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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과 저승을 잇는 다리 한국신화 1 - 신화로 만나는 세계 7 한국신화
최원오 지음 / 여름언덕 / 2004년 12월
평점 :
품절
3년 전인가, 한국신화 강좌를 들을 적에 난생처음, 무당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한국신화를 알았다. 기억력이 매우 안 좋은 고로 강의를 통해서만 듣고 흘려버려야 하나 안타까웠는데, 이 책 덕분에 그때 들은 신화를 상당수 다시 새길 수 있었다.
한국신화는 성서의 창세기나 그리스 신화처럼 한 줄기 체계나 계보로 정리되어 있지 않고, 지역마다 다르기도 하기 때문에, 한 편 한 편 재미있게 읽을 수는 있되 그 전체를 꿰뚫는 어떤 맥락을 파악하기는 어렵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내가 신화나 어원, 고고학 따위에 관심 있는 것은, 어떤 생각이나 사실을 사람이 어떻게 해냈을까 알아냈을까 궁금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땅과 하늘을, 세상을 어떻게 파악하기 시작했을까. 지금은 당연하게 여기는 물질을 세계를 처음 만났을 때, 사람은 어떻게 그것을 이해하기 시작했을까.
한국신화에서 어떤 일관된 세계관을 뽑아내기는 어렵지만, 창세 신화라 할 수 있는 관북 지방의 석가 미륵 신화(미륵이 세상을 만들어 내는데 석가가 내기를 제안, 속임수로 세상을 빼앗는다)나 제주의 대별왕 소별왕 신화를 보면, 세상은 ‘살기 힘든’ 곳이다. 왜냐하면 석가와 소별왕이 속임수를 써가지고 순리를 따른 미륵과 대별왕에게서 세상을 빼앗았기 때문에, “인간 세상에는 살인 역적이 많을 것이다. 도둑도 많을 것이다. 남자는 열다섯 살이 되면 자기 아내는 놓아두고 남의 아내를 엿보는 자가 많을 것이다. 여자도 열다섯 살이 되면 자기 남편 놓아두고 남의 남편 엿보는 자가 많을 것이다.” 이승은 그러하고, 대신 대별왕이 차지한 “저승법은 맑고 청랑”하다.(36쪽)
그렇지만 부자가 되어 죄를 짓고 벌을 받는 일이 왕왕 있는데, 부자가 되어 이렇게 하는 것이 바로 죄다.
벼는 썩어서 두엄이 되게 하고, 쌀은 썩어서 재가 되게 하고, 돈은 녹이 슬게 하고, 옷은 썩어서 거름이 되게 하고, ...... 걸인이 오면 식은 밥덩이를 여기저기 던져 주었다.(68-69쪽, 사마장자 이야기에서)
벼, 쌀, 돈, 옷이 남아나서 썩게 하는 게 바로 부자의 첫째가는 죄였던 게다. 그리고 거지에게 밥을 주더라도 곱게 주지 않고 여기저기 던져 주면 그게 죄였다. 이 구절에서 나는 가장 큰 감동을 받았다. 벼, 쌀, 돈, 옷이 남아나면 썩게 두지 말고 이웃에 풀어서 돌게 할 일이다.
죄가 그렇다면 공덕은 무엇인가?
깊은 물에 다리를 놓아 주는 월천공덕(越川功德), 절을 지어 주는 위인공덕, 옷 없는 사람 옷 주고 밥 없는 사람 밥 주는 활인공덕, 목마른 사람 물 주는 급수공덕, 그중에 제일은 젖 없는 아기 젖 먹여 기르는 공덕이라 하더이다.(138쪽, 바리데기 이야기에서)
그중에 제일은 젖 없는 아기 젖 먹여 기르는 공덕. 아이를 입양해 정성껏 기르면 그게 가장 큰 공덕인가 보다.
책을 읽다 보면 잘 모를 낱말이 가끔 나오는데, 그만큼 구전으로 이어지는 입말의 세계에서 내가 멀어진 탓도 있고, 또 무가도 노래인지라 의미 없이 음악적인 리듬감을 표현한 탓도 있다. 이를테면 상좌중이 “한침 지른 고깔에 두 귀 누른 장삼을 둘러 입고” 절을 나섰다는 표현이 있는데, ‘한 침 지른 고깔’이나 ‘두 귀 누른 장삼’이 대체 어떻게 만든 고깔이며 장삼이란 말인지? 굳이 해석하자면 한 침에 질러 만든 고깔(바느질 한 번에 뚝딱 지어낸 고깔?)에 두 귀를 눌러 만든 장삼(어떻게 천의 두 귀를 누르면 장삼이 되는지 모르겠다)이란 말일 텐데, 굳이 해석할 필요 없이 그 운율에 맞춰 읽으면 될 듯하다. 한 침 지른 고깔에 두 귀 누른 장삼. 랩으로 불러도 괜찮겠다. ^^
이들 신화는 무당이 굿할 때 읊어짐으로써 전승되었는데, 묘하게도 그 내용 중에 남에게 저주하는 말 속에 “자손 중에 무당이 나고” 하는 구절이 곧잘 나온다. 무가에 무당을 멸시하는 내용이 있다니, (과거에는 어땠을지 몰라도) 근세 이후 무당의 사회적 지위가 얼마나 낮았는가 짐작할 수 있다.
166쪽 이하 잿부기 삼형제 이야기에 나오는 ‘산천 선비’는 앞뒤 맥락을 볼 때 ‘삼천 선비’가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