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 - 미국 인디언 멸망사
디 브라운 지음, 최준석 옮김 / 나무심는사람(이레)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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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서부영화를 보며 인디언을 무찌르는 총잡이 이야기를 친구들과 재밌게 나눈 경험들이 많았다. 그리고 총잡이 흉내를 내며 날이 저물도록 놀았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미국에서의 서부개척의 역사가 인디언들에게는 처절한 멸망사임을 우리들은 모르지 않는다. 이 책은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에 걸쳐 이루어진 미국대륙의 개발과 남북전쟁이후에 본격화된 미국민의 서부 이주와 금광개발 그리고 산업화에 따라 인디언들의 삶터가 빼앗기고 그들의 들소와 먹을 것들을 탈취당하고 대량학살 당하고 한정되고 척박한 땅의 주재소에 내몰리며 땅에서 그들의 자취와 흔적이 사라져갔던 과정을 디 브라운이라는 백인이 진솔하고 자세한 자료들을 들어 실감있게 보여주고 있다.

미국의 역사에서 아주 오랜 기간동안 그들의 전통적 삶의 방식으로 다른 민족을 괴롭히지 않고 평화롭게 자신들의 삶을 영위해온 인디언족들, 그들은 삶과 사물과 자연을 대하는 방식이 서구인들의 과학과 문명에 있지 않았다. 개인주의와 탐욕, 물질주의와 권력주의라는 말도 모르며 공동체의 삶과 자연에 자신의 삶을 조화시키며 살고 있던 그들에게 백인들이란 존재는 자신의 삶의 터전을 빼앗고, 자신들의 양식인 들소들을 무차별 살상하고 심지어는 자신들의 이기심과 탐욕을 채우기 위해 수많은 인디언들을 잔인하게 살상하고 종족을 멸한다. 애초에 인디언들은 그들과 대지와 자연의 산물을 공유하고 마음을 열어 공존하려는 자비의 마음을 갖고 있었으나 정작 힘을 가진 그들은 자신의 욕심만을 자꾸만 채우려고 한다.

그들의 법에는 인디언들이 사람이 아니고 따라서 신성한 그들의 법의 적용대상이 아니다. 또한 진리는 힘을 가진 자의 넋두리라는 말은 애초에 그 곳에서 조상대대로 살아왔고 그들의 삶의 터전을 군대와 개척과 문명이라는 미명하에 탈취하는 과정에서 사실임이 밝혀졌다.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찬란한 서부개척의 역사니 프론티어 정신이니 하는 것들은 단지 미국 백인들의 탐욕 충족 과정을 미화시킨 것에 불과하며 그 이면에 드리워진 그림자 속에는 무수한 인디언의 낭자한 핏자국과 인권의 유린과 대량학살이 있었던 것이다.

이제, 근 현대사에 있어서 미국이란 깡패국가가 아메리카의 많은 국가와 전세계 제3세계국가들에 자본주의 체제를 이식하기 위해 군부독재와 손잡고 저지른 수많은 만행(대량학살, 인종 청소, 불법 테러 등)에 분노해왔듯이, 미국의 성립과정에서 묻혀간 인디언들의 멸망사에 분노하고 그들의 명복을 빌자. 비록 지나가버린 과거이지만 인디언의 멸망사를 바른 관점에서 다루고 미국 백인사를 제대로 평가하는 안목을 갖도록 하자. 그것은 미국의 것이라면 무조건 좋은 것으로 추종하고 배우려고 하는 우리들의 문화사대주의적인 태도를 꾸짖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우리의 고유한 전통문화 중 훌륭하고 좋은 것을 계승하고 재창조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문화적 주체성으로 우리의 앞날을 설계토록 하는 것으로 나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단지 이 책이 우리들의 분노와 공포를 느끼게 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관점에서, 이 책의 끝장을 덮으며 전해오는 전율과 공포를 뒤로한 채, 좀 더 인디언 문화들에 대해 현실의 과학문명에 대한 대안적 요소들을 전해주는 것들이 자세하게 설명되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약간의 아쉬움도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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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경림 시집 창비시선 218
신경림 지음 / 창비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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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김지하의 '화개'와 더불어 시단에서 주목되는 또 하나의 시집이 있는데 바로 이것이다. 한국 시단에서 그를 빼고서 시를 이야기하기엔 뭔가 허전한 신경림 시인의 이 시집은 그의 나이 60대 중반이후에 와서 조금은 더 자연스러워진 그의 언어미학을 접할 수 있는 동시에 그가 가진 삶의 무게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그런 책이다.

80년대의 사회운동의 분위기가 저물어가면서 90년대 들어와서 가볍고도 기술적인 시들이 난잡하게 쓰여지면서 그는 우리 시가 더욱 기교적이고 부자연스럽게 그리고 너무나 가볍게 흘러가고 있다고 경고한다. 역사성이나 현실성의 무게에 짓눌려 시답지 않은 시가 선동적 목적으로 쓰여진 것도 문제라고 한다면 그런 삶의 무게로부터 완전히 무관심해진, 그래서 대중의 저질적 욕구에 추종하는 참을 수 없는 가벼운 시들에 대해서도 경계할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체코의 작가이자 시인인 밀란쿤데라의 시 중 '시인이 된다는 것'이란 시에 보면 이런 말이 있다.

'시인이 된다는 것은
끝까지 가보는 것을 의미하지

행동의 끝까지
희망의 끝까지
열정의 끝까지
절망의 끝까지'

그것은 시가 가진 삶의 신중함과 무게를 인식한 말이라고 생각된다. 사실, 요즘 시들은 너무나도 가벼우면서 가식적인 기교가 섞인 글들이 너무 많다. 그래서인지 언제부터인지 시집을 손에 대는 일이 뜸해졌던 것 같다.

시적 언어란 것이 그 언어를 다루는 자의 삶을 투명하게 비추는 것이 아닐때 그 시는 대중을 감동시킬 수 없다. 비록 우리의 표면의식은 그 언어를 모두 이해하지는 못해도 진실하지 못하다면 우리 속의 참된 존재는 그것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신경림 시인의 말처럼 시는 나무와 같아서 그 아름다움을 아는 사람들에겐 그 참모습을 드러내는 법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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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다른 길
존 브룸필드 지음, 박영준 옮김 / 양문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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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오늘날의 문명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현실과 존재를 인식하는 방법으로 '과학'과 '문명'이라는 편협한 방법 외에 문명화된 짧은 역사 뒤에 자리잡은 무수하게 긴 인류의 '전통'과 '공생'의 방법을 통한 역사를 우리에게 제시한다. 서구사회에 의한 전 지구적인 근대화과정은 진보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에 존재하고 있던 토착민과 원주민의 역사를 파괴하는 과정 속에서 탄생하였고, 그것은 '인간에 의한 자연 지배'라는 기치아래 오만한 인간을 위한 모든 생명체와 자연의 파괴라는 결과를 초래했다.

하지만 이러한 문명화과정이 결국은 인간의 생존을 다시 되돌아보게 함으로써 세상과 존재를 인식하는 도구로서의 과학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게 되었으며 우주라는 공간 속에서 인류만을 위한 자연파괴가 과연 정당한가 하는 물음을 던지게 하였다. 특히 잃어버린 인류의 오래된 역사에서 모든 생명체는 자아를 갖고 있고 그것은 인류와 의사소통이 가능한 체계를 갖고 있는데 오직 인류가 자신의 오만함으로 인해 잃어버린 감각으로 해서 의사소통이 불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인간문명에 대한 비판적 시각으로 전통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이러한 숨겨진 능력을 찾아내는 방법을 알게 된 이들도 있다는 것을 이 책은 보여준다.

인간이 가진 의식과 마음의 위대함은 그것이 절대우주와 연결되어 있음으로 해서 생긴다. 자신의 신체에 주의를 기울이고 내면의 자아에 집중함으로써 신체에 아픈 곳을 찾아내고 치유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자연과 하나라는 느낌을 가질 수도 있다. 그리고 오래전 잃어버린 자신의 숨겨진 능력(예지력, 투시력, 자연 치유력 등)들을 되찾을 수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우리들의 능력을 되찾고 우주를 우아하고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 인간의 방종함에 대해 깊이 반성할 수 있는 침묵의 시간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제 이미 인류는 과학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수 있다는 환상에 의문을 가지기 시작했다. 또한 과학적 지식의 결과 인류자신뿐만 아니라 자연과 전 우주에 낳은 재앙들에 대해 자각하기 시작했다. 문명의 속도가 빨랐던 국가의 여러 학자들이 자신들이 파괴한 제 3세계의 토착문화와 원주민의 의식문화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이러한 추세는 급속도로 확산되어 가고 있다.

인간이 자연과 더불어 조화롭게 공존하고 우리의 잃어버린 원주민의 역사를 되찾고자 하는 노력은 바로 존재인식의 방법으로서 과학이 가진 편협성을 극복하고 인간이 잃어버린 능력을 되찾아 온 우주에 사랑의 기운을 불어넣어 이 곳에 바로 낙원을 건설하는 것이며 그것은 우리의 잃어버린 역사를 계속 이어가는 것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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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사람들 서문문고 6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 서문당 / 199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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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또예프스키의 처녀작이자 출세작인 이 작품은 그가 처음으로 관심을 같게 된 민중의 삶을 편지형식의 글을 통해 아주 훌륭하게 문학적으로 승화시킨 글이다. 고아인데다가 가난하고 몸이 약한 처녀 카레린과 그를 지켜주고 사랑과 연민을 아낌없이 주는 40대 중반의 하급 관리 마카르와의 애절하고도 순박한 사랑이야기가 우리들로 하여금 눈시울을 적시게 한다.

카레린의 몸의 약화와 궁핍을 극복하기 위해 마카르가 자신의 재산과 생존을 포기하면서까지 그녀에게 쏟는 헌신은 돈이 있는 부자가 가난한 자들에게 베푸는 적선과는 차원이 다르다. 저자는 이 작품을 통해 가난한 사람들이 과연 무엇때문에 이렇게 가난해야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과연 그들의 잘못인지 묻고 있다. 가난 그 자체는 그 가난을 짊어진 사람에게 아무런 잘못도 묻지 아니하나 사람들은 그 가난에 대해 잘못을 묻고 그 가난을 짊어진 사람들을 경시하고 무시한다. 가난하기 때문에 당해야 하는 설움들과 생존의 위협과 짓밟히는 인간의 존엄성이 이렇게 적나라하게 보여질 수 있다니....

가난은 사람의 마음까지도 병들게 하고 가난한 사람의 마음을 타락시키기도 한다. 가난은 사람들에게 마음의 여유를 앗아가고 그 사람을 속물근성으로 가득 차게 만들고 사람을 그 사람이 가진 돈에 의해 평가하게 한다. 결국엔 카레린마저 돈 때문에 자신의 진정한 연인이자 벗인 마카르를 떠나는 모습은 과연 가난이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게끔 한다.

가난 그 자체가 무슨 죄가 될까만은 가난 그 자체가 죄가 되고 따라서 가난한 사람들은 사회의 쓰레기취급을 받아야 하는 현실, 이 가난때문에 세상에 가장 중요한 가치인 사랑과 믿음마저도 저버리게 되는 현실, 물론 몸은 떠나도 사랑은 마카르에게서 떠나가지 않고 카레린의 가슴 속에 남아 있지만, 결국엔 마카르는 사랑의 교류를 하지 못하고 절망속에서 죽어가야 할 운명을 맞게 되지 않는가?

가난한 사람들에겐 사랑도 그 실현도 주어지지 못하는 안타까운 현실은 어쩌면 물질주의를 사는 현대 사회의 유형화된 모습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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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개 실천문학 시집선(실천시선) 141
김지하 지음 / 실천문학사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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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김지하의 5-6년간의 시적 작업의 중단과 국토 대순례를 통해 여러 명산대찰을 찾아 여행길에 오른 후에 나온 작품이다. 어느듯 60이 훌쩍 넘어버린 그의 오랜 공백기간 후에 내보인 이 시집은 그가 드디어 깨닫게 된 인생의 의미들이 글이란 옷을 입고 우리 앞에 나타난다.

'아내에게'라는 외로움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되고 그리고 자신이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외로움이 아닌 외로움의 의미를 깨우친 것이라고 말한다. '나그네'에서는 '길 너머 저편에 아무것도 없다'고 하여 자신이 걸어온 인생의 외로움과 그로 인한 허무함을 말하는 듯 들린다. 하지만 '내 고향은 길 끝없는 하얀길'에서 이미 아무것도 없었던 인생의 길 그 자체가 의미있는 존재가 되며 이는 아무것도 없어보이는 '무'라는 것이 존재가 있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그 무엇이 되고 있는 듯하다. '길가에 한 송이 씀바귀 피었다'에서는 이러한 것이 더욱 확연해져서 저편에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 결국엔 씀바귀가 피었다로써 결국엔 존재의 빈 공간을 채워주는 반드시 필요한 존재인 무의 본질에 대해 말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결국 그의 아무것도 없다는 꽃이 피다라는 말의 花開로서 무가 새로운 것이 있음이라는 깨달음으로 귀결되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의 생명사상이 이젠 보다 인생의 의미에 다가가고 있고 따라서 더욱 깊은 성찰의 내용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이 시집에 담긴 몇몇의 글들은 읽고 또 읽어도 의미가 새롭고 더욱 그 내용이 좋아짐을 느낄 수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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