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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쿠라노소시
세이쇼나곤 지음, 정순분 옮김 / 갑인공방(갑인미디어) / 2004년 8월
평점 :
품절
편집자가 리뷰를 올리는 게 정당한 일인가 망설였지만, 책 만든 사람의 이야기도 작으나마 쓸모 있는 정보가 될 수 있으리라 믿고, 글을 올립니다.
1. 제목에 관해
제목이 무슨 뜻인지는 책소개를 보면 다 나오니 건너뛰지요. 원제가 枕草子인 이 책의 한국어판 제목은 원래 "침초자"로 할 생각이었습니다. 중국 고전을 현대 중국어 발음을 빌려 읽지 않고 "논어" "장자"라 하듯이, 읽는 이가 받아들이기 쉽게 우리 식 한자음으로 표기하려 한 것이지요. 그런데 이 책을 우리말로 옮기고, 그 문화적 배경에 관해 주석을 단 정순분 선생은 "마쿠라노소시"란 표현을 더 좋아하시더군요. "초자(草子)"를 "책"이란 뜻으로 쓰는 건 일본의 고유 문화인 만큼, 일본식으로 읽어야 한다는 뜻인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백과사전에서도 萬葉集과 같은 일본 고전을 "만요슈"라는 일본식 발음으로 적으니까요...
여기서 의문이 하나 생깁니다. 왜 논어는 논어인데, 만엽집은 만요슈인가? 그건, 공자는 공자인데 풍신수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라 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겠지요. 중국 고전은 우리 조상들의 문화 속에 깊숙이 들어와, 이미 남의 것이 아닌 반면, 일본 것은 그렇지 않다는...
2. 별책부록에 관해
책을 읽다 보면, 어려운 내용은 아닌데, 단지 당시의 옷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라서, 당시 집 안의 구조가 어떤지 몰라서 이해 안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일본의 자료를 뒤져, 그런 부분을 이해할 수 있게 돕는 그림과 사진을 모았습니다. 일본에는 "국어백과" "고대국어사전"이란 이름으로 고대의 역사상(정치사든 생활사든 문화사든)을 잘 정리해놓은 책이 많더군요... 고대 유물과 그림책(會本)을 활용해 유물 사진과 재현 그림 같은 것으로 눈에 잡힐 듯 옛 사람들의 생활을 보여주는 책들... 부러운 일이에요.
그림책, 곧 회본(會本), 그림 두루마리가 풍부하게 남아 있다는 것도 부럽지요. 회본이 뭐냐면, 이를테면 겐지 모노가타리나 이 책, 마쿠라노소시 같은 옛 서책은 모두 그냥 글자로 쓴 것인데, 그걸 후대에 그림으로 표현해놓은 두루마리 책이에요. 하나같이 색색깔로. 그래서 일본 역사학자들은 고대의 생활상을 재현해낼 수 있습니다. 우리의 고대 역사는 기록이 부족해서... 모두 전쟁 탓이겠지요. 일본, 바로 그 나라의 군국주의 탓도...
3. 내용에 관해
이 책의 배경은 헤이안시대의 귀족문화입니다. 당시 시와 노래가 생활과 따로 떨어지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는 대목이 곳곳에 있습니다. 이를테면 눈이 아주 많이 내린 날, 중궁이 이 책의 지은이에게 "향로봉의 눈은 어찌 되었느냐"고 묻자, 지은이는 백거이의 시문 "향로봉의 눈은 발을 들어 올려 보는구나"에 따라, 말없이 격자문을 올리고 발을 높이 말아 올립니다.
독특한 미학을 창출했다는 평가를 받는 책이니만치, 그 운치를 즐기다가도, 귀족 중심 사고방식에 발끈하게 될 때도 있었답니다. 집이 불에 타버려 자비를 구하러 온 하층민을 시로써 놀리는 대목을 읽을 때는, 속으로 욱, 했습니다. 당시 궁중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생활상을 솔직히 드러낸 점을 이해하며 넘어갈 수밖에요. 사실 이 책의 백미는 지은이의 독특한 기지와 재치이고, 현대에 높이 평가하는 부분도 그것이니까요.
4. 교정에 대한 사소한 고백
이건 사소한 이야기지만, 제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기 때문에 고백합니다. 본문에 지은이가 일본의 옛 노래집이나 중국 시문집의 한 구절을 뚝 떼어서 인용한 경우가 많은데요. 당시에 풍류를 즐기는 사람들은 그렇게만 해도 무슨 이야긴지 다 알아들었겠지만, 오늘날의 우리는 밑도 끝도 없이 이 구절이 왜 튀어나오나 싶지요. 그래서 옮긴이가 일일이 각주를 달았어요. 이 구절은 원래 있었던, 이러이러한 노래에서 따온 것이다 하고.
그러다 보니 각주에 따옴표로 노래 원문을 표시하게 됐는데, 원래 노래에는 마침표를 찍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본문에 시나 노래로 나오는 게 아니라, 각주에 인용문을 밝힌 것이니 이 문장이 끝났다는 표시는 해야지요, 하고 옮긴이께 여쭈었더니, 그럼 따옴표 안이 아니라 밖으로 마침표를 끌어내야 한다며 최종 교정지에 몇 군데 그렇게 표시하셨습니다. 최종 수정 과정에서 그분이 표시하신 부분의 마침표를 따옴표 밖으로 옮겼는데, 인쇄 직전 필름 검판 과정에서 이분이 미처 보지 못한, 마침표가 여전히 따옴표 안에 있는 부분이 여럿 나왔습니다. 마침표 하나 때문에 이들 쪽의 필름을 통째로 다시 뽑아야 하나, 의논하다가, 그럴 만큼 큰 문제는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래도 인쇄에 들어가기 전에 통일되지 못한 부분을 알았는데, 고치지 않고 넘어갔다는 점이 마음에 걸립니다.
5. 별점에 관해
자기가 만든 책에 별점을 매기기란 영 낯간지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이 책에 10년간 매달려 연구해온 옮긴이, 그리고 6개월간 애써준 디자이너를 생각하면, 이보다 더 낮은 별점을 줄 수가 없네요. 이 책을 읽으신 다른 분들의 평가를 기다릴 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