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은 미스테리 하우스의 추리 관련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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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소설의 일력(日歷)
1. 추리소설의 멸망론
서머셋 모옴은 <추리소설의 쇠퇴 Decline and Fall of the Detective Story>에서 "추리소설은 멸망했다"고 그의 최후논점을 결론지었다. 우리로서는 믿고 싶지 않은 이야기다. 그가 이와 같은 주장을 한 데에는 상당한 이유가 있는데, 그 연유를 소개하기 전에 우선 오늘날의 추리소설의 실태를 분석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추리소설의 종류를 대별하면 대략 7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 본격 추리소설
교묘한 플롯, 강렬한 자료, 기발한 트릭, 폭탄 같은 해결을 바탕으로 한 수수께끼 풀이의 도취경에 독자를 파묻히게 하는 기본적인 형태의 추리소설로서 대부분의 작품이 이에 속한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그린 가의 살인 사건>의 파이로 번스, <이집트 십자가의 수수께끼>의 엘러리 퀸, <애크로이드 살인>의 엘큐울 포와로 등의 많은 천재적인 책략을 지난 명탐정이 탄생함으로써 일반 대중의 흥미를 추리소설에 끌어들였다.
* 도서 추리소설
이것은 일반적인 형식을 역행한 것으로서, 처음부터 범인이 밝혀져 있으며 범인 쪽에서 주도면밀한 범죄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는 과정을 그린 다음 완벽하게 여겨졌던 그 범행이 탐정에 의해 폭로되어 가는 과정을 써나간 것이다.
프랜시스 아일즈의 <살의>,F.W.크로프츠의 <크로이든 발 12시 30분>, 리처드 헐의 <백모 살인사건>을 세계 도서 추리소설의 3대 걸작으로 꼽는다. 콜롬보 시리즈도 이에 해당한다.
* 서스펜스 소설
서스펜스와 드릴이 넘치는 소설로서 대표적인 작품은 까뜨리느 아를레의 <지푸라기 여자>,패트리셔 하이스미스의 <태양은 가득히, 원제: 재사(才士) 리플리 씨>, 마가레트 밀러의 <겨냥한 짐승> 등인데, 많은 작품 가운데 이 세 작품은 여성의 작품이기에 특별히 예시한 것이다. 일부의 우려와는 달리 서스펜스와 드릴을 맛보려는 인간의 욕망은 참다운 의미에서 정신적 데카당스의 발로는 아니다.
* 스파이 소설
스파이 활동을 소재로 한 것으로 추리소설의 발전적 분야라고 할 수 있는데, 고전적 명작은 존 버칸의 <39계단>이며,에릭 앰블러는 <어느 스파이의 묘비명>을 비롯해서 많은 스파이 소설을 썼다.
그후 숱한 스파이 소설이 쏟아져 나왔지만 베를린을 무대로 한 존 르 까레의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는 007시리즈에 식상한 사람들로부터 깊은 찬사를 받았다.
* 하드보일드 소설
냉혹 비정한 행동파 탐정에 의해 두뇌의 추리보다는 행동으로 사건 핵심을 추적하고 진상을 파헤치는 것으로서 추리소설의 세계에 획기적인 선풍을 불어넣었다.
하드보일드의 창시자는 진정한 리얼리스트라고 하는 더실 해미트이며 그의 대표작은 <말타의 독수리>이다. 이를 발전시킨 레이먼드 찬들러의 <길고 긴 이별>도 이에 속하며, 로스 맥도날드의 <움직이는 표적>이 이들을 계승하고 세련시켜 왔다.
영웅적인 탐정으로는 "금발의 사탄"이라고 불리는 샘 스페이드가 있고 필립 마로우, 루 아아처가 있는데 비정의 멋을 풍기는 험프리 보가트의 이미지를 연상하면 될 것이다. 미국의 추리소설 평론가 안소니 바우처는 이들을 "해미트-찬들러-맥도날드 스쿨"이라고 이름을 짓고 있는데, 오늘날 이들에 의해 비정파 계보가 확립되었다.
* 경찰 소설
팀워크에 의한 경찰의 수사활동이나 경관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로서 87분서(分署) 시리즈가 대표적인 것인데, 1958년에 출판된 에드 맥베인의 <경관 혐오>는 이 시리즈의 최초 작품이다. 피엘 바아르 부처가 쓴 마르틴 베크 시리즈도 이에 해당되는데 대표작은 <웃는 경감>이다.
* 사회파 추리소설
심각한 사회문제나 기업의 조직에 존재하는 악과 공해문제를 추적하는 작품인데 지금 일본에서 크게 유행하고 있다.
일본의 사회파 추리소설의 쌍벽을 이루는 사람은 <점과 선>의 작가 마쓰모도 세이쵸(松本淸張)과 <죽음의 유역>의 작가 미나까미 쓰도무(水上勉)이다. 이런 종류의 소설의 세 가지 특징은 우리들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상적 현실에서 출발하며, 범죄의 사회적 동기를 중시하고, 탐정은 평범한 두뇌의 인물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비정파 탐정이 등장하지 않는 점에서 하드보일드와 구별될 뿐, 추구하는 방향은 거의 비슷하다.
이상 7가지 추리소설에서 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수수께끼 풀이에 중점을 두는 본격추리소설의 비현실성과 리얼리티에 중점을 둔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의 타락이 논쟁의 초점이 되고 있다.
본격 추리소설에 대한 비난은 비현실적이라는 점이다. 악마적인 천재라고 할 수 있는 범인이 계획한 교활하고 잔학한 완전범죄의 수수께끼를 천재적인 탐정의 명석한 두뇌로 선명하게 해결하는 일은 평범한 실사회의 실정과는 거리가 멀다는 이야기다.
이에 대신해서 등장한 사회파 추리소설은 평범한 인간이 평범한 동기로 일으킨 범죄를 평균적인 인간이 마치 현실적인 일처럼 평범하게 추리해서 해결함으로써 현실감을 줄 수는 있으나, 추리소설의 즐거움인 불가사의한 수수께끼를 해결하는 지적인 흥분을 얻을 수 없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으며, 챔피언이 없는 2류 시합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있다.
본격 추리소설에 대해 가장 격렬한 비판을 가한 사람은 레이먼드 찬들러이다. 그는 종래의 추리소설을 전적으로 부정했다. 그는 본격 추리소설의 특수성을 거의 인정하지 않고 리얼리즘을 제창했다.
그는 1944년 12월에 발표한 그의 에세이 <단순한 살인 예술 The Simple Art of Murder>에서 본격추리소설은 리얼리티에 관한한 "제로"라고 했다. 그의 의도는 생생한 인간의 묘사에 있었으며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었다. 본격 추리소설의 비현실성과 인간 상실에 대해 그는 공박했다. 그는 시종 인생에 대한 날카로운 공격적인 태도로 민중을 위한 소설을 썼다. 해미트와 찬들러의 소설은 일반 독자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으며 현대 추리소설계에서 확고한 지위를 점하고 있다. 그러나 추리소설이 지닌 유희문학으로서의 숙명을 부정하고, 추리와 논리적 흥미를 희생시킨다면, 추리소설이라는 특수 문학 형식은 사라지고 보통 문학이 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다.
그런데 이 유파에 속하는 현대적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의 일부 작가들은 불행하게도 모방자가 늘 그러하듯이 지나치게 자신들의 방법을 개량하려고 했다. 범죄자들은 더욱더 잔학하고 광포해지고, 사디즘이 범람하게 되고, 비키니를 입은 여성 등장인물은 더욱 더 색정광녀(色情狂女)가 되었으며, 탐정은 더욱 더 방약무인해지고, 경관은 더욱 바보가 되고 타락해버렸다.
그래서 너무나도 저속하고 어처구니없는 선정주의(煽情主義)로 타락한 행동 추리소설의 범람시대를 초래하게 되었는데 이 유행은 더욱 확대일로를 걷고 있다.
이와같은 풍조를 개탄한 서머셋 모옴은 <추리소설의 쇠퇴>에서 마침내 "추리소설은 멸망했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러나 비평가들이 입을 모아 아무리 비난을 하더라도 "스필레인 선풍"에서 보는 바와 같이 사디즘과 에로티시즘 작가라는 레테르가 붙은 이들의 작품들은 엄청나게 팔리고 있다. 미키 스필레인은 <심판은 내가 한다> 한 권으로 밀리언셀러 라이터가 되었다.
아무튼 지금은 하드보일드소설이나 리얼리즘에 철저한 "범죄소설"의 전성시대로 이행하고 있는 감이 있으며 살인이나 트릭이 일체 없는 추리소설이 멋진 작품으로 생각되는 풍조가 생기고 있다.
추리소설의 고전적인 정의를 "제공된 구체적인 단서나 자료를 데이터로 한 논리적인 사고, 즉 순수한 추리과정에 의해 범인을 찾아내는 것을 테마로 하는 소설"이라고 한다면 실사회의 범죄를 추적하는데 주안을 두는 소설은 범죄소설로서 별도로 다루어져야 할 것이다.
아무튼 무엇을 즐기느냐 하는 것은 독자의 기호에 맡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만, 유행이라고 하는 것은 머리 좋은 디자이너가 만들어 내는 것이고 대중은 무의식적으로 끌려가는 것이다.
그런데 서덜랜드 스콧이 그의 저서<현대 추리소설의 진전 The March of the Modern Mystery Novel>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근년에 와서 영국의 우수작가 사이에서는 고전적인 본격 추리소설 형식으로 되돌아가려는 확실한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예컨대, 힐다 로렌스, 마가레트 어스킨, 엘리자베드 데일리 그리고 프란시스 크레인 - 모두 다 여성임 - 의 작품을 보면 초기의 위대한 추리소설을 연상케 하고 있다. 그러나 복고풍의 새로운 디자이너들이 탄생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추리작가의 기본적인 것으로의 복귀는 이미 그 징후가 나타났으며, 옛 것으로의 복귀의 여행은 꽤나 오랫동안 계속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2. 추리소설의 소재론
오늘의 작가들에게는 다른 사람이 손대지 않은 소재나 새로운 진전법이나 독창적인 동기,지금까지 사용되지 않은 소거법 등을 찾느라고 무진 애를 쓰는 경우가 많다. 오늘날 놀랄 만큼 대량의 추리소설이 생산되고 있는 현상에 비추어 당연한 일이라고 할 것이다. 그 어떤 트릭(trick)이나 트위스트(twist)도 이미 사용된 것으로 생각되기 마련이다. 옛날의 대가들에게는 이런 문제에 당면하는 일은 없었다. 신인들은 항상 새로운 엑사이팅한 수단을 찾느라고 애쓰고 있으나, 추리소설의 소재는 오늘날이라고 해도 본질적으로 같은 것은 새삼 말할 필요도 없다.
B.J.R.스태플러가 지적한 것처럼 셔얼록 홈즈의 50퍼센트는 어떤 추리소설 속에도 포함되고 있는 것이다. 상상을 초월한 듯한 트릭에도 지금은 일정한 패턴이 정립되어 있는데 대별하면 다음과 같다.
(1) 탐정이나 경찰관이 곧 범인이거나, 경관으로 등장한 사람이 알고 보니 범인이라는 착상은 현명한 독자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검토하고 넘어가기 마련이다. 심지어 검사나 재판관이 범인인 경우도 있으니, 미스터리의 세계에선 아무도 믿을 사람이 없다.
로널드 녹스의 <추리소설의 십계(十戒)>에 의하면 페어플레이를 위해 탐정 자신이 범인이어서는 안 된다고 했으나 가장 기발한 착상으로 활용되었다.
(2) 자살자가 곧 범인이거나, 피해자가 곧 범인인 경우도 적지가 않은데 지금은 초보적인 속임수라고 할 수 있겠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피해자가 곧 가해자인 경우는 매우 특색이 있다고 할 수 있는데, 확실히 살해되었다고 생각되는 피해자가 실은 범인이라는 아이디어는 유명 작가의 거의 전부가 시도한 시기가 있었다.
특히 시체가 감쪽같이 사라졌거나 얼굴이 없는 시체만이 남아있을 경우에는, 피해자로 지목된 자가 곧 가해자인 경우이다. 이젠 현명한 독자는 얼굴이 없는 시체의 트릭 따위에는 속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트릭에 새로운 트위스트를 시도하고 있다.
이와 반대로 범인이 사라졌을 경우에는 가해자가 곧 피해자라고 할 수 있다.
(3) 가장 논의를 많이 일으킨 경우는 사건의 서술자가, 말하자면 <왓슨>의 역할을 담당한 인물이 곧 범인인 경우다. 누구나 감쪽같이 속기 마련이다. 독자들은 심지어 사기를 당했다고 항변까지 했다.
(4) 가장 특이한 것은 아마도 죽은 자에 의한 살인인 경우라고 생각된다. 150년 전에 죽은 여자에 의해 그 후손이 네 명이나 피살된 경우(카터 딕슨의 작품에서)가 있다. 그러니 용의자가 죽었다고 해서 안심할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5) 살인 목격자가 곧 범인인 경우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다는 점에서 불가능을 가능케 한 대표적인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6) 사건의 국외자가 범인인 경우도 있는데, 주요 등장인물이 범인이 아니라는 점에서 수긍할 수 없는 소재이다.
(7) 사건을 의뢰한 자가 범인인 경우와 그 반대로 사건을 의뢰 받은 자가 범인인 경우도 있는데 이 경우에는 범인의 정체를 간파하는데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8) 특히 피해자와 가해자가 공모자이거나, 쫓는 자와 쫓기는 자가 공모자인 경우는 가장 많이 애용되고 있는 것 같다. 트릭의 독창성보다는 상황 설정의 독창성 때문에 모두 걸작으로 지목되는 예라고 할 수 있다.
(9) 살인 편집광에 의한 연속 살인이나 집단 살인으로 가장하는 경우도 있는데, 속지 말라고는 하지만 감쪽같이 속고 마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10) 그 밖에 교환살인, 순환살인 등의 수법이 있다. 대표적인 소재는 역시 사라진 시체의 트릭, 1인 2역의 트릭, 금성 철벽의 알리바이 조성, 연속살인, 밀실의 살인 등이라고 할 수 있다.
하워드 헤이크라프트는 그의 저서 <오락을 위한 살인 Murder for Pleasure>에서 지금부터 미스터리를 쓰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써서는 안 되는 사항을 열거하고 있는데, 첫 번째 항목에 "밀실을 피할 것. 오늘날 그것에 신기함과 흥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은 천재뿐이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도날드 A.예이츠의 <밀실론>에 의하면 밀실의 이야기는 성서 외경(聖書外經)의 <벨의 이야기>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한다.
오늘날의 밀실법(Method of the Sealed Room)의 창조자는 추리소설의 아버지인 에드가 앨런 포우이다. 세계 최초의 추리소설은 동시에 최초의 밀실의 살인을 다룬 이야기인 것이다.
1841년 4월에 발표된 <모르그가의 살인>은 밀폐된 방에서 모녀가 살해된 사건을 다룬 것이다. 코넌 도일도 포우의 영향을 받았음인지 1892년에 발표한 <얼룩 끈>에서 기본적인 밀실의 살인을 다루었다. 위 두 가지 경우의 죽음의 사신은 사람이 아니었는데, 출입할수 있는 약점이 있었다는 점에서 엄밀하게 밀폐된 밀실은 아니었다.
밀실파(Locked Room School)의 교조(敎祖)로 신격화되고 있는 존 딕슨 카가 최고의 추리소설이라고 찬사를 보낸 가스똥 루루의 <황색방의 비밀>(1907년)도 밀실이 테마가 되고 있는데, 그는 금고처럼 밀폐된 실내에서의 범죄를 창안해 냈다.
오늘날의 독자들에게 친밀감이 깊은 작가들도 밀실에 공헌한 사람이 많은데, 반 다인은 <카나리아 살인사건>(1927년)에서, 엘러리 퀸은 <차이나 오렌지의 비밀>(1934년)과 <일본 언치새의 수수께끼>(1937년)에서 각각 밀실의 살인을 다루었다.
1935년 카는 <세 개의 관>에서 "밀폐되어 있는 방"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상태의 일반적인 메카닉과 그 발전에 관한 강의를 마련하고 있다. 그것은 이미 간략하게 소개한 바가 있다.
밀실의 역사도 이젠 2세기에 접어들었다. 그래서 인지(人智)로 짜낼 수 있는 신기한 방법은 많은 작가에 의해 이미 다 동원되었다는 것이 헤이크라프트의 주장일 것이다. 그래서 밀실의 이야기는 이제 더 새롭게 쓸 것이 없다는 이야기인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초심자가 처녀작에서 밀실의 세계에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불가능의 가능! 이것이 바로 밀실의 테마라고 할 수 있다.
아무튼 세계 모든 나라의 추리소설은 위에 열거한 몇 가지의 패턴의 다양한 배리에이션에 불과한 것이며, 그 패턴에는 큰 변함이 없는 것이다. 1962년 10월에 발표된 세바스챤 자프리조의 <신데렐라의 덫>은 굉장한 센세이션을 일으킨 작품인데, 여주인공이 곧 피해자와 가해자 그리고 증인과 탐정이라는 1인 4역을 연출하고 있다. 또한 이 작품은 불가능한 트릭을 가능케 했다는 칭송을 받았다. 그러나 이 경우도 기본적인 패턴의 교묘한 조립에 불과한 것이다. 하지만 그 조립방법에 독창성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스콧의 말처럼 추리작가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거의 모든 경우에 다른 작가의 아이디어를 차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탐정 작가론>을 집필한 영국의 더글라스 톰슨에 의해 근대 추리소설 중 5대 걸작의 하나로 손꼽힌다고 절찬을 받은 아가다 크리스티의 <애크로이드의 살인>의 트릭도, 크리스티는 독창적인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알고 보면 스웨덴의 두 작가에 의해 사용된 선례가 있다. 크리스티 여사로서는 전혀 깨닫지 못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일면에서 보면 전혀 무방한 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이 온당치 못하다고 하면 예술분야의 걸작은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3. 추리소설의 독자론
추리소설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불행한 천재" 에드거 앨런 포우(1809-1849)는 헤이크라프트가 지적한 바와 같이 병적 환상에서 도피하기 위해 건강한 사고가 필요한 추리소설을 창조했다고 했다. 사실 포우는 13세의 소녀와 결혼했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이상 성격에서 오는 미친 행동이며, 이상 성욕의 호기심에서 생긴 행위로 해석했다.
J.W.클루지는 단언하여 "포우는 자신이 미치광이가 되지 않기 위해 추리소설을 창조했다"고 했다. 이에 대해 헤이크라프트는 "오늘날 똑같은 이유로 사람들은 추리소설을 읽고 있다"고 익살스럽게 비양거리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분석으로 작가의 진실에 도달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아무튼 범죄 심리학자인 데이비드 에이브라함센 교수가 지적한 바와 같이 정상이라고 생각되는 사람들도 여러 종류의 불균형적 성격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다. 추리소설은 바로 불안, 권태, 근심, 공포로부터의 도피를 원하는 현대 문명사회의 사람들을 위해 있는 것이다.
고도로 문명이 발달한 구미사회에서 추리소설이 크게 붐을 이루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추리소설을 즐기지 않는 이유는 바로 현실도피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정신건강 탓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떻든 포우는 추리소설의 형식과 법칙을 만들어냈다. 밀실의 살인, 실화에 바탕을 둔 센세이셔널한 테마, 안락의자형 탐정, 심리적인 맹점, 의외의 범인 등…
코넌 도일은 포우가 추리소설에 대한 모든 수법을 창안했기 때문에 그 뒤를 잇는 사람들은 자신의 창의성을 발견할 여지조차 없는 것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더우기 포우가 창조한 명탐정 오귀스트 뒤팡의 강렬한 개성은 당시의 뛰어난 문인들을 자극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논리의 소설, 논리적 주인공의 출현은 하나의 경이였다. 오늘날 논리적 구성이 요구되는 추리소설의 원리의 명확한 설계도를 남긴 것은 포우의 독창성에 의한 것이다.
도로시 세이어즈 여사가 말한 바와 같이, 사람들은 옛부터 어려운 퍼즐게임에 머리를 괴롭히면서도 그것을 즐겨 왔다. 고행과도 같은 논리적인 사고를 전개시킨 끝에 난문에 대한 해답을 발견했을 때의 즐거움, 바로 그것을 맛보기 위해서이다. 본격적 추리소설이면 어느 작품이나 탐정과 범인의 지적 투쟁이 존재하는데 바로 독자와 작가의 지적인 게임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지성인들이 구미 사회의 지성인과는 달리 논리를 주안으로 하는 추리소설의 페이지를 펼치고 지적인 분석과 난문의 정복을 통한 논리적인 두뇌 게임을 즐기지 않는 또 하나의 이유는 모든 아시아 민족이 그런 것처럼 논리적인 사고에 익숙하지 못하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류의 역사는 - 특히 구미 사회에서는 1페니로 취하고,2페니로 만취하는 "진(Gin)"의 역사이며, "진"에 힘입은 -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 살인의 역사이기도 하다. 죄를 범하려는 성향은 전 인류에게 보편적인 것이다.
니콜라스 프릴링은 "살인이나 그 외의 어떤 범죄도 오락의 일부가 아니라 완전히 일생의 일부"라고 했다. 엘러리 퀸은 "미칠 듯한 격정의 충동으로 행한 폭력적인 범죄는 실사회의 인생 드라마 중에서 최고로 정화된 것이며, 그중에서 특히 살인은 특수한 정점에서는 드라마이다"라고 했다. 반 다인은 또 "사람은 적어도 20인 정도의 인간에 대해 죽일 만한 동기를 지니고 있으며, 그만한 동기로 100건 중 99건까지의 살인을 실현한다"고 했다. 콜린 윌슨은 그의 <살인 사례집 A Casebook of Murder>에서 "사람들은 줄곧 몸서리쳐지는 범죄에 매혹적인 전율을 느낀다"고 했다. 아무튼 인간은 "쾌락 살인"이라는 말이 있듯이, 피를 보는 것을 즐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까닭에 추리 작품 중의 가공의 유혈 소동이나 인간의 행복의 파괴 등에 대해 병적인 관심과 희열을 느끼면서 선선히 받아들이고 있다. 이것은 커다란 수수께끼로 되어 있다.
이 수수께끼에는 콜린 윌슨이 하나의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즉, 사람들은 이야기 속의 살인자와 자신을 동일시(同一視)함으로써 심층에 깊이 새겨진 숨겨진 살인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킨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살인자의 입장에 놓이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지만, 그가 어떤 나쁜 결말에 이르는가를 보기 위해 한순간 그의 입장에 서 보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 읽고 나면, 마치 악몽에서 깨어나 자신의 침실에 있는 것을 알고 가슴을 쓰다듬을 때처럼 다행스럽게 생각하는 것이다. 어떤 입장에 자기 자신을 놓아 본다는 것은 언제든지 그만 둘 수 있기 때문에 즐거운 것이다.
아무튼 사람들은 사형대에 서지 않은 채 살인을 즐길 수 있는 방법을 추리소설 속에서 구하려고 하는 것 같다. 따라서 살인이 없는 추리소설은 계란이 없는 오믈렛과 같다고 한다. 독자는 엽기적인 살인이 빈번히 일어나고 피투성이에 그로테스크한 것을 요구한다.
우리나라 사람이 추리소설을 즐기지 않는 마지막 이유는 바로 추리소설이 문명과 도덕을 파괴하는 씨앗을 품고 있다는 지나친 의식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추리소설은 인간의 범죄 성향을 도발하기보다는 - 역설적인 표현일는지는 모르겠으나 - 인간의 원시적인 충동을 승화하는 역할을 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추리소설 속의 인간의 죽음이나 살인이라는 이상 상황조차 단지 수수께끼의 문제로서 유희화 되고 있음에 불과한 것이며, 이 장르의 매력의 대부분은 존재하기 어려운 스토리의 설정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리얼리즘 파에 의해 날카롭게 비판받고 있는 점이기도 하다.
지금 구미 사회의 현대적인 문명의 조류가 - 좋은 것이건 나쁜 것이건- 밀물처럼 밀려드는 우리나라 실정으로 보아 멀지 않아 우리나라 사람도 문명이 만들어낸 정신질환에서 도피하고 합리적인 사고를 통한 지적인 게임을 즐기기 위해, 범죄의 세계로 도피함으로써 오히려 범죄에 대한 충동을 승화시키기 위해 추리소설을 찾을 것이다. 마치 구미 사회의 품위 있는 노부인들이 파묻힌 보물을 찾아내려는 것과도 같은 심리로 도서실에 가서 추리소설을 찾듯이 찾아 헤맬 것이다.
그러한 시기를 위해 - 바로 지금이 그런 시기라고 생각되지만 - 이 작은 책도 책방의 한 구석에서 손길이 뻗쳐지길 기다릴 뿐이다.
1979년 9월 盧 媛 (장편 추리소설 [악마의 일력] 後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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