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알고 있는 한국문화 버리기
최경원 지음 / 현디자인연구소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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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보문고에 들렀다가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우수출판기획안 지원> 선정작을 모아 둔 곳에서 발견한 책이다. 감은사탑, 달항아리, 고구려 철갑옷, 독락당, 석굴암 다섯 가지 문화재를 분석하여 우리 문화의 탁월한 구조와 형식미, 정신성과 조형이념, 실용성과 기능은 물론 역사성까지 조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한국문화 버리기’라는 제목은 사실 책의 내용에 잘 부합하는 건 아니다. 우리가 알고 있고 저자가 전제하고 있는 한국문화가 무엇인지 그게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2장에서 기존 학자들이 내놓은 한국문화에 대한 담론, 이를테면 ‘막걸리 맛’이나 ‘못 느끼면 말을 말자’ 따위 밑도 끝도 없는 애매한 감상은 이제 그만두자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데, 아마도 저자는 이런 막연한 감상으로 우리 문화의 성격을 규정하는 게 영 탐탁지 않았나 보다. 그래서 이제는 그런 두루뭉술한 ‘감상’에서 벗어나 색다른 해석을 통해 한국문화를 재조명하자는 것이다.

 

저자의 의견에 대체로 동의한다. 또 한국문화의 가치를 높이고 싶다는 열망과 글에 활용된 폭 넓은 지식들도 인상적이다. 뜬구름 잡는 인상비평이 아니라 철저한 형식 분석과 다양한 시각 자료를 동원해서 해당 유물들을 검토하고 있다. 비교를 위해 사용된 자료나 그림들은 그동안 미술사 저술에서는 보기 힘든 것이 많다. 다섯 개 꼭지마다 우리 유물만큼이나 큰 비중으로 서양의 미술품과 유물들이 비교되고 있다. 범위와 종류도 다양해서 회화나 조각은 물론 고대와 현대의 건축물, 산업 공예품과 디자인 제품까지 망라하고 있다.

 

저자는 학술 논문에서는 시도하기 힘든 논지를 거리낌 없이 제대로 펼쳐내었다. 학계와 이해관계가 얽히지 않아서겠지만, 그래서 더 편하고 자유롭게 주장을 전개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런 건 조금 부럽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책의 주장들이 학계에서 회자되는 이론과 완전히 다르다는 것은 아니다. 이미 소장학자들이 이 책의 논지와 비슷한 주장들을 펴왔고, 저자는 이 연구성과들을 잘 정리하고 나름의 해석을 덧붙여서 일반 대중들이 좀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게 하였다. 말하자면 전문가와 일반 독자를 연결해주는 중간 필자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했다.

 

디자인연구소에서 펴낸 책이어서 그런지 편집 형태도 독특하고 거의 매 페이지마다 나오는 각종 화려한 도면과 훌륭한 도판들도 책 ‘보는’ 즐거움을 준다.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았던 미술사 서적들에 견주면 꽤 파격적이다. 책의 인상을 굳이 표현하자면 뭐랄까, 디자인 잡지에 연재된 고미술 관련 칼럼을 모은 것 같은 느낌이다.

 

 

내용에 대해서는 몇 가지만 지적해 보자.  

 

먼저 감은사탑을 다룬 1장에서 질서와 불규칙의 조화, 상승감과 안정감, 육중함과 날렵함의 공존이 어떻게 성취되고 있는지 디자이너답게 탑의 형태를 분석하여 설명한다. 탑에 보이는 짜임새 있는 비례와 엄격한 구조를 ‘화엄’이나 ‘화쟁’사상과 연결하여 해석하였는데, 심정으로는 이해할 수 있지만 치밀한 논증은 아닌 것 같다. 탑을 화엄종의 사상이나 철학만으로 간단하게 설명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또 뒷산의 ‘불규칙한 선의 곡선이 규칙적인 탑의 외형을 절묘하게 타면서 흐르고 있다’(56) 같은 문장은 개인적인 감상을 현상에 투영하여 해석한 것이다. 또 ‘감은사지에서는 탑이라는 인공물과 자연이 서로 시너지 효과를 낳고 있다’(58)는 것은 저자가 비판하던 선학들의 말투와 비슷하다.

 

달항아리 설명을 읽으며 정말 많이 놀랐는데, 내가 늘 주장하듯 '달항아리를 제대로 보려면 손으로 돌려가면서 보고, 그럴 처지가 아니면 돌면서 보라’는 정확한 이유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박물관 독립 전시장 속의 달항아리를 한 바퀴 돌아가면서 보면 그 윤곽선이 아주 미묘하게 변화하는데, 이를 통해 저자가 말하는 ‘운동감’과 ‘생동감’을 느낄 수 있다. ‘찌그러진 형태’를 굳이 피카소의 회화에 비교하지 않더라도 이 찌그러짐이 분명히 의도한 것이라는 주장은 충분히 납득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게 형이상학(성리학, 태극도설)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보는 것은 그다지 공감하지 못한다.

나는 어느 성리학자가 태극도설에 입각해서 도공들에게 ‘둥그렇되 조금 찌그러진 항아리를 만들 것을 주문했다’는 명확한 문증이 나오지 않는 이상 일단 이것은 도공들의 창안으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도공들은 달항아리를 만들었고, 그 중 몇몇이 수요가 있자 좀 더 만들었을 뿐이다. 그들은 수요층을 쥐락펴락까지는 아니어도 이런저런 제품들을 만들어 '제시'하는 입장이었을 것이다. 물론 관요에 소속된 장인들은 잘못 구운 공납품이 되돌아오면 다시 만들어야 했고 늘 주어진 할당량을 제작해야만 하는 어려움에 처해 있었지만, 그런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뛰어난 창의성을 발휘했다. 수요층이 정확히 누구였는지는 몰라도 그들은 (전통이나 규범에 따라 만든 것 외에는) 그저 만들어진 상품 가운데에서 ‘선택’했을 뿐이다. 19세기에 달항아리 제작 방식을 계승하여 제작된 이른바 '고구마형' 항아리는 주로 민요에서 제작되었는데, 이런 유물들의 수요자까지 총체적으로 파악한 뒤에야 달항아리 계열의 용도불명 백자가 지니는 가치를 명확하게 평가할 수 있다. 지금으로선 달항아리에 담긴 '사상'에 대해 그 무엇도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누군가 금사리 항아리들을 '선택'하여 '수요'한 것까지는 분명하지만 그것에 성리학이나 태극도설 같은 ‘의미부여’까지 했는지는 증거가 없다면 사실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오늘에 와서야 그럴 것이라고 막연하게 짐작 뿐이다. 논거가 부족하면 불완전한 가설을 함부로 강요해서는 안된다.

엘리트들은 가끔 보면 자기네들이 모든 것을 통제하고 인식하고 있다고 착각을 하는 것 같다. 미술사에서 후원자와 주문자 연구가 중요한 건 알겠는데, 후원자와 주문자들이 직접 도구를 들고 재료와 씨름해 가면서 작품을 제작했던 것은 아니다.

 

3장에서 고구려 철갑옷은 공예가 아니라 디자인이었다는 주장은 충분히 이해한다. 전쟁에 쓰였던 물건이므로 신속한 제작과 기능이 가장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려청자가 대량 생산되었다고 해서 이것도 역시 ‘기능’이 강조되는 현대적 개념의 디자인에 부합하는 유물이라는 설명은 무리가 있다. 청자와 같은 도자공예품이 어느 정도 대량 생산 요소가 있다고는 해도 완전히 기능성만 추구하지는 않았다. 단적으로 청자의 ‘무늬’는 아무런 실용적 기능이 없다. ‘비색’이라 부르는 색깔도 마찬가지다. 디자인이라는 말에 너무 논리가 묻힌 것 같은 인상이다.

 

경주 독락당과 낙수장(Falling water)을 비교하여 서술한 4장에서는 기시감이 들었다. 독락당에 관한 김봉렬 선생의 논조에다 디자이너의 감각을 덧보태 더 이상 한국 건축은 초라한 건축이 아님을 역설하고 있다. 선조들은 건물의 크기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으며, 그들의 관념적 건축 행위가 있었다는 주장은 어느 정도 동의한다. 건축에서는 간접적이긴 하지만 문증들이 남아 있고, 무엇보다도 건축주의 생각과 이상이 설계에 직접 반영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책 내용과는 관계없는 이야기지만, 이 4장을 읽으면서 이라크의 여류 건축가 자하 하디드가 동대문역사문화공원의 그 괴상한 건물을 건축한 사람이라는 걸 처음 알았다. 주변 환경과 전혀 어울리지도, 그렇다고 역사성이 있는 것도 아닌 그 뜬금없는 외형에 참 어이가 없었는데, 과연!

 

석굴암이 국제적 양식의 건축과 조각을 보여주고 있고, 12당척을 기본으로 해서 √2의 비례가 반영된 구조라는 건 꽤 오래 전에 규명되었다. √2라니까 생각났는데, 최근에는 추사 김정희 <세한도>의 구도 속에도 매우 엄격한 수학적 비례가 사용되었다는 설이 제기되었다. 함께 참고하면 좋을 것 같다.

그리고 석굴암의 돔 구조가 로마에서 유래한 건축이라고는 하지만 만들어진 방식은 완전히 다르다는 것과 그 구축법이 독특한 팔뚝돌을 이용한 매우 독창적인 공법이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 

디자인과 디자이너의 관점으로 본 전통 문화 교양서로서 충분한 미덕을 갖추었고 곳곳에 번뜩이는 직관과 통찰이 엿보이는 책이다. 한 번 읽기 시작하면 한 꼭지 정도는 숨가쁘게 읽게 하는 힘이 있다. 다만 기존 학설에서 인용하거나 아이디어를 얻은 부분들은 본문에서 논저자의 이름만 슬쩍 언급하고 지나갈 것이 아니라 각주나 미주로 명확한 출처표시를 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요즘 교양서들 보면 참고 도서 생략하고 입 씻는 게 유행인 것 같은데, 각주까지는 아니더라도 끝에 참고 문헌을 덧붙이지 않은 것은 무척 아쉽다. 참고 문헌 챙겨 적는다고 해서 저자를 깎아내리는 독자는 아무도 없다. 오히려 관심 있게 읽은 독자들은 더 찾아 읽을 목록을 알려주어서 고맙게 생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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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은 나의 힘 - 나는 나를 사랑해요 명주어린이 2
김경우 지음, 이상미 그림, 조선미 감수 / 명주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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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들 국영수 학원에다 과학실험과 역사체험 등등 시키는 거 다 좋은데요, 운동을 해야 성적도 더 오릅니다.

잘하고 못하고는 문제가 아니라 하고 안하고가 문제입니다. 추우면 집에서 체조라도 시켜야 합니다.

저는 애들 중고생 되어도 운동 시킬 겁니다. 그 다음에야 지들이 알아서 하는 거고...

 

운동 안 하면 집중력 떨어져서 학습이 잘 안되고, 운동을 하면 지능지수 높아지는 건 물론 수리 능력이 발달하고, 자기통제, 계획, 추론, 추상적 생각과 관련 있는 뇌 기능이 올라간다는 과학적 연구 성과가 나와 있다는 얘기를 주구장창 해도 한쪽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려보낸다면 애들 인성 나빠지고 앉아서 게임만 하려는 건 둘째치고, 다른 학업 성적 오르기를 기대하는 것도 힘들죠.

 

5장까지는 앞서가는 부모라면 알고 있어야 하는 너무 당연한 상식에 속하는 이야기들(위에 말씀 드린)입니다.  

6장은 '운동으로 꿈을 이룬 사람들'이라는 꼭지인데, 네 사람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ADHD를 수영으로 극복한 마이클 펠프스

한쪽 팔이 없는데도 폴란드 탁구 대표팀이 된 나탈리아 파르티카

운동(농구와 달리기)으로 인생을 바꾼 버락 오바마

27년 동안 감옥에 있으면서 운동과 독서로 자신을 단련하고 다른이마저 변화시켰던 넬슨 만델라

 

'운동'이라는 코드를 통해 네 사람의 위인전을 읽는 것 같았습니다.

부모와 아이가 함께 읽고 지금 바로 실천해야 할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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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 방법론
로리 슈나이더 애덤스 외 지음 / 서울하우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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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기억으론 19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중반까지 학계에 미술사 연구방법론 논의가 꽤 유행이었던 것 같다. 모대학에서는 미술사 방법론 연구회가 기치를 내걸고 진행되었고, 이즈음 이러한 연구 경향에 영향을 받은 것인지는 모르나 나름 새로운 시각의 연구가 배출되기도 했다. 새롭게 시도되는 사회·경제적 연구(미술품 후원자), 문화적 연구(문학관련, 의례·의식 관련), 전기적 연구(작가 연구) 등은 기존의 양식사와 도상학(도상해석학)적 방법에다 더욱 폭넓은 시각을 더해주었다.


그런데 이런 ‘방법론’은 결국 기존의 연구방법을 분석하고 정리하여 말할 수 있는 것이지 적용되는 예가 없이 방법론 자체로만 성립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실천이 없다면 의미가 없는 이론이라는 말이다. 결국 실천하면서 이론을 적용하면 될 것을 굳이 그 이론을 규정하고 논의하는 것은 쓸모없는 시간낭비라는 주장도 가능하다. 예전에 은사님께서 하신 말씀처럼, “(방법론이란 건) 논문 쓰면서 그냥 하면 된다”는 얘기다.
나도 기본적으로는 그렇게 생각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희의적으로 볼 필요까진 없지 않을까 싶다. 방법을 생각하면서 방법에 대한 성찰과 비판도 가능할 터. 실제로 이 책을 보면서 새롭고 색다른 연구 방법이 있다고 여기지는 않았지만, 같은 작품을 참 여러 가지 시선과 해석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걸 알았다.


형식과 도상, 사회맥락 연구, 전기적 방법까지는 그나마 익숙하고 실천도 많이 되고 있는 방법론들이지만 기호학과 정신분석은 내용도 매우 어려웠고, 내 전공 분야에서는 거의 적용하기 힘든 방법론인 듯하다. 다만 정신분석과 미술을 논한 부분에서 위니코트의 ‘전이 대상(transitinal object)’을 종교미술(장례미술)에 적용하여 해석한 부분은 꽤 참조가 되었다.

 

방법론은 결국 미술사 연구자들이 유물을 보고 해석하면서 더욱 정교하게 다듬고, 필요한 경우 새로이 계발해야 하는 것이다. 예전에 이 책을 페미니즘 부분까지만 읽고 방치했던 이후 일종의 미련 같은 것이 남아있었는데 이번에 작정하고 다 읽었다. 이제 미련은 없으나 어려웠던 뒷부분은 완전히 소화하지 못한 것 같아 아쉬움이 조금 남았다.  

 

2009년에 재판이 되었나 본데, 내가 읽은 것은 가지고 있던 초판이다.

5장 페미니즘 부분에서 소개된 그림 <Charlotte du Val d'Ognes>은 최근에 Marie-Denise Villers의 작품으로 밝혀졌다고 하니 이런 내용들이 수정되었는지는 확인해 보지 못해서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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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크는 인문학 2 : 아름다움 - 못생긴 백설공주도 왕자의 키스를 받았을까? 생각이 크는 인문학 2
한기호 지음, 이진아 그림 / 을파소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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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숙한 사람이라면 아름다움이 지니는 힘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게 아니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깊이 성찰할 수 있어야한다. 아름다움이란 객관적인 것인가, 아니면 주관적인 것인가. 시대와 장소와 무관한 보편적인 아름다움이 있는가. 피타고라스가 말하듯 아름다움이란 ‘조화’와 ‘질서’ 같은 사물의 존재 방식에서 생겨나는 것일까, 아니면 데이비드 흄이 말하듯 “아름다움은 사물 그 자체의 성질이 아니라 오로지 사물을 응시하는 사람의 머릿속에서만 존재할 뿐이며, 모든 사람은 아름다움을 서로 다르게 느끼는” 것일까.

 

피타고라스-플라톤-아퀴나스 등이 아름다움을 유발하는 보편적(객관적)인 요소들에 대해 언급했다면, 인간의 문화 속에서 만들어지는 (주관적인) 아름다움에 대해 말한 학자들도 있다.

 

 

과학자 울리히 렌츠는 《아름다움의 과학》이라는 책에서 아름다움의 원리를 두 가지로 분류했습니다. 하나는 자연의 원리에 의해 만들어지는 아름다움으로 그 뿌리가 자연에 있는 것입니다. 비례가 맞는 몸매의 아름다움이나 황금 비율을 지킨 그림이나 조각 등의 조화와 균형을 갖춘 아름다움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다른 하나는 인간의 문화에 의해 만들어지는 아름다움으로 그 뿌리는 인간 공동체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문화는 인류가 만든 것이지만 인류 정신을 지배하는 힘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자연적인 조화와 비례를 유지하고 있지 않은, 심지어 기괴하다고 생각되는 모습에서도 아름다움을 느끼는 경우가 생기는 것입니다. (71)

 

 

캐나다의 심리학자 주디 앤더슨은 세계 각지의 다양한 문화를 연구했는데, 날씬한 몸매를 아름답다고 여기는 곳은 식량 걱정이 없는 지역이었으며 풍만한 몸매를 아름답다고 느끼는 곳은 식량이 부족한 지역이었다고 합니다. 식량이 부족해 먹지 못한 사람들이 보기에 풍만한 몸매는 아름답고 동경하고 싶은 몸매였던 것이죠. 즉, 아름다움이란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처지와 문화, 마음 상태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이끌림의 과학》을 쓴 애드리언 펀햄과 바이런 스와미도 비슷한 연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18~19세기 유럽 제국주의 국가의 귀족과 왕족 여성들은 노동을 하지 않았으므로 실내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부와 권력을 가진 여성들의 피부는 유난히 백옥처럼 희었고 흰 피부는 아름다움의 상징이었습니다. 하지만 산업사회에 접어들면서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실내에서 일을 하며 보내야 했고, 햇빛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더 이상 하얀 피부는 아름다움의 상징이 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가난과 병약함의 상징이 되었죠.

다양한 연구 결과를 통해서 아름다움은 단지 눈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았습니다. 인간들에게만 존재하는 문화라는 것은 우리에게 아름다움을 보는 또 다른 눈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인간은 자연에 몸담고 있으면서 동시에 문화를 가진 독특한 존재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이중적인 입장이 바로 아름다움을 객관적이면서 주관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이 아닐까요? (74-77)

 

 

아름다운 사람은 남다른 힘을 가지지만, 질투와 편견의 대상이 될 수 있고, 그에 따라 행복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4장의 얘기는 누구나 새겨들어야 할 것이다.

 

 

부하 직원이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을 때, 매력적이지 않은 부하 직원의 경우에는 단지 운이 나빴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매력적인 부하 직원이 업무를 완수하지 못한다면 노력이 부족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합니다. (93)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사람이 유리할 때도 있지만, 불리할 때도 있다는 이야기다. 사람들에게는 선망이라는 감정도, 질투라는 감정도 있기 때문에.

 

 

1970년대에 미국에서 행해진 한 실험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여러 남녀 대학생이 방을 구하라는 임무를 받았는데 결국 방을 구하지 못한 사람은 빼어난 미인들이었다고 합니다. (94)

 

 

5장 <예술 작품은 모두 아름다워야 하나요?> 에서는 피카소, 뒤샹, 존 케이지 등이 만들어낸 ‘아름답지 않은 예술작품들’을 예로 들면서 이제는 예술이 더 이상 옛날처럼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기술’이 아니라 무언가 다른 것으로 변질되었다는 결론을 던져놓고 황급히 마무리되었다. 하기야 본격적으로 예술론을 논하는 책은 아니니까 일단 “과연 예술이란 무엇일까요?” 정도의 질문으로 끝내는 게 현명할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고는 해도 뭔가 아쉬운 건 사실이다.

 

6장에서 동물들도 아름다움을 안다는 것과, 아름다움은 좋은 유전자의 증거라는 논의가 과학자들 사이에서 나왔다고 소개한다. 갓난쟁이도 예쁜 얼굴 모니터만 바라본다지 않아? 인간이 느끼는 아름다움이 남성적인 면보다는 여성적인 면에 더 치우쳐 있고, 이것은 인간의 생존과 진화와 직접 관계가 있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었다. 다른 동물에 비해 인간의 여성은 자녀를 오랜 기간 돌보아야 하는 처지에 있기 때문에 남성의 도움이 많이 필요했고, 이에 따라 아름다운 외모는 남성의 도움을 얻어내기 위한 수단으로 진화해 왔다는 것이다.

 

 

이렇듯 인간의 겉모습의 아름다움에 대한 논의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지만 끝에서는 역시 모범적이고 무난한 결론으로 훈훈하게 마무리되고 있다.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다양한 단어는 아름다움의 다양한 성질들을 생각해 보게 합니다. 만일 아름다움이라는 성질이 한 가지라면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표현이 그렇게 다양할 수 있을까요?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다양한 단어는 사물이 가진 여러 가지 종류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게 도와줍니다. 어떤 것은 색깔이 진해서 아름답고 어떤 것은 색깔이 연해서 아름답죠. 어떤 것은 커서 아름답고 또 어떤 것은 작기 때문에 아름다워요. 선이 굵어서 아름다운 것도 있고, 선이 가늘어서 아름다운 것도 있습니다.

아름다움의 성질은 한 가지가 아닙니다. 다양한 성질들이 결합해 만들어 낸 것이죠. 마치 훌륭한 음식을 먹으면서 ‘맛있다’고 말할 때, 그 말 속에 담긴 ‘맛’은 하나의 맛을 의미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죠. 쓰고, 맵고, 달고, 고소하고, 짠맛이 절묘하게 결합해 음식을 맛있게 만드는 것처럼, 사물의 다양한 성질 중에서 어떤 사람은 색깔에 주목해 그것을 아름답다고 느끼고, 어떤 사람은 모양에 주목해 아름답지 않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146)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미학 입문서로 보면 되겠다.

하지만 본격적인 미학 탐구서라고 하기엔 약간 부족함이 있다.

‘못생긴 백설공주도 왕자의 키스를 받았을까?’라는 부제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청소년들이 관심이 많을) ‘외모의 아름다움’에 대한 논의에 치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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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der's Game (Mass Market Paperback, Revised)
올슨 스콧 카드 지음 / Tor Science Fiction / 199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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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내내 개봉하기 전에 다 읽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다.

오늘 겨우 허겁지겁 (뒤로 가면서 모르는 단어는 찾지도 않고) 다 읽었다.

70년대에 쓴 소설로선 매우 획기적인 설정이었겠다.

 

뒤로 가면서 이제 얼마 안 남았는데 도대체 진짜 버거들은 언제 나오는 거냐 하면서 짜증을 냈었는데, 뒤통수를 맞았다.

텔레비전에서, 인터넷에서, 여기저기에서 봤던 영화 엔더스게임 예고편에 비친 이미지에 자꾸 소설 내용을 대입하게 되니까 때론 해석에 방해도 됐고 어쩔 때는 도움도 되었다.

 

8살 난 어린애가 애늙은이처럼 말하는 게 좀 적응이 안됐지만 탁월한 천재들은 공감이 간다고 하더라.

군사 훈련 장면들은 예비역인 내가 보기에도(공군은 아니었지만) 꽤 실감나게 묘사한 거 같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영화가 소설보다 재미있을 거 같진 않다.

 

 

Mazer Rackham이 엔더에게 한 말이 인상 깊었다.

 

"An enemy, Ender Wiggin, I am your enemy, the first one you've ever had who was smarter than you. There is no teacher but the enemy. No one but the enemy will tell you what the enemy is going to do. No one but the enemy will ever teach you how to destroy and conquer. Only the enemy shows you where you are weak. Only the enemy tells you where he is strong. And the rules of the game are what you can do to him and what you can stop him from doing to you. I am your enemy from now on. From now on I am your teacher." (262-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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