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미국 대공황 시절에 엄마를 잃고 고아원에서 살다가 아빠로 '추정되는' 사람을 찾아나서는 10살 흑인 남자아이 이야기다.

사전에 없는 단어(scooch, wock 등)나 처음 보는 축약어(I'da, I'ma 따위)가 간혹 나왔다.

원서에서 실존 인물인 듯한 미국 사람들의 이름이 나올 때는 사전지식이 없어서 그냥 넘어갔는데 번역본에 그 사람들이 어떤 맥락에서 언급이 되고 있는지 설명이 되어있어서 도움을 많이 받았다.

번역된 줄거리만으로도 충분히 감동인 소설이지만, 원문의 영어 문장이 주는 맛은 아무래도 반감되는 구석은 있었다(예를 들면 원서에서는 "woop, zoop, sloop" 이란 낱말이 오줌 나올 때, 잠이 들 때, 눈물 나올 때, 생각이 떠오를 때 등등 곳곳에서 '반복되어' 나오기 때문에 더 재미있는데, 번역본에서는 각각 다른 말로 번역됨).

 

버드의 여행은 안타깝고 험난하기도 하지만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꿋꿋하게 희망과 긍정을 잃지 않는 모습이 감동이었다.

처음에 고아원에서 위탁가정으로 보내진 뒤 2살 위 토드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누명까지 쓰고 쫓겨날 판이었는데, 아주 시원하게 복수해주고 도망나오는 장면은 통쾌했다. 일단 피해 들어간 도서관에 머물면서 그곳의 냄새와 분위기를 진지하게 묘사하다가도 갑자기 왜 사람은 도서관에서 졸리게 되는지 설명하는데 그 부분이 너무 웃겼다.

레프티 루이스를 흡혈귀로 오해하는 장면도 어린애다와서 웃음이 나왔다.

이렇듯 이 책은 비극 속에서도 희극이 툭툭 불거져 나온다. 마치 버드가 역경 속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 것처럼.

17장에서 그랜드라피스에 온 버드가 캘로웨이 밴드 음악을 들으며 묘사하는 문장은 마치 내가 그 클럽에 서서 음악을 듣고 느끼듯이 그렇게 읽혔다. 청소년 문학이라지만 이런 건 정말 탁월하다.

19장은 통근 버스에서 읽는데 눈물이 나서 아주 혼났다. 가족이란 결국 그런 것이다.

읽는 내내 10살 소년의 처지가 되어 함께 웃고, 함께 울 수 있었다.

이렇게 슬프면서도 웃기고, 감동을 주는 책은 정말 오랜만이다.

부디 버드의 색소폰 연주 실력이 늘었기를!

 

#아래 도서관 단상은 버드의 남다른 언어와 감성이 바로 도서관에서 이루어졌다는 걸 알려 준다.

The next thing about the air in the library is that no other place smells anything like it. If you close your eyes and try to pick out what it is that you're sniffing you're only going to get confused, because all the smells have blended together and turned themselves into a different one.

As soon as I got into the library I closed my eyes and old books, a smell that got real strong if you picked one of them up and stuck your nose real close to it when you turned the pages. Then there was the smell of the cloth that covered the brand-new books, the books that made a splitting sound when you opened them. Then I could sniff the paper, that soft, powdery, drowsy smell that comes off the pages in little puffs when you're reading something or looking at some pictures, a kind of hypnotizing smell.

I think it's that smell that makes so many folks fall asleep in the library. You'll see someone turn a page and you can easy until it stars piling on the person's eyelashs, weighing their eyes down so much that they stay down a little longer after each blink and finally making them so heavy that they just don't come back up at all. Them their mouths come open and their heads start bouncing up and down like they're bobbing in a big tub of water for apples and before you know it, ... woop, zoop, sloop ... they're out cold and their face thunks down smack-dab on the book.

That's the part that gets the librarians the maddest, they get real upset if folks starts drooling in the books and, page powder or not, they don't want to hear no excuses, you gotta get out. Drooling in the books is even worse than laughing out loud in the library, and even though it might seem kind of mean, you can't really blame the librarians for tossing drooly folks out 'cause there's nothing worse than opening a book and having the pages all stuck together from somebody's dried-up slobber.

 

# 17장 캘로웨이 밴드 연주장면: 번역서 249-253쪽 

"하나, 둘, 하나 둘 셋!"

고개를 들었다.

암살자 아저씨가 드럼 옆의 둥근 금빛 금속판을 드럼 채로 스르르 쓸어내리더니, 막 가랑비가 양철 지붕에 떨어지기 시작하는 듯한 소리를 냈다. 아무 때든 제 마음대로 타다닥 툭툭 요란하게 내리치는 빗줄기가 아니라, 똑똑 떨어졌다가 또르르 경쾌하게 튀어 오르는 소리였다.

이윽고 날라리 아저씨가 피아노를 연주하기 시작했는데 마치 드럼 소리 같았다. 잠깐 동안 피아노 소리는 암살자 아저씨가 만들어 내는 빗소리와 함께 곧장 어우러졌다. 이윽고 소리는 잠잠해졌다가 나이아가라 폭포가 울리는 듯 바뀌었다. 커다란 투명 물방울들이 사방팔방 튀어 오르며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물방울은 요란하면서도 또렷하게 떨어지다가, 어느 틈에 암살자 아저씨의 차분하지만 쾌활한 드럼 소리 속으로 녹아들었다.

착실이 에디 아저씨가 피아노 소리와 드럼 소리에 맞춰 손가락을 조용히 튕기기 시작했다. 손가락의 움직임에 따라 이쑤시개가 까닥거렸다. 아저씨가 도끼를 입에 물고 불었다. 그런데 그 가락은 색소폰이 울리는 음악이 아니라 아저씨가 색소폰을 말하게 하는 것 같았다. 아저씨가 나지막이 길게 우르르 묵직한 소리를 울렸다. 순간 단 한 번 깊고 구슬픈 소리가 났을 뿐인데도, 내게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처럼 들렸다. 착실이 아저씨는 한동안 그 가락만 불었다. 이윽고 색소폰 소리는 나머지 다른 악기의 폭풍 같은 소리에서 천천히 멀어져 갔다. 그러다가 다시 돌아와 소용돌이치면서 떠돌다가 암살자 아저씨와 날라리 아저씨가 계속해서 울려대던 빗소리에 합류했다.

나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미스 토머스와 지미 아저씨와 허먼 E. 캘러웨이가 내 뒤로 다가오는 기척도 듣지 못했다.

미스 토머스가 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칭찬했다.

"버드, 정말 잘했어. 모든 곳이 반짝반짝 눈이 부시구나."

나는 "고맙습니다, 아주머니."하고 대답하려고 했다. 하지만 도저히 무대 위 아저씨들이 들려주는 경이로운 소리와 어울리지 않는 소리 같았다.

지미 아저씨가 말했다.

"라본, 진짜 보기 좋구나, 얘야."

허먼 E. 캘러웨이는 뭐라고 툴툴거리더니 두 사람과 함께 무대 위로 걸어갔다.

지미 아저씨가 트럼펫을 들고 폭풍우 속에 합류했다. 미스 토머스는 등받이가 없는 의자에 앉아서 눈을 감고 머리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허먼 E. 캘러웨이도 거대한 콘트라베이스 옆에 서서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한 손을 콘트라베이스 꼭대기 가까이 얹고는 다른 손으로 줄을 튕기기 시작했다.

캘러웨이가 줄을 툭툭 당길 때마다 넓고 묵직한 무언가가 느릿느릿 한가롭게 걸어가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아니, 캘러웨이 자신이 조용히 멀리 있지만 언제라도 더 가까이 다가오려는 번개 같기도 했다.

모든 악기 소리가 어우러지는 순간, 플린트의 그 도서관에서 나던 냄새처럼 어떤 소리가 가장 마음에 드는지 가늠하기 힘들어졌다. 맨 처음에는 지미 아저씨의 트럼펫 소리가 가장 좋았다가 똥파리 아저씨의 트롬본 소리가 최고로 들리고, 그러다가 날라리 아저씨의 피아노가 큰 바위를 때리는 물줄기 소리를 내면 그처럼 멋진 소리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착실이 에디 아저씨의 색소폰이 다른 사람들 주위에서 노래하고 말하고 춤을 출 때면, 그제야 비로소 그 색소폰 소리야말로 다시 듣고 싶은 유일한 소리라고 굳게 믿게 됐다. 그러는 동안에도 허먼 E. 캘로웨이와 암살자 아저씨는 거대한 콘트라베이스와 드럼으로 아늑한 소리를 만들어 내면서 온 사물을 계속 움직이게 했다. 마치 누군가의 심장이 큰 소리를 내며 고동치는 것처럼.

어떤 악기가 가장 좋은지 가려 내기가 진짜 힘들었다. 미스 토머스가 입을 열기 전까지는. 다른 밴드 멤버들이 폭풍이라면 미스 토머스는 시커먼 먹구름을 뚫고 파열하는 햇빛이었다. 미스 토머스의 첫마디를 들으면 곧바로 궁금해진다. 이 밴드가 왜 '허먼 E. 캘로웨이와 대공황기의 우울한 파괴자들' 또는 '허먼 E. 캘로웨이와 누비아의 기사들'이라고 불리는지 그 까닭이 궁금해진다. 밴드 이름을 '미스 토머스와 대공황기의 우울한 파괴자들과 거대한 콘트라베이스를 켜는 비열한 늙은이'라고 불러야만 할 것 같았다.

미스 토머스는 진짜 노래를 부르지 않고 그저 "라 다 디 다 디 다 다, 하 위 아 호, 하 위 아 호, 하 위 아 데이."라고 말하는데도 정말 멋졌다. 곧이어 착실이 에디 아저씨가 색소폰으로 대답하는 듯하더니 어느 순간 두 사람은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따금 지미 아저씨의 트럼펫이 끼어들어 자신의 의견을 말하다가는 슬며시 사라지곤 했다. 다른 악기들도 번갈아 그 대화를 방해했다. 하지만 정말 내 마음에 드는 건 미스 토머스의 노래와 착실이 아저씨의 색소폰 소리가 주거니 받거니 하는 대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내 미스 토머스가 "도우, 디 도우 디 도우 디 바."라고 말하자 곧이어 착실이 아저씨가 대답했다. 둘이서 나누는 말을 이해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미스 토머스가 큰 소리로 노래했다.

"우린 그 뒤로 만나지 못했지요. 그런데 당신을 다시 만나니 반갑네요."

미스 토머스가 말했다.

"당신을 만나서, 이렇게 다시 만나서 반가워요."

그러고는 폭풍이 멎었다. 마지막으로 암살자 아저씨의 빗소리와 허먼 E. 캘러웨이의 천둥소리가 천천히 아득하게 잦아들었다. 마치 폭풍이 스러지며 이웃 마을로 흘러가듯이.

이윽고 죽은 듯 침묵이 이어졌다. 나는 대걸레를 놓고 힘차게 박수를 치며 외쳤다.

"와!"

미스 토머스가 일어나서 무릎을 굽히고 몸을 앞으로 숙여 인사했다.

나는 더 크게 박수를 쳤다. 이제야 왜 이 밴드의 이름 뒤에 느낌표가 여섯 개나 붙었는지 그 까닭을 알 수 있었다!

(249-253쪽)

 

위에서 밴드의 악기 소리들을 버드가 머물렀던 플린트의 도서관 냄새에 비유하는 문장이 있는데, 번역본을 보니 원문의 취지에 맞지 않게 번역했더라.

원문과 번역문 

All the instruments blended up together and, just like that smell in the library, you couldn't tell which one was your favorite.

모든 악기가 어우러지는 순간, 도서관 냄새가 나는 듯하면서 어떤 소리가 가장 마음에 드는지 가늠하기 힘들어졌다. (251쪽)

여기서 '도서관 냄새가 나는 듯하면서'를 '바로 그 플린트의 도서관에서 났던 냄새처럼'으로 바꾸면 될 듯싶다. 

 

(오래 전에 딴 데 쓴 독서글인데, 버스에서 울면서 봤던 책에 대한 예의라 생각하여 서재에 옮겨 둔다)

더 재미있는 인생을 살고 더 유능한 거짓말쟁이가 되기 위한 버드 콜드웰의 법칙

제39번 법칙
나이를 먹을수록, 자신을 울게 만드는
더 나쁜 일이 생기게 마련이다.

제328번 법칙
어떤 일을 하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서둘러 그 일을 해야 한다. 만약 망설이고 주저한다면
맨 처음 하고자했던 것을 하지 말자며
스스로 단념하게 될지도 모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조선 풍속사 1 - 조선 사람들, 단원의 그림이 되다 푸른역사 조선 풍속사 1
강명관 지음 / 푸른역사 / 2010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김홍도의 그림을 바탕 삼아 조선 백성들의 풍속을 시시콜콜 이야기한 책이다.

폭 넓은 문헌 지식과 민중들의 삶에 대한 애정이 없었다면 이런 글을 쓰기 힘들다.

 

국가와 지주들과 양반들이 어떻게 백성을 등처먹었는지 <타작>이나 <어살>, <길쌈>과 같은 그림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자리짜는 일, 대장간 일, 기와 이는 일 따위 그림과 함께 관계되는 옛날 이야기들도 재미있다.

가난한 백성들 얘기만 한 건 아니고 그림 감상하는 사람들, 서당 얘기, 활쏘고 씨름하는 얘기, 우물가에서 남녀가 정분 나는 이야기, 차면을 쓰고 아녀자 훔쳐보는 양반 놈팽이 얘기까지 한두 꼭지씩 들춰보기 재미있는 책이다.

씨름하다가 사람들이 싸우고 심지어 죽기까지 했다는 얘긴 처음 들었다.

우물가와 빨래터 꼭지는 옛날 남녀 사이에 일어나는 '스캔들'에 대해 말하고 있어서 재미있었다.  

 

고려 태조 왕건이 태봉 궁예의 장수로 있을 때 목포 호족의 딸을 빨래터에서 만났단다.

둘은 그 날 바로 같이 잤는데, 결정적 순간에 왕건은 임신(되어 덜미 잡힐 것)을 걱정하여 돗자리에 사정을 했다.

하지만 전날 용이 뱃속으로 들어오는 길몽을 꿨던 처자는 왕건이 흘린 정액을 쓸어넣었단다.

그렇게 해서 낳은 아들이 혜종이다. 그 처자는 장화왕후 오씨. 이런 연고로 혜종의 얼굴엔 돗자리 자국이 남았다고...

(189-190쪽 요약)

책에서 이런 야한 얘길 능청스럽게도 한다. 2권에서는 춘화 얘기도 있던데...   

 

이 책이 가진 또 다른 미덕은 미술사에서는 가볍게 다루거나 대수롭지 않게 지나친 부분을 문헌 자료를 통해 새롭게 밝히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글쓴이는 <고누>라고 알려진 그림을 사실 '밤윷'이라고 부르는 윷으로 윷놀이 하는 그림으로 보고 있다.  

또 <장터길>로 알려진 그림은 부부 행상을 그린 것이라 한다.

그림의 "남자와 여자는 농사를 짓다가 일시적으로 무언가를 팔러 장터에 가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물건을 팔기 위해 아이를 들쳐 업고 길을 나선 것이다. 여자가 치마를 걷어 올리고 바지에 행전까지 친 것은 길을 오래 걸었다는 증거다."

이 행상 이야기 나오는 꼭지가 여러 그림 자료를 견주면서 꼼꼼하게 설명하고 있어서 재미있게 봤다.  

고생스런 부부 모습에 내 자신을 투영해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김홍도, 단원풍속도첩 중 <부부 행상(장터길)>, 국립중앙박물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런 종류의 책이 대체로 그렇지만) 그림 설명을 하는 부분 가운데 <행려풍속도병>과 같은 큰 그림은 도판이 영 자세히 안보인다는 점이다.

그림 자체가 큰 것을 작은 면에 옮긴 데다가 그림 속에서도 작게 그려진 사람들 모습은 무척 알아보기 힘들다.

잘 보이는 그림은 <단원풍속도첩>의 그림들과 일부 첩 형태 그림들 뿐이다.

안 보이는 그림들은 알아서 찾아 볼 수밖에 없겠지만 그걸 애써 찾아 보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2010년 9월에 작성했던 서평을 옮겨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수입] Led Zeppelin - Physical Graffiti (Remastered) (2CD)
Led Zeppelin / Swan Song / 1999년 3월
평점 :
절판


락밴드 연주의 끝판왕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떻게 말할 것인가 - 세상을 바꾸는 18분의 기적 TED
카민 갤로 지음, 유영훈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발표자가 지녀야 할 자세와 올바르고 효과적인 방법론을 알려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석굴암, 법정에 서다 - 신화와 환상에 가려진 석굴암의 맨얼굴을 찾아서
성낙주 지음 / 불광출판사 / 2014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목조전실의, 목조전실에 의한, 목조전실을 위한 책이라고 할까. 모든 논리는 목조전실의 정당성으로 귀결된다.

목조전실은 있었을 수도 있고 없었을 수도 있다. 처음에는 없었다가 나중에는 보존 등의 문제로 설치했을 수도 있고, 전실 없이 지붕만 마련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개방형으로 놔둔 채 주실로 들어가는 들머리를 승려들과 불자들이 끊임없이 청소하고 관리했을 수도 있다. 옛날의 기록이나 사진이 없는 한 단언할 수는 없다. 나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모르는 걸 모른다고 해야지 함부로 짐작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쩌면 이렇게 확신에 찬 어조로 자신과 다른 의견을 가진 이들을 비판할 수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현재의 목조전실 덕분에 조각상이 잘 보존되고 있다는 주장은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것은 항온항습기라는 기계가 함께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항온항습기 같은 최첨단 기기가 없던 시절과 똑같은 조건에서 비교를 해야지 석굴 외부가 모두 2중의 콘크리트로 막히고, 전방을 밀폐한 채 365일 온습도 조절 기계를 돌리는 조건과 비교를 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백 번 양보하여 전실이 없었다는 자료로 제시된 것들이 모두 저자의 주장대로 전실이 없었음을 충분히 입증하지 못한다고 해도, 그것이 전실 존재를 입증하는 자료는 아니다.

책 속에서 문장들을 인용해 가며 찬찬히 논평해 보겠다.

 

1부 햇살신화

 

* 1부의 전체적인 주장에서는 별달리 반론할 내용이 없다. 기존 권위자들의 학설을 냉정하게 비판하는 자세는 아주 바람직한 태도이다. (이 뒷부분의 문장은 저자와 대화를 통해 오해임이 밝혀졌으므로 삭제합니다. 2015.2.24.) 다만 글쓴이가 전개하는 주장의 기본 아이디어가 근래에 강희정이 발표한 몇몇 석굴암 재발견연구에 힘입고 있음을 전혀 밝히지 않고 있다. 책의 말미에서 잠깐 소개할 뿐이다. 물론 이 경우도 강희정 연구의 내용과 이 책에 끼친 영향에 대한 언급은 없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 토함산이 뜻밖에도 월함산月含山’, 혹은 함월산含月山으로도 불렸다는 사실이다. ‘이 이름 속으로 직접 들어온 것이다. 지난 1966년에 발생한 도굴 사건 때 석가탑의 사리함에서 무구정광대다라니경과 함께 한 덩어리의 종이뭉치가 수습된다. / 묵서지편으로 불리는 것으로 최근에야 해독이 이루어져 고려초 1036년과 1037년의 잇단 지진으로 붕괴 위험에 처한 석가탑을 정종靖宗4(1038)에 중수하면서 넣은 사실이 밝혀졌다.

바로 이 묵서지편에 토함산이 월함산으로 나타나 있다. 삼국유사보다 243년이나 앞서는 고려 초의 사료에서 토함산을 월함산으로 칭한 것이다. 다만 월함산 하나만을 사용했는지, 토함산도 병용했는지의 여부는 불투명하나, 어느 쪽이든 예전 사람들이 토함산을 태양이 아니라 달과 연관 지어 생각했다는 자료로서는 손색이 없다.

이뿐만 아니라, 근대기에 발행된 관광 집인첩역시 주목할 만하다.

일제강점기에는 관광지나 유적지를 다니면서 도장을 받아 책자처럼 묶은 집인첩이 유행했는데, 대정大正, 1911~1925 연간의 것으로 추정되는 스탬프 첩에 함월산 석굴암 含月山 石窟庵이라는 인흔이 남은 것이다. 20세기 전반기에, 그것도 석굴암 당국에서 관광객에게 찍어주는 도장에 토함산 석굴암이 아닌 함월산 석굴암으로 새긴 것이다. (28-29)

 

신라인이 동해의 아침 햇살을 특별히 숭앙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30)

 

결론을 짓자면, 신라 때부터 구한말까지 이 땅의 옛 분들이 석굴암과 동해의 아침 태양을 묶어 생각했다는 단서는 전무하다. 어느 시대, 어느 누구도 석굴암 본존불과 동해의 아침 햇살이 하나라는 인식은 갖고 있지 않았다. 햇살 신화라는 것은 처음부터 실체 없는 마야, 혹은 나뭇가지의 그림자였던 것이다. (33)

 

저들(일본인들)의 글에서 놓쳐서는 안 되는 공통점이 있다. 저들의 눈앞에서 넘실거리는 바다는 조선의 동해가 아니라 일본해라는 것. 그 너머에 있는 / 나라는 해 돋는 나라’, 일본이라는 것이다. 글을 쓴 이들은 자신의 나라 쪽에서, 또 자기네 바다를 박차고 솟아오르는 태양을 보고 감격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44-45)

 

(대정 14(1925) 판 보통학교 국어독본에 실린 기행문 석굴암의 전문) 48-49

이 짧은 기행문의 요점은 본존불을 포함해 석실 내의 조각상들에 일본해의 아침 햇살이 비추면서 신비감이 도드라진다는 것이다. 마치 신라인이 일본해에서 떠오르는 야마토의 태양을 영접하기 위해 석굴암을 세운 듯한 뉘앙스마저 풍기는데, 식민지 조선의 아이들은 위 글을 읽으면서 어떤 생각에 잠겼을까. 우리의 동해가 아닌 저들의 일본해에서 떠오른 태양빛이 본존불을 비치는 정경을 상상하면서 석굴암을 구해준 총독부, 혹은 천황폐하의 은덕에 감격해했을지 모른다. (야나기 무네요시의) 개인적인 감상에 불과하던 이야기가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정착되면서 기억의 집단화 현상이 일어날 토대가 마련된 것이다.

이렇듯이 동해 일출을 석굴암 본존불에 결부시키는 논리는 일제강점기에 구축된다. 그 이야기는 일본의 유난한 태양신앙, 곧 아마테라스 오미가미 신앙을 산실로 태어난 식민사관이었던 것이다. (49)

 

(동짓날) 꼭두새벽부터 일출을 보겠다고 엄동설한 추위를 무릅쓰고 산에 오르는 사람이 얼마나 있었을지 의문스럽다. 다른 계절, 다른 날이면 몰라도 설날새벽에 산행을 감행하는 이는 거의 없다고 해도 틀리지 않는다. 잘 알려진 의유당관북유람일기意幽堂關北遊覽日記중의 동명일기東溟日記도 음력 918일의 일출 장면을 서술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다시 주목해야 할 것은 해맞이가 아닌 달맞이 민속이다.

(중략)

토함산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1960~1970년대만 해도 대보름이면 인근 마을 사람들이 삼삼오오 토함산을 올라 달마중을 하고, 석굴암 부처님께 절을 올리곤 했다. 지금도 달구경을 하고, 그 달빛을 등에 업고 험준한 돌길을 내려오던 어릴 적 추억을 간직한 이들이 많다. (55)

 

정리하자. 학창 시절 수학여행에서 꼭두새벽에 졸린 눈을 비비며 어둠에 덮인 토함산을 오르던 습속은 일제강점기의 산물이다. 근대 이전에는 그 비슷한 풍속조차 없었다. 저들은 일본해에서 솟구치는 야마토의 태양/을 영접하도록, 아침 햇살이 석굴암 본존불을 비추는 정경을 과장되게 묘사해 조선인을 유인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햇살 이야기는 남천우의 동짓날 일출 문제를 분수령으로 학문의 영역으로 진입한다. 마치 학술적인 검증이 끝난 듯한 분위기 속에 우리 민족의 판타지로 굳건하게 자리를 잡은 것이다. (56-57)

 

강우방의 논리는 간명했다. 실존 붓다가 새벽에 동녘을 향해 앉아 정각/을 깨우쳤다는 사실을 근거로, 신라인이 본존불을 동향으로 앉힌 것은, 곧 인간의 태양인 붓다가 자연의 태양과 일체화되는 순간을 재현하려는 의도였다는 것이다.

(강우방 글 인용)

요컨대 동해의 아침 태양이 아니면 석굴암의 의미는 완성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남천우에 의해 학술적 의미를 갖게 된 일제의 일출 담론은 강우방에 의해 종교적 신성의 옷까지 걸치게 된 셈이다. (62-63)

 

(남천우의) 광창설은 의심할 바 없는 사실fact’이자 진실true’로 통용되고 있다. 최근에는 광창이 환풍 기능까지 겸했다면서 생명의 호흡공呼吸孔이라는 표현까지 등장하고 있다.

(이성규 글 인용)

탁상공론에 해당하는 지나친 미화이자 왜곡이다.

거듭 말하건대 신라인은 광창이라는 걸 상상조차 한 바 없다. 비현실적/인 주장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는 것이, 곧 광창설이다. (77-78)

 

(홍예석 의심론, 중각석굴론 등 비판 후)

정리하자. 수십 년 동안의 논쟁을 거쳐 우리 연구자들이 도달한 석굴암의 완성태는 중각석굴이며, 그것의 이념적 뿌리는 야마토의 태양이다. 중각석굴은 광창에서 나오고, 광창은 일본해의 아침 햇살 이야기가 모태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석굴암에 관한 한, 우리는 아직 식민 상태 그대로이다. 해방 70/년이 다가오는 이 시점까지 여전히 저들의 시각, 저들의 이데올로기를 통해 석굴암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라 할 것 없이 모두가 일제를 비판하지만 정작 일제의 식민담론을 찬양하는 자가당착에 빠져 있는 것이 오늘의 우리 모습이다. 이야말로 석굴암의 비극이요, 한국 미술사학의 비극이라고 할 것이다. (102-103)

 

 

2부 석굴암의 20세기

 

(일본인들이) 마치 자신을 예루살렘을 탈환한 십자군으로, 경주를 예루살렘으로 인식한 것이다.

바로 그 경주에 뜻밖에도 처음 보는 인공의 석굴사원, 곧 석굴암이 있었다. 자신들의 영광을 과시하는 데 있어 더없이 훌륭한 호재를 발견한 것이다. 조선 병탄의 기념비로서 석굴암을 능가하는 것은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122)

 

* 앞서 밝혔듯이 1부의 햇살 신화론이나 위 부분의 아이디어는 결국 강희정이 90년대 말부터 2007년부터 이어 온 석굴암 재발견관련 몇몇 연구에 커다란 바탕을 둔 것이다. (이 뒷부분의 문장은 저자와 대화를 통해 오해임이 밝혀졌으므로 삭제합니다. 2015.2.24.)  그런데 저자가 그렇게도 비판하고 있는 기존 학계의 일원으로 볼 수 있는 강희정의 연구는 왜 본문에서 단 한 번도 다루지 않고 말미(거두는 글, 386)에만 제목 포함 단 3줄로 짧게 언급하는가. 학계에 자기가 영감을 받은 연구가 있다는 건 은근히 감추고 자신이 반대하는 연구(특히 그 연구의 공과 중에서도 과)만 제시하면서 미술사학의 비극이나 누추함같은 자극적인 용어로 싸잡아서 폄하하는 건 공정하고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총독부 공사에서 좀처럼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있다. 전실공간을 노천 상태로 열어둔 점이다. ‘의 기본이 지붕이라고 할 때, 이러한 조치는 어떤 말로도 설명이 안 되는 일이었다.

(중략)

더욱 석연찮은 점은 공사 이전에는 누구나 보호시설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138-139)

 

(원래의 공사 시방서에도 옥개를 만든다는 내용 있었다는 점을 지적 후)

그렇다면 거금을 들여 일으킨 공사에서 필수적인 보호시설, 그것도 설계 원안의 결정사항을 배척했다면, 필시 그럴 만한 배경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저들이 관련 자료를 남기지 않아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어떤 추론도 예단이 될 우려가 높은데, 그런 가운데 한 가지 떠오르는 게 다름 아닌 일출 담론이다.

반복되는 이야기지만 저들은 일본해에서 떠오르는 야마토의 태양을 맞이하기 위해 칠흑 같은 험로를 올랐고, 찬란한 야마토의 태양을 바라보면서 제국의 영광에 사로잡혔다. 어쩌면 햇살이 석실 내로 파고드는 장면에서 아마테라스 오미가미가 석굴암을 점령하는 듯한 환영을 보았는지도 알 수 없다.

그런데 전실공간에 보호시설을 세우면 그 같은 장면이 불가능해진다. 그 장면을 계속 보기 위해서는 어떤 것도 앞을 가려서는 안되는 상황인/ 셈이다. 때문에 혹여 일본해의 첫 햇살을 받아들이려는 의도에서 전각 설립을 무산시킨 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거둘 수 없다. 물론 이와 같은 접근 자체가 강박증일 수도 있고, 또한 직접적인 자료가 있는 것도 아니다. (140-141)

* 이 뒤에도 1970년대 일본인 건축학자 후지시마 가이지로가 쓴 글에서 햇살이 가려진 전실을 못마땅하게 표현한 점을 들어 일본인들이 태양이 석굴암을 삼키는 광경에 집착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하였다. 근거가 없는 이야기이며 저자 스스로 말하듯이 강박증 맞는 거 같다. 전혀 학술적인 글이 아니라 소설이다. 학술적 글쓰기는 개연성만으로는 완성할 수 없고 근거를 가지고 완성되어야 한다.

 

일본 황족과 군부 요인, 지식인들은 관부연락선을 타고 현해탄을 건넜다. 부산항에 도착하면 열차에 몸을 싣고 경주역이나 불국사역에 내려서는 불국사를 둘러본 후 토함산에 오르기 바빴다. 저들은 멀리 굽이치는 일본해를 바라보면서 감회에 젖다가는 허리에 찬 닛뽄도를 철럭거리며 흙모래 범벅인 구둣발로 법당 안팎을 활보했다. 정복자의 쾌감을 만끽한 것이다. (145)

* 소설에나 어울리는 상황 묘사 글인데, 이런 게 왜 나오는지 모르겠다. 이건 사실도 아니고 의견도 아니며 그저 추정에 따른 묘사일 뿐이다.

 

또한 일반인을 대상으로 관광단이 조직되고, 조선과 일본 구별 없이 각 학교의 수학여행에서 석굴암은 필수코스로 자리를 잡았다. 이들은 수십 명, 수백 명씩 무리지어 석실법당에 들어가서는 본존불 어깨에 무동을 타거나 곳곳에 낙서를 남겼다. 석실법당은 흙모래 먼지와 소란에 뒤덮여 평온한 날이 드물었다.

성전으로서의 영혼을 빼앗긴 박제품.

석굴암은 신기한 고대유적이자 관광객의 추억을 위한 기념사진의 배경으로 그 성격이 굴절되어 갔다. 그것은 창경궁에다 동물원을 차려놓고 호객을 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147)

 

총독부의 공사 이후 석굴암은 온갖 악조건과 힘겨운 싸움을 계속해야 했다.

장마철에는 법당 바닥이 물바다로 변하는가 하면, 봉토층을 파고든 빗줄기는 시멘트 두겁을 통과해 밖에서 날아든 분진과 뒤엉켜 돔 천정의 면석이나 주벽 벽면을 타고 흘러내렸다. 특히 동절기에는 봉토 위의 적설이 녹아 역시 안으로 스며들었고, 기온이 급격히 떨어지면 쉽게 결빙되었다. 더욱이 수분은 시멘트 고유의 독성을 용해시켜 생석회수로 변했는데, 19131차 공사의 책임자들은 생석회수가 돌의 세포분자를 파괴한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결국 주실 돔 천정부터 이끼와 곰팡이가 피어나고, 감실이며 주벽의 조/각상은 항상 물기에 축축했다. 자비의 화신인 십일면관음보살은 흉악하게 변해갔으며, 본존불도 마치 연탄가루를 덮어쓴 듯한 시커먼 얼굴로 참배객을 맞았다.

석굴암을 구해냈다고 자부하던 총독부는 19176월부터 7월까지 응급처방에 나서야 했다. 1920년부터 1923년까지는 시멘트 두겁에 모르타르를 바르는 등 보강공사를 행한다. 하지만 전각이 전제되지 않은 어떤 임시 조처도 임시변통에 불과했다. (147-148)

* 게다가 불자에 의한 관리도 거의 없었을 것이다. 관리 문제, 지나친 관람객들, 생석회수 문제 등에 의해 일제 보수공사 이후 급격한 전실 조각상 훼손이 진행된 건 아닌지.

 

그중에서도 눈비에 직접 노출된 전실 조각상의 상황은 최악이었다. 경중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풍화를 면치 못했는데, 우측 세 번째 야차상의 경우는 마치 천형을 치른 듯 윤곽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총독부 공사 전에는 코끝이 탈락한 것 말고는 세세한 문양까지 살아 있었으나 1960년대 초반에 이르면 가슴의 두 손과 허리의 요대, 각반, 발 등이 깎이고 뭉그러져 철저하게 훼손되고 만다. 1,200년 동안 멀쩡하던 것이 단 50년 만에 망실 지경에 이른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일제가 남기고 간 증기보일러를 돌리는 것 외에는 다른 수단이 없었다. (154)

* 일제에 의해 엄청나게 몰려든 관광객의 영향을 감안하지 않은 채 단순히 짧은 시간 동안 많은 훼손이 되었다는 서술은 마치 모든 문제가 (저자가 반대하는 전실 개방형) 구조에서 나오는 것으로 관점을 유도하려는 시도이다.

 

두 신중상의 전개는 전실과 주실 사이의 수리 관계를 새롭게 해석해 일그러졌던 전실의 평면 구성을 바로잡은 일이었다. 신라인이 추구한 석굴암의 미학 원리를 재발견한 것이라고 해도 지나침이 없다.

그러나 이 모든 긍정적인 결과에도 불구하고 그 과정에 곡절이 적지 않았다. 두 상을 펼쳐야 한다는 황수영과는 달리, 김중업과 김원룡 두 공동위원은 일제 때의 상태가 옳다는 쪽이었다. 두 위원은 증거가 불충분하다면서 어떠한 변형도 불가하다는 의사를 굽히지 않았고, 황수영은 절곡 상태가 비정상적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162)

* 첫 문단은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다. 전실과 주실 사이의 수리 관계? 이런 게 과연 있었는가. 다 훗날 만들어낸 거 아닌가? 새롭게 해석? ‘해석으로 문화재 보수나 복원(復原)이 가능한가? ‘해석으로 복원했다면서 전실의 평면을 바로잡았다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김중업과 김원룡이 일제 때의 상태가 옳다는 쪽이었다는 게 일제가 복원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나마 보수공사 이전의 상태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그걸 일제 때라는 말을 붙여서 고의로 반감을 유도하고 있다.

 

석굴암의 원형이 있다면 그것은 창건 시점의 석굴암뿐이다. 구한말의 석굴암은 원형을 찾아가는 디딤돌일 뿐이며, 오늘의 우리에게는 그때의 석굴암을 통해 신라인의 미학과 세계관을 추적하는 숭고한 과제가 주어져 있을 뿐이다. (178)

* 그런데 그 원형을 우리는 모르지 않나?

 

이렇게 보면 개방구조라는 것은 조선총독부의 1차 공사 때 콘크리트 옥개 시공을 무산시키면서 처음 나타난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 연구자들이 그리도 예찬해온 개방구조는 제국 일본의 선물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일출 담론과 일정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특별한 선물이었다.

매듭을 짓자면 1,300년 석굴암 역사에서 개방구조였던 때는 총독부의 1차 공사 이래 1960년대 복원공사 때까지의 단 50년에 지나지 않는다. 그 기간을 제외하면 창건 이래 석굴암이 노천 상태였던 적은 단 일순도 없었다고 확언할 수 있다. (186)

* ‘확언한다는 말을 이렇게 쉽게 하나? 왜 이렇게 확신에 가득 차 있는지 모르겠다. 자기 의견을 뒷받침한다는 자료들은 간접 자료가 대부분이고, 반대 의견을 뒷받침하는 자료들은 죄다 오독이라고 한다. 햇빛에 개방되면 무조건 일출 담론이다? 난 모르겠다. 모르겠으면 그냥 모른다고 해야지 모든 걸 혼자만 아는 듯 현상을 멋대로 재단하고 해석한다면 거기에서 건전한 토론을 이끌어낼 수 없다.

 

(산중일기중 팔부중상 부분 양변불상각사오’) 요컨대 각 너덧은 좌우가 다르게 한쪽은 4, 다른 한쪽은 5상이 아니라 양쪽에 똑같이 너덧상이 있다는 뜻이다.

(중략)

단언컨대 아수라는 정시한이 방문한 1688년 시점에 아무 무탈 없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210-211)

* ‘양변불상각사오의 오독(또는 정독) 문제와 별도로 이렇게(아수라상이 아무 무탈 없었다고) 말할 근거는 없다. 그렇지 않은가? 그런데 무슨 논거로 이처럼 단언을 한단 말인가. 남이 틀리면 자기는 다 맞은 건가? 남이 틀린 이유와 자기가 맞는 이유는 서로 다른 문제다. 아수라가 제자리에 없었다면 저자의 주장에 근본적인 문제가 생기므로 이렇게 우기는 것 같은데, 제발 자기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를 달라. 근거가 없으면 아무 말을 말자. 그게 지식인의 올바른 태도이다.

 

그러나 감상과 교육의 장으로 기능해야 하는 역사유산의 존재 의의를 생각할 때, 관람객 통제는 분명 풀어야 할 숙제 중 하나이다. 따라서 유리벽을 철거해야 한다면 그에 앞서 관람객을 제한하거나 아주 받지 않겠다는 뼈아픈 결단이 선행되어야 한다. 소수의 수행자가 머물면서 이따금 내방객을 맞던 그 옛날의 한적한 산중사찰로 돌아가는 것이다. (214)

* 일제 이후 50여 년간 석굴암이 훼손된 것도 개방되어서가 아니라 관람객 때문일 수도 있다.

 

석굴암의 판석 조각상은 모두 29상으로, 주실과 비도를 포함한 전실로 나누면 각각 15상과 14상으로 불일치를 보인다. 그러나 본존불과 똑같이 주실과 전실의 공통 존재인 십일면관음보살을 빼면 주실도 14, 전실도 14상으로 일치한다. 창건주 김대성은 처음부터 양쪽 공간의 조각상 숫자를 대등하게 설정한 것이다.

그런데 거기서 두 신중상이 빠지면 주실 대 전실의 주벽 조각상 숫자가 14:12로 바뀌면서 균형이 무너진다. 이러한 불균형은 결코 창건주가 바라는 바가 아닐 것이다. (217)

* 전실과 주실의 조각상 숫자가 대등하게 설정되었다는 추정의 근거는? 역시 없다. 무리한 추정이다. 그리고 전실의 조각상과 주실의 조각상 숫자의 불일치 때문에 균형이 무너진다는 건 편견이다. 숫자가 딱 맞아떨어져야 할 이유가 있나?

 

아울러 한 가지 더 지적할 사항이 있다. 알다시피 석굴암의 정원은 원래 40상이었다. 하지만 19094월 말경 조선통감부 소네 아라스케 부통감의 탐방이 있은 후 주실의 감실 중에서 제일 앞쪽 2상이 사라져 지금껏 38상이라는 온전치 못한 상태에 있다. 여기서 다시 두 신중상을 보류 내지 폐기하면 36상으로 또 줄어들게 된다. (217)

* 주실과 전실의 조각상 숫자가 일치해야 한다는 문단에 바로 이어서 이렇게 얘기하면 결국 자기 스스로 자기 논리를 부정하는 자가당착 아닌가? 40상이 맞다면 전실 조각상은 16, 주실 조각상은 14상으로 맞지 않으니까 어딘가 파묻혀 있을 2상이 더 발견되어야 한다고 우길 건가?

 

석굴암 앞에 겸손했다 (소제목, 236)

(중략)

결국 두 상을 전개할 때 최적의 비례를() 발생한다는 건축적 진실을 인지했고, 두 상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이다. (237)

* 도대체 누가 뭘 인지했다는 얘긴가? 그리고 이것이 인지인지 해석인지 누가 판단하는가? 이런 게 과연 석굴암 앞에 겸손한 것인가?

 

 

3부 석굴암, 역사의 법정에 서다

 

* 석굴암을 법정에 세운다는 자극적인 제목에 걸맞게 3부에서는 많은 자료(증거)와 기존 학설에 대한 반론들(특히 전실 개방설에 대한 반론)이 제시되고 있다.

 

석굴암이 신라 당대로서는 최선의 합법칙을 적용시킨 인공 축조물이라면, 오늘날 석굴암의 난제를 해결하기 위한 기계장치들 역시 이 시대의 과학을 최대한 선용한 것이다. (250)

* 이 시대의 과학을 이용한 것이라면 이것이 석굴암의 원형은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진짜 재미있고, 중요하고, 무서운 사실은 과학 전공자들에게서 신기한(!) 주장이 나오면 앞뒤 가리지 않고 뒤를 쫓아가는 미술사 전공자들의 누추한 모습이다. (251)

* 안타깝다. 이런 비아냥은 역효과만 낳을 텐데...

 

(과학자들의 실험에서) 일차로 지적되어야 할 것은 실험이 예단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학계가 석굴암의 원형을 두고 밀폐형이냐, 개방형이냐로 양분되어 가치를 다투는 상황에서 열린 구조가 옳다는 전제를 깔고 실험에 임한 것이다. 두 연구자(이진기·송태호)는 중립적 입장을 취하지 않은 채, 개방형의 손을 들어주었던 것이다. (252)

* 전제가 어떻든 실험 결과 자체는 인정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리고 최소한의 전제가 없는 실험이란 게 가능한가? 실험 결과를 인정하지 못한다면 밀폐형이 옳다는 걸 증명하는 실험 결과를 제시하는 게 순서다.

 

* 석굴암의 샘물 위 축조설이 터무니없다는 저자의 주장(254-266)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수긍한다. 일시적으로 생기는 물줄기를 처리하기 위해 배수로를 만들었을 수는 있어도 이른바 대류작용을 의도하고 일부러 샘물을 법당 밑으로 흐르게 했을 거라고 보긴 힘들지 않나 싶다.

*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전실 전각이 있었다는 근거가 되지는 못한다. 전각이 있어서 습기가 차단된다는 하는 저자의 주장은 근본적으로 큰 오류가 있는데, 현재의 전각은 전각+항온항습기’가 정확한 표현이다. 전각만으로 습기를 차단하는 게 아니라 기계의 힘으로 습기를 제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저자가 제시한 19985월부터 200212월까지 석굴암과 주변의 월평균 습도 변화 도표(279)는 전실 존재의 유무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 불국사화엄사사적흙과 나무를 사용하지 않고석굴암을 지었다고 한 것이나 임필대의 강와집대들보 없는 집의 형식이라고 서술한 바를 두고도 그저 석실 본체에 해당하는 진술 또는 주실 돔 천정의 특이한 모습을 전달하려는 것이고 전각이 없다는 것을 말하려는 게 아니라고 하는데(287-288), 설령 그렇더라도 이 글들이 전각이 있었다는 것을 말한 것도 아니다. 해동지도영남전도에 보이는 말굽 모양의 석굴암 표기도 주실 지붕을 略畵로 처리한 것으로 봐야한다고 주장하는데, 이것도 그렇다고 친대도 전실 밀폐설을 뒷받침할 수 있는 자료들은 아니다.

그냥 기존의 해석들은 무조건 다 틀렸다고 하는데, 선학들의 연구가 전실의 일부만 개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것이지 원형 주실까지 노출되었다고 본 것은 아니다. 전실 전각 철거론은 원형돔 철거론이 아닌데, 마치 선학들이 원형돔(지붕)까지 철거하자고 주장하는 것처럼 매도하고 있다. ‘針小棒大의 적절한 예가 아닌가 싶다.

 

1960년대 공사에서 진입로의 시멘트 옹벽을 철거하고 금시조와 아수라 두 신중상을 펼친 것은 전각 복원에 버금가는 쾌거였다. 그 의의는 단지 두 상의 원 위치를 찾아주고 석실법당의 잘못된 구조를 바로잡은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 김대성의 통일적 세계관을 되살려냈을 뿐 아니라 식민잔재의 청산이라는 대의를 완벽하게 실천했기 때문이다. 감히 말하자면 우리 불행한 근대사의 굽은부분을 우리 손으로 곧게펼친 상징적 사건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다. (315)

* 이 부분은 牽强附會의 적절한 예가 아닌가 싶다.

 

석굴암에서는 동일한 위계의 조각상들은 나란히 대열을 이룬 채 정확히 이분해 서로를 마주보도록 배치하는 게 일종의 철칙이다. (327)

* 김대성이 작성한 석굴암 설계도와 시방서라도 입수하지 않은 현 상황에서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가 있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나란한 대열을 이룬다는 게 잘못되었다는 얘기가 아니라 그런 조각상 배치의 근거가 없다는 말이다.

* 석굴암의 평면을 해석한 많은 도면들이 있다. (팔부중상 면석의) 절곡형(24당척)을 전제로 한 도면도 있고, 전개형(12당척)을 전제로 한 도면도 있다. 이래도 조화로운 비례, 저래도 조화로운 비례라면 결국 석굴암 기하학이란 결과론일 뿐인 게 아닌가? 절곡형일 경우 12당척으로 전실과 주실을 분할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하지만(334) 12당척으로 분할되어야 하는 이유라도 있는가? 애초부터 김대성이 전개형 석굴암 평면구조를 계획하였고,

 

절곡설은 김대성의 불교적 세계관에 배치될 뿐 아니라 일제 때의 왜곡된 법당에 찬탄을 보내는 반역사적인 관점이다. (334)

 

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과연 김대성의 불교적 세계관이라는 게 있었는가? 있었다면 그게 무엇이고 또 석굴암에는 어떻게 적용되었는지 궁금하다.

 

후대 중창설의 또 다른 근거인 팔부신중의 조악성 문제도 관점에 따라 달리 해석할 수 있다. 꼭 조악하다고 볼 수도 없는 문제지만, 설령 조악하다고 하더라도 그 조악성자체가 창건주 김대성에 의해 처음부터 의도된 작풍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이전 글에서 세밀하게 다룬 바 있거니와, 요컨대 전체 조각상을 놓고 보면 점진적인 변화의 양상이 확연히 드러난다. 쉬운 예로 각 조/각상들의 발, 각반, 소매, 복색, 자세 등에서 순차적인 진화의 흐름이 일관되게 관찰된다. 또 처음에는 직선 위주의 경직된 도상이 얕은 부조로 처리되고 있지만, 갈수록 곡선이 강조되면서 고부조로 처리해 입체감을 얻어 간다. 곧 전실에서는 불완전한 모습으로 출발한 후 비도를 거쳐 주실로 넘어가면서 완전한 모습으로 차근차근 변모해가는 것이다.

이와 같은 양상을 우연으로 돌릴 수는 없다. 처음부터 주도면밀한 기획이 서 있지 않고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야말로 우비고뇌에 끄달리며 자신의 참모습을 모르던 사바중생이 붓다의 가르침을 등불로 삼아 서서히 자신의 진아를 깨우쳐 나아가는, 깨달음의 세계로의 도정을 형상화한 것일 수 있다. (346-347)

* 너무 편리하고 자의적인 해석이다. 저자가 말하는 형식의 변화는 결국 양식의 차이이고, 양식의 차이는 시대의 차이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아수라와 가루라상이 조악하지 않다고 보는 것은 개인적 취향이지만 최소한 같은 사람이 조각한 것은 아니다. 또 다른 사람이 조각했다고 한다면 이들을 같은 위치에 배치하도록 조성자(건축주인 김대성)가 그냥 두었을 리가 없다. 상들의 종교적·상징적 위계에 따라 직선적이고 평면적인 양식에서 곡선적이고 입체적인 양식으로 변화를 주는 예는 없다. 저자가 또 다른 예로 드는 주실의 감실 속 유마거사상은(성낙주, 석굴암, 그 이념과 미학(개마고원 1999), 89쪽에서 조악한 것으로 치자면, 주실 안의 감실을 차지하고 있는 유마상이 제일 심하다고 했다) 형식적으로 조악한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형태를 생략한 것이다. 유마상에는 의도된 생략이 분명히 존재하지만, 조형성은 다른 감실상들과 일치한다. 아예 양식적으로 서로 다른 팔부중상과는 견줄 수가 없다는 말이다.

석굴암 팔부중상의 양식이 바깥에서 안쪽으로 점진적으로 변한다는 것도 동의하기 힘들다. 주실 쪽으로 향하여 오른쪽 면의 가장 안쪽에 위치한 天神상은 그 오른쪽의 야차상보다 직선적이고 평면적이므로 저자의 기준으로 본다면 두 상의 위치는 서로 바뀌어야 한다.

 

(강우방의 팔부중 후대 제작설을 반박하며) 그런데 일차적으로 팔부신중과 전각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팔부신중이 없던 시절에도 법당은 세워졌고, 그 안에서 신앙 활동이 행해졌다. 곧 팔부신중이든 인왕이든 조각상의 유무와 상관없이 전각은 건찰 불사의 핵심 요목에 해당한다. 팔부신중이 없다고 해서 김대성이 성전에 지붕을 덮지 않았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이 안 된다. (350)

* 여태까지 팔부중상과 전각을 연관시켜 설명해 놓고 전혀 별개의 문제라니? 팔부중상은 석굴의 구조를 이루고 있는 面石에 조각된 상들이다. 따라서 이들은 결국 석굴암 구조의 문제와도 직결됨이 자명한데 어떻게 별개의 문제가 되나? 전실의 벽면을 이루고 있는 여덟 개의 면석이 없다면 그 벽도 없는 것이고, 벽이 없으면 전실 공간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 간송미술관의 최완수 실장이 범천·제석 천신과 보현·문수 보살의 좌우가 바뀌었다고 주장한 내용을 비판한 것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356-359). 

 

그에 따르면 불국토의 수호자로서 마땅히 밖을 경계해야 할 존재들이 안쪽으로 돌아서 있고, 시선 역시 안쪽을 바라보는 것은 상식에서 벗어난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구한말에 그렇게 되었다는 입장을 취한다. (356)

 

* 저자도 지적하듯이 우리 조상은 그렇게까지 못나지 않았다석굴암의 모든 부조상들이 불국토를 수호하는 신상으로 단정하는 선입견은 아마도 호국불교 헤게모니에서 비롯된 것 같은데, 도대체 면석에 신상을 조각해서 무언가를 수호하는 게 가능하기나 한가 모르겠다. 무엇으로부터 무엇을 그렇게 수호하자는 건지 걸핏하면 호법신 아니면 수호신이란다.

모르는 걸 그냥 모른다고 용감하게 말하는 학자는 내가 아는 범위에서는 거의 없는 것 같다. 엘리트들은 이게 한계다. 마치 자기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 말하는 태도.

 

 

* 저자의 20년 석굴암 연구는 관련 전공자의 한 사람으로서 진심으로 존중한다. 하지만 왜 이렇게 말할 수 없는 것까지 굳이 말해야만 했는지 궁금할 뿐이다. 나 역시 평생에 단 한 권만이라도 책을 쓰고 싶은 사람이지만 이렇게는 아닐 것 같다.

* 현상을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만의 틀을 정해놓고 거기에다 현상을 끌어 맞추는 태도는 저자가 줄곧 비판하는 바가 아니던가.

* 문화재 보존에서 구조와 기능적인 측면과 하드웨어가 중요하긴 하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보존하려는 의지와 인력이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전실(원형 주실 말고)이 일부 바깥으로 노출되어 있었다고 해도 절에 상주하는 승려나 신자들이 날마다 청소하고 관리했다면 보존이 불가능하지 않다. 다들 알다시피 오늘날에도 절에 가면 매일 쓸고 닦는다.

사람의 힘은 때론 구조 이상의 역할을 한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꼬부기T 2015-02-13 14: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연히 이 서평을 읽게 됐습니다. 꼿꼿하고 당당하면서도 예의를 잃지 않으셨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2015-02-13 20:3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