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오전에 눈을 봤습니다. 눈이, 함박눈이 내리더군요. 아침 집을 나서면서 골목길 옆에 주차된 차 지붕위에 얇지만 햐얗게 쌓인 눈을 보고서는 '아, 눈이 왔었네!'란 생각의 아쉬움을 달려주려는 듯, 그렇게 하늘에서 눈이 왔습니다. 올 겨울 들어 저에게는 첫눈입니다. 첫눈 소식은 몇 차례가 있었지만, 제가 깨어있는 공간에, 제 머리 위로 하얗게 소북이 내려 앉는, 그 눈은 오늘이 처음이랍니다.

참 아름답게 내리더군요. 함박눈이었습니다. 눈발이 휘날리는 거셈이 없이, 피부에 전해지는 추위의 싸늘함 없이, 어느 시인이 읊었던 시의 한 구절처럼, 그렇게 따뜻하게 내리는 함박눈이 하늘에서 내려와 지상에 뿌려지는 그 풍경, 그 설경이란 가히 아름다움이었습니다.

제가 일하는 사무실에 앉아 있다가, 소리를 내지 않은 함박눈의 방문을 우연찮게 깨달았습니다. 순간의 비명과 함께 문을 박차고 달려 나갔습니다. 내 머리 위로 싸분히 내려앉는 함박눈은 아쉽게도 쉬 녹아버리더군요. 그래도 그게 어딥니까. 머리가 젖고, 옷이 젖어드는 것도 잊은체, 어린아이, 강아지처럼 주위를 뛰었습니다. 그냥 그대로 였어도 좋아겠습니다. 손바닥을 위로하고 내리는 함박눈을 내려받았습니다. 손 위에 손털처럼 가뿐히 내려앉은 함박눈 한 송이를 냉큼 입에 넣었습니다. 아무 맛도, 별반 차갑지도 않았지만, 내 속 가득히 산뜻해지고 시원해지더군요. 그 모습을 본 친구는 산성비가 어쩌구, 오염이 어쩌구 하더군요. 저라고 그걸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그때는, 저에게는 올 겨울의 첫눈이 그렇게 아름답게 내리는 그 순간에는, 그렇게 해보아야 했던 것이었습니다.

내일 모레에는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있습니다. 많은 친구들이 도서관에 틀어박혀서 시험준비에 여념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도 창밖으로는 그 광경을 보았겠지요. 저는 그들이 조금은 안타깝습니다. 무엇이 되었건간에, 우리가 누려야할 최소한의 낭만은 빼앗아 갈 수 없어야 하는게 아닐까요. 저는 그들이 대학생으로서 충분히 누려야할 낭만을, 푸르고 푸른 청춘의 시간에 가져야할 이상, 그런 것들을 무엇엔가에 이리저리 빼앗겨 버린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이땅의 젊은이들에게 우리 사회는 이런 낭만을 회복시켜 줘야하지 않을까요? 내년이면 가수 김광석이 참 찡하게 불러낸 노래 '서른즈음에'에 제가 딱 걸려버립니다. 그래서인지 더욱 그런 생각들이 드는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저는 대학생이 이제는 아니지만은, 지난 대학생활을 돌아보면 무엇을 했던가의 회의보다는 어떤 낭만이 있었는가의 후회가 더욱 큽니다. 그런 아쉬움들 모두 오늘 제게 보내준 하늘의 함박눈을 맞으며 달래고 또 달랬던 것이지요.

푸념과 체념은 이것으로 족하겠습니다. 그것이 길어지면, 제 삶이 궁구해질테니까요. 이번 겨울은 왠지 예감이 좋습니다. 아무것도 준비되어 있지 않지만, 오늘 내려준 함박눈을 보면서, 그리고 내 머리위에서 사뿐히 내려앉아 녹아버린 그 함박눈이, 제게 그런 기분 좋은 예감을 가능케 합니다.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왼놈이 왼말을 해도" 제 맘 하나 꽉 붙들고 있으면 될 것입니다.

이번 겨울 저에게만은 첫눈인 이 함박눈이 내리는 설경은 내 생애 가장 아름다웠다고 말하지는 못하겠지만, 무엇보다 제게 의미깊게 다가오는 그런 눈이었다고 말하겠습니다. 얼마남지 않은 시험에 제가 아는 모든 사람들이 다 잘 되었으면 좋겠구요, 이 겨울 모든 알라디너가 행복하고 평안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겨울을 인내하여 봄을 기다리지 마시고, 겨울은 그 겨울의 모습 그대로 만나고 즐기시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에 이 겨울은 따뜻할 거라 생각해요. 오늘 이 함박눈처럼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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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6-12-01 1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멜기세덱님의 겨울도 따스하기를 바래요. ^^

이리스 2006-12-02 1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헛, 내년이면 서른 즈음.. 이시군요. ^^;
눈을 보고 이렇게나 좋아하시다니 감성이 풍부하신 분 같아요. 마음이 따뜻해지는 편지 한 통 받은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어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