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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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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뻔 하게 시작해본다. 한병철의 <투명사회>를 읽기 전에, 읽으면서, 그리고 읽고 나서 문득 드는 뻔 한 생각이 '투명 인간'이었다. '투명 인간'은 우리가 한번쯤 어렸을 때 동경(?)했던 존재(?)였다고나 할까? (하도 오랜만에 리뷰를 쓰니 어휘력이 꽝이 됐는지, 적절한 단어들이 떠오르지 않는다. 아마도 이 리뷰는 물음표 천지가 되지 싶다.) '투명 인간'이란 특이한 발상은 꽤 오래되었지 싶다. 검색해 보니, 1897년에 영국의 소설가 웰스가 쓴 공상 과학 소설 <투명 인간>이 그 시초가 아닐까 싶다. 투명해 지는 약을 개발해 먹고 못된 짓 하다가 죽는다는 내용이란다. 신기하게도 1969년, 내가 태어나기도 무려 10년 전에, 그 당시 내로라하던 신성일, 허장강, 서영춘, 그리고 요즘 대세 이순재 선생 등 한 가닥씩 하는 분들이 출연해 만든 <투명 인간>이라는 영화가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걸 알았다. 2000년에는 미국에서 <투명 인간>이라는 드라마가 방송됐다. 그런데 내용은 잘 모르겠다. KBS에서는 <투명인간 최장수>라는 드라마도 했다. 외국에서는 <투명인간 그리프>라는 영화도 있었다. 찾아보면 더 많을 것이다. 그만큼 '투명 인간'이라는 화두(?)는 이래저래 유행이었더랬다.

 

  지금은 '투명 인간'이라는 비현실적인 화두를 들어보기는 어려운 듯하다. 대신에 공상이 아닌 현실로서의 '투명 인간'의 가능성이 언뜻 언뜻 보도를 통해 들려오기는 한다. 투명 망토 같은 것을 개발할 수 있다고 하는 것 같은데, 우리 어렸을 적, 그런 망토가 있으면 투명 인간이 될 수 있을 거야 하는 허무맹랑한 생각이 곧 현실이 되는 걸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러면 진짜 신기할 거 같다. 투명 인간이 되는 방법들은 우리 상상 속에서 여러 가지가 있었다. 약 같은 것을 개발하려 하다가 잘못해서 투명 인간이 되거나, 투명 망토를 걸치면 투명해지는, 뭐 그런 것을 생각했었다. 그렇게 우리는 투명해 지고 싶었던 것이다.

 

  투명 인간이 되어서 우리는 무엇이 하고 싶었을까? 여탕에 들어가는 걸 최우선으로 꼽을 수 있겠고, 은행에 가서 돈을 잔뜩 들고 나오는 것, 대강 유치찬란 뽕짝 같은 상상들에 그치고 만다. 그러다 정의를 위해 악당을 물리치고 해피엔딩?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투명해진다는 것은 불편한 점이 더 많을 듯하다. 요즘 같은 세상에 내가 보이지 않는다면, 죽거나 다치기에 딱 좋지 싶다. 길을 걸을 때도 아무도 나를 보지 못하니 열심히 피해 다녀야 할 판이다. 잠시 잠깐 한눈이라도 팔았다가는 차에 치여 죽기 딱 좋지. 아무데서나 잠을 자는 것도 피해야 할 것이다. 내가 자는 데 누구라도 덜컹 앉아버리거나, 무거운 짐이라도 쿵 내려놓는다면? 어익후!!!

 

  보통 공상 과학류의 주인공들은 한 때 신나게 즐기다가도 남과 다른 나를 느끼며 외로워지고 슬퍼진다. 뻔 한 스토리지만, 뻔하다는 것은 일반적이고 보편적이고 자연스러운 귀결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내가 투명인간이 되어도 당근 슬퍼지고 말 것 같다.

 

  상상을 넓혀서 투명해지는 약 혹은 망토가 개발되어 세상 모든 사람들이 투명해진다면, 세상은 어떻게 될까? 아무도 아무를 보지 못하는 세상은, 투명한 인간들이 제 아무리 빨빨거리며 돌아다닌들, 그건 아무도 없는 세상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 인간 모두가 투명해지면, 세상은 아무도 없는 세상이 되고 만다.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無.

 

  한병철은 말한다. "투명한 관계는 모든 매력, 모든 활기를 잃어버린 죽은 관계이다. 완전히 투명한 것은 오직 죽은 자뿐이다."(p.19) <투명사회>에서 말하는 투명한 인간과, 내가 지금까지 주저리 떠들었던 '투명 인간'은 출발점이 다르지만, 어쩌면 결과는 동일해지는 듯하다. 인간 모두가 투명해지면 그건 아무도 없는 세상, 죽은 자만 널린 세상, 아무 것도 아닌 세상, 아무 것도 없는 세상, 無.

 

  한병철이 말하는 '투명사회'의 속성은 '긍정, 전시, 명백, 포르노, 가속, 친밀, 정보, 폭로, 통제'다. 이렇게 보면 도무지 무슨 사회인지 알 수가 없다. '긍정, 명백, 친밀, 정보'만 보면 대단히 좋은 사회인 듯싶고, '포르노'를 보면 흥미롭게 야한 사회이기도 한 듯싶다. 이 사회에서도 인간은 투명해진다. 오늘날 '정보사회'라고 하는 이 시대에 인간은 '투명'하다는 얘기다. 이 '정보사회'에서 발생하는 중요한 문제가 정보 유출인데, 비단 몰래 빼가는 유출만이 아니라, 나도 모르는 사이 자연스럽게 노출되는 정보의 유출, 그로 인해 나의 일거수일투족 모든 것이 낱낱이 읽혀지는 그런 정보사회가 '투명사회'다. 누군가 나를 속속들이 알고 있다. 나의 모든 정보가 투명하게 누군가에 의해 읽혀진다. 그래서 나는 투명하다. 아니 이 사회의 인간 모두는 점점 투명해진다. 그리하여 투명해진 인간이 된다. 투명인간. "투명사회는 정보사회다. 정보는 어떤 부정성도 알지 못한다는 점에서 투명성의 현상이다. 정보는 긍정화되고 조작 가능하게 만들어진 언어다."(p.83)

 

  "아감벤의 테제에 따르면 아담과 이브는 원죄 이전에 벌거벗지 않았다. "은총의 옷" "빛의 옷"이 그들의 몸을 덮고 있었기 때문이다. 원죄로 인해 그들은 신성한 옷을 빼앗기고 만다. 완전히 벌거숭이가 된 아담과 이브는 몸을 가리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벌거벗음이란 곧 신이 내린 옷의 상실을 의미하는 셈이다."(p.49-50)

 

  태초에 하나님이 계셨고, 아담과 이브를 창조했더랬다. 그러나 그들은 벌거벗었지만 "벌거벗지 않았다." '신성한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창세기 2장 25절) 그러나 그들은 벌거벗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창세기 3장 11절) 그 부끄러움을, 부정성을 그들은 옷을 만들어 가렸다. 그리고 그들은 숨어 버렸다.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창세기 3장 8절) 그러나 오늘은 인간은 부끄러움을 가린 그 옷을 실오라기 하나까지 훌훌 벗어버린다. 부끄러움에 숨지도 않고 자신 있게 드러낸다.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한다. '긍정', 그리하여 만인에게 자신을 드러낸다. '전시'. 야한 사회, 이것은 '포르노'다. "아무것도 덮거나 숨겨두지 않고 시선에 내던지는 투명성은 외설적이다. 오늘날 모든 미디어의 이미지들은 어느 정도 포르노적이다."(p.59)

 

  "투명성의 강제는 기존 시스템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데 매우 효과적으로 작용한다. 투명성은 그 자체로 이미 긍정적이다. 투명성 속에는 기존의 정치경제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의문시하는 부정성이 들어 있지 않다."(p.25) 이러한 투명성은 결국에는 '통제'에 있어 최적화된다. "투명성의 독재 속에서는 주류에서 벗어나는 의견이나 일반적이지 않은 아이디어는 아예 입 밖으로 꺼내기도 어려워진다. 과감한 도전은 거의 시도되지 않는다. 투명성의 명령은 강력한 순응에의 강제는 낳는다. 사람들은 카메라의 지속적인 감시 속에 있을 때처럼 관찰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투명성의 명령에는 파놉티콘적 효과가 있다. 그것은 결국 커뮤티케이션의 획일화와 동일한 것의 반복으로 귀결된다."(p.141) 이것을 한병철은 '디지털 파놉티콘'이라 명명한다.

 

  21세기에 우리 인간은 자유를 만끽하고 있다. 아니 만끽하는 것만 같다. 아니 만끽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디지털은 우리의 발자취를 낱낱이 기록한다. 길을 걸어도 우리도 걸음 하나하나는 수많은 차들 앞유리창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블랙박스에 녹화된다. 거리마다 빌딩마다 달려있는 cctv에 의해 촬영된다. 우리가 버스를 타도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지 모든 정보가 남는다. 인터넷의 바다를 유영해도, 백화점엘 가도, 그 어디를 가도, 이 정보사회는 우리를 벌거벗게 만든다. 이것을 어느 누가 보고 있다면, 그는 우리를 '통제'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감시되는 것이다. 한병철의 투명사회의 속성을 하나 추가하면 '감시'가 되는 이유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를 노예처럼 부리고 착취하던 산업 시대의 기계에서 해방되었지만, 디지털 기기가 낳은 새로운 강제, 새로운 노예제에 직면하고 있다. 디지털 기기는 이동성을 무기로 모든 곳을 일터로, 모든 시간을 일의 시간으로 만듦으로써 우리를 더욱 효과적으로 착취한다. 이동성이 가져온 자유는 어디서나 일해야 한다는 치명적인 강제로 돌변한다."(p.163) "더 많은 자유를 약속하는 스마트폰에서 하나의 치명적인 강제가 생겨난다. 커뮤니케이션에의 강제. 사람들은 최근 들어 디지털 기기와 거의 강박적 관계에 빠져들었다. 여기서도 자유는 강제로 전도된다. 소셜네트워크는 커뮤니케이션에의 강제를 엄청나게 강화한다. 결국 그러한 강제는 자본의 논리로 소급된다. 더 많은 커뮤니케이션은 더 많은 자본을 의미한다. 커뮤니케이션과 정보의 순환이 가속화되면 자본의 순환도 가속화된다."(p.164) "우리는 오늘날 자유 자체가 강제를 촉발하는 특수한 역사적 단계에 처해 있다. 자유는 본래 강제의 반대 형상이다. 그런데 강제의 반대 형상이 강제를 낳는 것이다. 그래서 더 많은 자유는 더 많은 강제를 의미한다. 그것은 자유의 종말일 것이다."(p.181)

 

  디지털 파놉티콘의 무서운 점은 이렇듯 자유로운 통제, 감시라는 점이다. 아니 더 정확히는 자발적이라 해야 옳을지 모르겠다. "디지털 파놉티콘의 주민들은 수감자가 아니다. 그들은 자유롭다는 환상 속에서 살아간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전시하고 훤히 비추어줌으로써 디지털 파놉티콘에 풍부한 정보를 제공한다."(p.212) 우리의 정보를, 우리가 자발적으로 자유롭게 드러내놓은 정보를 누군가가 독점한다면, 그는 우리를 통제할 수 있다. 이전의 통제가 권력을 위한 것이라면, 오늘날의 통제는 무엇을 위한 것일까? 결국은 '돈'이다. 오늘날은 '돈'이 곧 권력이니, 그 근본은 같다.

 

  "내가 한 모든 클릭은 저장된다. 내가 디딘 모든 발걸음은 역추적될 수 있다. 우리는 도처에서 디지털 발자취를 남긴다. 우리의 디지털적 삶은 네트워크 안에 정확히 모사된다. 삶의 완벽한 프로토콜이 남겨질 수 있는 가능성으로 인해, 신뢰는 완전히 통제로 대체된다. 빅데이터가 빅브라더의 자리를 차지한다. 삶의 완벽한 프로토콜화는 투명사회를 완성한다."(p.211)

 

  한병철은 현대 사회의 '디지털화'에 초점을 맞춰 이를 '투명사회'로 분석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현대 사회는 투명사회'화'되고 있다. 어느 순간엔 완성될. 여기저기 막그냥 확그냥 정보가 넘쳐난다. 그러나 우리에겐 이야기가 사라진다. "오늘의 사회를 지배하는 긍정성의 과잉은 이 사회에서 서사성이 사라졌음을 방증한다."(p.69) 우리의 서사가 사라진 사회에서 빅브라더는 우리에게 이야기를 부여하고, 우리를 그의 이야기에 따라 지배하게 될 것이다. 서사가 없는 이 사회는 결국엔 비극이 될 것이다.

 

  몇 가지 아쉬운 점? 아니면 궁금한 점? 이도 아니면 그냥 궁시렁 몇 자 적으며 마무리하자. (내가 지금까지 무슨 말을 장황하게 했는지 정리도 안 된다.)

 

  1. 투명사회라는 테제는 한병철이 서문에서도 이야기했듯, 불합리하고 비합법적인 불투명성과 싸우는 투명성과 겹쳐진다. 정치권력, 자본권력에 강력히 요구되는 투명성, 투명한 사회에의 요구는 이 사회에 필수적인 부분이다. 이것이 자칫 한병철의 '투명사회'라는 비판에 의해 퇴색될까 하는 우려가 생긴다. 프레임이라고 했던가? 비판적 의미로서의 '투명사회'라는 한병철의 명명을 비판적 의미가 좀 더 부각되는, 그래서 조금 더 적절한, 권력과 자본의 투명성에 대한 요구와 겹쳐지는 않는, 그런 명명이 필요해 보인다. '디지털 파놉티콘' 같이 말이다.

 

  2. 투명사회가 완성되기 전에, 우리는, 우리사회는 무엇을 해야 할까? 어떻게 완전한 통제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피로사회>에서 제기된 현대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분석이 <투명사회>로 완성되었다면(?) 이제는 '불(不)투명' 사회로 되돌아 갈 수 있는 길을 알려주어야 하지 않을까?

 

  3. 한병철의 우려는 약간의 기우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과연 이 디지털 사회에서 부정성이 완전히 사라졌는가? 이야기가 없는가? <투명사회>를 읽어가면서 긍정성의 강요, 부정성의 소멸(?)이라는 견해에 부분적으로 동의하면서도 과연 그런가? 정말 그런가? 꼭 그런 건가? 아닐 수도 있지 않나? 여전히 나는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데? 하는 의문들이 든다. 인터넷을 통해 자기의 의견을 개진하고 비판하고 토론하는 장이 확대되고 있고, 건전하고 생산적인 만남으로 이어지고 있기도 하지 않은가? 그런 부분에 대한 의도적인 무시가 있지는 않은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한병철의 후기 작업을 기대하는 부분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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