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손바닥 문학과지성 시인선 291
나희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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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높은 가지를 흔드는 매미소리에 묻혀

 

내 울음 아직은 노래 아니다.


차가운 바닥 위에 토하는 울음,

풀잎 없고 이슬 한 방울 내리지 않는

지하도 콘크리트벽 좁은 틈에서

숨막힐 듯, 그러나 나 여기 살아있다

귀뚜르르 뚜르르 보내는 타전소리가

누구의 마음 하나 울릴 수 있을까.


지금은 매미떼가 하늘을 찌르는 시절

그 소리 걷히고 맑은 가을이

어린 풀숲 위에 내려와 뒤척이기도 하고

계단을 타고 이 땅밑에까지 내려오는 날

발길에 눌려 우는 내 울음도

누군가의 가슴에 실려가는 노래일 수 있을까.

                                「귀뚜라미」


  안치환의 노래다. 아직도 이 노래를 들으면서는 마음은 잔잔한 풀밭을 헤매면서 귀뚜라미 울음에 왠지 모를 가슴 속 어느 한 덩이, 덩이가 울렁이는 듯하다. “귀뚜루루르 귀뚜루루르 보내는 내 타전소리가/누구의 마음 하나 울릴 수 있을까.” 그러나 그 귀뚜라미는 내 가슴에서 크게 울었다.

 

  이 노래를 좋아하면서, 나는 이 노래의 가사를 안치환이 쓰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야말로 주옥같은 이 가사는 곧 시였다는 사실을 알았고, 이 시를 쓴 이는 나희덕이라는 여류시인임을 알았다. 나희덕! 이 이름도 왠지 귀뚜라미 울음의 작음 울림으로 들렸다. 그로부터 나는 나희덕이란 이름을 내 귓가에 귀뚜라미 울음과 같이 기억했고, 이 노래를 좋아 듣던 만큼이나, 듣던 때에나 또한 흥얼거릴 때에나, 나희덕이란 이름도 함께 기억했다. 하지만 그 이름뿐이었다.


배추에게도 마음이 있나 보다.

씨앗 뿌리고 농약 없이 키우려니

하도 자라지 않아

가을이 되어도 헛일일 것 같더니

여름내 밭둑 지나며 잊지 않았던 말

― 나는 너희로 하여 기쁠 것 같아.

― 잘 자라 기쁠 것 같아.


늦가을 배추 포기 묶어 주며 보니

그래도 튼실하게 자라 속이 꽤 찼다.

― 혹시 배추벌레 한 마리

이 속에 갇혀 나오지 못하면 어떡하지?

꼭 동여매지도 못하는 사람 마음이나

배추벌레에게 반 넘어 먹히고도

속은 점점 순결한 잎으로 차오르는

배추의 마음이 뭐가 다를까?

배추 풀물이 사람 소매에도 들었나 보다.

                                「배추의 마음」


  이 시는 중학교 3학년 1학기 1단원 시의 표현 소단원(2)에 수록되어 있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 나희덕! 그 이름이 불현듯 튀어나왔다. 내가 중학생이 아니고, 이놈의 국어교과서를 학교 다닐 시절보다 더 열심히 공부해야할 입장에 있어, 새롭게(이제 다시 8차 교과서를 펴낸다고 하니 새로울 건 이제 없지만) 7차교과서를 공부하다보니, 이 책에 나희덕의 시가 있었던 것이다. ‘배추의 마음’을 읊는 나희덕의 마음이 아하 곧 ‘배추의 마음’임을 느끼면서, 내 소매에는 ‘배추 풀물’이 들었고, 어느새 ‘귀뚜라미’의 울음소리 들려왔다. 나희덕! 나희덕! 이 이름이 계속해서 내 주의에서 맴돌았다.


처음엔 흰 연꽃 열어 보이더니

다음엔 빈 손바닥만 푸르게 흔들더니

그 다음엔 더운 연밥 한 그릇 들고 서 있더니

이제는 마른 손목마저 꺾인 채

거꾸로 처박히고 말았네

수많은 槍을 가슴에 꽂고 연못은

거대한 폐선처럼 가라앉고 있네


바닥에 처박혀 그는 무엇을 하나

말 건네려 해도

손 잡으려 해도 보이지 않네

발밑에 떨어진 밥알들 주워서

진흙 속에 심고 있는지 고대 들지 않네


백 년쯤 지나 다시 오면

그가 지은 연밥 한 그릇 얻어먹을 수 있으려나

그보다 일찍 오면 빈 손이라도 잡으려나

그보다 일찍 오면 흰 꽃도 볼 수 있으려나


회산에 회산에 다시 온다면

                                「사라진 손바닥」


  ‘배추 풀물’이 거의 다 빠져갈 즈음, 나는 재미삼아, 대학교 말년, 교양수업으로 시창작 강의를 수강한 적이 있다.(나는 전공이 국어교육이었지만, 국어국문학과 강의 중에 이 수업을 들은 것이다. 이 과목은 국문과 전공과목이지만, 내가 들었으니, 교양이나 다름없게 된 것이다. 그만큼 대충 들었다.) 아하 이런, 나희덕! 그 이름은 또 내게 확 띄었다. 아뿔싸, 이젠 도저히 나희덕을 만나지 않고는 아니 되겠구나. 하지만 나는 참으로 게을러서 나희덕 시인을 이제야 만났다.

 

  삼일간의 예비군 훈련 덕분인 것이다. 삼일 동안 4권의 시집을 읽었고, 그 중 하나가 바로 나희덕 시인의 이 시집 『사라진 손바닥』이다. 말하자면, ‘사라진 손바닥’이 불현듯, 혹은 우연처럼, 혹은 어쩔 수 없는 필연처럼.

 

  왜 그렇게 돌고 돌아, 이제야 만나야만 했을까? 나희덕이라는 이름을 안지는 10여년의 세월이 더 지난 듯한데, 왜 이제여야 하는가? 하긴, 그걸 묻는다고 뭐가 달라질 것은 없다. 내 운명은 왜 이런가 하고 따지니 보다, 앞으로의 운명을 걱정하는 것이 차라리 나은 것처럼. 그러니, 이제는 나희덕을 제대로 만나는 것이 필요할 터, ‘사라진 손바닥’이 내 얼굴에 뺨을 치고 말게끔 그렇게 만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나희덕과의 만남을 가능하게 해 준 예비군 훈련에 고답다는 말과 함께, 나는 이 시집『사라진 손바닥』을 통해, ‘연밥’도 여러 그릇 얻어먹었다고나 할까, 나희덕 시인이 숨겨 둔 ‘빈손’ 또한 잡아보았다고나 할까, ‘흰 꽃’이 하얗게 내 앞에서 빛났다고나 할까, 그럴 수 있어서 또한 즐거웠다. 귀뚜리미가 울고, 풀물 냄새도 나고.

 

  이렇게 내가 오랜 세월을 거쳐 나희덕을 만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왜일까? 나는 거기에 나희덕의 시의 힘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도덕적인 갑각류’라는 말이 뢴트겐 광선처럼 나를 뚫고 지나갔다. 벗어나려고 할수록 더욱 단단해지던, 살의 일부가 되어버린 갑각의 관념들이여, 이제 나를 놓아다오.

                                                                  <시인의 말>


  ‘관념’을 떨쳐버리고, 잘 짜여진 비단결처럼, 나희덕의 시는 곱디고운 아름다운 옷으로 나를 감싸주고 있었다. 시집 곳곳에는 따뜻함과 정겨움을 느낄 수 있었다. 귀뚜라미의 울음처럼, 배추의 마음처럼, 따뜻한 겨울 솜옷처럼, 나를 감싸주고 있었다. 그게 바로 나희덕의 힘이 아니겠는가?


잘 비워낸 한 생애가 천천히 식어가는 동안

그가 마지막으로 건네는 국밥 한 그릇을

눈물도 없이 먹어치웠다.

국밥에는 국과 밥과 또 무엇이 섞여 있는지,

국밥 그릇을 들고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서둘러 삼키려는 게 무엇인지,

어떤 찬도 필요치 않은 이 가난한 음식을

왜 마지막으로 베풀고 떠나는 것인지,

나는 식어가는 국밥그릇을 쉽게 내려놓지 못했다.

                                「국밥 한 그릇」 부분


  이게 바로 시인의 마음이었으니, 나희덕이란 이름은 내게 참으로 여린 잎사귀의 흩날림이었던 것이다. 이 시집의 해설을 쓴 김진수는 ‘직조술로서의 시학’이라고 명명하였거니와, 나는 나희덕이 만들어 내는(만들어 낸다는 말에는 어느 정도 문제가 있지만) 시들은 따뜻한 털옷, 한 땀 한 땀 뜨개질을 해낸, 바늘로 세세히 박음질을 한 그런 옷의 시학이 아닐까 한다. 앞으로 한 동안은 나희덕의 시세계에서 이런 따뜻함 느끼지 않을까 한다. 근데, 지금은 한여름이군! 아하! 그렇다면 또한 얼마간이 지난 후에 또 우연처럼 나희덕이 내게 찾아올 것이야!


땅 속에서만 꽃을 피우는 난초가 있다

땅 위로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없기 때문에

본 사람이 드물다 한다

가을비에 흙이 갈라진 틈으로 향기를 맡고 찾아온

흰개미들만이 그 꽃에 들 수 있다

빛에 드러나는 순간 말라버리는 난초와

빛을 피해 흙을 파고드는 흰개미,

어두운 결사에도 불구하고 두 몸은 희디희다


현상되지 않을 필름처럼 끝내 지상으로 떠오르지 않는

온몸이 뿌리로만 이루어진

꽃조차 숨은 뿌리인

                                「땅 속의 꽃」


  그 때까지는 ‘땅 속의 꽃’으로 남아있을 나희덕의 시를 내가 ‘흰개미’가 되는 그 때에 다시 만날 수 있겠지! 그렇게 나희덕의 시는 내게 또 다가올 것이다. 나희덕과의 기나긴 인연의 줄 굵게 잡고 놓지 않기만 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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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7-05 2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멜기님, 오늘 보내주신 책 두권 잘 받았습니다. 넘 감사하고 기쁩니다.
즐겁게 독서할게요. 제 서재에 페이퍼로도 간단히 올렸어요. 괜찮죠?
그러고보니 나희덕의 시집 한 권 사야지 하면서 미루고 있었는데, 이 시집
제가 좀 바구니로 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