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하다 죽어라 - 눈 푸른 외국인 출가 수행자들이 던지는 인생의 화두
현각.무량 외 지음, 청아.류시화 옮김 / 조화로운삶(위즈덤하우스)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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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 하늘은 왜 파란가? 보고 듣고 말하고 밥먹고 배출하고 느끼고 하는 이것은 무엇인가? 세상에는 두 가지의 사람이 있다.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생사의 문제를 해결한 사람과 해결하지 못한 사람. 더 말할 것도 없다. 나는 생사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그러니...숙제일 밖에...

 

  그런데 어떻게 하면 공부할 수 있나? 세상엔 여러 가지 공부방법이 있고 종교에 따라 종파에 따라 다양한 공부의 길이 있다. 그러나 그 모든 종교가 가리키는 곳이 진리라면 비록 겉모습은 다를지라도 그들이 가리키는 본래 진리는 하나다. 그런데 어떻게 그 곳에 닿는 인연을 만들 것이며 어떻게 그 곳에 닿는 공부인연을 지어갈 것인가?

 

  나는 오래 전 간화선의 공부방법에 조금의 인연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헛된 짓을 하며 한 세월을 보냈다. 이제야 비로소 공부란 무엇인가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니 공부인연이란 참으로 귀하고 귀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루 하루 목숨바쳐 공부해야 하고 하루하루 간절해야 하고 매 순간 순간 큰 분심으로 온몸으로 부딪히며 시절인연을 기다려야 한다.

 

  화두는 활구로 공부해야 하는데 그 활구란 것이 한 순간의 의지와 노력으로 일구어지는 밭이 아니다. 꾸준히 늘 새로운 마음으로 시절인연을 쌓아가야 비로소 화두를 들려는 의지나 노력없이 온 몸이 화두가 되는 경험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 때 비로소 '화두를 든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공부하다 죽어라'는 말도 나는 이렇게 들린다. 목숨을 걸어놓고 공부하라는 말로도 가슴에 담을 수 있지만 진정한 '화두를 드는'인연에 나아가 한 걸음도 물러서지 말고 불퇴전의 의지로 죽음을 무릅쓰고 나아가 진리의 관문을 통과하라는 의미 말이다. 올바른 공부의 방향을 모르고 허송세월한 지 오랜 시간이 흘렀다. 이제 더 돌이킬 수 없는 인생의 시절이 도래했고 더 늦기 전에 진리에 도달하여 남의 말 앵무새처럼 따라 외우지 말고 스스로 진리의 허기짐을 채우고 스스로 세상에 진리의 생기를 불어넣어 부처님처럼 세상에 나와 더불어 도움되는 사람이 되는 것이 내 공부의 종점이다.

 

  공부하다가 죽어버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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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곡 최순우, 한국미의 순례자 - 한국의 미를 세계 속에 꽃피운 최순우의 삶과 우리 국보 이야기
이충렬 지음 / 김영사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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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 한 연못이 있다. 달은 하늘 위에도 있고 연못 속에도 있다. 연못 속의 달은 하늘 위에 뜬 달이 있기에 가능하다. 옛 사람들의 삶과 그들이 추구한 이상과 멋이 있기에 그 삶의 흔적이 남아 지금을 사는 우리들의 가슴에도 그 멋을 전염시킨다. 언제였던가? 그림에 반해 멋모르고 그림을 사들였던 때가...그 인연으로 내 집엔 수십 점의 이야기가 생겼다. 수십 점의 아름다움이 생겼다. 더불어 그 아름다움에 끌려 수십 권의 우리 문화재와 골동품, 미술품에 관한 책도 생기게 되었다. 한 곳을 향한 마음은 그 주변에 비슷한 것을 끌어들이는 힘이 있다. 나의 생활 속에 자리잡은 그림과 잡동사니와 책 속에는 우리 문화와 예술품에 대한 미의식을 가졌고 멋을 가진 발굴자들의 인생이 있었고 또 거슬러 올라가 그런 멋과 미를 즐기며 살았던 선현들이 있었다.

 

  대중매체를 보면 한국의 위상이 높아져가는 것을 느낀다. 반도체 부분과 조선업계, 특허 및 신기술, IT기술과 자동차 가전제품 등에서 세계를 주도해가는 한국인의 자긍심의 또 다른 측면에서는 한국 5000년의 예술과 미의식 및 문화에 있어서의 자긍심이 있고 한국인의 뿌리깊은 역사와 전통 그리고 창조적이고 독창적인 예술품이 하늘에 뜬 달처럼 현실에서의 경제와 한국의 리더쉽을 이끄는 정신적 밑바탕이 된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어쩌면 일본과 미국, 선진 유럽에 정신적으로 뒤지지 않는 자긍심과 우월감이 세계 최강의 전자업계 일본도 세계최고의 경제력과 군사력을 가진 미국도 오랜 전통 속에 민주주의와 문화의 꽃을 피워왔던 유럽에게도 뒤지지 않고 세상을 선도해내는 창의력을 발휘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되는 것이다.

 

  그 세계 속으로 우리 문화의 자존심을 세계화시킨 분이 혜곡 선생님이다. 아주 오래 전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라는 책에서 처음 뵈었고 '나는 내 것이 아름답다'라는 책에서 두 번 째 뵈었다. 그리고 이 책을 통해 세 번 째 뵙게 된다. 그의 전기적 성격의 책으로서는 처음으로... 우리 문화재의 발굴과 체계화와 정리 또 문화사와 예술사에서 뻥 뚫린 부분들에 대한 고고학적이고도 예술사적인 연구로 한국미술사 5000년을 발굴해낸 선구자이며 한국 근대 미술사의 선구자라고 할 우현 고유섭 선생님과 간송 전형필 선생님을 스승으로 끊없는 자기 계발과 연구 노력 정성 그리고 한국미의 순례자로서 혜곡 선생님의 삶의 의미는 크다.

 

  일제 치하에서부터 한국전쟁 그리고 군부쿠데타 등의 역사적 격동기를 겪어오면서 오로지 한국 문화재에 대한 애정과 책임감으로 온 마음과 열정을 다 바쳤던 혜곡 선생님이 없었더라면 우리 미술사는 분명 수십년은 더욱 늦게 빛을 보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니 앞을 내다보고 우리 예술품의 중요성을 미리 알고 준비하고 대처하는 그의 혜안이 없었더라면 우리 한국 자긍심을 살려된 미술품의 많은 것들이 전쟁의 포화 속에 사라졌거나 이데올로기의 총알 속에 가루가 되었을 것이었다. 또한 세계 전시회를 통해 한국미의 독창성과 고품격을 외부세계에 알림과 동시에 우리 국민에게도 내부적인 자긍심을 고취시키려는 노력이 없었다면 그 적은 예산과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우리 문화재를 굳건하게 지켜나갔던 사명감이 없었던들....지금 우리가 누리는 예술적 우월감은 어느 빛이 들지 않는 땅 속에서 깊은 잠을 자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탐욕과 전쟁의 포화속에 한 줌 먼지로 날아가버렸을런지도 모른다. 고려청자, 조선의 백자, 석탑과 불상, 우리의 그림과 생활상을 보여주는 여러 유물이 그의 심미안과 혜안 속에서 시대와 역사와 의미의 질서를 가지고 우리들 앞에 온전한 모습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이 책에서 새롭게 보게 된 달 항아리의 아름다움과 조선의 분청사기, 백자의 아름다움, 그리고 고려시대 청자기와의 독창성 등 새롭게 눈여겨 본 일들과 우리의 아름다움을 보아내고 글로써 다듬어내는 선생님의 심미안이 내내 부러웠다. 적어도 우리 미술의 아름다움에 무지함을 드러내지 않게 어느 박물관에 들어서더라도 눈여겨 유물과 유적을 대하고 그림과 도자기 예술품을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그 미술품 속에서 멋과 아름다움을 볼 줄 아는 눈이 있어야 함을 절감한다. 이런 분들의 원이 있었기에 우리의 중요한 미술품과 보물들이 지금까지 우리 국민들에게 남아 민족의 자긍심과 심미안을 열어주고 있어 고맙고 또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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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을 위하여 - 우리 인문학의 자긍심
강신주 지음 / 천년의상상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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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시였다.

시의 정체성을 끝없이 찾아간 홀로

자신의 삶을 살기위해 벼랑 끝에서 항상 몸을 던진

진정한 시를 구성하는 언어를 찾아

게으름과 안정의 욕망을 버린

우리 나라 인문정신의 꽃이었다.

시대의 총칼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깨우친 삶과 내면의 뻘밭에서 피워올린

연꽃이었다.

 

스스로의 팽이로 온전히 돌아가기 위해서

또 다른 팽이를 방들여서는 안되기에 그는

일체의 주의와 집단과 데마고그를

거부하며 오롯이

스스로여야만 했다.

자신을 새롭게 발견해야만

비로소 제 돌아감으로 서있는

팽이가 될 수 있다는

제 진리에 닿기까지

그는 지치지 않는 무소였다.

 

침묵의 한 걸음 앞에 놓인 시

언어의 고통 아닌 그 이전의 고통을

온몸으로 부딪히며 부딪히며

삶의 진흙창에서 걷어올린

자유의 언어로서만

스스로 감동하는 시가 되기에

그는 타고난 시인이었고

그는 시였다.

 

그의 시는

나의 삶에

유효하다.

바로 지금.

 

강신주 님을 통해

김수영을 새롭게 만나니

이 정도 책이면

남부러울 것 없는

그만의 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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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견문록 - 에디오피아에서 브라질까지 어느 커피광이 5대륙을 누비며 쓴 커피의 문화사
스튜어트 리 앨런 지음, 이창신 옮김 / 이마고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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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느 아침 처럼 물이 끓는다. 나는 예멘의 '마타리'커피를 내린다. 일반 원두 커피처럼 쌉싸름한 맛이 없는 예멘 커피는 달짝지근한 맛에 커피의 깊은 향이 코끝을 스친다. 초코렛 향인지 옅은 한약재 향인지 고소하면서도 단 듯한 커피향에 오감이 또렷해진다. 불과 몇 년 사이 한국은 커피의 제국으로 바뀌었다. 일회용 커피에서 내려먹는 원두커피집까지 동네마다 몇 개씩 생겨나고 이제 아침을 커피와 함께 시작하는 문화는 이 곳에서도 이미 시작되었다.

 

  아라비카의 고장 에티오피아 하레르

  지금으로부터 1500~2000년 전 세계에서 가장 먼저 커피를 좋아한 유목민 오로모족이 케파왕국에 살았다. 이들은 커피를 부수어 기름과 섞은 뒤에 골프공만한 크기로 둥글게 만들어 먹었다. 이들은 전투를 벌이기 전에 이 커피를 먹었다. 이들이 바로 전쟁에서 포로로 잡혀 들어온 하레르 지역에 커피를 들여온 부족이었다. 비교적 낮은 지대인 케파의 거대한 커피 밀림에서 자라는 원두는 수천년 전 콩고 밀림에서 자생했다고 추정되는 동그랗고 거친 로부스타이고 하레르에서 자라는 커피는 원두가 길쭉하고 아라비카처럼 향이 풍부하다. 따라서 우리가 원두커피점에서 만나는 맛과 향이 좋은 커피는 대부분 아라비카로 아프리카 일부 지역과 브라질에서 생산된다.

 

  악마의 유혹인가? 신의 선물인가?

이슬람 신비주의자인 수피교도는 커피를 종교의식에 이용한 대표적 집단으로 이들에게 커피는 정신적 도취감을 일으켜 신과 소통하게 하는 도구였다. 커피는 영적 세계로 들어가는 관문으로 의식용 빨간 잔에 커피를 돌려마시며 궁극적 대상인 신과 초자연적 일체감을 형성하는 의미를 가진다. 중세 수피교도 신비주의자 루미가 빨간 옷을 입고 끊임없이 빙글빙글 돌아가며 추는 춤을 나는 어딘가에서 보았다. 반면에 다른 이슬람교도나 기독교에서는 커피를 악마의 음료로 규정해서 엄격히 금지했다. 이슬람 성지인 메카에서 1511년 커피를 금지하였다. 포도주와 같이 사람을 흥분시킨다는 이유와 예배 전 커피잔을 돌리는 수피교도의 행위는 술마시는 행위를 연상시킨다는 이유 그리고 커피를 '탄화'될 때까지 볶는데 이는 코란에서 금지한 행위였기 때문이다.

 

 최고급 커피 원숭이 똥 커피, 사향고양이 커피

  19세기 인도에서는 커피를 따는 원숭이를 조련하는 곳이 있었고 이 원숭이는 나무에서 열매를 따서 먹는데 여기서 채취한 커피를 멍키커피라고 불렀다. 원숭이는 아주 잘 익은 좋은 열매만을 따서 먹고 내장에서 화학반응을 일으키며 독특한 향을 낸다고도 했다.

  인도네시아의 야행성을 좋아하는 사향고양이는 야자주 주조에 쓰이는 자연 알코올이 포함된 수액과 신선한 커피 열매를 먹고 산다. 이 고양이의 장액이 커피에 특별한 향을 첨가해서 그런지 아니면 고양이가 잘 익은 열매만 골라먹어서 그런지 모르지만 사향고양이의 배설물은 잘 닦아내면 세계 최고의 커피라고 많은 사람들이 입을 모은다. 현재 이 커피는 일본이 대부분 소비하지만 미국기업 M.P 마운타노스가 '코피 루와크'라는 이름으로 1파운드(450그램)당 300 달러에 판매하면서 세계에서 가장 비싼 커피가 되었다. 레이븐즈 브루 커피에서는 이 커피를 판매하면서 티를 나누어 주는데 티셔츠에는 엉덩이 밑에 컵을 놓고 열심히 볼 일을 보는 사향고양이 그림과 함께 '마지막 한 방울까지 최고의 품질을'이라는 문구가 새겨 있다.

 

  커피의 눈물, 브라질

  오로모 전사들이 노예가 되어 하레르에 커피를 들여온 것처럼 커피는 노예제와 깊은 관계를 가진다. 남아메리카 커피 플랜테이션은 노예 노동력의 수요를 창출했고 이런 현상은 아프리카와 신대륙의 눈물의 역사를 만들어냈다. 노예 수입의 양적인 측면에서 보면 브라질이 단연 으뜸이다. 지난 200년 동안 아프리카에서 노예 약 300만 명이 개인이 운영하는 커피왕국에 동원되었다. 그 외에도 약 500만 명이 설탕 플랜테이션에 노예로 징발되었다. 이런 노예 노동의 착취 속에 오늘날 브라질 인구 상위 10퍼센트가 전체 부의 54퍼센트를 소유하고 노예의 직계 후손들은 오늘날에도 문맹률과 빈곤율이 높고 빈민굴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그들은 족쇄를 차고 하루 14시간 이상의 살인적인 노동환경에 처해졌으며 살인, 강간 등의 인권적 유린을 견뎌내야만 했다.

 

  맛없는 미국 커피로 세계의 입맛을 사로잡은 스타벅스 커피

  미국은 서양에서는 처음으로 국가의 탄생과 더불어 카페인에 전적으로 맛을 들인 나라이다. 보스턴 차 사건을 계기로 미국은 커피를 본격적으로 마시는 커피제국이 되었다. 그러면서도 한 번도 제대로 된 커피 제조법이 없는 나라이기도 하였다. 그래서인지 1800년대 들어와 남북전쟁이 일어날 당시 군용커피로 찬 물에 풀어먹는 인스턴트 커피를 만들어냈고 이 커피는 세계 2차 대전 후에도 사람들 사이에 퍼져갔고 1960년이 되기까지 인스턴트 커피는 미국 커피의 3분의 1 이상을 차지했고 1971년 스타벅스 커피가 만들어졌다. 스타벅스 커피는 처음엔 원두를 판매하는 곳이었지만 점차 집이나 직장에 대한 생각을 잊고 쉬는 장소와 결합된 신개념 판매로 사람들의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다시 모카향이라고 할까 한약향이라 할까 부드럽고도 진한 커피 향이 얼굴에 퍼진다. 커피가 만들어지기까지의 노예노동을 생각하면 커피의 맛과 향을 느끼기에 앞서 가슴의 아픔이 함께 한다. 그리고 커피의 탄생과정에 얼룩진 그들의 눈물을 생각하게 한다. 하지만 갓 볶은 원두의 맛과 향 그리고 기분좋은 자극과 각성의 효과를 가진 커피 한 잔이 내 눈 앞에 놓여진 일을 집중하게도 하고 또 이슬람 신비주의자들이 했던 것처럼 신과의 일체감으로 향한 마음의 길을 걸을 수도 있게 한다. 또 중세 사람들이 느꼈던 것처럼 최음제로서의 역할도 한다.(적어도 커피 광고에서만큼은 말이다.)

그렇다면 선택의 길은 당신 앞에도 있다. 악마의 유혹인가? 신의 선물인가? 당신의 어떤 커피를 마시고 싶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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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란 무엇인가 - 예일대 17년 연속 최고의 명강의 삶을 위한 인문학 시리즈 1
셸리 케이건 지음, 박세연 옮김 / 엘도라도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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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이란 무거운 주제이다. 특히 자신의 죽음이나 자신이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에 있어서는 그렇다. 이 죽음이라는 주제를 통해 샐리 케이건 교수는 보다 세밀하고 이성적으로 의문을 던지라고 조언한다. 죽음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죽음 이후에는 과연 영혼이라는 존재가 있어서 죽음을 경험하는 주체가 있는지 아니면 육체적인 죽음을 맞이함으로써 우리의 모든 것은 끝이나는 것인지...또한 나를 나이게 하는 정체성은 어디에 있는지...어제의 나는 지금의 나라고 할 수 있는지...마찬가지로 지금의 나는 가치관과 성격과 육체가 완전히 바뀌어버린 30년 후의 나와 같다고 할 수 있는지...등 등 죽음에 대한 정밀하고도 주어진 문제에 대한 새로운 물음으로 자신의 삶을 보다 지혜롭게 들여다보기를 원한다.

 

  그가 안내해주는 주제를 따라가다보면 그의 의문이나 전제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던지 그의 논리나 서술방식이 때로는 나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는 때도 있다. 하지만 그가 어떤 결론을 미리 내려 놓고서 자신의 주장을 사람들에게 설득하는 데 고집하지 않고 사람들이 자신의 논의와 서술을 따라 각자의 의문을 던지고 생각해볼 것을 권한다는 점에서는 정직한 학자라고 보여진다. 또한 때로는 불필요하고 의미없어 보이는 그의 논리전개방식도 사유를 전개해가는 방식으로서는 배울 점이 많다고 생각하게 된다. 나이와 상관없이 그는 학자이다.

 

  결국 죽음이라는 문제는 삶과 죽음 전체를 바라보는 지혜가 필요하고 또 삶과 생명이라는 주제에 대해 경험적인 깨달음을 필요로 하는 주제이기 때문에 학문적인 접근이 가져다 줄 수 있는 한계는 이미 그가 갖고 있다. 즉 죽음을 바라보는 그는 삶의 한 가운데서 죽음을 사유하기 때문에 사유로는 알 수 없는 죽음 이후의 세계나 죽음을 경험하는 사람들의 경험을 지금의 과학으로는 해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삶과 죽음에 대한 종교적 통찰은 이미 오래 전부터 많은 것을 이야기해 왔다. 그런 종교적 가르침이 오래전부터 자명한 사실조차도 사유적 논리로 판단을 내리는 부분은 별로 그의 말에 신뢰가 가지 않았고 읽는 재미도 없었다. 하지만 종교적 가르침이라고 해도 내 경험적 깨달음에 의해 알지 못한 지혜에 대해서는 그의 사유가 내 진리를 찾아가는 채찍은 될 수 있었다. 내 삶의 진리나 화두를 들기 위한 회초리 말이다.

 

  논리를 파고 들면서 한 주제에 대해 결론은 내리는 일은 양파의 껍질을 까는 것과도 같다. 한 껍질을 벗기면 또 다른 껍질이 나타나고 또 한 껍질을 벗기면 또 다른 껍질을 만나게 된다. 그렇게 해서 세밀하고 정밀하게 한 논리에서 더 깊은 논리로 들어가면 결국에는 정확하게 결론내릴 수 없는 텅빈 공간을 만나게 되는 점에 있어서도 똑같다. 삶은 죽음을 통해 보아야 더욱 지혜롭게 영위할 수 있고 또한 죽음은 삶을 통찰하는 지혜를 가져야 제대로 준비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내 마음이 경험하는 것이고 또한 내 마음이 창조해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자살은 괜찮은 것인가? 아니면 모든 자살은 나쁜 것인가? 타살은 상대방 동의없이 타인의 생명을 빼앗는 것이라면 자살은 피해자 자신의 동의를 얻고 있다는 점에서 사회적 해악은 적지 않은가? 그런데 피해자 자신이 느끼기에 죽음보다 못한 삶이거나 죽음이외에 다른 대안이 없을 때 선택하는 자살을 무조건 나쁘다고만 할 수 있을까? 이런 문제에서조차 인간과 생명에 대한 깊은 통찰이 결여된 논리적인 사유만으로는 올바른 방향을 세울 수 없다고 생각한다. 특히 죽음 이전과 죽음 이후의 행복을 공리주의적으로 비교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단 말인가? 또한 과연 비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인가? 저자도 스스로의 논리전개에서 모순에 빠져들 수 밖에 없는 사유의 공간, 사유의 블랙홀이 생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세이건 교수는 물리주의자로서 죽음 이후의 영혼의 경험을 부정한다. 따라서 죽음 이후의 어떤 것도 의미가 없다고 본다.

 

  이제 그의 사유를 따라가다가 나는 그의 사유의 길로부터 벗어난다. 나는 내 오솔길을 따라 간다. 삶과 죽음에 대한 보다 지혜로운 길은 내 삶을 더욱 밝게 해주고 또 내 마음을 더욱 넓게 하고 또 늘 공부의 길을 제시하는 길이다. 그 길은 내 스스로의 삶을 비춰주고 또 밝게 하기 때문에 스스로의 아는 마음이 이를 안다. 달리 말이 필요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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