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그러니까 14일) 눈길주기를 써놓고 나니 알라딘 배너창이 나를 심하게 유혹한다. 아 글쎄 박노자의 신간이 나왔단다. 이름하여 "만감일기". 그리하야, 어제는 유난히 많았지만, 오늘은 딱 하나, 이 책만 눈길준다.

[인문/칼럼]
박노자, 『박노자의 만감일기』, 인물과사상사, 2008.
부제가 '나, 너, 우리, 그리고 경계를 넘어'이다. 나는 전에 박노자를 두고 경계인이라고 명명한 바 있다. 그 경계에서 그 경계를 구획짓고 있는 우리들에게 그 경계를 이젠 뛰어넘어야 한다고 아무리 말해도, 도무지 들어먹지 않는 마당에, 제목도 걸죽히 한국틱한 '만감'이다. 박노자의 그 교차하는 '만감'이 무엇인지 함께 엿보는 것은 우리에겐 즐거움, 혹은 행복이다.
알라딘 상품 소개 페이지에 있는 출판사 책 소개와 목차를 옮겨온다.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박노자의 새로운 얼굴
사적 번뇌의 벽을 넘어 더 넓은 소통의 세계를 꿈꾼다
‘노르웨이의 한국인’ ‘우리 시대의 반항아’ 박노자는 궁금하다. 대체 어째서 인터넷의 악플들은 사라지지 않는 건지, 한국에서 유난히 ‘거절하기’가 어려운 이유는 뭔지, 가난한 사람들이 보수에 표를 몰아주고, 경제만 살리면 다 괜찮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뭔지……. 그런 궁금증을 박노자는 ‘번뇌’라고 부른다. 그간 인터넷 블로그에 쓴 그의 일기들은 이러한 ‘번뇌’의 흔적이며, <박노자의 만감일기>는 바로 그 흔적을 모은, 최초의 사적 기록이다.
<박노자의 만감일기>에는 개인과 가정, 역사와 사회에 대한 사적인 그러나 동시에 너무나 사회적일 수밖에 없는 궁금증과 생각이 담겨 있다. 그간 너무 민감해서 혹은 너무 개인적이라서 신문, 학술지에서는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이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단상에서 아이를 키우는 부모의 걱정, 민족주의와 국가, 폭력과 사회변혁에 대한 염려까지, 다양한 소재와 분야를 넘나드는 그의 고민들은, 때로는 학자적 통찰을 담아, 때로는 평범한 한 사람의 입장에서 진술된다. 많은 것들을 생각하고 염려하는 그의 글을 읽다 보면, 누군가의 일기를 들춰볼 때 느껴지는 은근한 즐거움과 함께 미처 보지 못했던 많은 것들에 대한 넓은 관심을 공유하게 될 것이다.
목차
일기를 쓰는 의미에 대하여: 번뇌가 깊어지면 ‘꽃’이 핀다
1부 나를 넘어
조국애란 무엇인가 | 타향살이, 불안의 일상화 | 거절의 미학 | 부처님 오신 날 | 절망을 느끼는 순간 | 너무 쉽게 망각된 그들, 고려대 출교자 | 자리가 사람을 명예롭게 만든다? | 학문의 의미, 미국의 아시아 학회에서 돌아와서 | 종교적 심성을 갖게 된 계기 | 근대적 ‘민중’에 대한 생각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선생, 그리고 군인과 아이 | 노르웨이 직장의 송년회 | 성욕과 종교에 대한 짧은 생각 | 등수 없는 학교의 추억 | “코리안 호스티스가 필요하세요?” | ‘친절’이라는 국제자본주의체제의 코드 | 불만과 불안의 수위, 그리고 우리들의 미래 | 우리들의 중독(들) | 마광수 교수의 연구실을 보고 | 인권, 아직 오지 않은 ‘근대’ | 자본주의는 인간의 본성인가 | 권위주의 사회엔 권위가 없다 | <효자동 이발사>와 지배?복종의 심리 | 군 폭력 관련 보도를 보고
2부 우리를 넘어
한국 유학생들의 핸디캡 | ‘테러리스트’는 욕인가? | <겨울연가> 열풍, 그렇게 자랑스럽기만 한가? | ‘악플’의 문화 | 한국 자본주의 미래 비관 | KTX 여승무원의 단식을 보며 | 여행잡감, 영어를 못(안)하는 유럽 | 포섭, 감옥보다 더 무서운…… | 유사 성행위와 유사 신앙행위 | 한국의 자유주의, ‘말의 잔치’ | 보수가 표를 얻는 비결? | 전교조 죽이기, 골프 버금가는 한국 지배계급의 취미 | 아니, ‘백인’이 뭐가 좋다고 이러는가? | 대학 신문을 보다 눈물 흘리다 | 아이를 키우면서 생각한다 | 내가 현실정치를 평생 못할 이유 | NL파 세력이 유지되는 이유 | 한국사 교과서를 쓰면서 역사 속의 선악을 생각하다 | 숫자놀이의 무의미함에 대해서 | 내가 방효유 선생을 내심 좋아하지 않는 이유 | ‘삼성관’에서 회의를 해본 느낌 | 제 손으로 제 무덤파기, 과잉성 혹은 예방성 폭력 | 강정구 선생 유죄 판결, 혹은 절망의 시간 | 우리가 도대체 그때 노무현에게 왜 기대를 걸었을까? | ‘바람직한 우익’, 한국에서 가능할까?
3부 국가와 민족을 넘어
‘민족주의자’를 포용하는 방법 | 희망과 절망 사이, 북한 학자들과의 ‘만남’ | 사회주의자가 ‘예수쟁이’ 구출에 사활을 걸어야 할 이유 | 국기에 대한 쓴웃음 | 통일, 디스토피아의 그림자 | 한국 사랑? | ‘일심회’ 판결 유감 | 의사 폴러첸의 강의를 갔다 와서 | 귀화인도 ‘한국인’인가? | ‘노무현’에 대한 가장 위험한 착각 | ‘국민’, 해체되지 않는…… | 미국의 주요 일간지가 전하는 북한의 ‘진짜 의도’ | 김일성 대학 기숙사의 국제 사랑 이야기 | 황장엽의 회고록을 읽다가…… | ‘그들’의 ‘민족’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 | 북한 인권 문제를 생각한다 | ‘반미’보다 차라리 ‘반미제’ | 역사학자들이 파업을 벌인다면? | 극단주의는 왜 위험한가 | 남이 하면 ‘우경화’, 우리가 하면? | 김영남, 그리고 ‘일본인 납치’ 문제 | 월드컵, 스포츠, 그리고 국가 | 우리는 그들과 얼마나 다른가? | 북한은 과연 ‘깡패 국가’일까? | 불교는 평화의 종교? | 위안부 문제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
4부 경계를 넘어
러시아의 ‘인간 사냥’ | 악의 일상성에 대한 명상 | ‘고향 방문’의 슬픈 회상 | 노르웨이 국치일 | 발이 빠지기 쉬운 징검다리 | 원칙을 배반한 타협의 결과 | 일본 잡감 | 일본공산당원이 서대문 감옥을 둘러보는 심정? | ‘진짜 사회주의’? 슬랴프니코프와 트로츠키 | 배울 것만 배우자 | 노르웨이 사회보장제도에 대한 오해 | 사담 후세인과 서구인들의 인종주의 | 러시아에 스킨헤드라는 망종이 생긴 까닭 | ‘주니어 제국주의자’들의 발흥 조짐? | 우리가 영어에 매달리는 이유 | 후쿠오카 단상, 의아한 평화 | 성개방과 보수성의 관계? | 일본공산당을 생각한다 | 트로츠키 아이러니 | 모리타 어민의 죽음 | 다민족 국가 미국의 진일보한 인재등용책 | 미 제국이 몰락해버린다면……? | 언어를 빼앗긴 자의 언어, 프랑스 무슬림 청년들의 봉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