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
메리 앤 섀퍼.애니 배로스 지음, 신선해 옮김 / 이덴슬리벨 / 201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
학창 시절에 한 여학생에게 편지를 보낸 적이 있다. 당연히 누구인지 알고 보냈다. 해마다 있던 환경미화 때문에 여학생들 교실에 올라가 못질 해주다 알게 된 애니까. 등교 시간에 버스 정류장에서 매일 보던 건 덤이었고, 함께 혼성 합창부 활동을 했던 건 편지를 보내고 난 다음이므로 절대로 우연이다. 그러나 얼굴이 하얗고 아담한 키와 날씬한 몸매에 머리를 늘 두 갈래로 단정하게 땋고 다니던 그 애한테 편지를 보낸 건 분명히 내 의도에 따른 것이었다.
나는 당시 친하게 지내던 친구와 남들 눈에 잘 안 띄는(적어도 그렇게 믿었다) 그 조용한 아이가 같은 중학교를 나온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중학교 졸업 앨범을 발견하고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훑어보다가 뒷쪽 주소록에서 그 아이 주소를 '매의 눈'으로 찾아냈다. 그리고 친구 몰래 속으로 그 주소를 달달 외웠다. 기말고사 시작 1분 전에 필사적으로 영어 단어를 외우듯이. 달달.
그렇게 외워 온 주소를 집에 와서 경건한 마음으로 적어 두고는 아마도 얼마 뒤엔가 편지를 썼을 것이다. 정말 답장은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냥 어린 마음에 객기를 부렸다고나 할까. 어차피 답장도 안 올건데 뭐, 이런 마음으로. 그래서인지 나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알고 지내는 친구인 양 별 시덥지도 않은 얘기를 편지에 썼었다. 같잖은 사랑 고백이나 되도 않는 허세를 다 빼고 그냥 내 일상과 간단한 소개 정도를 휘갈겨 썼던 것 같다. 글씨를 잘 쓰려고 노력하지도 않았고, 좋아한다느니 만나고 싶다느니 하는 부담스럽고 낯간지러운 말 같은 건 정말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한 1주일 쯤 뒤인가 답장이 왔다.
지금도 그 순간이 기억난다. 엄마가 우편함에서 가져온 편지들 가운데 하나를 건네주며 "너한테 편지 왔다. 근데 걔 누구니?"하던 그 순간. 방에 들어가서 조심스럽게 봉투를 뜯어서 편지지를 꺼내 읽던 그 순간.
내가 그랬던 것처럼 무겁지 않게 자기소개를 하는 편안한 편지였다. 그리고 나를 어떻게 아느냐고, 왜 나한테 편지를 썼냐고 물어보더라. 여기서 냉큼 너를 좋아한다고 답장을 하면 안되는 거다. 그거야 말로 바보 같은 짓이다. 좋아하더라도 그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여자에겐 결정적인 순간이 필요한 것이다, 라고 나이 든 지금의 내가 말한다.
#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에서 도시 애덤스는 생판 모르는 줄리엣에게 편지를 보낸다. 한때 줄리엣의 소유였던 찰스 램의 책을 자기가 갖고 있으며, 이 작가가 마음에 드는데 책을 더 구할 수 없느냐고. 자기가 살고 있는 건지 섬은 책을 구하기가 어렵다면서 그는 찰스 램의 이야기를 빗대어 자기 소개를 한다. 책을 다 읽고 나서 도시 첫 편지를 다시 읽는다면 찰스 램 이야기가 결국 도시와 건지 섬의 이야기라는 걸 알 수 있다.
독일군 점령하에서도 저는 찰스 램 덕분에 웃을 수 있었습니다. 특히 돼지구이에 관한 글이 압권이지요. 우리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도 독일군에게는 비밀로 해야 했던 돼지구이 때문에 탄생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찰스 램이 더 친근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성가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찰스 램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보다는 실례를 무릅쓰는 편이 나을 것 같았습니다. 그의 글을 읽다 보니 찰스 램과 친구가 된 것 같거든요. (19)
여기서 나는 도시가 '실례를 무릅쓰고' 줄리엣에게 편지를 쓴 이유는 찰스 램 때문만은 아니었다고 본다. 그건 내가 옛날 그 여자애한테 별 시덥지도 않은 얘기로 편지를 썼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찰스 램은 핑계였을 뿐이다. 근거는? 추신에 나와 있다.
추신. 제 친구 모저리 부인도 한때 당신의 것이던 소책자를 구입했답니다. 제목은 《불타는 떨기나무는 과연 존재했을까? 모세와 십계명을 위한 변론》이죠. 모저리 부인은 당신이 여백에 남긴 메모가 마음에 든다고 합니다. '신의 말씀? 아니면 군중통제의 수단?' 어느 쪽인지 결론이 났습니까? (19)
여기서 도시는 모저리 부인의 핑계를 대긴 했지만 자신도 역시 줄리엣의 메모가 마음에 든다고 한 거나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도시가 줄리엣에게 하고 싶었던 얘기는 결국, 찰스 램을 읽는 사람이며 또 다른 책에다는 저런 의미심장한 메모를 남겼던 "당신을 알고 싶어요"가 아니었을까?
추신에 굳이 줄리엣이 남긴 글을 언급하면서 그 결론이 궁금하다고 한 것은 고도의 시네루(이런 말밖에는 생각이 안 나서 수준을 드러내는 것 같지만)였다. 물론 스스로 시네루를 준다고 생각하고 쓴 것은 아닐지라도, 결과적으로 그 편지는 엄청난 회전이 들어간 白球가 된 셈이다.
#
옛날로 돌아가 보자. 우리는 그 후로도 죽 편지를 교환했다. 음악 얘기도 했다. 나는 클래식을 좋아한다고 했고, 그 애는 헤비메탈을 좋아한다고 했다. 그렇게 조용하고 공부도 잘 하는(전교 1등이었다) 여자애가 헤비메탈이라니! 난 그 의외성에 더욱 빠져들었다. 그래서 나는 그 애가 말했던 임펠리테리(Impellitteri) 앨범부터 사서 듣기 시작했다. 임펠리테리 하면 보통 화려한 기타 속주로 잘 알려진 명연주곡 <Somewhere over the Rainbow>를 떠올리지만 난 1번과 2번 트랙 <Stand in Line>과 <Since You've Been Gone>을 가장 좋아했던 거 같다. 너무 들어서 테잎이 늘어질 때까지 들었다.
Impellitteri - <SInce You've Been Gone>
각설하고, 도시에게도 줄리엣은 의외였을 것이다. 그녀가 그저 책이나 더 구해주고 선심 좀 써서 찰스 램에 대한 추가 정보를 알려주는 정도의 기대에 걸맞은 사람이었을 뿐이라면 이렇게까지 편지 왕래가 계속될 일이 없었겠지. 나중에 줄리엣이 자기는 작가라는 걸 밝히고 건지 섬의 북클럽에 대해 글을 쓰고 싶다고까지 하니 도시는 더더욱 놀랐을 것이다. 어쩌면 도시는 편지를 쓰면서 단순한 정보 이상의 뭔가를 더 기대했을 가능성이 있다. 모저리 부인 소유 책에 적힌 그녀의 필체를 통해 젊은 여성임을 간파했다든지, 아니면 막연한 대화 상대가 필요했을지도 모르겠다. 왜 안 그렇겠나. 아무리 전쟁 뒤의 힘든 상황이지만 한창 혈기왕성한 남자 아닌가.
도시에게 보낸 첫 답장에서 줄리엣은 독서와 자신의 메모에 대해 이렇게 적는다.
그래서 제가 독서를 좋아하는 거예요. 책 속의 작은 것 하나가 관심을 끌고, 그 작은 것이 다른 책으로 이어지고, 거기서 발견한 또 하나의 단편으로 다시 새로운 책을 찾는 거죠. 실로 기하급수적인 진행이랄까요. 여기엔 가시적인 한계도 없고, 순수한 즐거움 외에는 다른 목적도 없어요. (22)
…
추신. 모세에 관한 건 도무지 결론이 나질 않네요. 아직도 고민 중이랍니다. (23)
게다가 친절하게도 줄리엣은 《찰스 램 서간집》에 나오는 재미난 구절('술, 술, 술, 짠, 짠, 짠, 벌컥, 벌컥, 벌컥, 팽, 팽, 팽, 어질, 어질, 어질, 쾅! 난 결국 구제 불능이 되고야 말겠지. 이틀을 내리 술만 들이켜고 있으니. 내 도덕관념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신앙심도 희미해져가(원문: Buz, buz, buz, bum, bum, bum, wheeze, wheeze, wheeze, fen, fen, fen, tinky, tinky, tinky, cr'annch! I shall certainly come to be comdemned at last. I have been drinking too much for two days running. I find my moral sense in the last stage of a consumption and my religion getting faint)')까지 일부러 소개를 해주고, 돼지구이 만찬의 비밀과 감자껍질파이의 정체에 대해 질문까지 했으니 이제 쌍방향 교류의 전용선이 깔린 셈이다.
말하자면 도시의 "당신을 좀더 알고 싶어요"라는 물음에 줄리엣은 "저도 당신이 궁금해요"라고 화답한 것이다. 내 뜬금없는 편지에 망설이거나 얌전 빼지 않고 답장을 해 주었던 그때 그 아이처럼.
요즘에는 컴퓨터를 켜고 이메일을 보내거나 특정 사이트에 접속해서 알고 지내는 사람(사실은 id)에게 쪽지를 보내거나 그들이 쓴 글에 덧글을 다는 것만으로 손쉽게 대화를 나눌 수 있다. 그러나 겨우 20년 전까지만 해도 이렇진 않았다. 겨우 pc통신만 몇 개 있었지 인터넷은 흔히 쓸 수 없었던 시대였다. 요즘은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속 깊은 대화를 하기 위해 가장 요긴한 통신 수단은 '편지'였다. 그러고 보니 편지를 써 본 지도 너무나 오래 되었구나. 어쩌다가 이렇게 각박하게 살고 있는 건지.
#
도시가 줄리엣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에는 돼지 구이 파티의 유례와 몇 가지 부탁, 그리고 1944년 <펀치>에 실린 만화에 대한 질문을 적었다. 그 가운데 엘리자베스에 대한 얘기가 나오는데, 이후 엘리자베스는 거의 이 책의 중심인물로 부각된다. 독서회를 시작하게 된 것도,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의 시작과 끝은 결국 엘리자베스였다.
이건 짐작일 뿐이지만, 나는 도시가 엘리자베스를 사랑했으리라 생각한다. 그가 편지에 엘리자베스에 대해 쓴 내용들을 보면 그렇다. 책에서는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아도 만일 내가 도시였다면 엘리자베스를 사랑했을 것 같고, 독일군 의무관이자 친구가 된 크리스티안과 엘리자베스가 서로 깊은 사이라는 걸 알았을 때는 크게 절망했을 것 같다. 하지만 그 둘을 모두 좋아하는 입장에서는 속으로만 삭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가 나서서 엘리자베스의 딸 킷을 보살펴 온 사실이나(심지어 그는 줄리엣이 킷을 낳을 때 에번과 이솔라, 아멜리아와 함께 아이를 받는다) 뒤에 프랑스 여인 레미를 건지 섬으로 애써 데리고 와서 성심껏 보살핀 이유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단순한 동정이나 측은지심이었다고 설명할 수만은 없지 않은가.
크리스티안과 친구가 된 이후, 도시가 어느 날 엘리자베스와 크리스티안이 연인이란 걸 깨닫는 장면은 편지에 이렇게 적혀 있다.
그 후로도 그는 종종 제가 물 나르는 걸 도와주었습니다. 일을 마친 후에는 담배를 권했고, 우리는 길거리에 서서 담배를 피우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건지 섬의 아름다움이나 역사에 관해, 책이나 농장 일에 관해 대화를 나누었지만 현재의 상황에 대한 이야기는 결코 꺼내지 않았습니다. 늘 전쟁과 아무 상관 없는 이야기만 했지요. 한번은 우리 둘이 그렇게 서 있는데 엘리자베스가 자전거를 타고 이쪽으로 덜컹덜컹 달려오더군요. 그날 하루 종일 그리고 전날 밤도 거의 꼬박 새우며 간호 일을 한 터였고, 주민 대부분처럼 그녀의 옷도 옷이라기보다는 누더기에 가까웠어요. 그렇지만 크리스티안은 갑자기 말을 멈추더니 그녀가 오는 걸 멍하니 바라보더군요. 엘리자베스가 가까이 다가와 섰습니다.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표정을 본 저는 서둘러 자리를 떴습니다. 그제야 그 둘이 아는 사이라는 걸 알아챈 겁니다. (158)
마음은 찢어지게 아팠겠지만 그는 기꺼이 두 사람을 축복했으리라 본다. 건지 섬에 온 줄리엣이 도시한테 크리스티안에 대해 물었을 때 대답한 말에서 그런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당신이 상상하는 독일인과 비슷할 거예요. 키가 크고 금발이고 눈동자는 푸른색인, 다만 그는 고통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었지요(원문: He looked like the German you imagine - tall, blond hair, blue eyes - except he could feel pain). (256)
'고통을 느낄 줄 아는' 크리스티안이었기 때문에 도시는 그를 엘리자베스의 연인으로 인정해줄 수 있었을 거다. 그리고 그들의 딸인 킷도 마치 자신의 딸인 양 사랑해 줄 수 있었겠지. 도시가 킷에 대해 쓴 글을 보자.
킷이 엘리자베스를 많이 닮은 건 아니지만 회색 눈동자와 집중할 때의 표정만은 쏙 빼닮았어요. 무엇보다도 엘리자베스의 심성을 그대로 이어받았지요. 감정이 아주 격렬해요. 거의 젖먹이 시절부터 그랬습니다. 킷이 악을 쓰면 창유리가 흔들리고, 그 조그만 손으로 제 손가락을 움켜잡으면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였지요. 저는 아기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지만 엘리자베스가 가르쳐주었습니다. 저더러 천생 아빠가 될 운명이라며, 자신은 제가 아이들의 성장에 대해 더 많이 알게 할 책임이 있다고 했습니다. 엘리자베스는 크리스티안을 많이 그리워했습니다. 그건 자신 때문만이 아니라 킷을 위해서기도 했습니다. (198)
나만 그런 건지 몰라도, 이 정도면 도시가 엘리자베스에게 숨겨왔던 감정이 무엇이었는지 충분히 알 수 있지 않은가.
차마 말하지 못하는, 그리고 바라볼 수밖에 없는 남자의 쓸쓸한 심정을 나는 저 담담한 글 속에서 읽을 수 있었다. 그런 심정은 글로 적혀 있기에 읽히는 게 아니라 글 속에 숨겨진 진실에서 우러나오기 때문에 읽히는 것이다.
#
레미 지로가 건지 섬의 북클럽 회원들에게 보낸 편지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고 싶다. 다만 레미가 등장한 이후 도시의 심정은 어떠했을지 짐작해 볼 필요가 있다. 그는 자기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곧바로 깨달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도시가 줄리엣에게 이제 막 품기 시작한 감정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도시와 줄리엣의 감정이 무르익어 가려던 결정적 순간에 때마침 건지 섬을 방문한 마크가 마차에서 뛰어내리며 줄리엣을 부르고, 도시는 망연히 마크와 줄리엣이 키스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도시는 여행가방 빌려줘서 고맙다는 얼척 없는 말을 남긴 채 서둘러 그곳을 떠난다.
캐릭터를 가만히 놔두지 말라는 소설작법이 떠오르는 장면이다. 여기서 여자들은 "안 돼~~~!" 라고 할 것이며, 남자들은 "이런 제기랄! 이 자식은 왜 하필 지금 온 거야?"라고들 하겠지.
하지만 여기서 도시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었다. 자기는 줄리엣에게 아무 것도 아닌 존재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저 마크란 놈은 한 눈에 보기에도 타고난 외모와 엄청난 재력을 지닌 사람인 것 같았을 텐데. 도시가 크리스티안이나 마크와 같은 매력적인 남자들에게 느낀 열등감은 줄리엣이 섬으로 오기 전 보냈던 1946년 4월 2일 편지에 여실히 드러난다. 그나마 도시의 감정이 확실하게 나타나는 문장이다.
건지 섬에 멀쩡한 남자는 별로 없었고, 재미있는 남자는 아예 없었습니다. 우리 대부분이 지치고 초라하고 수심 가득하며, 남루하고 신발도 없이 더러웠습니다. 우리는 패배자였고, 그렇게 보였습니다. 즐거움을 추구하기엔 시간도 돈도 에너지도 없었지요. 건지 섬 남자들은 매력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독일군 병사들은 그렇지 않았어요. 제 친구의 표현에 따르면 그들은 키 크고 금발에 잘생기고 피부는 구릿빛이었습니다. 흡사 신의 이미지였지요. 그들은 화려한 파티를 열고 명랑하게 열성적으로 어울렸으며, 차가 있고 돈도 있고 밤새 춤을 출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병사와 데이트하는 아가씨들 중 일부가 아버지에게는 담배를, 가족에게는 빵을 가져다주었습니다. 파티에서 돌아올 때면 롤빵, 파이, 과일, 완자, 젤리 등을 핸드백에 담아 집으로 가져왔고 그 가족은 다음 날 진수성찬을 만끽할 수 있었어요. (147-148)
도시는 또 다시 절망을 느꼈을 게 분명하다. 모르긴 몰라도 이제 엘리자베스를 잊고 새로 시작해 보려는데 어디선가 또 훤칠한(하지만 크리스티안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녀석이 나타나서 그녀를 나꿔채 갔으니 오죽 했을까. 과연 이런 게 자기 운명이려니 하면서 크게 낙담했을 법하다. 문득 건지 섬에 온 레미가 북클럽에서 '운명 예정설' 토론 중에 했던 말이 생각난다.
"만약 운명이 예정된 것이라면, 신은 악마입니다." (374)
도시는 레이가 겪었던 끔찍한 불행과 비극에 견준다면 자신의 이 사소하고 개인적 불행은 아무 것도 아니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전쟁이 인간에게 가져다 준 충격과 참상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레미의 저 짧은 말로도 충분히 대변된다.
도시는 그런 레미를 보살펴야 한다고 생각했겠지. 게다가 줄리엣은 애초부터 자기와 맞지 않는, 접근도 불가능한 존재였을 뿐이며 한때 흔들렸던 마음은 이제 정리해야 한다고 결심했을 것이다. 그런 그의 자조적인 마음을 둔감한 줄리엣은 알아채지 못하고 소피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나 썼다.
도시에 대한 너의 질문들은 방향을 잘못 잡았어. 킷한테 가야 한다고. 아니면 레미나. 요즘은 도시를 거의 만나지 못할뿐더러 아주 가끔 마주칠 때도 그 남자는 당췌 말이 없어. 그것도 로체스터(《제인 에어》의 남자 주인공)처럼 로맨틱하게 생각에 잠겨 침묵하는 게 아니고, 반감을 표하는 근엄하고 냉정한 침묵이야. 뭐가 문젠지 모르겠어. 정말 몰라. 처음 건지 섬에 왔을 때 도시는 내 친구였어. 함께 찰스 램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섬 여기저기를 산책했지. 나는 누구보다도 그 사람과 함께 있을 때 가장 즐거웠어. 그런데 해안 절벽에서의 그 끔찍한 밤 이후로 그가 입을 다물어버렸어. 어쨌든 나한테는 말을 걸지 않는다고. 지독하게 실망스러운 일이지. 서로 마음이 통하던 그 감정이 그립지만, 그 감정 역시 처음부터 나 혼자만의 착각이었다는 걸 깨달았어. (353)
도시가 왜 그렇게 근엄하고 냉정한 침묵을 지켰겠는가. 별 다섯 개 주려고 리뷰까지 쓰고 있는 소설책의 여주인공한테 할 만한 얘긴 아니지만, 정말 뭐가 문제인지 모르는 여자다.
#
이 책에서 도시가 줄리엣에게 쓴 편지는 사실 몇 편 안된다. 그 외에는 줄리엣이 서술한 도시나 다른 사람들이 도시에 대해 얘기한 내용들로 그의 상황과 마음을 짐작할 수밖에 없다. 도시의 속마음을 드러내는 문장이라고는 거의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도 나는 그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편지를 보내는 남자의 마음을 알기 때문이다.
레미를 만나러 프랑스로 갔을 때 도시는 줄리엣에게 조언을 구하는 편지를 쓴다. 그건 심지어 마크와 줄리엣이 키스하는 모습을 보고 난 이후다. 편지를 쓰면서 도시가 느꼈을 복잡한 심정을 상상하기는 어렵다. 아마도 그 편지는 줄리엣에게 자신의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던 마지막 몸부림이었을지도 모른다.
이후의 줄거리는 생략한다. 이건 책 줄거리 소개가 아닌 한 등장인물에 관한 고찰이므로 거기에 집중하는 게 나을 성싶다. 나는 변죽만 울리는 편지글들 속에서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도시 애덤스의 감정을 짐작해 보았을 뿐이다. 그리고 그걸 유추할 수 있을 만한 개인적 경험이 마침 책을 읽으면서 기억났기 때문에 서평이랍시고 끄적여 보았다.
들은 얘긴데, 이 소설이 곧 영화로도 만들어진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은 엘리자베스와 줄리엣에 누가 캐스팅될 것인가 궁금하겠지만 난 그들보다 도시 역할로 누가 선정될까, 그리고 이 남자의 모습은 영화에서 어떻게 표현될지가 더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