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셔널리즘과 젠더 - 비판총서 3
우에노 치즈코 지음 | 이선이 옮김 / 박종철출판사 / 1999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몇 달 전인가, 아는 사람한테서 “정신대 할머니들 일본 대사관 앞에서 시위하는 것도 문제 있는 거 아냐? 어쨌든 한국정부가 일본정부에게서 배상을 받아버렸으니 한국정부한테 가서 시위를 해야지” 하는 말을 들었다. 그때는 그 말이 옳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왜 옳지 않은지 명쾌하게 말할 수 없었다.

이 책을 읽은 지금은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첫째, 국가가 언제나 개인을 대표할 수 있는가. 한국정부가 1960년대에 일본정부와 조약을 맺고 배상금을 받아냈다고 해도, 그것은 국가 대 국가의 협상이다. 일본군 ‘위안부’와 일제 징용 노동자들은 피해에 배상받을 권리를 국가에 위임한 바 없다. 당시 한국정부 역시 이들의 존재 자체도 의식하지 않았다. 둘째, 일본군 위안부였던 할머니들은 돈을 받는 게 목적이 아니다. 돈이 목적이라면 일본정부가 창설한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에게서 돈을 받을 것이다. (실제로 이 기금의 돈을 받은 할머니도 있다고 한다. 그것은 그분의 선택이니, 제삼자가 왈가왈부할 일은 아닐 것이다. 어쨌거나 일본 대사관 앞에서 매주 수요일 시위를 하시는 할머니들은 이 정체가 모호한 돈을 받기를 거부한다.) 이분들은 국가권력과 군대가 ‘감시’하며 ‘강제노동’을 시켜, 한 여성의 인생에 크나큰 피해를 입힌 점에 대해 국가권력이 책임지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한국인이 국익과 자신의 이익을 동일시하고, 국가와 자신의 정체성을 동일시하며, 자신을 가리켜 ‘국민’이라고 표현한다. 60년 전의 '국민'은 일본 군대에 자원해서 전쟁에 참여하는 것이 옳았다. 식민지 백성도 차별을 받지 않으려면 국민으로 인정받아야 하지 않았겠는가? 인정을 받으려면 국민으로서 기여를 해야 한다. 이로써 일본의 근대 페미니스트들이(심지어 조선의 여성 지식인들까지) 왜 제국주의 전쟁에 앞장서 찬동했는지가 설명된다. 근대 페미니스트들은 국가의 사업에 적극 참여하고 기여함으로써 여성도 ‘국민’으로서 인정받기를 바랐다. 곧 ‘여성의 국민화’가 운동의 목표였다. 여성뿐 아니라 조선의 남성 지식인들이 전쟁 참여를 격려했던 이유도 설명이 된다. 일제의 압박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식민지 백성은 2류 국민이었다. ‘식민지 조선인의 국민화’가 이들의 목표였을 것이다. 

‘순결한 조선 여성을 일제가 유린했다’는 인식은 어떠한가? 첫째, 순결하지 않으면 성 폭력을 당해도 괜찮은가? 둘째, 전쟁기에 생계를 위해 자발적으로 선택했던 사람들은 감시하에 강제 성노동을 해도 괜찮은가? 셋째, 일본군 위안부 중에 소수 포함되었던 필리핀이나 일본, 서양 여성의 경우는 조선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무시해도 좋은가?

가부장제 패러다임은 여성의 주체성을 부정하고, 여성에 대한 성적 인권 침해를 가부장제하에서 남성 간에 벌어지는 재산권 싸움으로 환원한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피해자에게 ‘침묵’을 강요해 온 ‘이중 범죄’의 원인이다. (중략) 여기서는 여성의 ‘정조’란 남성 재산의 하나로서, 그 재산권 침해에 대해 한일 양국의 가부장제 사이에서 이해가 계산되어 이야기되었을 뿐, 여성의 인격이나 존엄은 조금도 고려되지 않았다.

자기 민족 여자는 자기 것이며 그 여자가 다른 민족에게 능욕당하는 것은 ‘남자의 명예’를 더럽히는 것이라는 전제가 만약 한국과 일본의 남성들에게 있다면 그것은 충분히 종군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입을 다물게 하는 압력이 되었을 것이다.

“나는 성 폭력 피해자에게 그 몸을 부끄럽게 여기도록 해 고발을 막는 것은 그 자체가 용서할 수 없는 성 폭력이라고 생각한다”고 에바라는 논한다. (103-105쪽)

지나간 과거라며, 역사적 증거도 불충분하다며 묻어버리려는 이들에게, 이 책의 지은이는 분명히 말한다. 역사는 왜 끊임없이 다시 써야 하는가, 그리고 피해자들은 왜 과거를 이야기해야 하는가를.

권력 관계가 불균형인 곳에서는 강자의 ‘현실’이 지배적인 현실이 되어 소수자에게 ‘상황의 정의’를 강제한다. 그것을 거역해 지배적인 현실을 뒤집어엎는 것과 같은 ‘또 하나의 현실’을 낳는 것은 약자에게는 그 자체가 투쟁이며 지배적인 현실에 의해 부인된 자신을 되찾는 실천인 것이다.(179쪽)

그러므로, 제도 교육과 사회적인 통념에 의해 '국가'에 점령당한 나는, 자신을 되찾기 위해 '소수자의 현실'에 귀 기울이려 한다. 그리고 외치려 한다. "나의 신체와 권리는 국가에 속하지 않는다(20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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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6-01-16 0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훌륭한 리뷰입니다.

호랑녀 2006-01-16 0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과 동감!
저도 이 책을 읽으면 이렇게 똑똑하게 대답할 수 있을까요?
갈수록 논리와는 영 멀어져가는 삶이 두렵습니다, 요즘.

마늘빵 2006-01-16 0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이 참 마음에 들어서 읽었습니다. ^^ 동감

숨은아이 2006-01-16 1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호랑녀님, 아프락사스님 감사감사! 말없이 추천하고 가신 두 분께도 감사!

깍두기 2006-01-16 1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도 추천!
꼭 사볼게요^^
나의 신체와 권리는 국가에 속하지 않는다. 으아~~~~

숨은아이 2006-01-16 2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깍두기님/고맙슴다! 그, 그런데 책이 품절이라는... ㅠ.ㅠ

산사춘 2006-01-17 08: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뜬금없이) 우에노 치즈코 두번쯤 봤어요. 말은 못걸어봤지만... ㅎㅎㅎ

숨은아이 2006-01-17 0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사춘님/오오. *,* 그런데 이 책, 복간하면 사볼 사람 있을까요?

숨은아이 2006-01-17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따우님 덕분에 읽은 책이에요. 따우님한테도 물어봐야지. 이 책 복간하면 사볼 사람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