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박민규 지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진짜 큭큭큭, 낄낄대며 읽었던 소설.

예전에 썼던 독후감을 옮긴다(소설 읽고 독후감을 쓰는 일이 별로 없는데 이 책은 썼더라).

 

그저 달리기만 하기에는 우리의 삶도 너무나 아름다운 것이다.

라는 생각을, 했다. 인생의 숙제는 따로 있었다. 나는 비로소 그 숙제가 어떤 것인지를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고, 남아 있는 내 삶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야 할지를 희미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그것은 어떤 공을 치고 던질 것인가와도 같은 문제였고, 어떤 야구를 할 것인가와도 같은 문제였다. 필요 이상으로 바쁘고, 필요 이상으로 일하고, 필요 이상으로 크고, 필요 이상으로 빠르고, 필요 이상으로 모으고, 필요 이상으로 몰려 있는 세계에 인생은 존재하지 않는다.

진짜 인생은 삼천포에 있다. (278-279쪽)

  

292-292쪽의 난장판 '웃슬픈' 야구 경기를 보면서 간만에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공교롭게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고 난 뒤 잡은 이 책에서 별명이 조르바인 등장인물이 나오니까 이상했다.

결국 두 소설 다 비슷한 얘기를 하는 셈인데, 공감하는 바는 이 책이 더 컸다.

주인공이 살아온 시절과 장소가 나와 얼추 겹쳐서인가? 모르겠다.

 

진짜 인생은 삼천포에 있는 건가?

삼미의 야구를 해 보면 알 수 있을까?

 

치기 힘든 공은 치지 않고, 잡기 힘든 공은 잡지 않는다. (2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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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병통치약 2015-02-08 2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삼미하면 할 이야기 많죠 ㅋㅋ

돌궐 2015-02-08 23:01   좋아요 0 | URL
ㅎㅎ 공감하시는군요.

붉은돼지 2015-02-09 0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 재미있죠...짠하기도 하고요..

어디선가 보니 박민규는 휠체어에 앉아 글을 쓴다고 하더군요...

돌궐 2015-02-09 09:56   좋아요 0 | URL
가끔은 슈퍼스타들처럼 좀 망가지기도 해야하는데, 그러질 못해요.^^;
박민규가 밴드도 한다던데, 그런 일탈을 할 수 있단 게 참 부러워요.

yamoo 2015-02-09 1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상하게 박민규의 소설이 재미가 없습니다. 뭐가 좋은지도 딱히 모르겠구요. 좀 더 두고 봐야 겠지만 현재까지는 그렇습니다..ㅎ

돌궐 2015-02-09 17:28   좋아요 0 | URL
네, 저도 그런 작가 있어요. 좋다고는 하는데 왜인지 모르겠는 그런 작가 ㅎㅎ
그런 경우에 전 두고 보지도 않아요.ㅋ
 
[수입] The Rolling Stones - Grrr! [3CD 디지팩]
롤링 스톤스 (The Rolling Stones) 노래 / Abkco / 2012년 11월
평점 :
품절


누군가 말했다. 롤링스톤즈 음악은 라면과 같다고, 그렇게 좋은 음식은 아니지만 끊을 수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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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캐피털리즘 - 표류하는 개인과 소멸하는 열정
리차드 세넷 지음, 유병선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09년 3월
평점 :
절판


역자후기에 따르면 리처드 세넷은 어렸을 때 첼리스트를 꿈꿨다고 한다.

그런데 손목뼈에 이상한 병을 얻고 활을 당길 수조차 없게 되자 아쉽게도 연주가의 꿈을 포기했다.

그런 그에게 하버드의 한 사회학 교수가 입학을 추천했고, 세넷은 사회학자로서 새 인생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13살에 연주회를 열 정도로 뛰어난 기량을 지녔던 젊은이가 최고 대학의 사회학과에 입학 추전을 받으려면 그 재능과 지능이 어느 정도였을지는 알 만하다.

 

나는 세넷의 이 개인사를 읽고 나니 두 가지가 갑자기 이해됐다.

하나는 그가 이 책과 2년 뒤에 쓴 <장인>에서 장인들에 대해, 특히 예술가들의 훈련과 그 과정의 어려움을 매우 구체적으로 서술할 수 있었던 이유와,

또 한 가지는 젊은이(퇴출자)들의 실패와 좌절에 대해서 공동체(조직)가 너그럽게 이해하고, 재기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거듭 주장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영어 사대주의 때문인지는 몰라도 제목이 <뉴캐피털리즘>인데, 원제는 The Culture of the New Capitalism(신자본주의 문화)이다.

'신자본(신자유)주의 문화'라는 제목은 '뉴캐피털리즘'이란 생소하고 잘은 모르지만 뭔가 있어보임직한 제목에 비해 너무 평범하고 지루하다는 인상을 받는다면 그건 바로 이 책에서 말하는 천박한 신자본주의 문화의 세례를 제대로 받았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좋고나쁘고를 얘기하는 게 아니다. 그게 바로 뉴캐피털리즘 문화의 속성이라는 것 뿐이다. 실속은 없고 겉치레만 번드르한 문화.

다만 이 책은 '뉴캐피털리즘'이란 막연한 제목 위에 '표류하는 개인과 소멸하는 열정'이라는 원서에도 없는 부제를 붙여 책 내용을 압축하여 제시하고 있다. 누가 만들었는지 몰라도 매우 세련된 작법인 거 같다.

그러니까 한줄로 요약하면 '하마터면 욕할 뻔했는데, 알고 보니 좋은 제목'이란 얘기다.

 

어쨌든 ​<뉴캐피털리즘>이란 제목은 이 책을 신자본주의 개설서로 오해할 수 있는 여지를 주는데, 사실 이 책의 진짜 주제는 '(신자본주의의)문화'지 '신자본주의'라는 개념 자체는 아니다. 

물론 1장에서 저자는 사회자본주의가 신자본주의로 변화한 과정을 관료제 변모를 중심으로 심도 있게 설명하고 있다.
피라미드형 관료제의 구조를 충실히 구현하던 사회자본주의와 사회민주주의에서는 자본과 복지의 효율적인 분배보다는 제도 자체를 유지하는 게 관건이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주주의 이익이 최우선 과제가 되던 시대에 신자본주의가 탄생했고, 이 과정에서 관료제의 구조가 흔들렸단다.

쉽게 말하면 중간 단계가 거의 없고 상부와 그 지시를 따르는 하부로만 이루어진 시스템이 정착되였으며, 권력의 중심도 경영자에서 주주로 바뀌면서 장기적인 이익보다는 단기적으로 내는 이익이 더 좋다는 인식이 만연하게 됐다는 거다.

또 기업이 바라는 인재상도 달라졌다. 어느 한 특정한 분야에 장점을 보이는 사람보다는 그때그때 닥치는 상황에 대처를 잘 하는 사람이 선호된 것이다. 특히 첨단부문 기업에서 이런 현상이 더 두드러졌다고 한다.

 

세넷은 기업이 이런 임기응변에 강한(그러나 어느 한 가지도 제대로 못하는) 인재들을 추구하고 그들을 고용하면서 내세운 것이 '능력주의', '잠재력', '능력' 같은 말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말들은 결국 신자본주의에서 만들어낸 허울 좋은 추상적 개념일 뿐이고 실제로는 '알맹이 없는 능력' 또는 개인에 대한 (인격적) 편견 또는 선입견에 가깝다고 본 것이다. 2장 말미에서 세넷은 다음과 같이 썼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유연한 제도들은 컨설턴트처럼 여기저기, 이 문제 저 문제, 이 팀에서 저 팀으로 자유롭게 이동하는 지적활동을 중시한다. 팀원들 스스로는 진행중인 작업에 대해서만 능력을 발휘해야 한다. 그들은 때가 되면 조직 내의 다른 팀으로 옮겨갈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노동에서 요구되는 진정한 재능이란 맥락과 연관의 고리를 끊어버리고, 일의 결과만을 전망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좋게 말하면 상상력을 발휘하는 재능이다.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그런 재능을 선호하게 될 경우 경험이나 주변 환경과의 관련성이 사라지고, 오감을 통한 감흥이 배제되는 결과가 나타난다. 분석하는 것과 믿는 것이 따로 놀게 되고, 정서적 소속감이 희박해지며, 사물이나 사안에 대한 천착도 사라진다. 철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이 ‘유동성 근대성’이라고 했던 순수한 과정 속의 삶의 방식들이 배제된다는 의미다. 바로 이것이 첨단 조직의 노동을 규정하는 사회적 조건이다.
(144-145)

 

곧이어 저자는 '상상력'과 대비되는 '장인정신'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장인정신의 핵심은 일을 올바르게 처리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일상적인 것으로 보이는 업무조차도 뭔가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시행착오를 거듭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노동자들에게 실수가 허용되어야 하고, 끊임없이 그 일을 물고 늘어질 수 있도록 하는 분위기가 마련되어야 한다. 잠재력의 유무를 떠나 기능이란 노력하다 보면 단계에 따라 때론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되어 있다.
음악을 예로 들어보자. 경이로운 신동이라 할지라도 실수를 하고, 실수를 통해 배우는 과정을 거쳐야만 완숙한 예술가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속도가 강조되는 조직에서는 많은 시간을 들여 배우는 과정을 제공하지 않는다. 가능한 한 빨리 결과물을 내도록 압박이 가해지는 탓이다. 제한된 시간에 문제를 풀어야 하는 수험생들과 마찬가지로 빡빡한 업무 일정에 쫓기는 노동자들은 일을 꼼꼼하게 처리하기보다는 수박 겉핥기식으로 건성건성하기 십상이다. 조직들이 미래를 중시한다며 과거의 소중한 경험들을 헐값 취급하는 경향이 나타나는 것도 바로 이같이 알맹이 없는 능력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151)

위에서 말하는 '장인 정신'은 책의 끝 부분에서 신자본주의의 병폐를 극복할 수 있는 가치 중 하나로 제시되고 있다.

그리고 그런 이유 때문에 세넷은 이 책을 쓴 뒤에 곧바로 <장인The Craftsman> 집필에 들어간 것 같다.

 

신자본주의의 가벼움은 정치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제3장에서 세넷은 정치인도 개인의 '소멸하는 열정'을 이용하여 판촉을 한다고 평가했다.

유권자들은 상품을 사듯이 정치인에게 투표한다는 것이다. 

기업에서 상품을 판매할 때 그것을 구입한 뒤에는 소비자들의 열정이 소진되고 또 다른 상품, (프레임은 그대로지만) 포장만 바꾼 신상을 갖고 싶은 열망으로 찬다는 것을 이용하듯이 정치인들도 자기들 이미지를 새롭게 포장하는 데 급급하다는 이야기다.

 

정치도 연극적이긴 마찬가지다. 특히나 진보적인 정치에는 특별한 수사법rhetoric이 요구된다. 정치인들은 시민들이 경험을 통해 마음속에 쌓아둔 진보 정치에 대한 불신을 잠시 접어두게 하기 위해 수사법을 동원한다. 나는 이제껏 정치적 수사법이 지닌 긍정적인 측면을 중시해왔다. 하지만 상품의 판촉에서와 마찬가지로 정치의 판촉 행위도 훨씬 더 부정적인 쪽으로 향하고 있다.
시민들은 진보적인 변화를 바라면서도 잊고 있는 것이 있다. 환상이 현대사회에서 너무나 큰 비중이 차지하고 있으며, 그것이 변화에 대한 희망을 심각하게 갉아먹는다는 사실이다. 사람들 스스로가 능동적으로 점점 더 수동적이 되어가는 수동성 역설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191-192)

 

통상 언론은 장인처럼 완벽한 정책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정치가에게는 흥미를 보이지 않는 반면, 정치가의 겉으로 드러난 개성만을 부각한다는 비난을 받는다. 하지만 정작 문제로 삼아야 하는 것은 언론들의 관심이 왜 그런 쪽으로 쏠리게 되었는가이다.
노동의 경우 훌륭한 장인은 기계를 잘 다룬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장인은 나뭇조각이든 컴퓨터 소프트웨어든 어떤 문제가 있으면 그 이유를 찾아내려 한다. 문제가 발생하면 그 사안에 관여하고, 객관적인 애착을 보이는 것이 바람직하고 이상적이다. 이는 악기를 만드는 것과 같은 전통적인 장인의 세계에서나 현대의 과학 실험실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물론 잘 굴러가는 기업에서도 그렇게 하고 있다. 회사에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그것을 그냥 보아 넘기려 하지 않고 누구나 관심을 기울이는 건 당연한 일이다.
(201-202)

 

(이라크 전쟁을 찬성하는 인간들이 이라크가 어디 있는지도 어떤 나라인지도 알려고 하지 않고, 가톨릭 교회가 줄기세포를 반대하는 이유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이) 나는 사람들이 게을러졌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게 아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현 경제 상황이 시민들로 하여금 예전의 장인들처럼 사고하기 힘든 정치적 상황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점이다. 노동의 유연성이 강조되는 조직에서 팔방미인형이 우대받게 되면서 특정 분야에 몰입하는 한우물파기형은 불필요한 인물로 몰릴 수 있다. 능력 평가 시험에서도 특정 문제에 지나치게 호기심을 보이거나 골몰하다가는 시험을 망치기 십상이다. 더구나 첨단기술이라는 것 자체가 전문가가 아닌 보통사람들에게는 끼어들 여지를 주지 않는다. (203) 

 

신자본주의 사회의 소비 행태를 정의한 다음과 같은 단락은 군침 도는 상품들과 책들이 수시로 출몰하는 모니터 위에다 적어두어야 할 구절이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던 아이팟이나 SUV, 불필요한 소프트웨어들로 꽉 찬 컴퓨터 따위의 기계들은 여전히 소비자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월마트와 같은 대형 유통매장도 마찬가지다. 근검절약하는 청교도들은 돌다리도 두드려보는 신중함을 갖고 있었던 데 반해 우리는 쾌락을 원할 뿐이다. 소비자는 스스로 물건 속에서 ‘만들어낸’ 쾌락을 좇는다는 얘기다. 제정신을 가진 공리주의자라면 의심해야 마땅한 강요된 쾌락을 말이다. (186)

그간 비슷한 얘기를 많이 들었고, 또 나도 어쭙잖게 하고 있지만 이런 건 세넷 같은 학자가 얘기해야 더 권위가 생기기 마련이다. 문제는 사람들이 이런 책 읽지를 않고 생업에 바빠 읽을 시간조차 없다는 것이지만.

 

4장에서 세넷은 이 변화의 시대에 필요한 개인의 자질에 대해 세 가지를 제시한다.

첫째는 사건과 경험, 즉 내러티브(서사)를 축적할 것, 둘째 개인 유용성을 발휘할 것, 셋째 장인정신을 가질 것.

이 세 가지는 따로 독립된 사항이 아니라 서로 깊이 연계되어 있는 것이다.

일 하는 사람이 실패가 있더라도 이를 극복하고(또 조직은 이것을 넘어가 주고) '사건과 경험'을 쌓다 보면 나름의 '유용성'을 발휘하게 될 것이며, 그 유용성의 궁극에는 어떤 일을 '틀림없이', '올바로' 처리할 수 있는 '장인정신'이 자리하게 될 것이다.

 

누군가 어떤 일의 결과에 대해 설명하면서 틀림없이correct나 올바로right란 단어를 쓸 수 있으려면 자신의 바람이나 외부에서 받을 보상 따위와 무관하게 별도의 객관적 기준이 있다는 믿음이 전제되어야 한다. 자기에게 아무것도 돌아오지 않을지라도 뭔가를 제대로 해낸다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장인정신의 요체다. 그리고 자신의 이해득실을 초월한 그러한 헌신만이 사람들을 정서적으로 한 단계 끌어올릴 수 있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고 믿는다. 그런 헌신이 없다면 사람들은 생존경쟁의 살벌함 앞에 무릎 꿇고 말 것이다. (230-231)

 

마지막으로 세넷은 이 시대 문화를 다음과 같이 진단한다.

그가 말한 '반란'은 이미 시작되었는지 아니면 아직 일어나지 않았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새로운 문화가 권하는 바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한우물을 파기 위해 다른 가능성들을 닫아버리지 마라.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그동안 공들인 시간의 고리를 끊고 한우물파기를 포기하라.
이 책을 통해 나는 하나의 역설, 즉 새로운 권력 구조가 대단히 천박한 문화를 통해 생겨났다는 사실을 밝히고자 했다. 사람은 누구나 일을 제대로 해내려 노력함으로써만 스스로의 삶이 아무렇게나 흘러가지 않도록 단단히 붙들어 맬 수 있다. 따라서 나는 현재 일터나 학교, 정치의 세계를 뒤덮고 있는 문화의 천박함이 유리그릇처럼 작은 충격에도 쉬 깨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그리고 분명히, 지금의 새로운 질서 그 다음 단계의 역사의 첫 페이지는 이처럼 깨지기 쉬운 문화에 대한 반란이 장식하게 될 것이다.
(232)

 

 

책을 번역본으로만 읽었음에도 세넷의 명쾌하면서도 유려하고 종횡무진하는 논지는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깊이 있는 내용과 적절한 인용이 곳곳에 나오지만 만연체로 길거나 수사로만 채운 것도 아니다.

달변이지만 가볍지 않고 해박하지만 편협하지가 않다. 

 

이 책이 2006년도에 쓴 것이라 좀 철 지난 얘기도 없잖아 있었지만 그럼에도 세넷의 어조는 많은 영감을 주었다.

2008년 미국 금융위기 이전의 사회학 저서라 현 시점에서 냉정하게 따지자면 별4개가 적당하겠지만, 빠심으로 별 하나 더 준다. 어찌 보면 세넷은 리먼사태를 그 이전부터 예측하고 있었던 거라고 해도 무방하다.

왜 그를 일컬어 '사람을 좋아하는 사회학자'라고 하는지, 또 세계적인 석학이라 하는지 알 것 같다.

 

 

새로운 조직에서 소속감과 비공식적 신뢰, 제도에 대한 정보의 결핍은 불가피하다. 개인의 입장에서 볼 때, 노동의 가치는 여전히 중요한 것이지만 노동 자체의 도덕적 위신은 예전과 다르다. 새로운 조직과 제도에서의 노동은 노동 윤리의 두 가지 요소, 즉 보상의 지연과 장기적 관점의 전략적 사고라는 틀을 해체한다.
요컨대, 자본주의만 살아남고 ‘사회적인 것the social’은 죽은 셈이다. 불평등은 점점 더 소외의 문제로 이어지고 있다. 바로 이처럼 이상한 변화를 요즘 정치인들은 공공부문 개혁의 모델이라는 이름으로 추구하고 있다. (100)

경험이 늘어날수록 그 가치가 떨어지는 공식은 오늘날처럼 고분고분하게 길들여진 경제에서 보다 더 현실 속에 깊숙이 뿌리내리게 된다. 기술 발전은 특정 기술의 유효기간을 단축시킨다. 자동화의 진전으로 경험의 축적도 무용지물이 된다. 시장경제는 기존 노동자의 재교육에 돈을 들이느니 참신한 기술을 지닌 젊은이들을 고용하는 게 더 싸게 먹힌다고 압박한다. 게다가 선진국의 노동자들은 자신의 오랜 경험을 혁신한다고 해도 유능한 개도국 노동력의 장점과 매력을 따라잡을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 (119)

장인정신은 대상화objectification를 강조한다. 이탈리아 현악기의 장인 니콜로 아마티가 바이올린을 통해 그 자신을 표현한 것은 아니다. 그는 바이올린을 만들었을 뿐이다. 어떤 느낌으로 만들었는가와 상관없이 그는 그 대상 속에 자신을 쏟아부었고, 바이올린이 제대로 만들어졌는지 여부로만 스스로를 평가했다.
우리는 아마티가 작업할 때 우울해했는지 즐거워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단지 그가 바이올린 몸통의 ‘f’자 울림구멍을 얼마나 정교하게 팠는지, 도장을 얼마나 잘했는지를 눈여겨 볼 뿐이다. 대상화란 그 자체로서 의미를 지니도록 만드는 것을 뜻한다. (125-126)

이와 같은 대상화는 사회 밑바닥의 비숙련(그렇게 보일 뿐이지만) 노동자들에게도 자신의 일에 대한 자부심을 갖게 할 수 있다. 예를 들어보자. 1970년대 나의 제자였던 보니 딜은 미국 뉴욕 할렘의 파출부들을 연구했다. 가난한 흑인 여성 파출부들의 노동환경은 때로 일하러 간 곳의 백인 남자에게 능욕을 당하기도 할 정도로 열악했다. 그렇지만 흑인 여성 파출부들은 하루 일과를 마치고 나서 깔끔해진 집을 보며 나름대로 일말의 만족감을 얻는 것으로 조사됐다. 집주인에게서 한 마디 감사의 말도 듣지 못하더라도 말이다. 그래도 집은 깨끗해졌던 것이다.
몇 해 전 내가 미국 보스턴의 빵집을 조사한 결과도 이와 비슷했다. 가족이 운영하는 한 빵집에서 가장 나이가 어린 한 젊은이는 허드렛일을 시키고 잠시도 한눈팔지 못하게 닦달하는 아버지와 삼촌들에게 시달렸다. 하지만 그는 매일 아침 자신이 구운 근사한 빵을 보며 위안을 얻었다. 장인들이 얻는 위안을 낭만적인 것으로 바라보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떤 일을 그 일 자체를 위해 잘해냈을 때의 결과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126)

잠재능력이 사회가 필요로 하는 재능으로 부각되면서 오랫동안 쌓은 업적과 숙련의 가치는 소멸하고, 업적과 숙련에 깃든 지식의 맥락과 내용은 덩달아 소진되고 마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경험을 보완하고 정당화해주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소비다. 물건을 사려고 가게를 찾았을 때 바람직해 보이는 마케팅전략은 열정의 소멸을 부추기는 것이다. 이는 두 가지 방면에서 그러한데, 하나는 직설적이고 다른 방식은 은밀하다. 상표를 앞세워 열정의 소멸을 자극하는 것이 직설적 방식이라면, 제품의 효능과 드러나지 않는 기능을 부각해 사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드는 것이 은밀한 방식이다. (169)

영국의 슈코다의 광고는 자동차 자체를 설명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차의 안과 밖을 또렷하게 보여주고, 광고의 말미에 차에 관한 상세한 정보도 소개한다. 고급 모델인 아우디의 광고는 이와 대조적이다. 광고 영상은 주로 운전석에서 바라보이는 바깥 풍경을 보여주는 식으로 만들어진다. 아우디 광고에는 자세한 안내 문안도 없다. 차종이 컨버터블 쿠페냐 세단이냐에 따라 차 안에 탄 모델과 차창에 비치는 풍경이 바뀔 뿐이다. 아우디를 타면 사하라 사막에서든, 쇼핑몰에서든 어디서나 한결같이 안락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렇듯 광고에서 시각적 차이를 강조하는 속셈은 분명하다. 슈코다와 아우디가 기계적으로 10퍼센트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소비자들의 머릿속에 떠오를 여지를 없애버리려는 것이다. (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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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01-31 1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악가였다가 소설가가 된 파스칼 키냐르 생각도 나네요.
음악가이자 그 자신이 장인이었으니 사회학자가 되어 음악처럼 세상의 조화를 얼마나 바랐을까 싶으니 더욱 공감됩니다.
애정깊은 리뷰 써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돌궐 2015-01-31 13:09   좋아요 0 | URL
˝음악가이자 그 자신이 장인이었으니 사회학자가 되어 음악처럼 세상의 조화를 얼마나 바랐을까˝
와 정말 그 말씀이 딱 맞네요. 최근에 <투게더>라는 책도 나왔더라구요.^^

AgalmA 2015-01-31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고보니 최근에 세넷<무질서의 효용>도 사 놓고 경제학 공부하느라; 잊고 있었어요! 제목이 강렬해서 저자 이름은 까맣게 잊음;; 난 바보ㅜㅜ

돌궐 2015-01-31 13:33   좋아요 0 | URL
저도 <장인>은 읽었는데, 리뷰는 아직 못 썼어요. 나머지 책은 못 봤고요.
Agalma 님도 읽어보시고 리뷰 써 주세요.^^

AgalmA 2015-01-31 13:38   좋아요 0 | URL
장인, 투게더는 돌궐님이 쓰시고 저는 무질서의 효용 리뷰를ㅎ?
본문이 265페이지밖에 안 되고 생활권 얘기니 쉽겠지 하고 접근했은데 왠걸요 문장 하나하나마다 담지하는 게 많아 공부 좀 하고 읽어야겠다 싶어 호모사케르 읽고 있는데, 아니 여기도 만만치 않아 진퇴양난입니다;;
25살에 <무질서의 효용>을 썼다고 하니 음악뿐 아니라 역시 천재라 모든 걸 잘 하는 거였어! 읽는 이는 억울...

돌궐 2015-01-31 13:44   좋아요 0 | URL
장인은 나중에 시간내서 써보려구요. 투게더는 Agalma님 최근 글들과 연계되어 있으니까... 흠...(먼 산)

만병통치약 2015-01-31 15:03   좋아요 1 | URL
북플을 통해 Agalma, 돌궐님을 만나 좋은 책 알게 되고, 책만큼 좋은 리뷰를 보니 즐겁습니다. 다만 이 책도 봐야되겠고 저 책도 봐야도겠고 정신 없네요 ㅋㅋ

AgalmA 2015-01-31 17:07   좋아요 0 | URL
만병통치약님이 절 만난 것보다 제가 만병통치약님 만난 게 더 이득인 거 같은데요! 아니다. 만병통치약님이 보시는 책이 더 매력적이고 많아서 제가 더 정신없어요ㅎ 기본이 700페이지 이상;; 정말 대단하신 분.
(여기서 내가 이래도 되나 모르겠지만... 돌궐님 제 주책을 이해부탁드립니다)

돌궐 2015-01-31 17:31   좋아요 1 | URL
만병통치약 님, 이건 수십 말을 베풀고 겨우 한두 되 얻어 가면서 하실 말씀은 아닙니다. ㅎㅎ

AgalmA 2015-01-31 14: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돌궐님을 매우 신뢰합니다(버튼 꾸욱)
유통기한 저 죽을 때까지(이 정도면 압박은 아니겠지요ㅎ)

돌궐 2015-01-31 14:51   좋아요 0 | URL
책 제목도 마침 투게더니까 함께 쓰심이... ㅎㅎ

AgalmA 2015-01-31 17:05   좋아요 0 | URL
돌궐님의 유머에b
제가 일단 무질서의 효용부터 읽어야;

양철나무꾼 2015-01-31 1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대딩때 미샤 마이스키에 홀라당 발라당 빠져서 첼리스트를 꿈꾼적이 있습니다.
여차저차해서 그 꿈은 몇개월만에 접어버렸지만,
암튼 번역된 책의 제목은 구린데 (좀 경박했나여? 헤에~^^) 저 장인정신도, 장인도, 님의 재치만발 리뷰도 다 매력적이라는...ㅋ~.

돌궐 2015-01-31 20:49   좋아요 0 | URL
양철나무꾼 님, 감사합니다. 저는 첼로를 잡아본 적도 없습니다만 그 소리는 정말 좋아합니다.^^
그리고 다 보셨을 거 같지만 좋아하실 것 같아서... 유튜브 주소 하나 적었습니다.
http://youtu.be/mGQLXRTl3Z0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
사사키 아타루 지음, 송태욱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제목만 보아서는 무슨 반기독교 사상서인 것 같은데,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교회법과 종교 개혁의 발단과 전개에 대해 호의를 담아 친절하게 설명한다. 그런가 하면 『코란』을 읽어 이슬람의 혁명을 이끈 무함마드의 이야기도 소개된다. 결론은 읽고, 쓰고, 혁명하라는 얘기다. 혁명은 읽는 것에서 시작하여 고쳐 읽고, 고쳐 쓰는 과정에서 완성된다는 것이다. 대단히 열정적인 문체다. 나를 바꾸고, 사회를 바꾸는 수단으로써 독서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가자면,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기록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긴 민족이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전체 300건 가운데 11건이 우리 기록유산이다. 뭐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거니까 무조건 대단하단 건 아니지만, 아무튼 등재된 기록유산의 면면을 살펴 봐도 우리 기록물들이 어떤 가치가 있는지 알 수 있다. <승정원일기>는 너무 분량이 방대해서 아직 번역도 다 못한 걸로 알고 있다. <훈민정음>이나 <팔만대장경판>, <실록>과 <의궤>의 가치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모르긴 몰라도 대한민국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많은 기록물들이 온라인과 오프라인으로 쌓여가는 나라 중 하나임이 분명하다. 거기엔 수많은 블로그와 카페, 그리고 이곳 서재도 포함되겠지.

 

(아래부터는 본문 인용)

 

여기서 루터가 ‘읽은 것’을 ‘기도이고 명상이며 시련이다’라고 말했다는 것을 떠올립시다. 의미는 분명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는 성급함이나 폭력을 부정하고 말의 힘을 믿고 있습니다. (99)

 

원리주의자는 책을 읽지 않습니다. 책을 읽을 수 없는 것입니다. 책을 ‘읽을 수 없음’과 ‘읽기 어려움’에 맞설 용기도 힘도 없습니다. 나약한 사람들이라는 것이지요.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말해왔습니다. 텍스트를 읽는다는 것은 광기의 행위라고, 책을 읽으면, 읽고 말면, 아무래도 –내가 잘못된 건지 세상이 잘못된 건지, 몸과 마음을 애태우는 이 물음에 목숨을 걸 수밖에 없게 된다고. 사람들은 모릅니다. 읽을 수 있을 리가 없는 책을 그래도 읽는다는 것, 그 안에 있는 텍스트의 이물감, 외재성, 생생한 타자성을 모릅니다. 가혹하기까지 한 그 무자비함을 모릅니다. 그에 대한 두려움을 모릅니다. 그 놀랄 만한 ‘읽어라’라는 명령의 열정을 모릅니다.
반대로 무척 단정하지 못한 형태로 “내가 말하는 것이 성서이고, 내가 말하는 것이 『코란』이고, 내가 말하는 것이 불전이다”라는 정말 꼴사나운 모습에 자족한 채 지칠 줄을 모릅니다. 따라서 텍스트를 향하는 잔혹한 체험에 자신의 죽음과 광기를 무릅쓰고 몸을 드러낼 수가 없습니다. 그런 기적이 세계에 있을 수 있다는 사실조차도 감지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텍스트와 자신이 구별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근거나 전거는 모두 자신입니다. 준거는 자신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생각한 것이 모두 성서나 불전에 쓰여있다는 하찮은 망상에 안심하고 몸을 맡길 수 있는 겁니다. 거기에는 외부성과 타자성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루터 또는 무함마드에게 ‘읽다’라는 것은 무엇을 전제로 한 것이었을까요? 세계와 자신과 책이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생생한 이물로서 타자성으로 분리되고 구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책’을 읽는 자신이 미쳤는가, 아니면 세상이 미쳤는가하는 물음이 가능해집니다. 이렇게 당연한 일이 원리주의자들에게는 알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런 원리주의적 사고의 함정은 얼마든지 널려 있습니다. 지금도. (153-154)

 

(트리보니아누스 편, 『로마법 대전』) 여기서 유럽은 지금까지 전혀 몰랐던 한없이 정치한 법 개념과 법률 용어를 대량으로 입수하게 됩니다. 이리하여 과거의 거대한 유산인 로마법을 교회법에 주입하여 전대미문의 규모로 고쳐 쓰는 작업이 진행됩니다. 그들은 읽었습니다. 읽어버린 이상 고쳐 읽지 않으면 안 됩니다. 고쳐 읽은 이상 고쳐 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읽은 것은 굽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쓰기 시작해야만 합니다. 반복합니다. 그것이, 그것만이 ‘혁명의 본체’입니다. (179-180)

 

피에르 르장드르의 독창적인 사고의 핵심은 여기에 있습니다. 즉 그는 국가의 본질을 폭력이나 경제적 이익으로 줄여버리지 않습니다. 국가의 본질이란 ‘재생산=번식을 보증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즉 아이를 낳아 기르는 물질적·제도적·상징적 준비를 갖추고 대비하는 것이 국가의 역할입니다. 일단 그런 말을 듣고 보니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당연하지 않나요. 왜냐하면 아이를 낳아 기르지 않으면 단적으로 말해 절멸할 테니까요. 이런 것을 ‘저출산 문제’라 부르는 것은 문제를 하찮게 만들어 가장 중요한 문제에서 눈을 돌리게 하는 것입니다.
역으로 말하자면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없는 국가의 형식이야말로 가장 먼저 없어져야 하고, 우리가 오랫동안 말해온 의미에서 ‘문학’의 혁명에 의해 전복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런 것은 로마법과 교회법의 관계에 대해 오랫동안 실증적이고 착실한 연구를 계속해온 역사가라서 말할 수 있는 것이겠지요. 교회법은 재상산 법이니까요. 하지만 이렇게 지극히 성실하고 혁명적인 사상을 전개하는 사람이 어쩐 일인지 프랑스에서도, 다른 나라에서도 반동이니 보수니 하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저는 도무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이런 게 왜 안 되는 걸까요? 어떤 부분이 안 되는 걸까요? 그 근거를 보여주면 좋겠습니다. (185-186)

 

수많은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또 한 가지의 상실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보입니다. 우리에게는 들립니다.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그것만 말해왔으니까요. 우리는 ‘문학’을 잃었습니다. 우리는 시를 잃었습니다. 춤을, 연극을, 노래를, 음악을, 회화를, 복식을-한 마디로 말하면 예술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법이나 규범, 정치와는 관계없는 장소에 몰려 질식하려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사람이 살아남기 위해 필요하지 않은 ‘오락’, ‘장식물’, ‘사치품’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에 법이나 규범, 정치도 질식하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상실, 상실이라며 우리가 한 번이라도 그것을 결정적으로 손에서 놓아버린 적이 있을까요. 그것 없이 살 수 있었던 예가 있을까요? 없습니다. 그건 절대 있을 수 없습니다. (210)

 

명예욕을 위해서도 아니고 금전욕을 위해서도 아니라고 한다면, 왜 발표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걸까요? 그것은 –읽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좀 더 말해볼까요? 베케트나 첼란이나 헨리 밀러나 조이스나 버지니아 울프나... 발레리가 없었다면 저는 여기에 없을 겁니다. 니체나 푸코나 르장드르나 들뢰즈나 라캉이 있어주어 다행입니다. 그들이 말해주지 않았다면 저는 대체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을 겁니다. 무엇을 쓰면 좋을지 몰랐다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하며 살아가야 좋을지 몰랐을 겁니다. 발터 벤야민이 말했습니다. “밤중에 계속 걸을 때 도움이 되는 것은 다리도 날개도 아닌 친구의 발소리다”라고요. 발소리를 들어버렸던 것입니다. 도움을 받아버린 것이지요. 그렇다면 누구의 도움이 될지도 모르고, 어쩌면 아무한테도 들리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발소리를 내는 것조차 거부당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래도 발소리를 내지 않고는 배겨나지 못할 터입니다. 들려주려고 하지 않으면 안 될 터입니다. 한발짝이라도 좋으니까요. (271)

 

 


 

텍스트를, 책을, 읽고, 다시 읽고, 쓰고, 다시 쓰고, 그리고 어쩌면 말하고, 노래하고, 춤추는 것, 이것이 혁명의 근원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무래도 이렇게 됩니다. 문학이야말로 혁명의 근원이다, 라고. 루터는 문학자였습니다. 말의 인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상 최대의 혁명가였습니다. (105)

중세 해석자 혁명은 ‘혁명의 본체’를 드러낸 혁명입니다. 다시 말해 법학자의 텍스트 고쳐 쓰기의 혁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척 담담하고 전혀 극적이지 않습니다. 수많은 신학자, 법학자가 밤낮으로 홀로 책장을 넘기고 사전을 찾고 판례를 조사하여 법문을 고쳐 씁니다. 정말 수수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담담하고 수수한 작업에서 엄청난 변혁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줄기차게 이어지는 작업 자체가 바로 혁명입니다. 이것이 바로 12세기 혁명의 위대함이니까요. (193-194)

도스토옙스키 등은 10퍼센트 이하에 승부를 걸어 승리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의 소설을 번역본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자명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전혀 자명한 게 아닙니다. 기적에 가까운 일입니다. 그리스인들이 99.9퍼센트 소멸한 가운데 0.1퍼센트에 승부를 걸어 승리한 것처럼 러시아인들도 이겼습니다. 우리의 싸움은 0.1퍼센트가 살아남는다면 이기는 싸움인 것입니다. 만약 우리의 적이 있다고 한다면 그들은 0.1퍼센트라도 놓치면 지는 겁니다. 즉 우리는 압도적으로 유리한 싸움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251-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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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1-22 15: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텍스트를, 책을, 읽고, 다시 읽고, 쓰고, 다시 쓰기. 제가 이 책에서 가장 좋아하는 문장입니다.

돌궐 2015-01-22 21:04   좋아요 0 | URL
저도 읽고 쓰고 다시 쓰는 게 바로 혁명이란 얘기가 정말 참신했어요.
게다가 cyrus님은 저 말을 충실하게 실천하고 계시잖아요.^^

cyrus 2015-01-22 21:09   좋아요 0 | URL
말은 이렇게 하지 머리는 안 따라줘요. 자고 일어나면 새책이 몇 권씩 늘어나는데 여기에 관심이 쏟다보니 다시 읽고 쓰는 기회가 없어요. ^^

곰곰생각하는발 2015-01-24 14: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필사 분량이 많습니다. 필사의 필사` 같습니다..ㅎㅎ

돌궐 2015-01-24 15:04   좋아요 0 | URL
제가 읽는 책마다 초록을 꽤 많이 남겨둡니다.^^
 
꼬마 예술가 라피 비룡소의 그림동화 233
토미 웅거러 글.그림, 이현정 옮김 / 비룡소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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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거러 그림책 속 인물들은 어려움에 굴복하거나 자기 앞에 닥친 일들을 부정하고 회피하지 않는다. 주어진 여건과 한계 속에서 새롭고 빛나는 가치들을 만들어 낸다. 저주받은 음악가 트레몰로, 폭주족? 즐로티, 거인의 여자 제랄다, 꼬마구름 파랑이와 강도들까지 교화시킨 티파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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