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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선거이야기 - 1948 제헌선거에서 2007 대선까지
서중석 지음 / 역사비평사 / 2008년 3월
평점 :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선거는, 그래서 아주 흥미롭게 관전했던 선거는, 1987년의 대선이다. 왠지 모르게 나는 기호 1번 노태우가 당선될 거라고 예견했다. 87년에 나는 몇 살이었지? 10살이 안 됐을 나인데, 뭘 안다고 예견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내 예상은 적중했다. 보통 사람처럼 얼굴 넙데데한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었음을 자고 일어나 아침 먹던 자리에서 듣고 우쭐했던 기억이 있다. 이후로 나는 김대중이 대통령이 될 때까지 모든 대선에서 당선자를 적중했다. 그때까지 내게 선거권은 없었다는 것은 지금 생각하면 천만다행이었다.
내가 처음으로 선거권을 행사한 건 2002년 대선이었던 것 같다. 1998년 지방선거 때 내게 투표권이 있었나 잘 모르겠고, 있었더라도 안 했을 가능성이 100%다. 2000년 국회의원 선거 때는 분명히 내게 투표권이 있었지만, 투표를 한 기억은 없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최초의 투표권 행사는 2002년 대통령 선거가 아니라 그 전에 있었던 지방선거였을 것이다. 그때 나는 군대에서 착취당하고 있었고 거기서는 거의 강제였기 때문이다. 하여간 기억하기로는, 그러니까 흥미롭게 관심갖고 투표하기로는 2002 대선이 처음이다.
그때 내가 노무현을 뽑았는지는 반신반의다. 이회창은 확실히 안 뽑았다. 그런데, 이 때 처음으로, 그러니까 내가 투표권을 갖고 있는 상태에서의 예측이 최초로 빗나갔다. 이회창이 되는 줄 알았는데, 노무현이 되었으니 말이다. 아무튼 이 결과로는 사실 나는 뭐가 뭔지 몰랐다. 아 지금 생각해보니 정몽준을 뽑았는지도 모르겠다. 이때 나는 이 사람이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선 것이 영 맘에 차진 않았다. 사실 그 사람이 피파 회장이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강하게 갖고 있었고, 괜히 왜 대통령 하겠다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어쨌든 안 될 건 뻔한 일이고, 이왕 나왔으니, 표를 좀 주면 피파 회장 되는데 나름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더랬다. 그야말로 뻘 생각, 뻘 짓이다.(군인은 선거일 전 부재자 투표를 한다. 그래서 내가 투표할 당시에는 여전히 정몽준은 후보였고, 사퇴 전이었다. 그래서 기억을 안하는 건지, 못하는 건지 모르지만, 노무현을 뽑았는지 정몽준을 뽑았는지, 영 모르겠다.)
그 후로부터, 제대해서는 거의 모든 선거에 참여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내 예측은 곧잘 맞았던 것 같은데, 내가 투표한 후보가 당선 된 일은 전혀 없었다. 이거도 어찌 보면 뻘짓인데, 좋게 말하면 이상과 현실은 괴리라고 할까? 그런데 이 뻘 짓은, 앞서의 뻘 짓, 그러니까 2002년 대선에 나온 정몽준이 피파 회장 되는데 좀 도움이라도 줄까하고 그에게 아까운 내 한 표를 헌신할까 했던 그 생각의 뻘 짓과는 전혀 다른 뻘 짓, 혹은 현실과 괴리된 이상이었다.
민주노동당을, 그도 아니면, 보수꼴통 아닌 사람에게 전적으로 투표를 해왔다. 그러나 그들이 당선된 일은 전무하다. 이 뻘 짓이 진짜 뻘 짓이 아니었다는 미약한 증거가 2004년에 나타났었다. 민노당의 국회진출 말이다. 그래서 나는 계속적으로 뻘짓을 해왔고, 요 전에도 뻘짓을 했더랬다. 4년 후에도 뻘 짓을 할 예정이다.
진보신당이 원내진출에 실패했다. 사상 처음으로 한 정당에 당원으로 가입하고, 알게 모르게 선거운동도 나름 하고 다녔다. 좌측 상단을 보면 저 로고를 아직도 달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내가 사는 지역구에는 후보도 안 낸 정당이 진보신당이다. 비례대표에게나 투표했을 뿐이다. 3%를 못 넘겨서 비례대표 하나 못 얻었다. 이런, 여전히 뻘짓이다. 그러나 나는 4년 후에도 이 뻘짓을 할 예정이다. 왜일까? 앞서 뻘짓이 뻘짓이 아닐 거라는 미약한 증거를 보았듯이, 어쩌면 나는 그 마약과도 같은 극소량의 마취제와 취해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데, 그게 중독성 짙은 마약이 아니라, 양약이고, 적절한 사고이고, 희망한 행동이란 생각, 아니 그 증거를 최근에야 굳혔다. 어떻게? 이 책 서중석의 『대한민국 선거이야기』를 보고 말이다. 이 책은 "1948 제헌선거에서 2007 대선까지"의 선거 앞다마 뒷다마 이야기들을 강연 형식으로 쉽고 재미나게 엮어내고 있다. 옆집 할아버지가 본인 살아온 얘기, 보아온 얘기, 진반 구라반 엮어가며 술술술 토해내듯이, 저자 서중석은 그렇게 지난 선거 이야기들을 쉼없이 토해낸다. 선거가, 그때 그때 누가누가 될 지 찍기놀이의 재미만이 아니라, 그 자체에서 어떤 슬프고 비참하고, 때론 우스꽝스럽고, 때론 감동적이기까지한 그런 재미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걸 예전에 미처 몰랐어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선거를 나처럼 뻘짓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나는 뻘짓이라도 하자고 하고, 50%는 뻘짓을 왜하냐고 한다. 그리고 당연 안한다. 선거를 한 놈이나 안 한 놈이다 매한가지로 선거를 비판하고 별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고 실망한다. 과연 그런가? 과연 그랬다. 경우에 따라서 다르긴 하지만. 그런데 서중석은 꼭 그렇지마는 않았다고 이야기한다. "선거는 참으로 비관적인 문제점을 많이 지니고 있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 한국 사회에서 선거가 굉장히 역동적인 역할을 했던 사실을 부인하기가 어렵다는 겁니다"라고 주장한다. 과연 그럴까? 이 책을 읽어보니 과연 그랬다.
해방 직후 1948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보통선거가 실시되고, 제헌국회가 설립된다. 보통선거 말이 쉽지, 우리나라가 실시한 이 보통선거는 다른 당시 선진국에 비해 가히 비약적으로 빠른 것이다. 알고 보면 참 혁명적인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런데, 이후 선거에서 간간히 실망한다. 번번이 이승만 할아버지가 대통령이 되는 걸 보면 그렇다. 그런데, 서중석은 이렇게 말한다. "대통령 직선제도 이승만이 영구집권하기 위한 일환으로 도입했지만, 그것이 두 번째 직선제 선거인 1956년 5 · 15선거에서부터 그의 발목을 잡았고, 1960년 3 · 15선거로 파멸하고 말거든요. 마치 한 편의 그리스 비극을 보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리스 비극보다 짜증나는 일이지만, 참 아이러니컬하기도 하고 묘하다고도 생각된다. 선거가 이승만을 결국 끌어내린 것이라고, 서중석은 이야기 한다. 선거의 힘.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키고, 그로부터 군부독재가 이 세상을 수십년 간 지배하는 악몽이 시작되지만, 결국 선거가, 그 전부는 아니지만 많은 부분에서, 박정희의 죽음을 불러오고, 전두환의 장기집권 야심을 무마시킨 중요한 구실을 했다. 그런데, 그게 너무 지지부진, 느리게만 보여서, 문제이기도 하고, 그 영향력을 알아보기가 어렵기도 하다. 좀 빠른 혁명이었다면 수많은 목숨은 살아남지 않았을까? 아니다. 빠른 혁명은 더많은 희생을 요할 수도 있는 일이다. 근데 이건 잘 모르겠다.
여하튼, 이후 87년 대선은 내가 적중한 선거이지만, 지금의 내 생각으로는, 아니 일반적으로는 그 결과는 불행이었다. 이후 김영삼의 선택과 그를 선택한 우리의 선택은 선거를 믿을 수 없게 만들었고, 그나마 정권교체를 이뤘다는 의의는 있지만, 우리를 여전히 힘들게한 김대중, 감동의 주인공이 되어 반짝했지만, 결국 반짝으로 끝나버린 노무현. 이런 과정들, 그러니까 선거를 통한 변화들을 보면 차츰, 느리게,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 것이라고도 보여진다. 그러나 이명박이 되어서는 그래, 좀 후퇴했다고 치자. 그런데 가슴아프게도 서중석은 "6월 민주항쟁 이후 민주주의는 우여곡절은 있었으나 진전되고 있었고, 2002년 대선과 2004년 총선은 혼탁함이나 타락상이 그다지 보이지 않았던 깨끗한 선거였습니다. 정책대결, TV 토론이나 유권자의 자발적 참가, 국민경선대회 등 신선한 선거운동이 전개되었다는 점에서 민주주의가 일정한 궤도에 오른 감을 주었는데, 불과 몇 년도 안 되어 여러 가지 면에서 후퇴했을 뿐만 아니라 퇴행적인 면도 노정되니 마음이 가볍지 않습니다. 역사가 일직선으로 진보하는 것이 아니고 나선형적 변화를 갖는다고 배웠지만, 너무나 빨리 온 후퇴요 퇴행이었습니다."라고 토로한다. 너무 빨리 온 퇴행이라고 말이다.
그러서 좀 나도 가슴아프지만, "1967년 선거로부터 4년 후에 있었던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는 신선한 바람이 부는 등 선거사에서 각별히 기억할 만한 활기와 유권자 의식을 보여주었습니다. 앞으로 있을 선거는 2007년 대통령 선거처럼 재미었는 무기력한 선거가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덧붙여 2008 총선처럼 더 무기력한 선거가 되어서도 안 되겠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기대와 희망을 품고 있는, 선거를 통해 희망을 만들어 가고자 하는 서중석을 말을 듣고, 그래 나도 앞으로 이 뻘짓아닌 뻘짓을 계속하리라고 다짐해 본다. 여하튼 아직 선거는 뻘짓이다. 아니 뻘짓 아닌 뻘짓이다. 그런데, 나중에, 어쩌면 아주 나중에, 내가 여전히 젊을 적에, 혹은 늙으막히, 그도 아니면 죽은 후에라도, 나 또는 나 아닌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선거는 뻘짓이 아니었어. 그건 혁명이었어. 그래 선거가 혁명이 되게끔, 나는 뻘짓을 계속하자. 아주 느르고 더딘 혁명일지라도. 아 근데, 4년 후 진보신당, 혹은 하나된 진보세력이 조금은 활개를 폈으면 좋겠다는 좀 빠른 혁명의 메세지라도 있었으면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