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소설가 하근찬 선생의 별세 소식을 접하고 다소간 황망했다. 우리 민족의 근현대사의 고난과 아픔을 하근찬 만큼이나 리얼하게 그려낸 이는 드물다. 그 역사의 아픔이 우리에게 잊혀지지 않고 오랜 기억으로 남게 하는 것은 그의 작품이 우리에게 항상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에게 무척 친숙한(?) 소설가 중의 하나다. 중학교에서는 그의 「흰종이수염」을 배우고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는 십중팔구 「수난이대」를 읽는다. 가족의 사랑과 고난이 역사적 수난의 아픔과 이어져 우리를 엄숙한 슬픔으로 인도하는 그의 작품은 그렇게 우리 가까이에 있었고, 그렇기에 하근찬도 늘 우리 옆에 있었다. 그렇게 있을 줄만 알았던 소설가 하근찬은 어느날 우리에게 부고를 전하고는 멀리 떠났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하근찬 선생의 별세를 전하는 기사가 여럿 있으나 한국일보 박래부 논설위원의 조사를 옮겨온다. 더불어 소설가 하근찬의 약력을 간단히 옮긴다. 하근찬의 소설을 다시 한 번 읽는 것이 그에 대한 가장 최상의 추모가 아닐까 한다.

[지평선] 작가 하근찬 / 박래부 한국일보 논설위원실장

일제 때 징용으로 끌려가 사고로 왼쪽 팔을 잃은 박만도는 아침부터 설렌다. 삼대 독자인 아들 진수가 6ㆍ25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오는 날이기 때문이다.

 한 가지 걱정되는 것은 아들이 병원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기차에서 내린 아들은 한쪽 다리가 잘려진 모습이었다. 부자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 내린다. 오는 길에 아들은 "부자가 이래 가지고는 어찌 사느냐"고 한탄한다. 그러나 만도는 "앉아서 하는 일은 네가 하고, 나다니며 하는 일은 내가 하면 된다"고 위로한다.

외나무다리에 이르러 한 팔이 없는 만도는 다리 없는 아들을 업고 용케 몸을 가누며 건너간다. 작가 하근찬의 데뷔 소설 <수난이대(受難二代)>의 줄거리다.

▦ 1999년 이병헌전도연이 출연하여 잔잔한 감동을 주었던 <내 마음의 풍금>이라는 영화가 있다. 강원도 산속 오지의 늦깎이 여자 초등학생 홍연 앞에 어느날 '남자'가 나타난다.
사범학교를 갓 졸업하고 처음 부임한 총각 선생님이다. 홍연은 지나는 길에 우연히 자신을 '아가씨'로 불러준 선생님에게 운명적인 첫사랑을 느낀다. 천리 만큼이나 멀리 떨어진 남녀 사제 간의 사이는, 여러 에피소드와 우여곡절을 거치며 조금씩 좁아져 간다.

▦ 여러 세대가 공감한 영화 <내 마음의 풍금>의 원작 역시 하근찬의 소설 <여제자>다. 순진할 뿐인 아버지와 아들이 비정한 역사의 진행 속에 엄청난 수난을 당하는 내용의 <수난이대>와 역시 순진한 소녀가 겪는 첫사랑의 아름다운 승리를 그린 <내 마음의 풍금>은 모두, 우리에게 익숙하고 정겹고 궁벽한 농촌을 무대로 하고 있다.

그러나 하근찬은 순진한 인물을 낭만적으로 그리되, 사회 구조 속에서 그들이 겪는 민족적 비극이나 사회의 병리 현상을 날카롭게 부각시키고 있다.

▦ 원로 소설가 하근찬씨가 25일 향년 76세로 타계했다. 그는 자신이 주변에서 보고 느낀, 개인적인 동시에 역사적인 삶을 애정과 객관성을 가지고 묘사한 정통적 소설가였다. 역사 속에 명멸한, 늘 수난을 겪는 용렬하리만큼 착한 사람들을 감싸 안은 작가였다.

그는 데뷔작 <수난이대>가 대표작으로 꼽히는 한계도 있으나, 문단의 평가도 좋았고 문학상도 많이 받았다. 그의 타계가 특히 안타까운 것은 문학에서도 자기 영역을 공들여 지키는 이가 드문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근찬(河瑾燦, 1931. 10. 21 ~ 2007. 11. 25) - 한국 소설가

가난한 농촌을 무대로 서민들의 애환과 민족적 비극을 그려냈다. 1948년 전주사범학교를 중퇴하고 몇 년 간 교사로 근무하다가 1954년 부산대학교 토목과에 입학, 1957년 중퇴했다. 군복무를 마친 뒤 교육자료사·대한교육연합회 등에서 일했으며, 1969년부터 글쓰기에 전념하고 있다. 1955년 〈신태양〉 주최 전국학생문예작품 공모에 〈혈육〉, 1956년 〈교육주보〉 주최 교육소설 공모에 〈메뚜기〉, 1957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수난2대〉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수난2대〉는 일제강점기에 징용으로 끌려가 외팔이가 된 아버지가 6·25전쟁에 참전했다가 다리 하나를 잃은 아들을 맞이하는 이야기로 전쟁에 의한 2대의 수난을 그렸다. 그가 쓴 대부분의 작품은 서민들의 애환과 민족적 비극을 다루고 있으며 이를 제재별로 나누면, 6·25전쟁을 제재로 한 〈흰 종이 수염〉(사상계, 1959. 10)·〈야호〉(신동아, 1970, 1971. 12) 등, 일제 말기를 배경으로 한 〈족제비〉(월간문학, 1970. 1)·〈산에 들에〉(현대문학, 1981. 11~1983. 8) 등, 일상 체험을 다룬 〈서울 개구리〉(문학사상, 1973. 12) 등이 있다. 이중 대표작으로 평가되는 〈야호〉는 태평양전쟁과 6·25전쟁에 희생된 한 여인의 수난 이야기이다. 소설집으로 〈흰 종이 수염〉(1976)·〈월례소전〉(1978)·〈화가 남궁씨의 수염〉(1988) 등이 있고, 1970년 한국문학상, 1983년 조연현문학상, 1984년 요산문학상, 1988년 유주현문학상 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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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술 2007-11-28 2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른 78년 말띠생이라 77 뱀띠들이랑 같이 학교 다녔는데 중학교 때 흰 종이 수염 배운 적 없는데요. 제 동생이 님이랑 같은 79년생인데 동생 국어책 본 적 있는데 제가 쓰던 국어책이랑 같았거든요. 요즘은 어떤 지 몰라도 그 땐 중학교 국어 교과서는 하나 뿐이었던 걸로 아는데. 어쩌면 79년생이 중2나 중3이 됐을 때 국어교과서가 제가 쓰던 거에서 바뀌었는지도 모르겠군요. 동생 국어책 봤던 때가 제가 중3, 동생이 중1이었을 때니까.

멜기세덱 2007-11-28 2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저랑은 같은 교과서로 공부하셨답니다. 제가 5차교육과정의 마지막이거든요. 흰종이수염은 현재 중학교 국어교과서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일단 여기서 세대차 확 드러나죠...ㅋㅋ

심술 2007-11-29 1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요새" 중학교 교과서에 흰 종이 수염이 수록돼 있군요. 세월 무서워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