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語文隨想]
"'한글' 創制 전에는 어느 나라 말을 썼나요?"
우리 학교 편입생 面接試驗을 치를 때마다 내가 즐겨서 던지는 質問이 있다. "世宗大王이 한글을 만들기 전에는 우리 민족은 어느 나라 말을 썼을까요?" 그 질문을 면접시험 문제로 추가하게 된 데는 背景이 있다.
평소에 가깝게 지내는 어느 學者와 대화하던 어느 날이었다. 이른바 一流 大學을 나오고 博士學位까지 받은 그분이 아주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물었다. "세종대왕께서 한글을 創制하시기 전에는 우리는 어느 나라 말을 썼지요?" 나는 너무도 놀라 그 질문의 내용을 다시 확인했다. 혹시 내가 잘못 듣지는 않았나 해서였다. 하지만 그분의 질문은 確實했다. 그분은 세종대왕이 만든 것이 바로 우리말(國語)이라 알고 있었고, 따라서 세종대왕이 우리말을 만들기 전에는 말이 없었던 것은 아닌지, 있었다면 어느 나라 말을 썼는지 이 점이 궁금해서 내게 물은 것이었다. 아주 심각하게.
세상에, 박사이며 교수인 분도 한글과 국어를 混同할 수 있구나! 國語敎育에 문제가 있구나! 그 후로부터 나는 시험 때 이 질문을 종종 한다. 지난번 수시면접 때도 물었더니, 세종대왕이 만든 게 우리말이라고 自信 있게 대답하기에 설명해 주었다.
周知하듯, 우리말은 세종대왕 이전부터 있었다. 다만 우리말을 적는 文字가 없어 漢字를 빌어다 적었고, 세종대왕께서 우리 글자인 한글을 만들어 우리말을 소리 나는 대로 적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세종대왕이 만든 것은 우리 글자인 한글이지 우리말은 아니다. 정확히 말해서 한글은 國文과도 다르다. 한글은 英語의 'A B C D' 같은 알파벳이다. 'ㄱ ㄴ ㄷ ㄹ ㅏ ㅑ ㅓ ㅕ' 같은 우리 알파벳을 運用해 우리의 입말(국어)을 적어 놓은 결과물은 國文이다. A, B, C, D를 운용해서 영국인의 입말을 적은 것이 英文이고, 한자를 활용하여 작문해 놓은 것이 漢文이듯 말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우리말, 즉 국어는 한글로 表記할 수도 있고 漢字로도 로마자로도 표기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영어를 한글을 이용해 표기할 수 있다. 실제로 요즘 자기네 固有 文字가 없는 種族에게 우리 한글을 가르쳐서 자기네 말을 적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운동이 펼쳐지고 있기도 하다. 한글이 얼마나 優秀한지, 자음 모음 몇 가지만 補完하면 대부분의 音價를 다 적을 수 있다. 예컨대 脣輕音(순경음) 'ㅸ'같은 것을 되살리면 有聲音 'ㅂ'의 표기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국제음성기호로는 90여 개 소리밖에 못 적는데 우리 字母音을 활용하면 120여 개의 발음과 억양과 聲까지 적을 수 있다니 분명히 자랑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한글'과 '韓國語(우리말)'를 혼동해서는 안 될 일이다. '알파벳'을 '英語'로, '한자'를 '中國語'로, '가나(假名)'를 '日本語'로 혼동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런데도 우리 학교의 그 학자만이 아니라, 평소에는 물론 한글날 무렵이면 "한글의 危機", "영어를 잘하려면 한글부터 잘해야" 이런 말들이 신문과 방송에 반드시 등장해 매년 필자의 귀를 괴롭게 한다. 하도 괴로워 최근에는 아예 이 문제를 논문으로 썼다. 그 정도를 알아보기 위해 고등학생, 국어 교사, 국문과 강사와 교수를 대상으로 설문 조사해 보니 정말 심각하였다. '한글'은 '우리 글자(문자)라고 남북한 國語辭典에서 분명하게 規定하고 있는데도 學生의 58%, 敎師 29%, 敎授 및 講師의 24%가 '한글'의 개념을 '우리말'로까지 認識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이에 더욱 용기를 얻고 개탄하는 마음으로 '한글을 한국어의 의미로까지 쓰는 것은 誤用'이란 주장을 담아 이 논문을 어느 학회에 투고했더니만 審査委員 중의 한 사람이 '揭載不可' 판정을 내렸다. 그 이유가 내게는 너무도 충격적이었다. "誤用이 아니다. 文脈에 따라 한글을 한국어로 쓸 수 있다. 따라서 게재 불가"라는 것이었다. 국문과 교수(국어학자) 중에서도 이 두 어휘를 혼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하게 해주어 놀랍기만 하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을까? 왜 국어학자까지 '한글'과 '한국어'를 같은 말로 쓰는 세상이 되었을까? 그 原因으로 몇 가지를 생각할 수 있겠는데, 가장 源泉的인 것은 '訓民正音', '正音' 같은 원래의 漢字語 명칭을 그대로 쓰거나 '國字', '韓字' 같은 명칭을 썼더라면 괜찮았을 텐데, '한글'이라는 새 명칭을 만들어 내면서부터 문제가 생겼다고 본다. '글'과 '글자'는 엄연히 다른 것인데, '한글'이라 하여 글자의 이름에 '글'이란 말을 붙여 무리하게 造語하다 보니 이상하게 된 것이다. '한글學會'라는 기관명도 이 문제에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朝鮮語學會'가 光復 이후 改名할 때 마땅히 '韓國語學會'라고 했어야 자연스러웠을 텐데, 왜 그랬는지는 몰라도 '한글학회'라 하면서 잘못되었다. '한글학회'라고 기관명을 고쳤다면 '한글(훈민정음)' 연구에만 주력했어야 하지만, 이름은 그렇게 바꾸고 우리말(한국어) 연구와 보급에 주력해 오다보니, 言衆의 뇌리에 不知不識間에 '한글=한국어(우리말)'라는 인식이 계속하여 심어지고 확산되어가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이제부터라도 각급 학교 '國語' 과목 첫 시간에 이 문제부터 확실하게 가르쳐야 하지 않을까? 그러면 '국어(한국어)와 한글'이 어떤 관계인지, 이 지극히 基本的인 문제부터 정확하게 알게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래서 제발 한글날마다 내 귀를 자극하는 誤用 표현들이 사라졌으면 좋겠다.
李福揆 (西京大 敎授)/ <語文生活> 통권 제119호, 2007.10, 4~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