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뱀장어 - 충전
전기뱀장어 노래 / 붕붕퍼시픽 / 2011년 5월
평점 :
품절


˝깨지 않을 꿈을 꾸도록 오늘도 난 눈을 감아˝ - <구조지질학> 가사 전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나탈리 골드버그 지음, 권진욱 옮김 / 한문화 / 2013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어제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를 다 읽었다. 신뢰하는 이웃 님들의 추천을 보고 나서 찾아 읽었다.

결국 각 잡고 쓸 생각 말고, 쓰는 것을 일상으로 만들라는 거다. 작업실 근사하게 꾸며놓아야 글이 나오는 게 아니란 것이고 작가라면 언제 어디서든 곧바로 연필을 들고 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그 말에 영감을 얻은 것일까. 아까 점심 때쯤 문득 벚꽃잎 운운하는 글을 북플로 적었는데, '뼛속까지 내려가서 쓰라'는 얘기와 아까 겪었던 경험과 옛날의 기억이 섞여서 화학작용을 일으킨 듯하다.

뼈는 우리 몸을 지탱해 줄뿐만 아니라 피를 만들어 공급한다. 내 몸의 피는 뼈가 만든 것이다.

이런 관념이 있는 내게 차창으로 날아들어온 벚꽃잎은 잊었던 젊은 날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고, 그 기억은 저런 민망한 글을 끄적이게 한 거다.

핑크빛 벚꽃잎이 내 피가 됐단다. 아하핫! 이거야 원 낯 간지러워서 견딜 수가 없다.

 

각설하고,

나탈리 골드버그가 선 수행을 오랫 동안 했다고 하던데, 그녀도 밝히고 있듯이 이 책에서 말하는 글쓰기 훈련 과정은 결국 불교의 선 수행 과정과도 일치한다. 곳곳의 문장 속에는 불교적 인식론도 수시로 나왔다.

연기론이나 보살사상을 이 책에서 읽게 되리라곤 생각도 못했다.

 

아무튼 대단한 에너지를 뿜는 글쓰기 책이다. 어떤 형태로든 글을 쓰려는 분들은 꼭 한 번쯤은 읽어봄직 하다.

 

 

당신이 누구인지 잊어버려라. 당신이 쳐다보고 있는 모든 사물들 안으로, 거리 속으로, 물 잔에 담긴 물 속으로, 옥수수밭 속으로 들어가 그대로 사라져 버려라.
당신이 느끼는 바로 그것이 되어 그 감정을 태워버려라. 걱정하지 말라. 당신은 초조함에서 벗어나 환희에 도달할 것이다. 만약 당신이 어떤 감정을 잡았다거나, 그 감정과 완전히 하나가 된 바로 그 순간을 냄새 맡거나 보게 되면, 당신은 이미 위대한 시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런 다음 우리는 다시 지상의 삶으로 돌아온다. 위대한 비전을 갖춘 작품만이 남는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또 다시 책 속으로(물론 좋은 책 속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이유다.
그러니 우리가 누구이며 어떻게 우리 자신에게 이를 수 있는지 밝혀 주는 작품을 읽고 또 읽어라. 이 과정 속에서 우리는 자신과 타인에 대한 연민을 키우고 다정한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을 거듭 체험하게 된다. (140)

방 안에 있는 고양이가 움직이는 물건을 응시하는 모습을 지켜본 적이 있는가. 고양이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으면서 동시에 모든 감각을 동원해서 보고, 듣고, 냄새를 맡는다. 당신이 거리에 나가 배워야 할 것이 바로 그런 고양이의 태도다.
고양이는 돈이 얼마나 필요할까 계산하거나, 플로렌스에 가면 누구에게 엽서를 보낼까 고민하지 않는다. 단지 생쥐 한 마리, 마루 바닥에 구르고 있는 공 또는 크리스탈에 반사되는 빛줄기를 응시하고 있을 뿐이다. 고양이는 언제라도 자신의 모든 것을 튀어 오르게 할 준비를 하고 있다. 그렇다고 당신이 당장 네 발로 기고 꼬리를 치켜 세우라는 말은 아니다. 단지 고요하게 응시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141-142)

어떤 글을 쓰겠다고 계획했을 때 동물처럼 행동해보자. 동물처럼 천천히 움직이고, 동물처럼 당신이 쓰려는 이야기의 먹잇감들을 하나씩 비축해 두자. 어떤 방법이든지 상관없다. 일상의 찌꺼기에서 발굴해내든지, 도서관을 찾아가든지, 정신의 정원으로 나가든지 마음대로 하라.
무엇이 되었든 모든 감각을 집중시켜라. 논리적인 마음은 꺼버려라. 마음을 비워 놓고 생각이 들어가지 않게 하라. 언어가 배꼽에서부터 올라오는 것을 느껴라. 머리를 위 속으로 끌어내리고 소화시켜라. 당신 육체가 양분을 빨아들이도록 내버려 두라. 인내심을 가지고 한결같은 균형을 유지하라. 생각의 지층에 있는 무의식의 세계 속으로, 당신의 핏줄 속으로 글쓰기를 삼투시키라. (142-143)

결국 세상에 완벽한 것은 없다. 진정 글을 쓰고 싶다면 모든 것을 잘라내고 쓸 수밖에 없다. 글을 쓰기 좋은 완벽한 환경도, 습작 노트도, 펜도, 책상도 없다면, 자신을 유연하게 훈련시킬 수밖에 없다. 아무리 낯선 환경 속에서도, 완전히 다른 장소에서도 글쓰기 훈련은 계속되어야 한다. (164)

자신이 쓴 글 중에서 좋은 부분은 표시를 해두라. 이것들을 글감 목록에 적어 놓으면 다음 번 다시 글을 쓸 때 그 중 하나를 잡아서 새롭게 시도해볼 수 있다. 또 표시를 해둔 글은 그 문장에 대한 기억을 강화해 훗날 필요한 상황에서 무의식적으로 그 문장이 떠오르도록 만든다. 이렇게 서로 떨여 있던 별개의 부분들이 뭉쳐져서 어느 날 갑자기 하나의 놀라운 작품이 탄생할 수도 있다. (262)


댓글(6)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yrus 2015-04-21 18: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앞으로 이제 짐승처럼 글을 써야겠어요. 먹이를 찾아 산기슭처럼 어슬렁거리는 하이에나처럼요. 하이에나를 본 일이 있다면 바로 접니다. ㅎㅎㅎㅎ

돌궐 2015-04-21 18:52   좋아요 0 | URL
저도 먹잇감을 찾아 헤매는 한마리 들개가 되려고 합니다.ㅋㅋㅋ

만병통치약 2015-04-21 2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짐승처럼 글을 쓰는데는 악평이 최고더군요 ㅋㅋ

돌궐 2015-04-22 08:12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악평을 쓸 때는 뭔가 더 치열하고 본능적으로 쓰게 되더군요.
어트케 우리 알라딘 악평가 모임(서클명 `짐승들`)이라도 따로 만들어 볼까요? ㅋㅋㅋ

transient-guest 2015-04-22 0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을 하다보면 무아지경에 빠져서 글이 나오는 때가 있습니다. 제가 하는일이 주로 많이 읽고 쓰는 형태의 일이 대부분이라서 복잡한 케이스들이 쌓이면 어느 순간에 이것들을 정리하면서 그런 경험을 하는데요, 연습이 많이 되어 있는 상태에서 가능한 것 같아요. 일할때에는 정말 짐승처럼 그거 하나만 생각하게 되더라구요.ㅎㅎ

돌궐 2015-04-22 08:51   좋아요 0 | URL
네, 저도 비슷한 경험이 있습니다. 뭔가 발표를 할 때도 막바지에 이르면 전에 계통 없이 모아두었던 글과 자료들이 정리되면서 그럴싸한 논리나 문장이 완성되더라구요. 또 그런 때는 평소같으면 생각도 못할 아이디어도 떠오르고, 말씀처럼 하루 종일 짐승처럼 그거 하나만 생각하게 되더군요.^^
 
The Transall Saga (Paperback)
Paulsen, Gary 지음 / Delacorte Pr / 2011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애리조나 사막에서 혼자 캠프를 하다가 이상한 파란빛 광선에 이끌려 문명이 몰락한 먼 미래로 가게 되는 남자아이 이야기다.

게리 폴슨 소설답게 긴박한 이야기 전개와 모험이 재미있었다. 막판에 나오는 활극은 몰아서 읽을 수밖에 없더라.  

하지만 번역본 제목처럼 그 '푸른 광선의 비밀'이 무엇이었는지는 결국 나오지 않았다.

 

("여긴 어디, 나는 누구?"하며) 미래로 떨어진 마크는 혼자 숲 속에서 살다가 정체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붙잡힌다.

그 뒤 마크는 기회를 틈타 붙잡힌 마을에서 도망가려다가 되돌아온다.

다른 부족 사람들이 그 마을을 기습하기 위해 쳐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기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이들에게 위험을 알려주는 소년의 이 '지어낸 이야기'를 읽고 있자니,

자기가 반드시 책임져야 할 이들은 내팽개치고 ('가만히 있으라'고 한 채) 자기네들끼리만 몰래 토낀 인간들의 '실화'가 더욱 참담하였다.

하필 이 책을 읽고 있었던 때가 바로 작년 이맘때쯤, 세월호 참사가 있었던 그 날이었기 때문에.

 

위험을 알려준 건 고마운데, 왜 그러고 나서 도망가지 않고 계속 도와줬느냐고 묻는 부족장에게 마크는 이렇게 대답한다.

 

"It was not an easy decision. I considered saving only myself. But it didn't seem right to let everyone else die." (131)

쉬운 결정은 아니었어요. 내 목숨이나 챙기자는 생각도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이 죽게 놔두는 것이 옳은 일은 아닌 거 같았어요.

 

 

#

아름다운 것이다. 이렇게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의 손해까지 감수하는 사람의 모습은.

우리가 세월호 박지영 씨를 눈물로 기억하는 이유는 목숨까지 버려가며 승객을 구하려던 숭고한 모습 때문이 아닌가.

그녀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대로 객실에 내려가는 건 돌아올 수 없는 길임을.

왜 두렵지 않았겠는가? 그래도 그녀는 그 엄청난 두려움을 이겨낸 것이다. 죽음의 짠내가 허파로 엄습해 오는 것이 느껴졌지만 내려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아름다운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의지이며 마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아름다운 사람만 살지 않는다. 우리가 자기 몸뚱아리와 자기 이익만 챙기려는 사람의 모습을 언짢게 바라보는 이유는 그들의 저 이기적인 모습 때문이 아닌가. 이들을 추하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생존 본능에 따르는 걸 무조건 비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정말 醜하고 惡한 것들은 따로 있다. 사람이라 부르기도 싫다. 영문도 모르고 죽어간 사람들의 넋을 위해 사건의 원인과 결과, 즉 진실을 밝혀서 앞으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자는 사람들을 입막음하려는 것들, 참으로 더럽고, 나쁜, 고깃덩어리들이다. 진정한 추악의 갑종들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불교개론 조계종 신도전문교육 필수교재 1
대한불교조계종 포교원 엮음 / 조계종출판사 / 2012년 2월
평점 :
절판


붓다와 불교 사상에 관한 대략의 윤곽을 잡을 수 있는 개설서이다.
초기불교와 부파불교에 이어서 대승불교와 선불교에 이르는 불교의 역사와 주요 경전들이 소개되고 있다. 각각의 불교 경전들이 어떤 시대적 배경에서 저술되었고 그 내용들은 어떠한지 개관할 수 있었다.
수많은 경전의 단편적인 인상들이 계통 없이 떠도는 상황에서 정리가 필요한 시점이었는데 마침 적당한 책이었다.

3장 초기불교부터 6장 선의 세계까지 특히 정리가 잘 되어있어 도움이 많이 되었다. 수행하는 마음으로 초록을 작성해 두자.

 

조계종 종단에서 교재로 출판한 것이어서 포교와 교단의 지향점을 염두에 둔 서술이 조금 있지만 거슬리지는 않는다. 아마도 그것은 불교가 맹목적 신앙을 강조하는 신학이 아닌 ˝인간에서 출발하여 인간을 문제 삼다가 결국 인간의 문제로 회귀하는˝(272-273) 인간학이기 때문일 것이다.

 

 

남들이 보기엔 밉상이지만 사랑하는 연인에게 그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멋진 남자요 여자이다. 아무리 먹기 좋은 음식도 배부른 사람이나 아주 심한 고통에 빠져 있는 사람에게는 쓰레기나 진배없다. 이와 관련한 `일수사견(一水四見)`의 비유가 있다. 똑같은 물이 아귀에게는 피고름의 더러운 물로, 물고기에게는 자신들이 사는 집으로, 사람에게는 마시는 물로, 하늘에 사는 신들에게는 보석으로 가득 찬 연못, 즉 보엄지(寶嚴池)로 보인다는 것이다. (179)


댓글(2)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해피북 2015-03-29 1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돌궐님은 불교에 관심이 많으신거 같아요 그래서 말인데요 혹시 저 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읽어볼 수 있는 불교 서적이 있을까요 예를 들어 아주 쉬운 금강경? 과 같은 책을 읽어보고 싶은데 어떤 책을 봐야할지 잘모르겠어요^~^

돌궐 2015-03-29 12:35   좋아요 0 | URL
불교 개론서에서는 이 책도 괜찮겠고, 조계종출판사의 <부처님의 생애>가 감동도 있고 좋았습니다.
경전 중에서는 <숫타니파타> 같은 초기 경전류를 읽어보시면 어떨까요.
사찰 문화재에 관해 궁금하시면 명법스님 <미술관에 간 붓다>나 자현스님 <사찰의 비밀>이 좋겠습니다. 불교 건축 쪽으로는 김봉렬 <가보고 싶은 곳 머물고 싶은 곳>1,2권을 추천합니다.
금강경 관련 쉬운 책은 제가 과문하여 잘 모르겠습니다.^^;; 각묵스님의 <금강경 역해>가 가장 좋다고 들어서 저도 그걸 읽어보려고 합니다.
 
이런 시가 하필
가만히 좋아하는 창비시선 262
김사인 지음 / 창비 / 2006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인은 아주 평범한 일상이나 사물도 다르게 보는 사람들이다.

심지어는 자기 자신조차도 관조하는 자들이다. 그리고 그것을 정제된 글로 표현한다.

 

 

 

노숙

 

 

헌 신문지 같은 옷가지들 벗기고

눅눅한 요 위에 너를 날것으로 뉘고 내려다본다

생기 잃고 옹이진 손과 발이며

가는 팔다리 갈비뼈 자리들이 지쳐 보이는구나

미안하다

너를 부려 먹이를 얻고

여자를 안아 집을 이루었으나

남은 것은 진땀과 악몽의 길뿐이다

또다시 낯선 땅 후미진 구석에

순한 너를 뉘였으니

어찌하랴

좋던 날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만

네 노고의 헐한 삯마저 치를 길 아득하다

차라리 이대로 너를 재워둔 채

가만히 떠날까도 싶어 묻는다

어떤가 몸이여

(12)

 

이 시로 김사인 시인은 2005년 현대문학상을 받은 걸로 알고 있다.

그리고 이 한편만으로도 시집은 별3개 깔고 들어간다.

나는 시를 많이 모르지만 시집 한 권에서 다섯 편 이상 뽑을 수 있다면 별 다섯 개를 줘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깊이 묻다

 

 

사람들 가슴에

텅텅 빈 바다 하나씩 있다

 

사람들 가슴에

길게 사무치는 노래 하나씩 있다

늙은 돌배나무 뒤틀어진 그림자 있다

 

사람들 가슴에

겁에 질린 얼굴 있다

충혈된 눈들 있다

 

사람들 가슴에

막다른 골목 날선 조선낫 하나씩 숨어 있다

파란 불꽃 하나씩 있다

 

사람들 가슴에

후두둑 가을비 뿌리는 대숲 하나씩 있다

(81)

 

 

 

옛 일

 

 

그 여름 밤길

수풀 헤치며 듣던

어질머리 풀냄새 벌레소리

발목에 와 석거이던 이슬방울 그리워요

우리는 두 마리 철없는 노루새끼처럼

몸 달아, 하아 몸은 달아

비에 씻긴 산길만 헤저어 다니고요

단숨만 들여마시고요

안 그런 척 팔만 한번씩 닿아보고요

안 그런 척 몸 가까이 냄새만 설핏 맡아보고요

캄캄 어둠 속에 올려 묶은 머리채 아래로

그대 목덜미 맨살은 투명하게 빛났어요

생채기투성이 내 손도 아름다웠지요

 

고개 넘고 넘어

그대네 동네 뒷산길

애가 타 기다리던 그대 오빠는 눈 부라렸지만

우리는 숫기없이 꿈 덜 깬 두 산짐승

손도 한번 못 잡아본걸요

되짚어오는 길엔

고래고래 소리질러 노래만 불렀던걸요

(86-87)

 

 

 

인절미

 

 

외할머니 떡함지 이고

이 동네 저 동네로 팔러 가시면

나는 잿간 뒤 헌 바자 양지 쪽에 숨겨둔

유릿조각 병뚜껑 부러진 주머니칼 쌍화탕병 손잡이 빠진 과도 터진 오자미 꺼내놓고

쪼물거렷다

한나절이 지나면 그도 심심해

뒷집 암탉이나 애꿎게 쫓다가

신발을 직직 끈다고

막내 이모한테 그예 날벼락을 맞고

김치가 더 많은 수제비 한 사발

눈물 콧물 섞어서 후후 먹었다

스피커에서 따라 배운 '노란 샤쓰' 한 구절을 혼자 흥얼거리다

아랫목에 엎어져 고양이잠을 자고 나면

아침인지 저녁인지 문만 부예

빨개진 한쪽 볼로 무서워 소리치면

군불 때던 이모는 아침이라고 놀리곤 했다

저물어 할머니 돌아오시면

잘 팔린 날은 어찌나 서운턴지

함지에 묻어 남은 고운 콩고물

손가락 끝 쪽글토록

침을 발라 찍어먹고 또 찍어먹고

 

아아 엄마가 보고 싶어 비어지는 내 입에

쓴 듯 단 듯 물려주던

외할머니 그 인절미

용산시장 지나다가 초라한 좌판 위에서 만나네

웅크려 졸고 있는 외할머니 만나네

(88-89)

 

 

 

조용한 일

 

 

이도 저도 마땅치 않은 저녁

철이른 낙엽 하나 슬며시 곁에 내린다

 

그냥 있어볼 길밖에 없는 내 곁에

저도 말없이 그냥 있는다

 

고맙다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

(38)

 

 

#

누가 시를 삶에 대한 부드러운 복수라고 했다던데, 나는 그저 시는 허세라고만 생각했다.

근데 복수면 어떻고 허세면 어떤가. 어차피 인생은 허세로 가득한 일장춘몽 아니던가.

허세고 복수고 간에 이런 시를 읽을 수 있었다는 건 참 고마운 일이다.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

옆에 떨어진 나뭇잎조차도 달리 보게 해주어서 고맙고,

내 안에 숨겨진 '날선 조선낫' 한 자루가 무언가 생각해 본 것도 고맙고,

"손도 한번 못잡아"보고 떠났던 아이가 생각나서 고마운 것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만병통치약 2015-03-21 2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화려하지 않고 멋 부리지 않아 더 와닿네요

돌궐 2015-03-21 23:05   좋아요 0 | URL
시집 속에는 조금 어려운 시도 있긴 한데, 아직 제가 다 소화를 못했습니다.^^;

해피북 2015-03-21 2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시에 대해 잘 모르지만 이렇게 날것 처럼 생생하게 다가올때 크게 와닿는거 같아요 ^~^

돌궐 2015-03-21 23:07   좋아요 0 | URL
김사인 시의 장점이 말씀하신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