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셔널리즘과 젠더 - 비판총서 3
우에노 치즈코 지음 | 이선이 옮김 / 박종철출판사 / 1999년 12월
구판절판


이야기에 대한 물음은 언제나 이중성을 갖고 있다. 누가 이야기하는가라는 이야기하는 사람의 문제와 누구를 향해 이야기하는가라는 듣는 사람의 문제이다. ‘피해자’의 ‘증언’을 누가 듣는 것인가. 듣는 귀가 없으면 아무도 그것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누구를 향해 이야기하는가라는 물음을 제기했을 때 이야기narrative는 이야기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공동 작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야기하는 사람은 같은 이야기를 녹음기처럼 반복하는 토킹 북talking book[맹인을 위해 책의 내용을 녹음한 테이프]이 아니다.
그렇기는커녕 지금까지의 오럴 히스토리 연구를 보면 약자 입장에 놓인 사람은 강자인 듣는 사람이 듣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 경향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야기 현장 또한 권력이 행사되는 임상 실험장이다. 약자의 이야기는 단 한 줄기로 구성되지 않는다. 종종 지배적인 이야기를 뒷받침하거나 보완하는 식의 이야기가 생겨나면 듣는 사람은 ‘현실’이 오로지 하나라고 착각한다. ‘또 하나의 현실’은 약자의 이야기 안에 있는 주저와 모순, 비일관성의 한복판에서 갈기갈기 찢긴 단편으로 나타난다. 여성사에서 이러한 오럴 히스토리의 비일관성이야말로 ‘지배적인 현실’에 균열을 나타내는 결정적인 것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듣는 사람은 뒤섞여 얽힌 이야기 현장에서 민감해야 한다. 그리고 이야기가 일관성 있는 이야기로 짜여졌다면 듣는 사람 또한 임상적인 현장에서 ‘상호 작용’하고 있는 것이 된다.-181쪽쪽

‘나’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은 젠더나 국적, 직업, 지위, 인종, 문화, 에스니시티 등 각양각색으로 존재하는 관계성의 집합이다. ‘나’는 그 어느 것도 피할 수 없지만 그 어느 하나만으로도 환원되지 않는다. ‘내’가 거절하는 것은 단일 카테고리의 특권화나 본질화이다. -205쪽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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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아이 2006-01-22 2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님/그렇군요... 저도 독자층을 넓히고 싶은데, 그래도 기반이 되는 독자층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달라서 말이지요. 메일 주소는 부탁드려요. ㅠ.ㅠ 그리고, 고마워요.

숨은아이 2006-01-25 1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님/감사 감사!!
 
내셔널리즘과 젠더 - 비판총서 3
우에노 치즈코 지음 | 이선이 옮김 / 박종철출판사 / 1999년 12월
구판절판


‘공’문서란 ‘관(官)’에서 사태를 어떻게 ‘관리’했는가를 나타내는 자료이다. 그 유무를 물어 공문서가 없는 한 ‘사실’ 증명은 불가능하다는 것은 ‘치자(治者)’ 입장으로 동일화된 것이 아니면 무엇인가.-159쪽쪽

당사자의 현실에서 벗어나 어떤 역사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제3자의 입장에서 ‘판정’할 수 있다는 생각은 실증 사학자들의 교만이다.
(중략)
‘문서 사료’란 권위에 의해 정통화된 사료, 지배 권력측 사료의 다른 이름이다. 지배 권력측이 자기의 범죄를 인멸하거나 정당화해야 할 만한 동기가 있다는 점에서 이 사료의 ‘신빙성’ 또한 물어야 할 것이다. -161쪽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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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에노 치즈코 지음 | 이선이 옮김 / 박종철출판사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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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코사카 마코토는 ‘남자는 그것을 참지 못한다’고 하는 식의 ‘남성 신화’를 비판해, 남성의 권력 지배를 과시하기 위해 강간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특히 전시 강간은 그러한 복수성(윤간)에 특징이 있으며 약자에 대한 공격을 통해 연대 의식을 확립하기 위한 ‘의식(儀式)’이라고 논한다. 사실 전시 강간이 종종 ‘관객’이 있는 곳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병사의 공격이 특히 여성의 성으로 향하는 것은 그것이 ‘적’ 남성에 대한 가장 상징적인 모욕이며 자기 힘의 과시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강간’은 상대국 남성에게 격렬한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효과가 있는 것이다.-114쪽쪽

강제나 임의에 관계없이 ‘매춘’은 여성과 남성 사이의 ‘성과 금전의 교환’이 아니다. 성 산업으로서 ‘매매춘(賣買春)’은 파는 사람(업자나 경영자, 대개 남성)과 사는 사람(인 남성)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교환 행위이며, 거기서 여성은 교환 주체=당사자agent가 아니라 단지 객체=상품에 지나지 않는다. 상품에게는 손님을 선택할 권리가 없다.
(중략) ‘매춘’ 패러다임은 패러다임 자체 속에 여성의 ‘주체성’을 함의함으로써 남성을 면책하는 견해이다. (중략) ‘매춘’ 패러다임은 본인의 ‘의사’를 문제시한다는 점에서 여성의 자기 결정권을 인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매춘부’와 그 밖의 여성 사이를 나누는 ‘성의 이중 기준’을 떠받친다는 점에서 가부장제 코드의 변이라 할 수 있다.-119-120쪽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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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셔널리즘과 젠더 - 비판총서 3
우에노 치즈코 지음 | 이선이 옮김 / 박종철출판사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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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과거의 잔재’, 즉 좀처럼 불식되지 않는 ‘유산’은 종종 ‘전통’이나 ‘민족성’이라는 말로 불리며, 그리하여 비역사적인 것으로 바뀌어 버린다. ‘전통’이란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매직 카테고리, 카테고리의 블랙박스로서 ‘발명’된 것이다.-7쪽쪽

앤더슨의 용어를 빌리면 ‘국민 국가’는 균질적인 ‘국민’ 창출을 통해 ‘환상의 공동성’을 만들어 내며 그렇게 만들어진 ‘집단 정체성’은 ‘문화’나 ‘민족’ 개념의 핵심이다. 이 미완의 ‘국민화’ 프로젝트로부터 우리는 지금도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다.-13쪽쪽

우연히 ‘인권 선언’으로 번역되고 있는 프랑스 혁명의 ‘인권 선언 les droits de l'homme et du citoyen’은 글자 그대로 ‘남자 homme’ 및 ‘시민 citoyen’의 권리에 지나지 않는다. 이 ‘남자’와 ‘시민’에는 여성과 노동자가 배제되었다. 그러한 권리를 누리려면 ‘문명화 civiliser’된 ‘공민(公民)’의 자격이 필요했던 것이다.
따라서 ‘인권’은 항상 어디까지가 ‘인간’의 범위인가라는 ‘경계의 정의’를 수반한다. (중략) 그리고 ‘경계의 재정의’를 둘러싸고 언제나 ‘2류 시민’들 사이에서는 누가 먼저 ‘문명화’되어야 하는가를 둘러싼 경쟁이 있다. -18-19쪽쪽

카테고리가 ‘이것이 아니면 저것’이라는 배타성을 지난 곳에서는 이러한 억압이 반드시 생겨난다. 그리고 ‘국민’이란 그러한 ‘배타적’인 카테고리의 전형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한 배타성을 더욱 가시화시킨 것이 전쟁이다. ‘국민’은 반드시 한 ‘국가’에 배타적으로 귀속할 것을 강요당한다. 이중 국적자나 적도 아군도 아닌,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존재는 인정받지 못한다.-91쪽쪽

성별 불문 전략은 언뜻 평등을 이룬 것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서 생산과 전투를 짊어진 여성들은 ‘공적 영역’이 남성성을 기준으로 정의되어 있는 한 ‘이류 노동력’, ‘이류 전사’가 되는 것에 만족해야 한다.-93쪽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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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셔널리즘과 젠더 - 비판총서 3
우에노 치즈코 지음 | 이선이 옮김 / 박종철출판사 / 1999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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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전인가, 아는 사람한테서 “정신대 할머니들 일본 대사관 앞에서 시위하는 것도 문제 있는 거 아냐? 어쨌든 한국정부가 일본정부에게서 배상을 받아버렸으니 한국정부한테 가서 시위를 해야지” 하는 말을 들었다. 그때는 그 말이 옳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왜 옳지 않은지 명쾌하게 말할 수 없었다.

이 책을 읽은 지금은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첫째, 국가가 언제나 개인을 대표할 수 있는가. 한국정부가 1960년대에 일본정부와 조약을 맺고 배상금을 받아냈다고 해도, 그것은 국가 대 국가의 협상이다. 일본군 ‘위안부’와 일제 징용 노동자들은 피해에 배상받을 권리를 국가에 위임한 바 없다. 당시 한국정부 역시 이들의 존재 자체도 의식하지 않았다. 둘째, 일본군 위안부였던 할머니들은 돈을 받는 게 목적이 아니다. 돈이 목적이라면 일본정부가 창설한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에게서 돈을 받을 것이다. (실제로 이 기금의 돈을 받은 할머니도 있다고 한다. 그것은 그분의 선택이니, 제삼자가 왈가왈부할 일은 아닐 것이다. 어쨌거나 일본 대사관 앞에서 매주 수요일 시위를 하시는 할머니들은 이 정체가 모호한 돈을 받기를 거부한다.) 이분들은 국가권력과 군대가 ‘감시’하며 ‘강제노동’을 시켜, 한 여성의 인생에 크나큰 피해를 입힌 점에 대해 국가권력이 책임지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한국인이 국익과 자신의 이익을 동일시하고, 국가와 자신의 정체성을 동일시하며, 자신을 가리켜 ‘국민’이라고 표현한다. 60년 전의 '국민'은 일본 군대에 자원해서 전쟁에 참여하는 것이 옳았다. 식민지 백성도 차별을 받지 않으려면 국민으로 인정받아야 하지 않았겠는가? 인정을 받으려면 국민으로서 기여를 해야 한다. 이로써 일본의 근대 페미니스트들이(심지어 조선의 여성 지식인들까지) 왜 제국주의 전쟁에 앞장서 찬동했는지가 설명된다. 근대 페미니스트들은 국가의 사업에 적극 참여하고 기여함으로써 여성도 ‘국민’으로서 인정받기를 바랐다. 곧 ‘여성의 국민화’가 운동의 목표였다. 여성뿐 아니라 조선의 남성 지식인들이 전쟁 참여를 격려했던 이유도 설명이 된다. 일제의 압박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식민지 백성은 2류 국민이었다. ‘식민지 조선인의 국민화’가 이들의 목표였을 것이다. 

‘순결한 조선 여성을 일제가 유린했다’는 인식은 어떠한가? 첫째, 순결하지 않으면 성 폭력을 당해도 괜찮은가? 둘째, 전쟁기에 생계를 위해 자발적으로 선택했던 사람들은 감시하에 강제 성노동을 해도 괜찮은가? 셋째, 일본군 위안부 중에 소수 포함되었던 필리핀이나 일본, 서양 여성의 경우는 조선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무시해도 좋은가?

가부장제 패러다임은 여성의 주체성을 부정하고, 여성에 대한 성적 인권 침해를 가부장제하에서 남성 간에 벌어지는 재산권 싸움으로 환원한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피해자에게 ‘침묵’을 강요해 온 ‘이중 범죄’의 원인이다. (중략) 여기서는 여성의 ‘정조’란 남성 재산의 하나로서, 그 재산권 침해에 대해 한일 양국의 가부장제 사이에서 이해가 계산되어 이야기되었을 뿐, 여성의 인격이나 존엄은 조금도 고려되지 않았다.

자기 민족 여자는 자기 것이며 그 여자가 다른 민족에게 능욕당하는 것은 ‘남자의 명예’를 더럽히는 것이라는 전제가 만약 한국과 일본의 남성들에게 있다면 그것은 충분히 종군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입을 다물게 하는 압력이 되었을 것이다.

“나는 성 폭력 피해자에게 그 몸을 부끄럽게 여기도록 해 고발을 막는 것은 그 자체가 용서할 수 없는 성 폭력이라고 생각한다”고 에바라는 논한다. (103-105쪽)

지나간 과거라며, 역사적 증거도 불충분하다며 묻어버리려는 이들에게, 이 책의 지은이는 분명히 말한다. 역사는 왜 끊임없이 다시 써야 하는가, 그리고 피해자들은 왜 과거를 이야기해야 하는가를.

권력 관계가 불균형인 곳에서는 강자의 ‘현실’이 지배적인 현실이 되어 소수자에게 ‘상황의 정의’를 강제한다. 그것을 거역해 지배적인 현실을 뒤집어엎는 것과 같은 ‘또 하나의 현실’을 낳는 것은 약자에게는 그 자체가 투쟁이며 지배적인 현실에 의해 부인된 자신을 되찾는 실천인 것이다.(179쪽)

그러므로, 제도 교육과 사회적인 통념에 의해 '국가'에 점령당한 나는, 자신을 되찾기 위해 '소수자의 현실'에 귀 기울이려 한다. 그리고 외치려 한다. "나의 신체와 권리는 국가에 속하지 않는다(20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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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6-01-16 0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훌륭한 리뷰입니다.

호랑녀 2006-01-16 0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과 동감!
저도 이 책을 읽으면 이렇게 똑똑하게 대답할 수 있을까요?
갈수록 논리와는 영 멀어져가는 삶이 두렵습니다, 요즘.

마늘빵 2006-01-16 0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이 참 마음에 들어서 읽었습니다. ^^ 동감

숨은아이 2006-01-16 1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호랑녀님, 아프락사스님 감사감사! 말없이 추천하고 가신 두 분께도 감사!

깍두기 2006-01-16 1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도 추천!
꼭 사볼게요^^
나의 신체와 권리는 국가에 속하지 않는다. 으아~~~~

숨은아이 2006-01-16 2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깍두기님/고맙슴다! 그, 그런데 책이 품절이라는... ㅠ.ㅠ

산사춘 2006-01-17 08: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뜬금없이) 우에노 치즈코 두번쯤 봤어요. 말은 못걸어봤지만... ㅎㅎㅎ

숨은아이 2006-01-17 0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사춘님/오오. *,* 그런데 이 책, 복간하면 사볼 사람 있을까요?

숨은아이 2006-01-17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따우님 덕분에 읽은 책이에요. 따우님한테도 물어봐야지. 이 책 복간하면 사볼 사람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