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쌈닭' 두루미히에 이끌려 보게 된 <베토벤 바이러스>에 난 푹 빠져버렸다. "첫 눈에 반한다"는 걸 난 믿지도 않고, 경험하지도 못했지만, 이 경우에는 좀 다르다고 해야 하겠다. 적어도 드라마에선 예외가 생겨 버린 것이다.

그로부터 나는 <베토벤 바이러스> 전도사가 되어 버렸다. 여기저기 이 드라마를 선전하고 다녔다. 반응은 제각각이다. 그런 드라마가 있느냐에서부터 일본 드라마의 아류일 뿐이라고 냉담한 반응에까지. 여하튼 이 드라마가 무지하게 재미있다. 적어도 내게는.

아무튼 내 선전공세에 넘어가서 이 드라마를 보고 나처럼 푹 빠진 이들이 주변에 적지 않다. <베토벤 바이러스> 제작자 측에서는 최근에 쟁쟁한 경쟁 드라마를 꺾고 시청률 1위에 오르게 된 공로를 내게도 얼마간 돌려 감사를 표해야 할지 모른다.

그런데, 재미난 것은 이 드라마를 본 친구와 후배 부부의 반응이다. 강마에를 보면서 날 보는 것 같았다는 것인데, 이게 칭찬인지 아닌지 구분할 것 없이, 나는 최고의 연기자 김명민을 떠올리며 부라보를 외쳤더랬다. 그런데 이 친구들이 그 이류를 달았을 때는 좀 찝찝했지만 기분이 썩 나쁘지는 않았다.

그들이 내게 강마에를 닮았다고 한 이유는, 외모가 아니라(난 외모도 닮았다고 주장한다) 강마에 특유의 독설과 말버릇이 나를 떠올리게 한다는 거다. 곰곰 생각해보면 일리있는 말이다. 알만한 사람은 알거다.

옛 기억을 떠올려보면, 어느 시골의 작은 교회에서 나는 어린 나이에 성가대 지휘를 맡은 적이 있다. 자랑은 아니지만, 나름 재능이 특출났다고 생각된다. 누가? 내가. 예전에도 나는 지휘에 일가견이 있었더랬다. 초등학교 6학년 쯤으로 기억되는데, 음악시간에 학교선생님이 클래식을 틀어주더니, 모두 눈을 감고 음악에 맞춰 지휘를 해보라는 것이었다. 나는 음악에 심취해서 손을 휘저었다. 결국, 제일 잘 한 사람에게 주는 포도스티커 10알은 내 차지가 되었던 것이다. 그때 나의 이 음악적(지휘적) 재능을 알아보고 키웠으면 지금쯤 카이얀 저리가라는 명 지휘자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교회에서 성가대 지휘를 한 적이 있었다고 했는데, 그때에도 지휘를 참 잘해서, 열악한 조건에도 불구하고(시골의 작은 교회의 성가대에게 조건은 늘 좋지 않다) 1500여 명이 모이는 그쪽 지역 대형 집회에서 찬조 공연을 한 적도 있었더랬다. 자랑이냐고? 맞다 자랑이다.

그런데, 강마에를 닮았다는 소리를 듣고는 이 때의 기억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때 그시절을 떠올리면 대단히 미안한 기억들이 많은데, 그 미안함은 당시 내 지휘를 잘 따라줬던 성가대 대원들이다. 나보다 나이도 많은 어른들도 있었고, 한 두살 아래의 후배들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여간 당당한 게 아니었다. 강마에처럼 실력이 떨어지거나, 음정과 박자를 못 맞추면 여지없이 독설을 퍼부었다. 내 독설의 단골 손님은 피아노 반주자였는데, 그 아이에게 특히 미안한 마음이다. 성가대 지휘자 하면 좀 부드럽고 나긋나긋하며 자애로워야 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성전에서 장사하던 이들에게 퍼부어댔던 것처럼 나도 그렇게 퍼부어댔던 아픈 기억이 있다.

또다른 기억이 떠오른다. 대학시절, 1년에 한번씩 학과에서 학술제라는 걸 하는데, 그때 몇몇이 모여서 작은 콘서트같은 걸 연다. 뭐, 왕년에 깔짝되기만 한 어중이 떠중이 모아 하는 공연이니 별볼일 없는 것이지만, 나는 그걸 대학 3년동안 연속으로 참가했다. 고등학교 시절 기타를 깔짝 된 적이 있어서였다. 두해째 참가하던 때에, 후배 한 놈에게 기타를 가르쳐야만 했던 적이 있다. 그 후배 놈은 그때 이후를 나를 보면 이를 부득부득 간다. 이쯤하면 다들 상상하시겠지만, 난 그 아이에게 기타를 가르치면서, 강마에가 불광동 돈텔파파를 다루듯이 했다. 그리고 강마에가 정희연 씨에게 퍼부은 독설들만큼 심한 말들을 했을지도 모른다.

자꾸 기억들이 떠오른다. 생각해보면 이런 경우들이 참 많았다. 나는 나름 짜증을 잘 내는 축이 든다. 아무튼 이런 증거들을 떠올리면 나는 영락없는 강마에다. 누가 감히 아니라고 하겠는가?

그런데, 우리는 여러모로 강마에 같은 면들을 다들 지니고 있지는 않을까? 그럴지도 모른다. 나쁜 마음으로 그러지는 않았을지 모르나, 누군든 한번쯤의 독설로 다른 이들에게 상처를 주었을 것이 확실하다. 그러니까 모두들 자기 안에 '강마에'를 품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를 보면 두 명의 강건우가 등장한다. 하나는 늙고 독하고 나쁜 건우 강마에고, 젊고 부드럽고 착한 건우 강마에 제자다. 왜 이 둘은 이름이 강건우로 설정되었을까? 내가 작가의 의도를 알지는 못하지만, 이 것은 일종의 자아의 이중성을 상징하는 것은 아닐까 싶다. 누구나 강마에와 착한건우의 모습을 자기 내면에 이중적으로 담고 있다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는 것이다.

강마에와 착한건우는 여러모로 상반된 캐릭터다. 노력형과 천재형, 독함과 부드러움 등등, 여러 면에서 정반대다. 그런데, 그 둘은 점점 하나가 되어간다. 음악과 지휘라는 어떤 목표로 향하면서 이 둘은 점점 합치된다. 그러면서 서로를 닮아가고, 조금씩 융합되면서 그 둘은 하나의 강건우로 통합하는 것이다.

<베토벤 바이러스>가 우리에게 전달하는 메시지는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하나의 강건우가 되가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 안의 이중성들을 잘 조화시켜 변화하라는 것. 그러나 각각의 장점은 최대한 살려내라는 것. 강마에가 독설로 무장된, 안하무인의 인간이지만, 어떤 하나의 가치에 있어서는 절대 양보하지 않는 강한 집념과 노력, 착한건우의 착하고 부드럽고 다른 사람들을 조화시키는 탁월함, 이런 장점들을 최대한 살리면서 서루를 배우고 닮아가며 변화되어가는, 그런 것들이 우리들 내면에서도 일어나야하지 않을까?

내가 강마에를 닮은 것 같다는 친구의 말을 듣고 나를 뒤돌아보면서 나의 이중성은 잘 조화되지 못하고, 그래서 수많은 이들에게 상처와 아픔을 주었을 것을 생각하니 참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이제부터라도 <베토벤 바이러스>에서처럼, 착한건우와 강마에가 하나된 강건우로 태어나는 것처럼, 내 안의 강마에와 착한건우를 합체해보아야 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어떻게? 독설을 퍼부어야 할 때는 강마에처럼, 세상의 착하고 여리고 가난한 이들에게는 착한건우처럼.

우리는 그렇지 못할 때가 너무나 많지 않았는가? 특히나 이 사회는 내면의 이중성을 외면의 이중성으로 표출하라고 강요하고 있잖은가? 권력자와 지배자와 부자들에게는 강마에처럼 가차없는 독설을 퍼부어대고, 가난한 민중들의 아픈 가슴은 착한건우처럼 달래주어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하나된 강건우들이 이땅에 넘쳐날 때 우리 사회도 베토벤필(<베토벤 바이러스> 출연진들이 오케스트라를 꾸려 공연한다던데?)이 넘쳐나 아름답게 연주될 수 있을 것이다.

아 내 안에 강마에 있어 행복하다. 그리고 난 외모에서도 김명민을 약간 아주 약간 닮았다고 조용히 주장해본다. 생각대로 하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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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8-10-20 0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하~ 딱 두번인가 중간에 조금 봤어요~~~ 드라마는 그 시간에 TV에 묶여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잘 안 봐요. 멜기님은 정말 드라마매니아예요.ㅎㅎㅎ
내 안에 강마에 있어 행복한 님, 강건우의 자연스런 합체를 기대할게요~~~^^

조선인 2008-10-20 0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ㅎㅎ 독설장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터라.
(주말에 재방하는 걸 언뜻 본 적이 있긴 하지만 독설이 시작될 거 같으면 채널전환.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