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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야자키 하야오 영화 중 스펙타클이 최고.(1986년 작품이란 걸 감안.)

정말 그의 영화는 씨디나 비디오 본 걸로 만족하면 안 된다.

 

2. 한 50분 지났나 보다 했는데 어느새 2시간 10분이 훌쩍. 시간 가는 줄 모른다.

 

3. 시타와 파즈는 <미래소년 코난>의 라나와 코난 복사판이다.

파즈와 코난은 힘세고 착하고 용맹스럽고 귀여운 미야자키표 남자 주인공 그대로인데,

시타와 라나는 다른 여자 주인공에 비해 대단히 "여성적"이다.

이야기의 중심에 서 있고, 용감하며, 강하지만,

언뜻언뜻 앗, 웬 공주님을 구하는 기사?와 같은 장면이 펼쳐진다.

근데 그 장면이 무지하게 이쁘기 땜에 비판하기 좀 거시기하다.

 

4. 보고 나오는데 어떤 남자애(대학생인 듯)가

"만화영화라 캐릭터들이 귀엽고 예뻐서 재밌는 건데,

스토리라인은 아마겟돈과 비슷하다"고 하던데,

그게 이현세의 아마겟돈(1987년에 시작했나?) 이야긴지

할리우드에서 1998년에 발표한 아마겟돈 이야긴지 모르지만,

어느 쪽이든 두 가지보다 라퓨타가 앞선다.

게다가 전달하는 의미가 다른데?

첨단 과학의 총체라는 라퓨타를 지키는 건 새집을 돌보고

족제비(? :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도 그렇게 생긴 동물이 나왔는데)와 같이 노는

로봇이었던 것, 선글라스 쓴 그 남자가 그토록 탐냈던

주조종실(?)까지 나무 뿌리들이 모두 먹어버렸던 것,

멸망의 주문을 외웠을 때 인간이 만든 첨단 문명의 검은 반구는

모두 무너져 내렸지만 라퓨타의 몸체를 이룬 거대한 나무 뿌리는

그대로 남아 하늘 높이 날아간 것, 지금도 하늘에 떠서

꿈으로 남은 것...

 

5. 라퓨타가 떠 있는 지점은 일본 열도 남단의 상공 같다.

마지막에 보이는 그림이, 그곳 같다. 도쿠시마 섬과 혼슈 섬이 이어지고,

혼슈 섬의 오목한 부분에 일본 최대 호수인 비와호(琵琶湖)가 있고.

그런데 그림의 시점이, 남태평양에서 일본 열도 남단을 올려다보는 시선이다.

 

6. 군대가 라퓨타에 도착해서, 그곳의 보물을 마구 약탈하는 장면이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이 저렇게 약탈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시종 군대와 파시즘을 비판해온 미야자키는,

군대란 저런 것이다, 하고 보여주려 했던가?

 

7. 별점? 당연 5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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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아이 2004-05-04 1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덧붙여) 라퓨타의 엄청난 힘은 재앙이다. 탐욕이 불러온 재앙에 맞서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는, 어여쁜 두 아이를 보고, 내 옆의 옆자리에 앉은 여자분은 막 울더라.
 
나의 서양미술 순례 - 창비교양문고 20 창비교양문고 20
서경식 지음, 박이엽 옮김 / 창비 / 1992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2004. 1. 4
 
서경식 지음, 박이엽 옮김, <나의 서양미술 순례>, 창작과비평사,
1992년 4월 초판 발행, 2000년 12월 12쇄 발행

저는 초판본(컬러 도판은 책 앞에 4쪽 있고 책 사이사이에,
그리고 책 뒤에 부록으로 흑백 도판이 있는 문고판)을 샀는데,
2002년 2월에 개정판이 나왔습니다.
책 속의 그림과 사진을 모두 컬러로 바꾸어 양장본으로 낸 모양입니다.
개정판은 아직 보지 못했지만,
초판본을 보면서 그림 자료가 아쉬웠는데,
그걸 보강한 개정판이 나왔다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책의 원제는 私の西洋美術巡禮.
재일교포인 서경식 선생이 일본어로 써서 일본에서 발표한 것을
우리말로 옮긴 것입니다.

이 책을 산 것은 2002년 1월입니다.
작가나 여행가들이 유럽의 미술관을 돌아보고,
서양 미술을 소개하는 책은 여럿 있습니다.
그런데 미술 공부하시는 어떤 분에게서,
그런 “비전문가를 위해 미술책” 붐이 일기 전,
서경식 선생이 쓴 바로 이 책을 능가하는 것은 없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10년 전에 작은 문고판으로 나온 책이라,
요즘처럼 그림 자료를 다양하게 수록하고 화려하게 편집한 책과는
외양을 비교할 수 없지만, 그리고 서양미술 전문가가 쓴 책도 아니지만,
과연 이 책은 그 동안 제가 본 미술관 여행기, 미술 입문서
그 어느 것보다도 독특했습니다. 어느 책에서도 볼 수 없었던 그림을,
어느 글에서도 느낄 수 없었던 진심으로 이야기하는 책이었습니다.
이 책을 제게 알려주신 그분께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서경식 선생은, 아는 분은 다 아시겠지만,
바로 서승, 서준식 형제의 막냇동생입니다.
일본에서 태어나 자란 서승, 서준식 형제는,
조국을 배우고, 독재정권 아래 조국이 나아갈 길을 무엇인가 고민하다가,
잠시 북한에 다녀온 일 때문에 간첩 혐의를 받고 옥에 갇힙니다.
그때부터 일본에 있던 그들 가족은 오로지
두 형제를 구해내는 데에 생활을 바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서준식 선생은 1988년 5월 17년 만에 세상에 나왔고,
우리나라에서 인권운동가로서 살고 계십니다.
19년 동안 옥중에서 생활한 서승 선생은,
취조실에서 고문에 못 이겨 시뻘겋게 달아오른 난로를 껴안고
죽으려 하다가 얼굴에 심한 화상을 입었습니다.
1990년 2월말 출소한 서승 선생은 지금 일본의 어느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신다 합니다.

이런 와중에 무슨 미술 이야기냐고요?
1970년대 초부터 일본에서 한국으로 먼 옥바라지 길을 다니던
이들 형제의 어머니가 1980년 세상을 떠나고,
3년 뒤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난 뒤,
서경식 선생은 누이와 함께 1983년 10월 난생 처음 유럽 여행을 떠납니다.
"부모를 잇따라 잃고 허탈해진 누이에게 기분전환 한번 시켜주자는
생각이 없진 않았으나" ... "기묘하게 경건한 심경"으로.

그리고 "헤엄치듯이, 떠밀리듯이, 단지 관광지를 돌아다닐 뿐"이었던 그는,
벨기에 브뤼헤(브뤼주)에서 그 그림(그게 무엇인지는 책에서 보십시오)을 보고는,
그만 순례를 시작하게 됩니다.
아픔과 피, 절규와 고뇌로 얼룩진, 서양미술 속의 인간사를 찾아서.
그것들을 보며 서경식 선생은 그 아픔을 온 마음으로 느끼고,
달래고, 스스로를 단련했을 겁니다.
이렇게 말하면 이 책이 매우 어둡기만 한 듯 여기실지도 모르겠군요.
아니, 아름다운 그림도 있습니다.

그리고 고흐도 이야기합니다.
고흐 이야기는 워낙 많은 책에 소개되었지만,
서경식 선생은 다른 것을 느낍니다.
고흐와 테오 사이에 '창조하는 인간'과 '그것을 감상하는 인간'
사이의 어쩔 수 없는 단절이 있다지만,
서경식 선생은 역사 앞에서 자신을 채찍질한 두 형과 자신 사이의
단절을 그렇게 간단히 인정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서경식 선생은 여행하면서 이런 경험도 합니다.
피레네 산맥에 걸쳐 있는 바스크 지방은 프랑스와도, 에스파냐와도 다른
고유한 문화와 언어를 지닌 바스크 사람들이 사는 곳입니다.
이곳을 차지하고자 오래 경쟁을 벌여온 프랑스와 에스파냐는
1659년 바스크 사람들의 뜻과는 상관없이
자기들 맘대로 이 지방을 나누어 가집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바스크 지방은 피레네 산맥 양쪽으로
프랑스령과 에스파냐령으로 갈리어 있습니다.
서경식 선생은 이런 바스크 지방에 꼭 가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에스파냐를 여행하다가 바스크의 국경 마을인 안다유로 갑니다.
안다유 기차역의 승강장에 바로 국경선이 있습니다.
에스파냐에서 프랑스로 가는 승객들은
기차에서 내려, 에스파냐 출국검사소를 거쳐 프랑스 입국검사소를 통과한 뒤
프랑스 쪽 기차로 갈아타야 합니다. 

에스파냐 출국검사소를 지키던 경찰관은
국적이 "Republic of Korea"라 적힌 서경식 선생의 여권을 보고는
손으로 자신의 가슴께를 슥 자르는 시늉을 하더니
손바닥을 위로 펼쳤다가 아래로 뒤집어 보이며
"남이요? 북이요?" 하고 묻습니다.
'남'이라면 상관없지만 '북'이라면 쉽사리 국경을 통과하지 못합니다.
서경식 선생은 말없이 엄지손가락을 아래쪽으로 돌려 보였다 합니다.
'남'이란 뜻으로요.

"그래, 여기서는 조선이란 무엇보다도 분단국가로서 알려져 있을 테지.
어느 민족의 분단이 그 민족을 식별하는(identify) 지표가 되어 있다니
이게 도대체 뭔가? ......
게다가 나는 방금, 분단된 자기 민족의 어느 한쪽 나라에 자기가
소속한다는 뜻을, 이국의 관헌 앞에서 승인한 것이다. 이 승강장 위의
눈에 보이지 않는 선을 넘어, 저편에 기다리고 있는 기차를 타겠다는,
단지 그것뿐인 이유 때문에.
그렇게 말한다면, 본시 이곳에 살고 있는 바스끄인들 자신부터가
자기네 땅의 이쪽 저쪽을 왕래하는 데 일일이 두 국가의 허가를 받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주변을 오가는 바스끄인 누군가를 붙들고 묻는다면 어떤 대답을 할까,
“당신네 나라는 스페인인가 프랑스인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쁘라도 미술관에서 지겹게 스페인의 독기를
쐰 뒤에 바스끄 땅에 서 있는 내가 무척 과민해져 있는 탓이리라."-95쪽

참고 삼아 적자면, 이 책의 73쪽에 피카소의 게르니카 앞에 선 서경식 선생이
"아까의 그 차마르틴 역에서 본 일본인 샘통이 여기에도 왔을까,
왔다면 도대체 어떤 느낌을 받았을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는
문장이 나옵니다.
우리말로 "쌤통"이라 하면
"남이 낭패 본 것을 고소해하는 뜻으로 이르는 말."이라고 사전에 나옵니다.
그런데 여기서 "샘통"이란 말은 그 뜻으로 쓰이진 않은 듯해서,
원래 서경식 선생이 쓴 단어가 무엇인지 창작과비평사 홈페이지에 문의했더니,
아래와 같은 답글이 달렸습니다.

"지적하신 대목은 원저의 ふくれっ面이라는 말을 의역한 표현입니다만,
역자 박이엽 선생님께서 작고하셔서 직접 상세한 내용을 확인하기는
어려운 형편입니다.
사전을 찾아보면 'ふくれっ面'는 '(불만에 가득 차) 뽀로통한 얼굴'이란 뜻이므로
중쇄작업을 진행하면서
원문의 뜻을 독자분들이 명확히 이해하실 수 있도록 바로잡겠습니다.
늘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샘통 대신 "심통"으로 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는데,
다음 쇄에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습니다.

한편 제가 가진 초판 12쇄본에는 이런 부분도 있습니다.
140쪽에 얀 반 아이크의 생몰 연도를 1380~1425년으로 적고는,
144쪽에는
"로베르트 캄핀의 출생년에 대해서는 1375년에서 80년까지
여러 설이 있는 모양이나 사망연도는 1444년이 분명하다.
얀 반 아이크보다 2, 3년 일찍 태어나, 3년 더 살았다는 이야기다."고 했습니다.

로베르트 캄핀이 얀 반 아이크보다 3년 더 살았다면
얀 반 아이크가 사망한 해는 1425년이 아니라 1441년이어야 합니다.
인터넷에서 천리안과 엠파스로 백과사전을 찾아보니
얀 반 아이크 생몰 연도를 1395?~1441로 해놨더군요.

얀 반 아이크가 어느 해에 태어났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사망한 해는 이 책 본문의 문맥이나 백과사전 자료에서나
1441년이 맞는 듯합니다.
개정판에는 생몰 연도 표시를 뺐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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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영화를 보러갔다
윤대녕 지음 / 중앙일보사 / 1997년 3월
평점 :
품절


2002. 5. 28

 

윤대녕, <옛날 영화를 보러 갔다>, 1995


지금은 절판되었습니다. 중앙일보사에서 1995년에 나왔는데,
중앙일보의 출판 담당 부서는 1997년 중앙M&B라는 이름으로
독립적인 계열사로서 갈라져 나왔지요.

이 책, <옛날 영화를 보러 갔다>는 소설을 특별히 좋아하거나
이 책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며칠 전 우연히 집안의 서랍을 뒤지다가, 오래 전에 이 책을
읽고 쓴 글을 발견했습니다. 예전에 썼던 글은 모두 5.25인치짜리
디스켓에 들어 있어 지금 볼 방법이 없거나,
예전에 한번 노트북 하드를 날렸을 때 모두 날아가 버려
가진 게 없습니다.

그런데 이 글은 종이에 출력해 놓았네요. 그래서 기념으로
그냥 한번 소개합니다.


<'거기'와 함께 '여기' 살기>

이 소설은 한 남자의 자아 찾기 여행기이다. 또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과거'를
바라보는 방법에 대한 제안이다.

"오랫동안 나에 대해 타인처럼 살았"던 '나'란 남자,
그가 자신에 대해 타인처럼 살았던 이유가 별거 중인
아내 때문인지(아내는 자신의 존재를 불안하게 여긴
나머지 스스로 불행해졌으며 다른 사람까지 불행하게
만든다)는 확실치 않다. 아마 아니리라.
그가 별거하고 직장을 그만둔 것은 계기에 불과하리라.
그는 그 전에 과거를 잃었기 때문에 스스로
사랑한다고 확신할 수 없었던 아내와 결혼했다.

그가 어느 순간부터 과거의 인물이 보내 오는
무차별 암시를 통해 과거에 눈뜨기 시작했다.
그리고 과거를 찾음으로써 유진에게서 벗어나
선주와 진정으로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선주가 "낯설고 추운 곳"으로 떠났다가 돌아왔을 때,
그녀는 더 이상 유진의 허깨비가 아니라
선주 자신이 되었다. 선주가 갔던 "낯설고 추운 곳"은
유진의 백조 자리가 아니었을까?

'나'는 '거기'를 잃고 살았기에 '여기'에서
실존의 의미를 찾지 못한 채 부유(浮遊)해 왔지만
'여기'에 있는 '거기'를 찾은 뒤
'거기'에 있는 '여기'에 묶여 버린 E의 굴레를
떨쳐 버렸다.

그런데 '나'는 도대체 왜, 어떻게 해서
유진과 희배를 잃었을까? '나'는 유진이 죽은 뒤
정신병원에 갔다 오고 나서 유진과 희배에 대한
기억을 잃었다. 유진은 실존의 무의미함을 전도하는
전도사였다. 그녀는 시간의 반대편에 가고 싶어했다.
'나'는 실존의 무의미함을 몸서리 쳐지게 체험한 뒤
자기 보호 본능에 의해 그 기억을 잃었을 것이다.
실존이 다름아닌 실존 그 자체임을 깨닫기 위해
그는 오랜 시간을 돌아온 셈이다.

때로 나(소설 속의 '나' 남형섭이 아니라
이 글을 쓰는 나)는 스스로 역사를 가진 존재라는
사실을 잊는다. 내가 존재하고 이 순간을 살아가기까지
각종 행위와 관계가 있어 왔다. 사람들은 모두,
아니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역사를 가진다.
그런데 때로 자신을 단지 중력에 묶인 물리적 존재로
인식할 때가 있다. 시간의 흐름에서 자유로운
물질 - 그런 물질이 실제로 있는지는 모른다.
그저 그렇게 느낀다.

또 때로는 그런 느낌마저 없이 자동 인형처럼
반사적인 동작만 한다. 아침에 눈 뜨고 밥 먹고
세수하고 걷고 전철 타고 일하고 다시 걷고 전철 타고
눈을 감는다. 그리고 우연히 몇 달 전의 나,
1년 전의 나, 3년 전의 나, 10년 전의 내가 했던
말과 행동, 맺었던 관계를 깨닫고 퍼뜩 놀란다.
나는 어쩌면 그렇게 '자신에 대해 타인처럼' 살았을까.

반대로 예전의 기억 때문에 밤잠을 이루지 못한 적도
있다. 그냥 거리를 지나다가도 전에 내가 했던
말이 생각나 얼굴을 찡그리고 입술을 깨물기도
한다. 과거를 극복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중학교 때 국민학교 시절을 돌아보기도
싫어했고 고등학교 때는 중학교 때를,
대학교 때는 고등학교 때를 회상하기 싫어했다.
꿈에서 예전의 기억을 왜곡된 형태로 보기도 한다.

과거는 완전히 단절된 듯싶다가도 자꾸자꾸
부메랑처럼 돌아온다. 상황으로, 내 태도와 행동으로.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과거를 바라보는 방법은?

윤대녕은 같은 자리를 빙글빙글 도는 순환선이 아니라
나선형 궤도를 보여 주었다. 과거를 바라보는 방법은
내려다보는 것이다. 현재의 나는 과거의 나이되
양과 질에서 다르다. 소설 속의 '나'는 과거를 잃고
자신에 대해 타인처럼 삶으로써 궤도를 이탈했다가
다시 돌아왔다.

그런데 이 소설의 내용에 공감하면서도
이 소설을 이루는 구성 요소에 나는 불만이 많다.

우선 주인공의 '드라이'하고 '쿨'한 태도와
예술 취미에서 서투른 무라카미 하루키 냄새가 난다.
작가가 들으면 몹시 섭섭하겠지만 할 수 없다.
'상실감이 충일한' 무라카미 하루키에 비해,
이 소설의 주인공은 유물론적이고 실존적이다.
유물론적이고 실존적인 건 좋은데 잠시 일탈하여
허무해졌다. 아니, 그것까지 좋은데 왜 선천적으로
'드라이'하고 '쿨'한 듯한 흉내를 내는 것일까.
그러면서도 별거중인 '나'는 선주에게 이런 말을
다 한다.

"그러니까 서둘러 결혼하라니까. 혼자서 마음을
조율하며 살기엔 이미 나이가 차버린 거야.
평형감각을 잃지 않고 살려면 우선 정해진 코스를
따라가야 해."

갑자기 웬 고리타분한 결혼관?

그리고 '~고 있었다'는 어미를 비롯해서
일본어를 번역한 듯한 어투가 소설 전체에 넘쳐난다.

"그러나 입이 미어져라 국수를 밀어넣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보면서 나는 그녀가 배가 고파서가 아니라,
무언가 견디질 못하고 있기 때문에 저러고 있다는 걸
깨닫고 있었다(본문 77쪽)"는 식이다. '국수를 밀어넣는'
'못하기' '저런다는' '깨달았다'고 하면 될 것을.

조사 '의'가 필요없는 부분에서 떡하니 자리를
차지하기도 한다. "살아 있는 것들과 다시 만나게 되고
시간과 박자를 맞춰 또 미래로의 여행을 계속하는
거야......(본문 141쪽)" 그냥 '미래로 여행을
계속하는 거야'라고 하면 되는데.

작가란 '말'을 가지고 자신을 표현하는 사람인데
자신이 도구로 쓰는 '말'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단지 문법에만 맞으면
우리말이 되는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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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7. 4

 

원제가 千と千尋の神隱し라고 하길래, 千은 '센'이고, '千尋'은 치히로,

그럼 '神隱し'는 뭐야? 싶었지요. '행방불명'이라면 일본에서도 같은 한자어를

쓸 텐데 말이에요.

 

가미가쿠시(神隱し)란  어린아이가 사라진 걸 가리키는 말이래요.

그런데 일본에선 산신이나 텐구(天狗)란 괴물이 이런 일을 잘 저지른다고

생각한대요. 그러니까 가미가쿠시란 그 한자대로 '귀신이 숨겼다'는 뜻이지요.

텐구는 얼굴이 빨갛고 코가 높은 괴물이라는데,

생각해 보니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나오는 마녀 유바바가

얼굴이 빨갛고 코가 높게 생겼네요. '서양의 마귀할멈'처럼 생겼잖아요.

어린아이가 신들의 세계에 잠깐 다녀오는 일,

<이웃의 토토로>에서도 메이가 그러잖아요?


그런 경우를 뜻하는 말이 우리말에 있나... 없는 것 같아요.

어린아이가 없어졌다, 하면 유괴, 실종, (말 그대로) 행방불명, 뭐 이런

살벌한 말밖에 떠오르지 않네요.

 

그런 말이 왜 우리말엔 없을까, 생각하다가

그런 말이 어떻게 일본말엔 있을까 도리어 궁금해졌어요.

어린아이가 잠시 없어지는 일...은 있지요. 놀러 가서 길을 잃기도 하고

식구들 모르게 옷장 속에 숨어들어서 잠들어 버리기도 하고.

그런 일을 신이 숨겼다고 생각하다니, 재미있잖아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역시 미야자키 하야오의 각본, 감독 작품다운 면모를

보입니다만, 이전에 본 작품들하고 다른 점이 두 가지 눈에 띄었어요.

 

첫째는 치히로라는 여자아이, 다리가 아주 길고 가늘다는 점입니다.

얼굴은 땡그란데... 전의 작품에서는 글쎄, 다리가 긴 편이긴 해도

다른 일본만화에서 보이는 심한 체형 왜곡은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동양인 체격을 보기 좋게 잘 그렸다고 생각했는데,

치히로의 다리는 유난히 길고 너무 가늘었어요.

요즘 일본 아이들의 체형이 그렇게 바뀌어서 그런 건지.

 

둘째 개인이 구원되는 데 그쳤다는 점.

하야오의 작품뿐 아니라 지브리 스튜디오에서 내놓은 작품은 모두

공동체의 문제 해결을 이야기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공동체의 문제를 이야기하지만

결국 결말은 치히로의 가족이 원 상태로 돌아가는 걸로 끝나거든요.

돼지로 변한 다른 사람들은?

그리고 아파트 건설로 삶의 터전을 잃었던 하쿠가

이제 마녀의 제자 노릇을 그만두겠다, 그리고

치히로에게 앞으로 꼭 다시 만날 거라고 약속하긴 하지만,

어떻게 그렇게 될지는 알 수 없어요.

 

뭐, 열 살짜리 여자아이의 가미가쿠시를 소재로 삼은 거니까

그 아이가 부모의 품에 다시 돌아가는 걸로 끝나는 데 그쳤다고도 할 수 있지만.

 

또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습니다.

치히로가 부모를 구하기 위해서는 계약에 의해 마녀의 시험을 통과해야 했습니다.

치히로는 시험을 받아들입니다. 아기 보우가 시험을 무효로 하려고

힘을 쓰고 있었는데... 규칙은 규칙이다, 이건가요?

글쎄, 전 잘못된 계약에 의한 일방적인 규칙은 어겨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

아니면, 그들의 세계에는 그들 나름의 규칙이 있고

우리는 그걸 존중해야 한다는 뜻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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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아이 2004-05-19 0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가와카미 히로미라는 일본 작가가 쓴 소설집 [뱀을 밟다]에도 가미가쿠시를 소재로 삼은 <사라지다>란 단편이 있습니다. 사뭇 다른 환상을 다룬 소설이지만.
 
캔디 캔디 애장판 1 - 흑백
미즈키 쿄오코 글, 이가라시 유미코 그림 / 하이북스 / 2002년 12월
평점 :
품절


2002. 5. 20

 

이가라시 유미코, <캔디 캔디>, 전 9권, 하이북스


이 만화를 모르는 사람도 있기는 있겠지요, <캔디 캔디>.
텔레비전 만화영화로도 만들어져, 그 만화는 안 봤더라도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라는 주제가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그 만화.

일본에선 고단샤(講談社)라는 출판사에서 1975~1977년에 출간했다는데,
고단샤는 꽤 역사도 깊지만 지금도 갖가지 책을 다 내는
아주 큰 출판사지요.

제가 국민학교 다닐 적에, 그러니까 70년대 말에서 80년대 초반,
최초로 소장한 만화책이었지요.
그때 표지에는 한글로 "캔디♡캔디"라고, 가운데 하트가 있었어요. ^^;

국민학교 5학년인가 6학년 때쯤에,
매일이다시피 가는 동네 서점이 있었습니다.
거기서 추리소설 따위를 한 권씩 살 수 있었는데
(그때 누군가 나를 데리고 가서 책을 사 주었는지
아니면 내가 돈을 들고 가서 샀는지는 정확히 모르겠는데,
좁은 서점의 서가 앞에서 이 책 저 책 한참 들여다보곤 했던 기억으로
보아 어른이 따라오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9권짜리로 출간된 만화 <캔디 캔디>도
그렇게 한 권씩 사서 모았더랬습니다.

그런데 친구들에게 빌려주다 보니, 한 권 한 권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지요. 오호, 통재라~
만화책으로 먼저 캔디를 본 저는, 그 후 텔레비전에서
만화영화로 할 때는 별로 잘 보지 않았습니다.
책으로 먼저 보고 난 다음에는 영화가 재미없기 일쑤이니까요. ^^;
그리고 왠지 만화영화 속 캔디의 목소리가 마음에 안 들었답니다.

그리고 10년쯤 뒤... 대학 3학년 때이던가요,
과외를 가르치던 아이에게 캔디 만화책을 빌릴 수 있었어요.
저녁 8시쯤부터 보기 시작해서 새벽 4시까지,
펑펑 울면서 다 보았습니다.

이상한 일이지, 국민학교 땐 캔디를 재미있다고만 생각했지
보고 울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대학 때 보니까,
캔디라는 여자아이의 힘든 삶, 그 꿋꿋한 자세에
눈물이 줄줄 흐르지 뭡니까.
저, 책이나 영화 보고 잘 안 웁니다.

그 후 텔레비전의 어느 주말 프로그램에서,
홍경인이 여장을 하고 캔디로 분해 짤막한 코믹 드라마를 연기했는데,
그때 캔디가 어려운 상황에서 눈물만 훌쩍이고
남자들의 도움을 받아 곤경에서 벗어나는 여자아이로 그려져
화가 났더랬습니다.

캔디는 "울면 안 돼" 하고 다짐하는 아이입니다.
남에게, 특히 남자에게 의지해서 살 수도 있었는데,
스스로 자기 길을 찾아 열심히 생활하는 여자입니다.

예쁜 남자들이 포진한 만화, 그들 모두의 사랑을 받는 캔디,
이런 도식적인 구도가 분명하긴 하지만,
이른바 '사랑'이 중요한 갈등 구조이며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동력이 되긴 하지만,
누구와 누구와 맺어지는 데 이 만화책의 종결이 있지는 않습니다.
사랑도, 인생도 스스로 선택하는 캔디.

그리고 또 몇 년이 지났을 때
이른바 '애장판'이라 하여 두꺼운 네 권으로 묶여
<캔디 캔디>가 팔리는 것을 종로 지하상가에서 보고, 샀습니다.
아마 해적판으로 이런 저런 수상한 출판사 몇 군데에서 나온 모양인데,
읽다 보면 중간 중간 몇 장씩 건너뛴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인쇄도, 제대로 된 필름을 가지고 한 게 아니라
만화책을 복사하다시피 해서 그림이 군데군데 뭉개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좋았습니다.
이렇게 산 네 권짜리 '애장판' 캔디를 보고,
두 번째로 펑펑 울었습니다.
다 아는 내용인데도 그렇게 눈물이 나다니.

그리고 올해 초에, 마침내 <캔디 캔디>가 다시 9권짜리로
나온 것을 알았습니다. 판권을 보니 2001년 3월 출간했더군요.
지난달 9권 전집을 샀는데, 사무실 직원들이 모두 돌려 보고는,
마지막으로 제 손에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지난주 토요일에 붙잡고 읽었답니다.

이제 나이 들어 마음이 메말라, 울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이번에도. 세 번째.

그런데 울면서도 예전엔 보이지 않던 것이 보였어요.
이 만화는 배경을 모두 미국이니 영국으로 삼고,
등장 인물 역시 모두 미국이나 유럽의 백인이지만,
등장인물들의 관계나 사고방식이 모두 철저히 일본식이라는 겁니다.

사실 미국이 배경인데도 흑인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 것부터 그렇지요.
만화 종반에 1차 세계대전(1914~1917)이 터지는 것으로 보아
캔디는 1899년쯤 태어나 1910년대를 살아가는데,
1860년대 전반 미국 내전(이른바 남북전쟁, American Civil War를 왜
남북전쟁이라고 번역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에게 남북전쟁은
6.25 아닌가?) 이후 흑인들은 농촌에서는 농장 노동자로,
도시에서는 공장 노동자로 사회의 하층 계급을 형성했지요.

이건 앵글로색슨계 백인을 동경하는 자세라고밖에 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오로지 당주의 뜻에 좌지우지되는 대가족...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과거에 일본의 법률은 가족을 호주제로 묶어 놓아,
호주(그러니까 집안의 주인) 아래에 모든 가족이 법적으로나
관습적으로 종속되었습니다.
그런 일본식 호주제가 일제 강점기에 우리 나라에 들어왔고,
일본은 패전 후 그 법률을 고쳤는데,
오로지 남한에서만 아직 호주제가 그 위세를 떨치고 있지요.
그리고 호주제 폐지가 논의될 때면
전국의 유림이 들고 일어나 우리 고유의 문화를 없애려 한다고
벌떼같이 떠들어대니, 통탄할 일입니다.

아무튼, 아드레이 집안은 윌리엄 '할아버지'의 결정에 따라
모든 일이 좌지우지됩니다. 이 윌리엄이 전면에 나서지
않을 때면 이인자, 에르로이 할머니가 집안을 휘두릅니다.
캔디에게 쏟아지는 다른 가족의 횡포를 막아 주는 건
바로 윌리엄의 이른바 '변덕'이지만,
그리고 윌리엄은 이러한 가부장의 지위에서 벗어나려
애쓴 자유주의자로 그려지지만,
결국 윌리엄은 대가족의 가부장으로서 위력을 발휘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 모두, 윌리엄의 명령에 꼼짝도 못합니다.

사유제 질서 속에서 어느 나라나
상류층은 가부장제의 질서를 유지한다지만,
이런 극단적인 가부장주의는 극히 일본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요즘의 일본은 법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그렇지도 않지만,
아직도 일본 영화를 보면 일본 가정 속 여자의 지위는
여전한 느낌입니다. 뭐, 영화는 현실을 반영할 뿐
진실 그 자체는 아닐지 모르지만 말이지요.

그러나 만화 속 등장인물의 말투를 보아도 그렇습니다.
캔디는 왈가닥처럼 굴 때는 다른 남자 친구들에게
반말투로 말하지만, 진지한 자세를 보일 때는
존대말투를 씁니다. 일본어를 잘은 모르지만,
일본어에는 여자 말투와 남자 말투가 따로 있어서,
여자 말투는 공손한 존대말투로 번역된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왈가닥인 캔디도 성실하고 진지할 때는 여자 말투를 쓴다는 것...

안소니, 테리, 스테아, 아치는 모두 캔디의 친구인데,
특히 사랑을 느끼는 상대인 안소니와 테리에게 말할 때
캔디는 존대말을 씁니다. 안소니와 테리는 반말을 쓰고!
허허...

그리고 애니나 스잔나는 얌전하고 여자다운 성격이면서
남자에게 접근할 때는 참으로 노골적입니다.
겉으로 활발해 보이는 여자가 도리어 연애 감정에는
솔직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지만,
내성적이라 잘 나서지도 못하는 여자가
그토록 적극적이라는 데 일본 여자들의 성격을 떠올립게 됩니다.
얌전한 애니와 스잔나가 그런데,
적극적인 악녀 이라이자가 안소니나 테리를 대하는 태도는
더 말할 것도 없지요.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고,
우리 나라 작가가 지은 만화라면 이렇지 않을 것 같아요.

그리고 가끔, 상황 연출이 치밀하지 못하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이를테면 멕시코 농장에 팔려 간 캔디가
아드레이 가문의 양녀가 되어 돌아왔을 때,
그 사실을 미리 안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돌아온 캔디를 보고 안소니, 스테아, 아치는 매우
놀라면서도 반가워하는데,
다음 순간 바로 이 세 사람이 미리 준비된 캔디의 방으로
캔디를 안내합니다. -.-
(소설을 각색하면서 줄거리를 과감히 축약하느라 그렇게 된지도.)

또 종반부에서 데이지라는 잠깐 나오는 여자가 닐에게
"오페라를 보고 콘서트에 간 다음에 미술관을 관람하고 싶다"고 말하는데,
오페라는 보통 저녁 7시, 8시에 시작해서 두 시간 정도 하는데,
그럼 오페라가 끝난 밤 9시, 10시에 시작하는 콘서트는 뭐며,
그 콘서트가 끝나는 밤 11시, 12시까지 문을 여는 미술관이
어디 있다는 말인지!

만화를 읽는 내내 이 구석 저 구석에서
그런 저런 비슷한 느낌이 들었는데,
그래도 <캔디 캔디>가 다시 없을 명작인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이 만화는 미즈키 교코라는 작가의 소설을 각색한 것이라는데,
1998년인가 원작자 미즈키 교코와 만화가 이가라시 유미코가
캐릭터 저작권을 놓고 소송을 벌였다는 보도를 들었습니다.
미즈키 교코는 인물 캐릭터가 소설 속 묘사에 근거한 만큼
자기도 권리를 갖는다는 주장이고,
이가라시 유미코는 인물의 외모 등이 기본적으로 소설에
묘사되었다 해도 그걸 구체적인 형상으로 표현한 것은
만화 작가의 독창적인 상상력이라고 주장한다는 이야기였어요.

"원작자 측의 얘기에 따르면 두 사람은 1995년에
'작품을 이용할 경우에는 쌍방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계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작년에 만화가 측에서 단독으로 도쿄도내에 스티커 사진기를 설치했으며
홍콩에서의 단행본 출판 계약을 맺은 사실이 발각되었다.
또한 복제 원판도 판매한 사실이 드러났다.
이는 모두 원작자의 허가가 없었던 것으로
약 150만엔의 손해배상 등을 요구하여 도쿄법원에 제소했다."
- DSD Today News World, 1998. 12. 4

이 재판의 결과는 알 수 없는데,
azn4.n4.co.kr에 2000. 4. 25자로 올라온 소식은 아래와 같습니다.

"작년 10월 「캔디♥캔디」의 유명 만화가 이가라시 유미코가
자신이 그린 「캔디♥캔디」 캐릭터를 무단으로 배포 및 판매했다는 이유로
원작자 미즈키 쿄코를 고소하여 화제가 되었던 사건의 결과가 3월 17일 발표되었다.

판결의 내용은 미즈키 쿄코가「캔디♥캔디」의 원작자로서
원작에 대한 저작권은 갖고 있지만 이가라시 유미코가 창조한 캐릭터에 대한
저작권은 가질수 없으니 향후로는 「캔디♥캔디」의 캐릭터를
무단 판매하는 행위를 금한다는 것.

그러나 이번 판결에 대해 원작자 미즈키 쿄코는
"원작자는 스토리만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캐릭터에 대한 컨셉트도 제공하기 때문에
당연히 캐릭터에 대한 저작권을 행사할 수 있다"며 강하게 반발,
3월 30일 도쿄 근교에서 항의 시위를 펼쳐 주목을 끌었다."

흠... 그런데 이 두 작가의 나이는 대체 어느 정도 되었을까요?
책에 태어난 해는 밝히지 않고 생일과 별자리만 나와 있네요.
이가라시 유미코는 1970년에 데뷔했다,
미즈키 교코는 열여덟 살 때 주니어 소설 신인상을 수상해 데뷔했다,
이 정도만. 별자리는 왜 알려 주는 거지?


****

현재 알라딘에서 검색해 보면
9권짜리 <캔디 캔디>는 안 나오고 5권짜리 애장판만 뜨며,
그나마 모두 품절이군요. 아쉽다.-2004. 5.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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