박힌 현자와는 전혀 다르다. 그는 어린 시절 우리가 선망한 영웅을 훨씬 더 많이 닮았다. 규측을 부과하는 자가 아니라 우리의 규칙이 되는 자이다. "만일 그가 나라면 그는 어떻게 행동할까?" 부디 우리의 모델이 되는 사람에게 필적하고 싶게 만드는 이런 감탄의 능력을 우리가 온전히 간직하게 되기를. (236)

 

 

 

좀 많았지만 힘써 옮겨보았다.

덕분에 조금 무기력에서 벗어난 것처럼 느낀다.

이런 게 바로 '행동하는 미덕'일 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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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 2 - 아스카.나라 아스카 들판에 백제꽃이 피었습니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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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건축학 개론>을 보면 수지가 나중에 지어달라며 이제훈에게 집 설계도를 하나 그려 준다. 이 어설픈 도면을 남주인공이 책상에 있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권에다 꽂아두었다가 빼보는 모습이 나온다. 깨알같은 고증이다. 90년대 초중반 쯤 대학생들 책상에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한 권 정도는 있었으니까. 게다가 건축학도라면 그 책에 나오는 유홍준 교수의 저 감은사지 석탑에 대한 격정적인 감상(아, 감은사 탑이여, 아, 감은사 탑이여를 되뇌이던)을 아주 인상 깊게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그 이전에 어떤 책에서도 경주 촌구석 들판에 서있는 쌍탑에 대해 그 정도 파토스를 드러내며 비평한 예가 없었으니까.

 

나도 학창 시절에 이 답사기들을 읽었다. 답사 가기 전에 유홍준 교수는 뭐라고 했나 궁금해서 읽었던 거 같다. 공감되는 것도 많았고, 마치 희대의 만담가가 답사 현장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풀어놓듯이 써내려간 필력에 많이 놀랐다. 무엇보다도 문화사의 시각에서 유물들을 설명하고 있는 점이나, 미술사 논문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작품에 미학적 가치들을 부여하는 태도'에 속이 다 시원했었다. 때때로 적당한 문학작품과 시가 인용되었고, 곳곳에 적절하면서도 위트 있는 비유가 사용되었다. 이런 글쓰기는 보통 내공이 없고서는 거의 가능하지 않은 것이고, 어설프게 시도했다가는 비웃음만 살 게 뻔한 방법들이다. 그런데 그는 이것을 성공적으로 해냈다. 이 때문인지 답사기는 많은 이들의 공감과 환영을 받았고, 지금까지 시리즈책을 출판할 수 있는 힘을 얻었던 것이다.

 

나도 유홍준의 답사기를 3권까지는 가지고 있고, 나머지 책도 통독은 못했지만 조금씩은 읽어 보았다. 최근에 나온 제주도편은 나 역시 잘 모르는 곳이라서 오랜만에 구입해서 완독했다. 아마 제주도편이 내가 읽었던 유교수의 답사기 가운데 가장 재밌게 본 책일 것이다. 제주도는, 유홍준 스타일의 저술이 너무나 잘 어울리는 그런 곳이다. 유물들이 제주도라는 땅과 자연과 인간과 함께 어우러지며 갖가지 이야기들을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유물들만 따로 보아서는 알 수 없고 깨달을 수 없는 가치와 상징들이 저자의 능숙한 스토리텔링으로 모양을 갖추었다. 나로서는 다 읽고 나서 제주도를 다시 가고 싶었던 그런 책이었다. 답사와 기행책에 이만한 찬사는 없을 것이다. "가고 싶게 만드는 책"

 

그리고 올 여름 일본편 답사기가 나왔다길래 내심 궁금하던 차에 도서관에 새로 들어온 걸 보고 2편만 빌려서 쭉 읽어 보았다. 일본의 교토와 나라, 오사카를 가본 게 벌써 옛날이다. 그때의 기억들이 되살아나더라. 기행문으로서 일본 아스카·나라편 답사기는 또 다른 스테디셀러가 될 것이다. 아스카와 나라의 문화유산들을 이만큼 '감상'이 아닌 '해설'로 소개한 기행문은 드물기 때문이다.

저자는 나라시대까지 일본 고대의 역사를 제법 충실하게 서술하고 있는데, 딱딱한 역사서를 보는 것보다는 훨씬 빨리 그 대략의 흐름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필요한 부분에서는 되도록 상세히 서술하여 일본의 고대사. 아스카~나라시대까지 역사를 일람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건 교양서로서 매우 큰 장점이다. 어차피 세세한 내용들은 전문서나 논문을 참고해야 하겠지만 웬만한 교양인들의 지적 허영을 충족하기 위해서는 이만한 책도 없다.

다른 답사기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글쓴이는 아스카와 나라의 문화유산들의 겉모습만을 말하지 않는다. 이들을 담고 있는 지리와 역사를 배경으로 삼아서 건축과 미술품을 설명하고, 나아가 문학과 인간을 이야기하며, 오다가다 지나는 자연까지 탐미한다. 마치 작정하고 '모든 것'을 말하고 있다는 느낌마저 든다. 장소를 보고 인간을 본다. 학술적인 글에서는 쓰기 힘든 심미적인 감상이 적극 쓰여졌고 지루해질 때쯤이면 흥미로운 야사나 개인적인 여담을 가미하였다. 이런 매력적인 글쓰기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타고난 감각이 있어야 한다. 솔직히 눌변에 글도 빨리 잘 못쓰는 나는 이렇게 할 수 있는 저자가 부러워 죽겠다.

 

저자는 글 속에서 걸핏하면 미술사학자, 미술사가라고 말하지만 한편으로 그는 미학과(학부)와 동양철학과(박사)를 졸업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거 같다. 유물과 예술을 보는 그의 시각은 미술사학자라기보다는 미학자나 철학자에 가까울 때가 많기 때문이다. 이것은 저자의 책에서 작품의 치밀하고 정교한 분석보다는 직관적, 심미적, 문화사적, 사상적 해석이 더 자주 보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따라서 똑같은 설명을 해도 지루하지가 않고 금방 몰입할 수 있는 장점이 있는 반면, '있어 보이는' 문체에 쉽사리 경도되면서 비판 정신이 수그러드는 단점도 있다. 하지만 전공자들이야 빠순이가 아니니까 너무 나간 이야기나 헛점들을 잡아내는 게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닐 듯하다.

기본적으로 좋은 책이다. 정말 거의 다 좋다. 일본의 역사와 문화를 통해 새삼 우리 자신을 다시 보게 해주었고, 일본도 물론 다시 보게 해 준다. 하지만 옥의 티 몇 가지만 지적하자면

 

아스카 지역의 <선악의 이면석> 등 돌조각과 연관시켜볼 만한 게 없다고 하는데(109) 미륵사지에서 발굴된 석상이 아스카 지역의 돌조각들과 유사하다고 일본인 스스로 지적한 바가 있다(가종수·기무라시게노부, 『한국석상의 원류를 찾아서』, 2011). 또 일본과 한국의 정원을 비교하며 이야기한 부분에서 우리더러 좀 '정리하면서' 살자고 권고하는 건(182) 괜한 오지랖이다. 한국인은 한국인답게 살다가 죽으면 된다. 이른바 '막사발'을 일본인들이 '다완'으로 재발견하여 숭배해 마지않는 건 참 재미있는 현상이긴 하다. 한국인들은 그것을 만들어서 썼다. 그리고 그것을 '버렸다' 그네들은 거기에 연연하지 않았던 것이다. 다완들은 스님들이 썼던 그릇이었다는 얘기도 있다. 강을 건너면 뗏목을 버리는 이런 행태야말로 진정한 선승의 태도 아닌가. 일본인들은 그릇에 이름 붙이고 의미부여하기에 급급했다면(그릇 하나와 성을 바꿨다는 얘기도 있다) 한국인들은 한낱 물건인 것에 초연했을 뿐이다.

<몽유도원도> 설명에서는 이상한 연극이론을 갖다 붙이던데(198), 하나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몽유도원도는 두루마리 형태로 (오른쪽부터) 펼쳐 보는 그림이다. 돌돌 감겨 있던 두루마리를 펼치기 시작하면 '몽유도원도'라는 안평대군의 글씨와 찬문이 나오고 이어 역동적인 기암괴석 한 가운데 도원이 그려진 장면이 처음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다. 안평대군이 꾼 꿈을 화원 안견이 그림으로 그릴 때 시간순으로 그린다면 오른쪽에 속세에서 산으로 들어가는 장면을 먼저 그리고 맨 왼쪽에 도원이 그려져야 한다. 이걸 반대로 도원을 먼저 오른쪽에 그린 것은 안견이 그림을 펴자마자 이야기의 절정이자 핵심 부분이 나타나기를 의도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야기와 그림은 다른 것이다. 이야기를 시각으로 구현해 낼 때 화가의 응용력과 창의력은 이렇게 발현된다. <몽유도원도> 화면 구성에 굳이 도망자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가면서 잡히게 하라는 연출 이론을 적용하는 건 매우 이상하다. 한번에 보는 그림이 아니라 두루마리로 펼치면서 보는 그림이다.

흥복사 팔부중상 설명에서 '불법을 수호하는 여덟 신'이라는 해설은 이제는 촌스럽고 너무 관습적인 설명이다(224). 불교에 나오는 호법신들의 범위가 너무 넓고 막연하다. 도대체 무엇으로부터 그렇게 수호들을 한다는 건가? 팔부중상과 제자들과 보살들이 모두 등장하는 장면이 누군가로부터 불법을 수호해야만 하는 장면인가? 그렇다고 이들이 경전에서 불법을 수호하는 존재로 나오는 것도 아니다. 인상이 험악하고 무기라도 잡고 있다고 해도 다 호법신은 아니다. 합장하고 기도하고, 깨달음에 희열하고, 눈 감고 슬픔을 억누르는 모습으로 표현되어도 갑옷 하나만 입으면 무조건 수호신인가? 

 

성급하고 근거가 없는 판단과 최근의 연구 성과들을 반영하지 못한 서술들은 앞으로 보완을 더 하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해도 읽어서는 안되는 책은 아니다. 몇몇 오탈자는 편집자와 교정자의 실수니까 그냥 넘어가자. 책을 서둘러 만들었나 보다.

 

나머지 일본편 답사기도 어서 찾아 읽어야겠다.

방사능 화염을 내뿜는 고질라가 또 다시 나타날지도 모르겠지만 가보고 싶어질지도 모르니까.

 

 

2015. 2. 20. 덧붙임.

위에 아스카 지역 '선악의 이면석'을 한 일본인이 미륵사지 석상과 비교한 바가 있다고 했는데, 최근 이 미륵사지 석상은 절 건립 당시에 만든 것이 아니라 후대에 제작한 것임을 밝힌 논문이 발표되었다. 따라서 아스카 석상과 미륵사지 석상의 영향 관계를 논하기에 앞서 이들의 정확한 조성연대에 관한 사실부터 검증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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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증의 탄생 - 글쓰기의 새로운 전략
조셉 윌리엄스.그레고리 콜럼 지음, 윤영삼 옮김, 라성일 감수 / 홍문관(크레피스) / 2008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올 한 해 여러 가지 글쓰기 책들을 골라 읽어봤지만 이 책만큼 정교하고 치밀하게 논증(논리)에 대해 설명한 건 없었다.

다만 초보자들보다는 논문이나 칼럼과 같이 논증을 바탕으로 한 글쓰기를 조금이라도 해본 이들에게 더욱 가치가 높은 책일 것이다. 자신이 써왔거나 생각해왔던 문제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면서 부끄러워질 때도 있고, 아니면 자긍심이 생길 수도 있겠다. 나도 그랬으니까.

536페이지에 이르는 이 텍스트를 정독한다면 지금까지 자기가 썼던 글들을 다시 볼 수 있게 해줄 뿐만 아니라, 앞으로 글들을 좀더 신중하게 쓸 수 있을 것이다.

밑줄 친 부분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모두 인용하는 건 어렵다. 전체 다섯 파트 중 포인트만 정리해본다.

 

part 1: 논증이란 무엇인가?

- '작가의 에토스'라는 개념은 거의 생각하지도 못한 부분이었다. 독자들에 호소하는 작가의 에토스-로고스-파토스가 있다. 편협하고 급하고 공격적이고 독설을 내뿜는 에토스는 사람들이 싫어한다.  

- 독자가 계속해서 "그래서 어쨌다고?"라고 따져 묻는다고 상상하라. (110)

- 독자들이 관심 없는 주제로 논증하지 마라. 그들이 궁금해 하는 것을 논증하라.

 

part 2: 논증을 전개하는 기술

- 어느 순간이 되면, 마음 속 어두운 편안함에서 글자의 차가운 빛 속으로 가설을 끄집어내야 한다. (174)

- 지나치게 확신하지도 않고 지나치게 자신이 없지도 않게.

- 이유(reason)와 근거(evidence)는 다르다. - 근거는 '바깥세상'에서 끌어온 것이고 이유는 우리가 생각해낸다. 논증은 '이유+주장'이다.

- 자신이 쓴 글에 어떤 오류가 있는지 판단하려면 인용과 데이터를 진술하는 문장을 모두 찾아 밑줄을 그어라. ① 밑줄 친 부분이 글 전체에서 3분의 2가 넘는다면 근거가 지나치게 많은 것이다. ② 밑줄 친 부분이 글 전체에서 3분의 1이 되지 않는다면 이유를 뒷받침할 만큼 근거가 충분하지 못한 것이다. (223)  

- 전제를 생각해야 한다. 이유와 주장을 이어주는 보편적인 원칙이 전제이다. 누구나 동의하는 전제인가, 저자 혼자만 설정한 전제인가?

- 글을 쓸 때 독자들도 자신과 같이 생각할 것이라는 착각에 빠지지 말라.

- 언제나 반론을 수용해야 하며, 스스로 반론을 예상하고 반박을 준비해야 한다. 또 자기 가설에 부합하는 근거만을 찾아서는 안된다.

 

part 3: 논리적 사고에 대한 논리적 분석

- 현실에서는 대개 문제에 대한 가능한 해법을 어느 정도 예측한다. 이러한 잠정적인 해법을 우리는 '가설'이라고 한다.

- 문제해결에 능한 사람은 말도 조심스럽게 한다. 

 

■ 문제해결에 능한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말하는 습관을 비교연구했다. 그 결과, 문제를 잘 해결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확실성과 완전성을 드러내는 말을 자주 썼다.

'절대로' '반드시' '언제나' '예외 없이' '꼭' '모두' '전부' '무조건' '틀림없이' '분명히' '확실히' '오로지' '아무것도' '~해야 한다.' '~하지 말아야 한다.' 

■ 문제를 쉽게 해결하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불확실성을 드러내고 범위를 한정하는 말을 자주 썼다.

'가끔씩' '일반적으로' '때때로' '보통' '대개' '다소' '특별히' '약간' '어느 정도' '아마도' '있을 법한' '의심스러운' '그 중에서도' '다른 한편' '~할 수 있다.' '~할지도 모른다.' '~할 것이다.' 

 

- 정의와 의미는 다르다. "정의는 우리가 만들 수 있지만 의미는 만들 수 없다."(336)  

- 의미를 문제 삼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밑에는 가치와 감정을 놓고 벌이는 갈등이 숨어있다. (대리논증)

- 의미를 실제 땅에 비유한다면 사전의 정의는 지도에 비유할 수 있다. 따라서 많은 요소가 생략된다.

- 원인과 결과 문제: 진짜 '원인'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자.

- 인과관계 분석법: ① 원인으로 추정되는 요인이 없을 때보다 있을 때, 그 결과가 더 자주 발생하는가?(유사-차이원리) ② 원인이 존재하지 않을 때 결과가 대부분 나타나지 않는가? ③ 결과의 빈도가 원인의 빈도와 비례하는가?  

- 말 속에는 가치 판단이 숨어 있다. 똑같은 사실에 어떤 어휘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저자의 가치가 드러난다.

 

part 4: 논증의 언어

- 명확한 글쓰기의 6원칙: ① 주요행위자의 이름을 주어자리에 놓아라 ② 주요행위자의 동작을 동사로 서술어자리에 놓아라 ③ 밀접한 관계가 있는 문장요소는 최대한 가까이 놓아라 ④ 독자에게 친숙한 정보로 문장을 시작하라 ⑤ 낯설고 복잡한 정보는 문장의 뒷부분에 놓아라 ⑥ 전체 글의 주어들을 일관되게 유지하라

- 간결함과 생생함: ① 최소한의 글자만으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라 ② 지시대상을 '눈으로 볼 수 있는' 단어를 사용하라

예, 근거, 설명은 구체적이고 뚜렷하고 생생한 언어로 진술해야 설득력이 높아진다.

- 보편적인 원칙, 가치, 가정은 보편적인 언어로 진술해야 설득력이 높아진다.

- 주어를 무엇으로 하느냐에 따라 이야기의 방향이 달라진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선택한 어휘 하나하나에 언제나 민감해야 한다는 사실이다."(483)

 

부록

- 글쓰기 체크리스트: 나중에 활용할 것! (494~512)

- 스토리보드를 활용하자: 글을 단위별로 템플릿을 마련 각각 종이에 개요와 반론수용/반박을 적고 이유, 근거 등을 적는다. 그리고 이들을 벽에 붙이거나 나열하여 한눈에 볼 수 있게 하라.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를 수도 있다.

- 오류를 검토하라: ① 명백한 오류 = 어긋난 추론, 제자리 논증(주장=이유), 동의하지 않는 걸 기본 전제로, 무지에 호소, 힘에 호소하는 것 ② 상황적 오류 = 부당한 응수(뚜꿔꿰), 미끄러운 비탈(레두띠오아드압수르둠), 양자택일, 은유를 문자 그대로, 대중에 호소(아드뽀뿌룸), 권위에 호소(베레꾼디암), 인신공격(아드호미넴), 연민에 호소(아드미세리꼬르디암)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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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자료를 대하는 연구자의 자세
    from 突厥閣 2015-07-13 18:39 
    아래는 <학술논문작성법>에서 옮겨 온다. 이 책은 <논증의 탄생>의 전문가 버전인 듯하다. <논증의 탄생> 앞 부분에서는 저자의 에토스를 강조했는데, 이는 일반 독자들은 글쓴이가 그 글을 쓸만한 사람인가를 중시하기 때문일 거다. 반면 학술논문은 어차피 '선수들'끼리 돌려보는 글이므로 <학술논문작성법>에서는 에토스 관련 부분이 빠져 있다. 우리는 우리의 주장을 확인시키는 자료와 주장은 쉽게 찾아낸다. 그렇지만
 
 
 
Road (Mass Market Paperback) - 영화 '더 로드' 원작
코맥 매카시 지음 / Vintage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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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

이야기는 너무나 자명하고 뻔한 결말로 흘러간다.

바라보는 것이 참 고통스러웠지만 그래도 한 가닥 희망으로 겨우겨우 책장을 넘긴 것 같다.  

그건 마치 남자가 소년을 데리고 마지막까지 버티려고 했던 심정과도 같다고 할까.

 

모든 것이 불타고 재밖에는 남은 것이 없는 땅 위에서 그들은 바다를 찾아 나선다.

왜 세상이 죄다 불탔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한 설명이 없다.

그들은 버려진 집이나 건물에서 식량을 구해야 하고, 진창에서 그을음을 걸러낸 물을 마셔야 한다.

 

절망의 상황에서 남자는 최후의 순간을 생각했다.

살아있다는 것이 오히려 더 고통스러운 이런 상황에서 깔끔하게 끝낼 수 있는 바로 그것을 생각했을 것이다.  

아마 나라도 그랬겠지.  

그는 늘 권총을 들고 다녔다.

권총은 인육을 먹는 자들로부터 자신과 아이를 방어하기 위한 무기이기도 했지만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최후의 순간이 오면 '그 일'을 수행할 수 있는 도구이기 때문에.

하지만 남자는 끝내 아이를 버리지 못했고, 결국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이 지점에서 세상의 모든 아빠들이라면 이 남자의 의지와 숭고한 행위를 지지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

그리고 나 또한 그 지지와 응원으로 이 책을 내려놓지 못하였다. 

 

폐허로 변한 세상에서 인간 사냥꾼을 피해 삶을 연명해 나가는 그들의 모습에서 문득 

이 주옥같은 오늘날의 현실과 뭐가 다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맥카시는 이 시대의 절망적인 상황을 종말이 닥친 세계에 빗대어 이야기한 것인지도 모른다.

어떤 평문을 보니 작가 자신이 매우 궁핍하게 살아왔다고 한다. 

서 남자가 처한 극한 상황과 식량을 구하는 절박한 과정의 리얼리즘은 그냥 나온 게 아니다.

새삼 내가 누리고 있고, 가지고 있는 것들의 고마움을 알게 되었고, 다시 돌아보게 만들어 주었다.

 

 

#

문장이 어렵지는 않았지만 매우 구체적이고 생소한 단어들이 아주 많이 나오며, 형태가 변형된 단어와 사전에는 없는 단어들도 수두룩하게 나온다.

그런데 이들을 (찾거나) 알지 못하고 온전히 읽어 내기는 힘들다.

그건 이 낱말들이 각각 장면들의 배경과 상황, 심지어는 감정과 분위기까지 이끌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리딩레벨 4.0이라는 말만 믿고 가볍게 시작했다가는 좌절할 공산이 크다.

 

어떤 문장들은 마치 시처럼 읽히더라.

섬뜩할 정도로 탁월한 묘사와 통찰. 예를 들면,

 

벗은 남자의 뼈만 앙상한 어깨를 이런 감각적인 문장으로 표현한다.

The razorous shoulder blades sawing under the pale skin. (218)

 

죽음에 가까워지는 걸 두려워하면서 하는 독백.

He is coming to steal my eyes. To seal my mouth with dirt. (261)

 

그런가 하면 간결하면서도 확신에 찬 말들... 벙커에 들어가기를 무서워하는 소년을 달래며 말한다. 

This is what the good guys do. They keep trying. They dont give up. (137)  

핡, 이런 건 정말 나도 아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다.  

 

 

책의 분위기를 몇몇 단어들로 대변한다면?  

charred, senseless, bleak, cold, desolate, birdless, leaden, gray and barren...

 

고통스럽고 음울한 비극이었지만 남자의 용기와 의지는 아름다웠다.

이 춥고 쓸쓸한 가을 날에 몹시 어울리는, 양식(style)이 뚜렷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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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전략 - Reading & Writing
정희모.이재성 지음 / 들녘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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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 정도 수준에서 글쓰기에 참고할 수 있는 책이다.

나 또한 성급한 단정과 오류로 가득 찬 잡문이 아니라 냉철한 논리가 살아 있는 글을 써야하기 때문에 도움이 될 것이다.

 

마지막에 문장 다듬는 12, 13장 부분은 논문을 퇴고할 때 꼭 필요한 부분이다.

주어와 서술어를 맞추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닌 것 같다.

하나의 주어에는 하나의 서술어를 쓰고,  영어식으로 서술어가 먼저 나오게 쓰던가 아니면 우리말처럼 서술어를 뒤로 보내던가 하라는 얘기다. 또 능동과 수동을 잘 구별해서 써야 문장이 쉽게 읽힌다고 한다.

 

책에다 되새길 부분들은 표시를 해 두었으므로 불필요하게 긴 인용은 생략하고 몇 구절만 옮겨 본다.

 

 

 

글쓰기는 순전히 노동으로 이루어진다. 직접 글을 쓰는 것도 그렇지만 이를 준비하는 것도 노동이다. 그뿐만 아니라 좋은 글을 쓰기 위한 학습도 당연히 고된 노동이다. (20)

 

글쓰기 학습 역시 이론의 영역이 아니다. 수없이 반복되는 연습만이 글을 잘 쓸 수 있게 한다. 그리고 거기에 요령을 조금 덧붙이면 숙련 시간이 단축된다. 글쓰기는 '헤파이스토스'(노동의 신)의 영역이며, '뮤즈'(예술의 신)의 영역이 아니다. (21)

 

사실 글을 쓰는 행위는 끊임없이 글을 읽는 행위를 수반한다. (34)

글은 읽어가면서 써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251)

 

글을 좀 써본 대부분의 사람들은 글이 머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료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글에서 자료 찾기가 중요하다는 것은 글이 영감이나 천재성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준비나 노력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76)

 

좋은 글을 쓰기 위해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무엇보다 글감을 넉넉히 장만하는 일이다. (81)

 

글감의 선택은 내가 아니라 문장의 논리가 결정한다. (85)

 

좋은 화제란 일상에도 있지만 책이나 자료에도 많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155)

 

서두에 들어갈 수 있는 주된 내용은 '화제', '과제', '개념', 이렇게 세 가지이다. 우선 이 세 가지를 기억해두자.

화제: 글을 시작하기 앞서 독자의 관심과 흥미를 끌기 위해 독자에게 제공되는 다양한 관심 거리.

과제: 글을 통해 풀고자 하는 문제.

개념: 대상에 대한 정의나 개념, 원리, 적용 등을 풀이하는 것. (194-195)

 

뛰어난 작가나 편집자, 칼럼니스트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지금부터라도 인용노트나 독서노트를 만들어보기 바란다. 뛰어난 작가의 경우 인용노트나 독서노트를 만들어 인용할 경구를 미리 준비해둔다. 독서만 하고 중요한 인용구들을 기록해두지 않으면 그것을 이용하기가 매우 어렵다. 매번 책을 읽을 때마다 쓰임새가 있는 구절을 메모해둔다면 나중에 글쓰기를 위한 큰 재산이 된다.

인용구를 사용할 때 기억해둬야 할 것은 적절한 인용구의 선택과 함께 그 인용구를 해석한 부분도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흔히 인용구는 인용구 단독으로는 사용되지 않는다. 너무 뻔한 사실인데도 이것의 중요성을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인용구는 인용구의 부분과 해석의 부분이 항상 결합되어 있어야 적절하게 이용할 수 있다(인용+해석). (201)

 

(결말을 쓸 때) 주의할 것은 요약을 할 때 서두나 본문에서 썼던 말을 그대로 써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220)

 

수정은 작성된 글의 문장과 구성, 주제에 문제점이 없는가를 점검하는 과정이다. 글은 이런 수정 과정을 통해 완성된다. (253)

우선 소리를 내어 읽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

끝으로 자신의 글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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