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卷頭言>
人文學의 危機
金倉圭(大邱敎大 名譽敎授)
近年 國文科 某 敎授의 退職 紀念式場에 慶賀하러 간 일이 있었다. 그때 同科의 젊은 교수가 司會를 맡아보았다. 퇴직 교수의 著書 소개가 있었는데, 한 번도 아닌 두 번이나 冊名의 漢字를 엉터리로 읽는 것을 보고 '아뿔사! 큰일 났구나' 했다.
얼마 전 '人文學의 危機'라면서 80餘 人文大學長들이 모여 宣言文 發表한 것을 紙上에서 접했다. 나는 이 '人文學의 危機'는 인문학을 專攻하는 교수들이 自招한 결과라고 봤다. 인문학 가운데 國語國文學을 例로 보더라도, 요즘 國語國文學 論文集들을 보면 한결같이 한글 一色으로 變貌됐다. 아무리 시대의 흐름을 따라간다지만, 이 한글 일색의 논문을 읽다가 무슨 뜻인지 몰라 앞뒤로 文脈을 맞추어 보고 한참 생각해 봐야만 意味가 통하고 파악될 때가 있다.
우리 國語國文學科 出身이라 한다면, 冊 標題의 漢字 정도는 常識的으로 읽어야 된다. 이렇게 국어국문학을 名色 專攻하고 大學 講壇에 선 교수라면, 아주 깊이 있는 實力을 要하는 漢文은 아니더라도 상식적인 漢字 정도는 능히 읽을 수 있어야 하겠다.
漢字는 中國서 나온 文字이지만, 우리나라로 와서 우리 祖上들이 二千年 동안 使用하여 왔다. 韓國文化의 根幹을 이해하고 우리 傳統文化를 찾자면 漢字를 모르고서는 안 된다. 國譯事業이 잘 進陟되어 難解한 文集들을 위시한 많은 飜譯이 되어져 쉽게 접근을 할 수 있지만, 아직도 대붜분의 漢籍들은 放置된 상태다. 漢字語를 逐出한다면 우리 專統文化는 과연 무엇이 남겠는가.
韓 · 中 · 日 三國은 漢字를 쓰고 있는 나라들이다. 이 三國이 漢字를 각각 자기 나라 소리대로 말한다면 잘 알아듣지 못한다. 그러나 漢字로 表記되었을 때는 그 意味가 잘 疏通된다. 이 漢字는 각기 그 나라에 가서 그 나라스럽게 發達한 것이다. 과연 한글 國粹主義에 빠져 漢字를 내쳐야 하겠는가. 이런 결과가 學生들을 漢字를 모르는 文盲으로 만들었고, 極少數이긴 하지만 國語國文學을 專攻한 이 가운데 常識的으로 알아야 하는 漢字로 적힌 冊 標題도 못 읽는 경우가 나왔고, 마침내 '人文學의 危機'가 온다는 사실은 明若觀火한 現實이 되고 말았다.
우리말과 글 속에는 우리 精神이 녹아 있다. 光復된지 60년이 지났는데, 우리말 속에 우리말化한 日本語가 넘쳐나고 있다. 이는 우리 國語國文學者들이 放置한 잘못도 있고, 政府 主導下에 올바른 語文政策이 一貫性 있게 안 된 原因도 있다. 우리 民族正氣를 올바르게 세우려면, 말과 글 속에 녹아 있는 精神을 올바르게 갖도록 國語國文學이 先導했어야 햇다. 이러고 난 뒤 親日 殘滓 淸算으로 가는 것이 순서가 아닐까 한다. 例로 지금 쓰는 '化粧室'을 嶺南地方에서는 '淨廊'이라 썼다. '化粧室' 보다 '淨廊'이 얼마나 좋은 우리말인가. 그러나 사투리고 촌스러운 말이라 하여 팽개쳐진 말이다. 日帝下에서는 '便所'로 使用하여 오다가 언젠가부터 '化粧室'로 둔갑한 말이다. 이미 우리말 속에 化石化된 日本語 로 '祝祭 · 開化 · 立場 · 役割 · 詩歌', 또 요즘 學界에서 쓰이는 '學際' 등 天地볏가리다.
'人文學의 危機'는 남의 탓도 아니요, 豫算 打令만으로 돌려서도 안 된다. '얼' 빠진 소리는 집어치우고, 우리 魂과 精神을 바로 세우는 民族 主體性의 國語敎育이 時急하다. <語文생활 통권 제108호, 3쪽)
인문학의 위기는 한자를 몰라서일까? 민족이니 국수주의니, 혼이니 정신이니 하는 것은 이제 그만 들먹였으면 하지만, 나름 수긍가는 대목이 있기도 하다.
전부는 아닐테지만, 오늘날의 어문교육이 이 '인문학의 위기' 운운하게된 데에 크게 일조하는 바가 없다고는 못할 것이다. 어쨌거나 여기서 인문학이 위기니, 그 원인이 뭐니, 대책을 강구하자, 뭐 그런 소리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단도직입, 나는 한자를 우리가 어느정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자어를 외래어로 치부해 버리고, 한자를 남의 나라 글자라고 배척하는 요즘의 작태를 보면 참 한심한 노릇이기도 하다. 한자어는 분명 우리말이고, 한자, 나아가 한문은 우리의 중요한 자산이다. 세계화니 글로벌이니 하는 데에도 한자(한문)은 분명 유용하다. 우리말의 대부분을 구성하고 있는 한자어, 그 말의 의미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한자라면, 우리는 그것을 당연히 안고 가야할 것이다.
여기서는 국한혼용으로된 글을 옮겨 놓거나, 직접 글쓰기를 해 봄으로써, 한자와 한문에 관심있는 알라디너의 어문생활에 나름의 도움이 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