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11월 7일 수요일) 저녁 5시 30분.
오후 내내 집중이 안 돼 기를 썼던 교정지를 덮어버림.
벌써 6개월째, 역시 나는 지구전에 약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음.
오늘은 약속도 없지만 좀 일찍 도망쳐야겠다고 실장님에게 말함.

8일(오늘) [고양이를 부탁해]가 종영되는 걸 알고서
어떻게든 이 영화 볼 기회를 만들어보리라 별러온 나.
오늘이 그날이다 생각함.
원래는 지난주에 종영해버리는 줄 알고 체념하고선 비디오로나 봐야지 했던 영화.
정동 스타식스에서 다행히 일주일 더 버텨줌.

삼성애니패스카드 가져가면 정동 스타식스에선 평일 영화 반값인데
빌어먹을, 인터넷 예매는 할인이 안 됨. 그냥 가서 보면 되지 하고 생각.

사무실에서 나온 시간이 5시 50분. 6시 40분까지는 시간이 모자라지 않으리라
생각했지만 이날따라 5호선이 늑장을 부림. 서대문역에서 6시 36분에 내림.
부지런히 걷다가 나중에는 뛰어서 극장에 닿은 것이 39분.
그리고 매표소 앞에 길게 늘어선 줄. 예매표 찾는 창구는 기다릴 필요 없는데,
제값 주고 예매할걸 후회도 잠깐 함.
내 차례가 된 시간이 6시 45분. 그냥 들어갈까 하다가,
영화 시작했다는 말에 8시 50분 표를 끊음.

옆 건물에 있는 맥도널드에 갔더니 김치버거 세트를 사면
아이스크림 콘이나 애플파이를 공짜로 준다 해서 얼떨결에 그렇게 함.
다 먹고 나면 배부를 테니 오래 갖고 있기 곤란한 아이스크림보다는
애플파이로 달라고 함.
유리벽 쪽에 바처럼 좌석이 늘어선 자리를 찾아 김치버거를 먹음.
김치버거라 해서 어떤가 봤더니 햄버거 사이에 김치 쪼가리 몇 개 든 것. -.-
먹으면서, 나는 조명 등등 때문에 유리창에 그림자가 져서
밖이 잘 안 보이는데 밖에서는 내가 햄버거 먹는 모습이 훤히
드러나리라는 생각을 함.

천천히 먹고 2주째 들고 다니는 [석순] 19호를 펼침.
마침, 마지막 꼭지는 영화를 보는 여성 관객의 쾌락과
페미니스트 관객, 퀴어영화에 대한 글 세 편을 묶은 것.
마지막 장을 덮으니 8시 10분.

영화관 건물로 다시 가서 로비의 작은 탁자와 의자 하나를 차지.
나와 나이가 비슷하거나 조금 어릴 것 같은 여자 하나,
한쪽에 방치된 의자 하나를 밀고 내가 앉은 탁자로 옴.
맞은편에 앉아 주섬주섬 봉지를 펼치는데
내가 봉지 밑에 깔린 신을 잡으며 "봐도 되겠지요?" 물음.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던 신문이라 여자는 물론 허락.
둘이서 신문을 나누어 보는데 여자, "같이 드세요" 하고
봉지 속의 빵을 보임. "전 방금 먹었어요" 하고 웃어줌.

8시 30분. 목이 말라 건물 안의 편의점에서 음료수를 2개 삼.
앉았던 자리로 돌아와 하나를 앞의 그 여자에게 건네자
고마워하며 "영화 보러 오셨어요?" 하고 물음.
그렇다 했더니 "어떤 영화... [물랑루즈]요?"
"[고양이를 부탁해]요."
"아... 정말 고맙습니다."
그 여자는 [물랑루즈]를 보러 온 모양. 둘이 같은 영화를 본다면
이야기를 틀 수도 있을 텐데. 40분이 되자
"영화 잘 보세요" 하고 내가 먼저 일어섬.

그 동안 옆자리에서는 다른 여자가 40분 내내
페미니즘 영화에 대해 어떤 남자와 이야기하고 있었음.
[석순] 19호의 한 글은, [석순] 19호가 나왔을 당시
미국 흥행을 휩쓴 영화 [브리짓 존스의 일기]와
한국 극장가를 강타한 [친구]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했음.
이 글은, 한국의 문화소비자층을 구성하는 비율을 봤을 때도
여성 관객의 주머니를 털지 못하면 영화는 절대로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하는데,
[쉬리]에서 영화 속 상황을 규정하는 조건에서 희생자이면서도
공격자인 모순적인 위치로 전면에 나섰던 여성이
[공동경비구역]에서 남자들만의 세계에서 이루어진 사건에 대한
관찰자이며 기록자로 물러서더니,
[친구]에서는 노래 한 곡 부르고 사라져버린 상황에 대한
해독을 시도함.

그리고 극장 좌석에 앉아 새삼스레 주변을 둘러보니,
거의 대부분이 여자임. 특히 내가 앉은 줄은 가운데 앉은 나를 경계로
셋씩 같이 온 여자들 무리로 채워짐.
이들은 어떤 눈으로 어떤 영화를 보며 쾌락을 느낄까?
같은 영화를 보러 일부러 늦은 시간, 한 공간을 꽉 채운 사람들이라는
호감. 그러나 영화가 시작하고 몇 분 흘렀는데 내 앞에서 셋째 줄에
몸도 별로 낮추지 않는 채 줄줄이 들어와 앉는 사람들. 짜증남.
(아까 나도 5분 늦게 영화를 보러 들어가? 하고 잠시 망설였는데
그때 안 그러길 잘했다 생각.)

그리고 내 바로 앞자리에 아이 두 명과 같이 온 부부인 듯한 사람들.
아기 옷 때문인지 팔을 머리 위로 들었다 놨다,
또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위로 들었다 놨다,
바로 뒷자리에 앉은 사람에게는 하나하나 모두 스크린에 방해될
행동을 연속으로 함. 애가 재미없어할 게 뻔한 영화를
왜 꼭 같이 와서 보는지 이해 안 됨.
극장에서 보는 영화는 비디오와 달라 대사 하나 놓쳐도
되감아서 확인할 수 없음을 새삼스레 깨우침.
짜증스러웠으나,
문득, 이런 것들도 모두 '극장에서 영화 보기'의 일부일 거라는 생각.
그리고 부부가 영화를 같이 보고 싶은데
아이들을 맡길 데가 없어 할 수 없이 데려왔으리라 이해하려고 노력.

[고양이를 부탁해]
상영시간   110분.
각본 감독  정재은.
제작 배급  마술피리.
주연          배두나(태희), 옥지영(지영), 이요원(혜주), 이은실(비류), 은주(온조)

요즘 스무 살 여자애들이 그렇듯,
손에서 전화기를 뗄 줄 모르고 틈나는 대로 문자를 날리는 그들.

비류와 온조로 나오는 쌍둥이 여자애들은 예전에 MBC '칭찬합시다'를
이윤석, 서경석이 진행할 때 같이 나왔던, 무표정한 얼굴로
사람들을 웃긴 그 쌍둥이 여자애들. 역시, 귀여운 여자아이들이었음.

배두나가 좋음. 눈과 귀와 마음뿐 아니라 손과 발까지 열려 있는 아이 태희.
그 태희에게 딱 어울리는 배두나가 좋음.

이요원 연기 잘함. 증권사 사무실에서, 스스로 가치 있는 일을 한다고
믿기 위해 발버둥치는 여상 출신 여직원 혜주.
얄밉고 이기적이기도 하며, 깜짝 놀랄 만큼 의뭉스러운.

지영이란 아이가 이 영화에 나와서 영화가 좋아짐. 정말.
지영이 없었다면, 이 영화의 의미는 절반으로 뚝 떨어졌을 거라 생각.

영화 마지막 장면에 무식하게 큰 글자로 나오는 "GOOD BYE"가 좋은 영화.
타일이 주르륵 뒤집히는 듯하게 그래픽 처리한 크레딧도 좋음.

영화관에서 울어보기는 [개 같은 날의 오후] 이후 처음.
코미디영화 보고 울어보기는 [개 같은 날의 오후]가 처음이었고,
안 울리는 영화 보고 울어보기는 [고양이를 부탁해]가...
음... 처음은 아님...

말을 하고 싶지 않아지면서, 담배 한 대 피우고 싶어지는 영화.
음, 그래, 이런 기분이 느끼고 싶어서,
아마 이 영화는 이런 기분을 느끼게 해줄 거라 생각해서 보러 왔는지도 모름.

오늘 아침 출근해서 영화감독 이름을 몰라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홈페이지(www.titicat.com : 영화에 나오는 고양이 이름이 '티티'임)에
장사가 안 돼 종영하는 이 영화 재개봉 운동에
가수 조영남이 나섰다 함. 나 이 사람, 별로 안 좋아하는데
그렇다 해도, 다양성을 배양하기 위한 운동을 한다는 건 좋은 일이라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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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7. 25 조금 문장을 손보았다.)

작년인가 재작년인가 그 이름을 알게 되어 행복했던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
그 멤버인 이브라힘 페레 할아버지가 내한 공연하는 기념으로
광화문 씨네큐브에서
빔 벤더스Wim Wenders 감독의 다큐멘터리 필름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Buena Vista Social Club>(1999)을
10월 9일까지 재상영한다고 해서,
정말 꼼짝 말고 책상 앞에 붙어 있어야 하는 처지임에도,
걍 오늘 아침 조조를 보고 말았다.

가난한 처지라 공연은 보러 가지 못해도
(그런데 이 할아버지, 갑자기 눈병이 생겨 내한 공연이 취소됐다고 함)
이 영화는 꼭 봐야지 싶었다.

아침 10시 50분이 상영 시작 시간이었는데,
시작 직전 참 묘한 기분이 되었다.
좌석이 80석이나 될까 하는
아담한 상영관에서,
그때까지 좌석에 앉은 사람은 나까지 단 네 명.
모두 혼자 영화를 보러 온 여자들이었다.
허, 이런 경험 처음일세.

불이 꺼지고 영화가 시작하는데
사람들이 더 들어와,
영화 끝나고 보니 관객은 모두 아홉 명이었다.
그 중 남자는 두 명.
그런데 여자 두 명이 같이 온 경우를 제외하고는
역시 모두 혼자 온 사람들이었다.

흔히들 영화 마지막의 자막이 올라가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들썩들썩 자리를 비우기 시작하는데,
오늘 아침 10시 50분 광화문 씨네큐브 2관에서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은,
자막이 다 올라가고
(물론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의 1999년 카네기홀 공연 실황이
화면에 나오는 중에 자막이 올라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스크린에 불이 꺼지고 나서도 아무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
몇 초 뒤 상영관 천장의 불이 켜지자 한 사람씩
서운한 듯 일어서는데, 왠지 동류의식 같은 것이 들었다. ^^;

중간에 좀 졸리긴 했지만(다큐멘터리라는 게 그런 법 아닌가),
그냥 보고 듣기만 해도 좋았다.

영화 앞부분의 자막에는 좀 불만이 있는데,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의 첫 공연 때
좌석을 메운 관객들과 무대에서 연주를 준비하는 멤버들을
비추는 화면 한가운데로
원래 필름의 자막인 연주자들 이름이 나왔다.
그 위에 한글 자막을 다시 입혔는데,
원래 알파벳으로 된 자막과 한글 자막의 색깔이 비슷한데다
자막의 글자가 워낙 많아 어디에 눈을 둬야 할지 정신이 산란했다.
한글 자막은 옆구석에 세로쓰기를 하든지 할 일이지...
그런 생각을 하는데 어느 순간 자막이 내 생각대로 되었다. 하하.

상영이 끝나고 나오는데 표 파는 곳에서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의 주요 멤버 다섯 명이 연주, 노래한 곡을
82개나 모은 다섯 장짜리 CD
The Great Members of Cuban Music <The 5>를
1만 7000원에 팔기에 싼 건 사두는 게 장땡이다 하고
사버렸다. ^^;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의 첫 번째 앨범은 있지만,
보컬 이브라힘 페레나 피아니스트 루벤 곤살레스의 CD는 없어
언제나 살 수 있으려나 한숨 쉬고 있었는데, 잘되었다 하고.

그런데 수록곡들 제목을 보니
여자보컬 오마라 포르투온도가 부른 <관타나메라>는 없다.
예전에 mp3로 그 노래를 듣고는, 꼭 CD로 갖고 싶은 마음이 들었는데... 구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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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7. 25. 표현을 조금 손보았다.)

<붉은 돼지>를 처음 본 건 몇 년 전. 선배가 빌려준 비디오를 통해서다.

처음 봤을 땐 재미없었다.
비디오로 두 번째 봤을 땐 나름대로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번에 극장에서 보니까... 
미야자키 하야오, 그의 작품 앞에선 무릎 꿇고 싶어진다.
그의 작품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와 <원령공주>이지만,
(<원령공주>는 "좋아한다"는 말만으로는 모자라다!)
<붉은 돼지> 역시 <붉은 돼지>만의 매력이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만화에서 가장 독특하고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건 여성들을 묘사하는 방식이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이른바 "나쁜 여자"는
다른 만화나 드라마와 달리
성격이 비뚤어지고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악인이 아니라,
합리적인 이성을 갖춘 인물이다.
합리적인 이성을 갖추었기에 그 나름대로
인간을 위해 좋은 방법을 찾고,
나중에 그 방법이 틀렸음을 알게 되면
역시 이성적으로 자신의 잘못을 받아들인다.
그런데 <붉은 돼지>는 다른 작품과 달리
남성 중심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여자가 결투의 경품으로 등장하지 않나.
그러나 그것은 비행기조종사들의 남성 중심적 문화를
반영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리고 이 작품에도 역시 열심히 살아가는,
그래서 "너를 보면 인간도 괜찮구나" 싶은  여성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작품의 백미는
엔딩크레딧 화면 왼쪽에 계속 나타나던
이 작품의 원작 만화 그림들이다.
(확인해보진 않았지만 원작 만화 그림인 것으로
짐작된다. 이 작품의 원작은 미야자키 하야오 자신이
<월간 그래픽스>란 잡지에
<비행정의 시대>란 제목으로 연재했던 만화라 하니까.)

거기서 보이는 건 돼지들이 전쟁을 치르는 모습들이다.
포르코 하나뿐이 아니라,
매우 많은 돼지가 전쟁을 견디는 모습들이다.
그 중에서 많은 돼지 비행사들이 단체 사진이라도
찍는 듯 모여 선 장면에서는 울컥 치솟아오르는 것이...

"파시스트 인간보다는 돼지가 낫다."
그렇게 인간이기를 거부한 돼지들이 모여
파시스트 전쟁을 견뎌낸 모양이구나... 싶으니까.
포르코 혼자 외로이 버틴 것이 아니리... 싶으니까.

만화영화다 보니 극장엔 아이들이 많았는데,
아이들이 과연 이 만화를 이해할지,
아니 적어도 재미있게 보기라도 했을지 잘 모르겠다.
뒷부분에 포르코와 커티스가 육탄전 벌이며
마구 망가지는 얼굴이 나오니 그때는
아이들이 떠들썩하게 웃으며 좋아하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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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살림에 매달 거금 6000원이나 내면서 캐치온(유료 영화 채널)을 보고 있다. 예전에 시청료 6개월 무료 행사할 때 옆지기가 코넷을 해지하고 냉큼 신청해버렸다. 당시엔 인터넷은 다 직장에서 하니까 집에 통신선 연결할 돈으로 영화 보자, 뭐 이런 생각이었는데, 지금은 내가 집에서 일하게 되어 예전의 코넷보다 훨씬 비싼 하나로통신을 깔고도 계~속 캐치온을 본다. 시간 없을 땐 한 달 가도록 제대로 영화 한 편 보지 못해, 그 돈이면 차라리 필요할 때 비디오를 빌려다 보는 게 이익이다 싶으면서도, 웬만한 개봉 영화는 6개월이나 1년쯤 뒤에 거반 틀어주고, 때로는 소식 둔한 내가 듣도 보도 못했지만 우연히 보고 나니 본전 뽑은 것 같은 작품을 보여주어, 그 맛에 끊지 못한다.

오늘 본 영화도 아마 캐치온이 아니었으면 보지 못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스웨덴 영화인데, Invisible로 번역된 원제는 Den Osynlige라고 한다. osynlige라는 말이 아마 invisible이란 뜻인가 보다. "스웨덴판 식스센스"라고 광고하던데, 미국식 미스터리(혹은 스릴러) 영화와는 분위기가 아주 다르다. 식스센스는 보지 않았지만 막판에 그 인간이 귀신이더라 하는 반전이 있는 건 아는데, 이 영화에서는 그런 뒤통수를 치는 반전...(이 아주 없지는 않다. 하지만 식스센스와 같은 건 아니다)...보다는, 곧 세상을 떠날 영혼이 자신을 해친 이를 이해하게 되고, 해친 이는 그 영혼을 돕게 되는 감동이 있다. 그 과정을 보여주는 두 아이가 예뻐져서 그만 울고 말았다.

해친 아이, 아넬리는 털모자를 쓰고 목깃을 세워 눈만 내놓은 차림으로 나온다. 그렇게 자신을 꽁꽁 숨기고서(하필이면 이 더운 날 그런 차림을 보자니 아주 갑갑했다. ^^;), 도대체 쟤는 뭐야, 왜 저래? 싶은 행동을 한다. 다친 아이, 니클라스는 그런 아넬리를 미워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영화가 아넬리를 조금씩 보여주다가, 아넬리가 비로소 모자를 벗고 머리를 늘어뜨리는 순간, 니클라스는 아넬리를 "미운 행동 덩어리"가 아니라 "감정과 생각이 있는 한 여자 아이"로 보게 된다.

영혼에 대한 예의...라는 말이 떠올랐다. 우리 민속신앙에서도 사람이 죽은 뒤 49일 동안엔 집을 떠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49재를 올리는 거란다. 실제로 넋이 있든지 없든지, 산 사람이 실컷 슬퍼할 시간을 주고, 또 슬픔에서 벗어나는 계기를 마련해주는 풍속일 텐데, 만약 신체에서 분리되는 영혼이 있다면 그 시간에 죽은 넋은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미련을 털어버릴 것이다. 그동안 세상을 떠난 이에 대해 내가 예의를 갖추었는지 돌아본다. 제대로 한 것 같지 않다. 그래서 아프다.

 니클라스와 아넬리

보면서 이런 것도 생각했다. 스웨덴에도 작가가 되고 싶은 자식의 꿈을 가로막고 돈 잘 버는 직업을 위해 진학을 강요하는 어머니가 있구나, 친자식만 사랑하는 계모와 마음의 눈이 먼 아버지 때문에 버려지는(집에서 쫓겨난다는 게 아니라 정서적으로) 아이가 있구나, 학교에서 삥뜯는 불량청소년, 교사가 포기하는 학생이 있구나.

2002년 작품이고, 아마 우리나라에서도 개봉했던 모양이다. DVD로도 나오고. 감독은 두 사람, Simon Sandquist(시몬 산드퀴스트?)와 Joel Bergvall(요엘 베리발? 외래어표기법에 따르면 이렇게 쓰는 게 맞는 것 같은데. --;). 니클라스 연기를 한 배우는 Gustaf Skarsgard(구스타프 스카르스게르드, 이름 끝 gard의 a에 움라우트가 붙은 것 같았다. 그러면 스웨덴어는 "에"로 쓴다), 아넬리 연기를 한 배우는 Tuva Novotny(투바 노보트뉘). "매츠 월스"라는 사람이 쓴 소설이 원작인데, 소설과는 분위기나 전개 방향이 많이 다르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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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없는 이 안 2004-07-24 0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포일러가 될 만한 건 하나도 남기시지 않아서 감동을 주리란 기대만 하고 볼 수 있을 것 같네요. 전 방금 니콜 키드먼 주연의 영화를 하나 빌려다 봤는데 너무도 실망스러워서 리뷰도 쓰기 싫으네요. 안소니 홉킨스도 주연으로 나왔는데 배우의 연기 외엔 처음부터 욕심만 잔뜩 잡고서 정작 메시지는 잃어버린 영화란 생각이 드네요... 시간 아까워라~ ^^

내가없는 이 안 2004-07-24 0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을 떠난 이에 대해 예의를 갖추었는지... 살아계신 이에게도 예의를 잃고 사는 제 삶을 되돌아보게 되는군요. ㅠㅠ

숨은아이 2004-07-24 1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다고 너무 기대하면서 보진 마세요. 기대가 크면 실망이 따르더라구요. ^^; 근데 니콜 키드먼하고 안소니 홉킨스가 나온 영화라면 <휴먼스테인> 말씀이신가요? 전 아직 안 봤는데, 그렇게 실망스러워요?

숨은아이 2004-07-24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다시 생각해보면 <인비저블>에도 좀 걸리는 부분이 있어요. 자식에게 자신의 뜻을 강요하는 어머니, 문제아가 된 의붓자식을 소외시키는 계모... 문제의 근원을 "어머니" 에게만 돌린 듯한. 하긴 문제는 배경으로만 나오지만요. 글구 이 영화의 중심 인물 중에 유색인종이라고는 딱 한 명 있는데, 그 아이를 의지박약으로 그린 것도 좀...

내가없는 이 안 2004-07-24 2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넵, 휴먼스테인 맞아요. 저한테는 그렇게 실망스럽더이다... ^^ 그러니까 흑인의 피를 받았으면서도 운좋게(아니, 운 나쁘게일수도 있겠죠) 백인의 흰 피부를 갖추고 태어났으니 단 한번 백인이라고 서류상 체크한 것이 평생을 거짓으로 살게 하지요. 그걸 반전이란 장치랍시고 가진 셈인데 영화 흐름상 무척 약한 충격요법이랄 수 있었지요. 그것말고도 여러가지 약한 고리가 많아요... 영화 제대로 만들기란 참 어려운가 보다, 뻔한 생각을 하게 하는... ^^

숨은아이 2004-10-23 0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보니 캐치온 시청료는 7800원이다. 옆지기 통장에서 자동이체된다구 그것도 헷갈리다니, 나도 참... ^^
 
어떤 나무들은 - 아이오와 일기
최승자 지음 / 세계사 / 1995년 4월
평점 :
절판


1998년  3월 25일에 쓴 독후감이니, 오래돼도 너무 오래됐습니다... 그런데 이 책이 아직도 검색되는 게 신기해서 옮겨봅니다. 폴 오스터라는 이름을 처음 가르쳐준 책이에요.

***

어떤 나무들은 - 아이오와 일기
최승자, 세계사(1995)
값 : 6000원

이 책은 시인 최승자가 1994년 8월말부터 1995년 1월 중순까지 미국에 머물렀을 때의 일기다.  아이오와시티의 아이오와대학에서 주최하는 International Writing Program에 참가하기 위해 우리 나라를 떠나던 날부터 그 프로그램에 참가하는 동안, 또 나중에 샌프란시스코에서 한 달을 머무르는 동안 보고 느끼고 생각했던 것을 적은 글이다.

남의 일기를 읽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우선 독자를 예상하고 쓴 글이 아니기에, 쓴 사람만 아는 깊은 뜻이 행간 곳곳에 숨어 있게 마련이다. 그리고 글을 쓴 사람이 자기 눈으로 보고 자기 감각으로 이해한 대로만 (객관적인 시각을 가장하지 않고) 하는 이야기라서, 읽는 사람은 글 속의 '나'를 잘 알지 못하면서도 글을 읽는 동안은 '나'의 눈과 귀로만 글 속의 세계를 보고 들어야 한다. 그런데 글 속의 세계는 바로 읽는 이가 사는 세계와 같은 실제 세상이기에, 읽는 이는 글쓴이가 아닌 바로 자신의 시각을 아예 놓쳐 버릴 수도 없다. 그래서 남의 일기를 읽는 일이란 두 사람의 시각을 경유하는 일이다.

두서가 없는 점도 일기의 특징이다. 그냥 떠오르는 대로 편하게 쓰는 글인 데다, 특별한 사건이 있다 해도 똑 부러지게 결말이 나지 않은 채 다음날로 넘어가 버릴 수도 있다. 그런 글을 앞에 두고 동시에 두 사람(글쓴이와 글 읽는 자신)이 되어야 한다니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런데도 남의 일기를 읽는 일은 참 매력 있다. 남의 속내를 들여다보기...
나 아닌 사람은 누구나 타인이고 나는 나조차 잘 모르기 때문일까. 다른 사람의 속마음을 읽고, 그 사고방식을 아주 구체적으로 알아보고 싶은 건 그 사람에 대한 관심일까 아니면 나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욕망에서 나오는 습성일까.(아니면 그저 엿보기의 쾌감? - 2004. 7. 22에 덧붙임.) 어쨌든 이 책 자체가 최승자라는 시인이 자기 정체성을 새로이 매기는 과정을 보여 주는 건 사실이다. 글쓴이는 책의 들머리, <작가의 말>에서 이렇게 썼다.

"아마도 이 책으로 큰 도움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다름아닌 나 자신일 것이다. 내가 몹시도 지치고 피곤해질 때, 작으나마 내가 새로 배운 것들을 포기하고 싶어질 때, 이 일기에 나오는, 필경은 아마도 내 눈에만 보일, 꿈틀거리며 새로 태어나려 애쓰는 내 자신의 모습이 내게 힘을 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글쓴이가 새로 배운 것은 아마 이 책 266쪽에 나오는 이 대목이리라.

"나는 프로그램화된 사회에서 살아왔다. ... 나는 이 프로그래밍에 더 이상 적응하지 않겠다. 나는 더 이상 프로그램화되지 않겠다."

글쓴이가 미국이란 나라에서, 아이오와시티라는 작은 대학 도시에서 뭐 대단히 좋은 점을 보고 그 동안의 자기 인생을 부정하거나 하는 건 아니다. 다만 그니는 서른몇 해 동안 자신을 규정해 온 사회를 벗어나 다른 사회에서 온, 전 세계에서 온 작가들을 만났고 그 가운데서 고독하게 일기를 썼다. 만남. 다른 세상을 만나는 일.

그니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바라티라는 작가의 집에 묵다가 바라티의 친구라는 사람에게서 온 전화를 받고 한참 재미있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고 나서 이렇게 썼다.

"미국에서는 친구 만들기가 아주 쉽다. 한국에서였다면 이런 유의 대화라는 건 도저히 불가능했었을 거다. 안면도 없는 사람들끼리, 그것도 얼굴도 모르면서, 전화로 이런저런 얘기를 한다는 건. 한국에서라면 주책맞은 여자, 아니 정신나간 여자 축에 들어가지 않았을까? 아마 전화를 끊고서, 아니 내가 왜 그렇게 씨알머리없는 짓을 했을까 하는 자기 반성의 과정을 거쳐야 했겠지? 그런데 그게 실은 자기가 하는 반성이 아니라는 것, 그건 어떤 권위, 혹은 어떤 파워를 독점하기 위해, 자기가 독점하려 한다는 것도 의식하지 못한 채 - 이게 더 큰 문제다. 그걸 의식조차 못 하고 있다는 게 - 어떤 프로그래머들이 설치해 놓은 소프트웨어에 의해서 내가 그렇게 반성하게 만들어져 있다는 것, 그러니까 내가 반성하는 게 아니라 반성당하는 것이라는 사실, 끔찍한 사실."(269쪽)

그니는 가만히 앉아서 이런 결론을 내린 게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언제나 나 자신으로 꽉 차 있어서 나 외부의 것에는 흥미를 느낄 여유가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를 꽉 채우고 있는 그 나 자신은 죽음처럼 송장처럼 내 내부에 누워 있기만 한다. 이 내 내부의 송장을 어서 치워 버리지 않으면 나는 언제나 이 모양 이 꼴로 살아야 할 것이다. 일어나 문을 열고 나로부
터 나가 다오."(236쪽)

나 자신에게 "나로부터 나가 다오" 하고 말할 수 있을까? 정말 어느 노래처럼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다.' 그런데도 아직 꽉 차진 못해서 허기를 느낀다. 하지만 그러다가는 평소 밥 먹을 때처럼, 과식하는 줄도 모르고 허겁지겁 먹어 대다 나중에 배불러 죽겠다 소리를 하게 되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이 책의 129쪽에 인용된 글을 옮긴다. 글쓴이가 '식상할 만큼 너무도 자주 인용되는 구절'이라고 한 글인데, 무식한 나는 처음 봤다. ^_^

"우리가 필요로 하는 책들은 우리에게 하나의 misfortune처럼 작용하는, 우리 자신보다 더 사랑하는 어떤 이의 죽음처럼 우리를 괴롭게 만드는, 마치 자살 직전에 있는 것처럼 혹은 사람이 사는 곳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어느 숲에서 길 잃은 것처럼 느껴지게 하는 그런 책이다. 책이란 우리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기 위한 도끼 구실을 해야 한다."  - 프란츠 카프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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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녀 2004-07-23 07: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폴 오스터도 이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건가요?
이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한국 작가를 한 분 아는데, 굉장히 유익한 프로그램이라고 감탄하더군요. 한 대학에서 세계적인 작가들을 대상으로 이런 프로그램을 진행하다니, 참 대단해요.

책이란 우리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기 위한 도끼 구실을 해야 한다!!!

무식한 저는 첨 봤습니다. 그런데 가슴에 새기고 싶군요 ^^

숨은아이 2004-07-23 1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폴 오스터가 이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건 아니고요, 최승자 시인이 이때 폴 오스터의 책을 읽고 끌린다고 이 책에 썼어요. 이후 최승자 시인은 폴 오스터의 <굶기의 예술>을 번역하기도 했어요. 문학동네에서 나왔던 <굶기의 예술>은 지금 절판된 듯.

로드무비 2004-07-30 1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별로 잘 쓴 건 아니지만 최승자 시인과의 만남에 대한 짧은글 하나 썼으니 시간 날 때
잠시 들러봐 주세요.^^
가끔 님의 방에 들어와 하나씩 꺼내어 읽을까 합니다.

panda78 2004-08-27 0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숨은 아이님 리뷰 읽고, 타스타님 이벤트 참가상으로 신청해서 읽었답니다.
최승자씨가 번역한 문학동네판 굶기의 예술은.. 상당히 마음에 안 들었는데..
이 책은 술술 잘 읽었습니다. 서점에 가서 그 다리자르고 팔 자르고 머리 떼놓는다는 시가 과연 어떤 건지 찾아보기까지.. ^^;;

숨은아이 2004-08-27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 전에 썼던 것인데, 좀 부끄럽네요. ^^; 그런데 그 시는 찾으셨나요? 찾으셨음 저도 가르쳐주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