漢字의 올바른 인식을 위하여
安秉禧(서울대학교 명예교수)
우리가 가용하는 漢字를 '중국글자'라 부르는 사람이 간혹 있다. 우리나라 글자인 한글과 대비하려는 뜻이 숨겨져 있다. 나아가 한자를 混用하자는 사람을 중국에 빌붙는 非愛國者로 치부하려는 含意가 내포된 용어이다. 그러나 나라 사이의 문물교류를 생각한다면, 더욱이 우리나라 한자의 특수성을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이 용어가 적절하지 않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우리 현대생활의 대표적인 의식주를 비롯하여 그 밖의 문물제도에 대하여 그 原籍의 나라 이름으로 부른다면 큰 망발이 될 것이다. 한자를 중국글자라고 하는 일도 똑같이 망발에 속한다.
중국글자라 하지 못하는 근거는 우리나라 한자 안에 존재한다. 한자의 三要素에 形音義가 있다. 可視的인 글자의 꼴을 字形, 글자가 나타내는 發音을 字音, 글자의 뜻을 字義라 하는데, 모든 한자는 이 三要素를 갖추고 있다. 表音文字가 形音의 두 要素만을 가진 것과 대립된다. 이들 三要素를 우리나라, 중국과 일본에서 사용되는 한자에서 살피면 공통되는 점도 있지만 차이나는 것도 있다. 字形과 字義는 대체로 공통된다. 오늘날 標準字體가 中國에서는 簡體字로 되고 日本에서는 많은 略字로 되어 있으나, 간체자나 略字의 기본은 이른바 繁體字나 正字라고 하는 우리나라의 標準字體이다. 따라서 字形의 공통성은 인정된다. 字義도 똑같다. 나라에 따른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대부분의 한자는 세 나라에서 같은 뜻으로 사용된다. 그런데 字音은 세 나라가 확연히 다르다. 일찍부터 언급되는 사실이지만 '韓國'을 '한국'으로 발음하는 일은 우리나라에서만 허용된다. 극히 일부 한자의 발음이 같을 수는 있으나 우리나라 한자의 거의 대부분은 독특한 발음을 지닌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나라 한자를 중국글자로 부르지 못하는 근거가 된다.
우리나라 한자학습은 《千字文》과 같은 蒙學書로 행해져 왔다. 책을 펼치면 大字로 된 한자가 있다. 韓石峯과 같은 名筆이 쓴 한자로 字形을 익히면서 習字도 하고, 그 아래 한글로 된 '하늘 천'과 같이 한자의 뜻과 발음을 공부한다. 그리하여 '天'이란 한자의 形音義를 익히는 것이다. 《千字文》은 16세기 후반에 비로소 나타나지만 이러한 학습법은 훨씬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자료가 없으나 아마도 한글 창제 훨씬 이전부터 있은 것으로 추측된다. 字形을 보이지 못하는 한글로나 口頭로 한자를 가리키게 되는 경우에 '뜻+발음'이란 묶음이 한자의 이름으로 사용된 역사가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15세기 후반의 醫學書諺解에 《救急方》과 《救急簡易方》이 있다. 前者는 國漢混用이나 後者는 한글만으로 번역되었다. 두 책에는 환자의 혓바닥에 漢字 '鬼'를 쓰라는 方文이 똑같이 수록되었는데, 前者는 '혀에 鬼ㅅ字를 쓰고'(권 상, 16)로 되었으나 後者는 '혀 위에 귓것 귀짜를 쓰고'(권 1, 49)로 되어 대조적이다. 前者는 國漢混用으로 '鬼'의 字形을 보일 수 있으나 後者는 字形을 보일 수 없어서 '귓것+귀'(여기의 '귓것'은 雜鬼란 뜻이다)란 한자의 이름을 보인 것이다. 이러한 방법은 口頭로 말할 경우에도 같다. 필자도 어렸을 적에 이름의 글자를 묻는 어른 앞에서 같은 묶음의 이름으로 대답한 경험이 있다. 이 묶음은 오랜 학습에서 굳어진 한자의 이름이다. 그런데 이 '뜻+발음'이란 이 이름은 우리나라 한자만이 가진 특징이다. 이 이름으로 부르는 글자가 어떻게 중국글자인가?
더욱 중요한 사실은 우리나라 한자 중에는 우리나라에서만 사용되거나 독특한 뜻으로 사용되는 글자가 있다. 이른바 韓國俗字가 존재한다. 일본에도 그 나름의 俗字가 있으나 전혀 다르다. 娚妹, 田沓, 垈地, 媤家, 黑太' 등등의 '娚, 沓, 垈, 媤, 太'가 우리의 俗字다. 이러한 한자는 古文書는 말할 것도 없고 實錄과 같은 史書에도 빈번하게 사용되어 있다. 이들 俗字까지 통틀어서 중국글자라 할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다. 이들 한자가 우리나라의 글자라 할 수 없다면, 우리나라의 특수한 한자라 하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점들로 우리나라 한자는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 된다.
그러나 동양 세 나라의 한자는 공통되는 성격이 많다. 서구문물의 東漸으로 일본에서 일어난 한자폐지론이 다른 나라로 번져 간 사실이 그것을 말한다. 한자의 부정적인 측면이 사실 이상으로 강조된 점까지 같다. 그러나 한자가 이들 세 나라의 문화 발전에 남긴 불후의 功績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무수한 중국 고전이나 우리 고전을 들지 않더라도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록된 《朝鮮王朝實錄》과 《訓民正音(解例本)》(한글이 아니라 한글을 한문으로 설명한 책)이 우리에게 문화민족으로서의 긍지를 가지게 한 사실로써 충분히 인정된다.
그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큰 효용을 가진 문자다. 한자는 경제대국인 일본과 중국의 常用文字이고, 그 언어에는 우리와 공통되는 많은 漢字語가 있다. 이들 한자와 한자어는 세 나라 사이의 문화교류나 經濟交易에서 사회간접자본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지난 연말 경제5단체 대표가 각 단체 新入社員 채용에서 한자시험을 치르기로 하고 회원사의 채용 시험에도 이를 권장하기로 하였다는 보도는 바로 그 기능을 인정한 일이다. 이러한 사실에서도 우리는 한자에 대한 올바른 認識이 있어야 할 것이다. 편협한 애국주의는 우리의 시야를 가리는 帳幕일 수 있다. 역사의 이해를 위할 뿐 아니라 미래의 발전을 위하여도 止揚되어야 할 태도이다.
<전통문화> 2007년 가을호, 9~1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