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에 탐정으로서보다는 학자로서, 아니 로빈 윙크스 Robin Winks가 그처럼 잘 지적했듯이, 어쩔 수 없이 이 두 가지 다로서, 『양성성의 인정을 향하여 Toward a Recognition of Androgyny』라는 책을 출판하였다.
“ 양성성”이라는 용어는 그 때는 매우 새로운 말이었고, 따라서 많은 서평가들을 놀라게 하였다. 지금에 와서 양성성이라는 말은 이제 대중매체의 사건이 되었고, 나는 학자로서 라깡과 기호학과 정신분석의 역사를 적절하게 언급하면서 훨씬 더 복잡하게 성을 논하고 가르쳐왔다. 하지만 추리소설과 관련해서 양성성을 결코 논해 본 적은 없다. 여기에서 나는 그것을 논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추리소설에는 일종의 성의 분리가 있다는 사실이 1970년 이래 나에게 떠올랐지만 상당히 비현실적인 것이었고, 결코 확실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성과 추리소설을 논해야겠다는 결심은 한바탕 집안 청소를 하는 동안에 갑자기 하게 되었다. 아이들을 길러본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그들을 집을 떠나보내는 일은 그들에게 자기 소유물들을 가져가도록 하는 일에 비교하면 쉬운 일이다. 자신들의 공간에 간직할 정도는 아니고 부모들의 공간에 간수해 두었으면 할 정도로 정이 든 물건들을 10년간 간수한 후에야 대부분의 부모들은 반역을 시작한다.
‘ 와서 가져가라, 그렇지 않으면 치워버릴 거다’하고 그들은 말한다. 최근에 쌓아둔 대부분의 잡동사니들이 치워질 때, 나는 1940년과 1964년에 출판된 종이표지로 된 두 권의 책을 발견하였다. 『소년 추리소설 The Boys' Book of Great Detective Stories』과 『제2소년 추리소설 The Boys' Second Book of Great Detective Stories』이라는 제목의 이 책들은 하워드 헤이크래프트 Howard Haycraft가 편집한 것이었다. 첫권의 서문은 다음과 같이 시작되었다 : “ 이 책은 현재의 십대 소년들-어린이용 책보다는 더욱더 강한 것을 요구하는 적극적이고, 성장 중에 있는 모험심 있는 청소년들-을 위한 것이다. 그 나이의 소년들은 자연스레 추리소설로 기울어지기 때문이다.” 이 책은 포우 Poe로 시작해서 세이어즈 Sayers로 끝나는데, 그 사이에 아가사 크리스티 Agatha Christie가 들어 있었다. 헤이크래프트가 그 당시에 지금의 영화제작자들이 알고 있는 것, 곧 소녀들은 소년들에 대한 이야기에 매료될 것이며, 누구도 소녀들에 대한 이야기를 원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것이 추리소설에도 해당되는 이야기일까?
매우 흥미있는 작가들의 작품에서 영국 추리소설은 처음부터, 그리고 미국 추리소설은 최근에 매우 양성적이다. 내가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양성성이란 무엇인가? 스테레오 타이프적인 성에 대한 반대를 의미한다. 여기에서 심리학자 샌드라 벰 Sandra Bem이 양성적인 사람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지를 보자. 흥미롭게도 그녀는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로서 특징짓고 있다. 스테레오 타이프적인 여성 남성들은 무엇이 적절한 행동인가를 모를 때에 행동할 수 없다. 처방 안된 상황에 놓일 때, 그들은 당황과 무위로 빠져든다. 벰이 다음처럼 설명하고 있듯이 :
모든 사람들이 다 심리적으로 양성적일지라도, 세상은 두 종류의 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하여 여성이 된다는 것은 전형적으로 여성의 신체적 틀을, 여성의 생식기를, 가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월경하고 임신.출산할 수 있으며, 아이를 수유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남성이 된다는 것은 전형적으로 남성의 신체적 틀을, 남성의 생식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수염을 기를 수 있고 여성에게 임신시킬 수 있으며, 따라서 아버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철저한 외과 절단 수술을 하지 않고서는 생물학적으로 주어진 것을 피할 수 없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심리학적인 건강이란 반드시 자신의 남성성이나 여성성에 대한 건강한 의식이 포함되어야 한다. 그러나 자신의 남성성이나 여성성에 대한 건강한 의식이란 거울을 들여다보고서 그 곳에서 보는 자신의 육체에서 완벽하게 편안함을 느낄 수 있다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
자신의 육체에 편안해한다는 것을 넘어서, 자신의 성이 자신의 행동이나 생활 양식에 그 밖의 다른 영향을 끼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주장하고자 한다. 따라서 여성은 자기가 원하면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편안함을 느껴야 한다고 내가 시사한다 할지라도, 이것이 그녀가 반드시 아이를 낳기를 원해야 한다거나 그녀가 아이들과 집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남자는 자신이 곧추설 수 있는 음경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만족스러워해야 한다고 말했을지라도, 이것이 결코 성관계시에 남성이 더욱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된다거나 혹은 그의 성관계의 상대가 반드시 여성이어야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 철저한 외과 절단수술을 하지 않고서는”이라는 종속구문에 주목해 보자. 성전환의 전 현상은 성역할을 전통적인 남성성과 여성성의 양극단으로, 절대적으로 구별되는 것으로 규정한 결과라는 것을 우리는 최근에 이해하게 되었다. 성전환자들은 판에 박힌 성별행위의 희생자들이다. 이러한 사실의 가장 좋은 예를 잰 모리스 Jan Morris의 『수수께끼 Conundrum』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녀는 여성으로 전환되기 이전에, 모험심 많은 저널리스트였으며, 운동화를 신고 에베레스트를 달려가듯이 올랐던 사람이었다. 그녀는 쓰고 있다 :
내가 여성으로서 점점 더 대접을 받을수록, 나는 점점 더 여성이 되어갔다. 내가 차를 후진시키는 일이나 병마개를 따는 일에 무능할 거라는 기대를 받게 되면, 이상하게도 나는 무능하게 되었다...... 나의 변호사는, 어느 날 아침, 마음을 놓고 있던 순간에, 나를 “ 나의 아이”라고까지 불렀다. 그리고 날마다 나를 열등한 자라고 말했으며, 한 달 두 달이 지남에 따라 나는 나도 모르게 그 상황을 받아들였다. 현재에도 남자들은 그들보다 아는 것도 덜하고, 능력도 덜하며, 덜 자기중심적인 여자를 더 좋아한다는 것을 나는 발견하였고, 그래서 나는 그들을 기쁘게 해주었다...... 남자들의 생색내는 듯한 태도는 참을 수 없지만, 정중한 우대는 매우 기분좋았다....... 나는 특별히 차를 후진시키는 일을 잘하고 싶지 않았다......
나의 인생관 또한 변하였다. 나는 이제 더 감정적으로 되었다. 나는 매우 쉽게 울었고, 바보처럼 슬픔과 아첨에 쉽게 굴하였다....... 날마다 겪는 어떤 비본질적인 감각을 내가 특히 여성적이라고 생각했는가를 한번 살펴보자. 첫째, 나는 작고 깔끔하다고 느낀다. 사실은 나는 5피트 9인치며, 133파운드에 이르는 작지 않은 체구이다. 그리고 나는 깔끔하지도 않다. 그러나 여성성이 공모해서 나로 하여금 그렇게 느끼도록 한다. 나의 블라우스와 스커트는 가볍고, 밝고 주름져 있다.
내 구두는 다른 어떤 옷보다 내가 오히려 좋아하는 취약성을 나에게 주는 것 이외에도 나의 발을 실제보다 훨씬 더 우미하게 보이게 하였다. 내가 거리로 걸어나갈 때 나는 의식적으로 세상의 칭찬을 기대하고 있음을 느꼈고, 그것은 내가 남자로서는 결코 느껴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리하여 신문 판매인이 호의적으로 나를 쳐다보는 것 같을 때, 혹은 우유 배달차의 남자가 나에게 미소를 보였을 때, 나는 어리석게도 마치 <선데이 타임즈>에 나에 대한 좋은 평이 실린 것처럼 우쭐해짐을 느꼈다.
이것과 다른 경우, 곧 처음부터 여성이었던 마리시아 유드킨 Marcia Yudkin의 느낌과를 비교해 보자 :
나는 성전환자가 “ 진정한 여자”라고 말할 때의 의미로서의 “ 진정한 여자”임을 내 자신이 느끼지 않는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내 자신을 “ 진정한” 한 인간, 특정한 성이 아닌 한 인간으로서 느낄 뿐이다. 물론 나는 내가 여성임을 알고 있다. 마치 내가 내 키는 5피트 6인치이고, 갈색머리와 푸른 눈을 가졌으며, 나이는 25살임을 알고 있는 것처럼. 그러나 나는 이러한 사실들이 나를 규정하게 하지 않으며, 또한 다른 사람들이 그러한 외형적인 사실들에 의해서 나를 규정하지 않는 그러한 상황에 있기를 더 좋아한다....... 나는 내 자신을 ‘ 여성의 육체 속의 여성’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만약 생물학적인 사실들과 부합하거나 혹은 부합하지 않는 내면적인 실재로서의 여성이라는 성전환자의 견해가 모든 사람에게도 해당된다면, 응당 그래야겠지만. 이러한 직관 또한 여성은 우연히 여성이라는 성을 갖게 된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여성이라는 철학자들의 주장과도 상반되는 것이다.
이것은 미국 여성의 말이다. 그러나 수년 동안 그것은 소위 양성성이라는 것을 지지했던-전혀 그럴 것 같지 않은 로렌스 D.H. Lawrence도 마찬가지로 지지했었던- 영국적인 것이었다. 다음은 도로시 세이어즈 Dorothy Sayers에 의해서 적절하게 인용된 로렌스이다 :
남자는 여자를 동등한 자로서, 스커트를 입은 남자로서, 천사, 악마, 아이의 얼굴, 기계, 도구, 가슴, 자궁, 한 쌍의 다리, 노예, 백과사전, 이상, 외설로서, 기꺼이 받아들이려 한다. 한 가지 그가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것은 그녀를 인간으로서, 여성이라는 성을 가진 진정한 인간으로서이다.
영국소설, 특히 영국의 미스터리물들은 처음부터 “ 양성성”을 받아들였다. 사실상 영국의 추리소설은 항시 양성적인 남성- 비록 그들은 그 호칭을 달가워하지는 않았지만-을 자랑하였다. 1920년대에 여성들이 범죄소설 작가로서 추리소설 분야에 대거 뛰어들었을 때, 그들은 그들의 탐정을 매력적이지만 여성적으로 만듦으로써 남성작가들의 뒤를 따랐다.
이 여성작가들이 만들어 낸 남자 탐정들은 그 전임자들보다 더 신사다웠고, 상류층이었으며, 더 무기력하였다. 이것은, 모든 훌륭한 혁명분자들을 상당히 분노케 했으며, 그리고 그것은 이해할 만한 분노였지만, 물론 거짓이었다. 범죄자들과 그 밖의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여성적인 사람은 누구나 무능력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수년 동안 여성작가들은 조심스럽게 옷을 입힌, 신사다운 주인공들을 사건 사건마다 과시하였다. 그에 따라 판매고는 솟아 올랐고, 그 형식이 특히 지성인에게 가장 인기있는 장르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내가 여러분에게 아가사 크리스티가 얼마나 많은 돈을 벌었는지, 혹은 그녀의 탐정, 포와로 Poirot- 여러 가지로 빈번하게 묘사되어왔지만 “ 남자답다”고는 결코 불릴 수 없는 -을 상기시켜줄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남자다움은 사실상 그 팀에서 함께 일하는 왓슨 일행들에게 남겨진 것이었다. 여기서 단지 지나가면서, 영국인이 홈즈로부터 시작된 추리소설에서 남자다움과 어리석음을 동일시한 최초였다는 것을, 그러나 아마 마지막은 아닐 것이라는 점만 지적하고자 한다.
미국은 다른 분야에서처럼 여기에서도 성적 스테레오 타입으로부터 옮겨가는 일이 느리게 진행되었다. 미국인들은 다른 문화에서보다도 좀더 빨리, 그리고 더욱 단호하게 아이들을 성별로 구분하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의 남성작가들은 강인한 탐정들을 만들어 냈을 뿐만 아니라 판에 박힌 여성 타입, 곧 죽거나 혹은 남자를 잡아먹는 타입의 여성을 만들어 냈다. 로버트 파커 Robert Parker는 드문 예외 가운데 한 사람이다. 스펜서 Spenser는 강인하지만, 그러나 그는 또한 부드럽다. 여성과 시에 대한 그의 견해는 도덕적인 다수뿐만 아니라 람보까지도 놀라게 할 것이다.
그러나 큰 변화를 가져온 사람은 여자 탐정을 만들어 낸 여성작가들이다. 얼마전에 이 문제에 대해서 함께 논의를 했던 캐롤 브래너 Carol Brenner -여러분 모두가 잘 알고 있듯이, <살인잉크 Murder Ink>라는 굉장한 서점을 운영하고 있으며, 모든 종류의 미스터리물에 대해서 광범위하게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굉장히 호의적인- 는 아만다 크로스 Amanda Cross가 1964년에 그녀의 소설들을 출판하기 시작했을 때, 살인잉크 서점의 서가에 있는 소설에는 채용할 수 있는 여탐정이 거의 없었다고 말하였다.
1972년에 이르러 우리는 제임스 P.D. James의 『여성에게 부적절한 일 An Unsuitable Job for a Woman』에서의 영국에서 온 그 굉장한 코르델리아 그레이 Cordelia Gray를 갖게 되었다. 오늘날은 더 많은 여성작가들이 있는데, 그러나 캐롤과 아마 마릴린 스타시오 Marilyn Stasio, 미셸 슬렁 Michele Slung을 제외하고는 우리 일반인은 모두 접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들 대부분은 미국인이다. 최근에 가장 굉장한 모험담인 『살인명령 Killing Orders』을 쓴 사라 파렛스키 Sara Paretsky의 바르샤브스키 Warshawski는 여성 사설 탐정이다. 그녀는 아마츄어와 프로 탐정의 경계를 허물어뜨린 사람들 가운데 하나이며, 그녀는 그 일로 생활비를 벌고 또한 그 일에 매우 유능하다. 도로시 우낙 Dorothy Uhnak의 『거짓 증인 False Witness』에서의 리니 쟈코비 Lynne Jacobi는 사설 탐정이라기보다는 지방검사 사무소에서 일하는 굉장한 탐정이며, 어떻게 양성적인 여성이 범죄소설에서 훌륭하게 성공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좋은 본보기이다. 마찬가지로 캐롤린 휘트 Carolyn Wheat의 소송 구조변호사인 카산드라 제임슨 Cassandra Jameson은 대부분의 미국 소설가들-추리소설가거나 보통소설가이거나 간에-이 판에 박힌 사고를 받아들이듯이 그토록 열렬하게 그러한 사고를 피하고 있다.
스테레오 타입적인 성 역할로부터, 더 중요하게는, 스테레오 타입적인 성 역할에 순응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경멸과 조소로부터 벗어나서 양성성으로의 방향전환은, 내가 매우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는데, 다른 어떤 장르에서보다도 추리소설에서 더욱 큰 계기를 발견할 수 있으며, 다른 어떤 곳보다도 미국에서 최근에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영국 여성 추리작가들 그리고 딕 프란시스 Dick Francis를 포함한 많은 남성작가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영국이 최근에 우리의 혹은 그들 자신의 양성적인 전통보다는 우리의 남자다움을 수락하고 있다는 사실은 슬픈 현실이다. 물론, 범죄소설이나 혹은 다른 장르에서 양성성으로의 이러한 전환이 쉬운 것은 아니다. 양성적 인간을 연구했던 앞서 말했던 샌드라 벰은 그녀의 남편과 함께 그들의 자식들을 소위 그녀가 말하는 ‘ 성 도식화의 과정’으로부터 자유롭게 양육하려고 하였다. 지배문화로부터 벗어나는 가치와 신념을 주입시키기 위해서는, 이데올로기가 아이들에게 침식해오기 전에 아이들에게 있는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를 파내기 시작해야 한다고 벰은 말하고 있다. 벰과 그녀의 남편은 하나의 생물학적 징후라기보다는 모든 종류의 외적 징후에 의해서 성을 배치하는 성 도식화의 과정을 그들의 아이들에게는 침투하지 않게 하려고 시도하였다. 매우 힘든 작업이긴 하지만 그들은 이것이 매우 고무적인 일임을 알았다. 벰은 보고하고 있다.
우리가 우리 딸에게 동화책 제1권을 읽어주기 전에 우리는 그녀와 함께 그 이야기가 반영하고 있는 남녀에 대한 문화적인 믿음과 태도에 대해서 이야기하였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읽는 동안에 우리는 빈번하게 “ 이 이야기의 작자가 여자아이는 항시 구조될 필요가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는 것은 재미있지 않느냐?”와 같은 언급을 하였다. 만약에 그러한 논의가 지나치게 서투른 것이 아니라면, 그러한 논의는 그 아이가 그 이야기를 완벽하게 즐길 수 있는 이해의 배경을 제공해줄 수 있으며, 동시에 성 스테레오 타입이 그들 자신의 믿음이나 진실에 부적절한 것으로서 무시하는 것을 배울 수 있다.
4살된 벰의 아들은 남근중심주의를 과장없이 직면하였다. 그는 어느날 유치원에 갈 때 머리핀을 하고 가기로 작정하였다. 그 날 여러 번 다른 남자아이 하나가 여자아이만 핀을 꽂고 다니기 때문에 제레미는 여자아이임에 틀림없다고 그에게 말하였다. 핀을 꽂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며, 남자아이라는 것은 남근과 불알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이 꼬마아이에게 설명하려고 애쓴 후에, 제레미는 드디어 그의 요점을 더욱 설득력있게 하기 위해서 그의 바지를 내리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그 꼬마아이는 설득되지 않았다. 그는 단지 “ 누구나 남근은 가지고 있지. 그러나 여자아이만 핀을 꽂는다”라고 말했을 뿐이다.
나는 이 글 전체를 읽어보라고 여러분에게 추천하고 싶다. 왜냐하면 결국 우리 모두는 모든 사람(중요한)은 남근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직면하고 있으며 우리는 동화에 나오는 스테레오 타입적인 성에 맞서서 미리 틀을 짜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불행하게도 범죄소설에 대한 대부분의 이론가나 비평가들은 현재의 추리소설에서의 여성의 출현을 침투의 초기단계에서의 하나의 반응으로서 보고 있다. 만일 그 침입자를 목격하지 못하고, 특히 그들을 격려하지 않으면 그들이 사라져버릴 거라는 기대를 그들은 가지고 있다.
나는 연속 2년간 미스터리 작가에 대한 가장 훌륭한 전기적 혹은 비평적인 책을 뽑는 미국 미스터리 작가협회에서 일하였다. 그렇다고 책 선정에서 나의 유일한 혹은 주요한 기준이 “ 성 도식화 과정”에 대한 문제에 정통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주시기 바란다. 2년간 그 협회는 현명하게도 기꺼이 만장일치로 책을 선정하였다. 첫해에 그 상은 제임스 카인 James Cain의 전기에 수여되었고, 두번째 해에는 르 까르 Le Carre에 대한 훌륭한 연구에 주어졌다. 두 작가 모두 여성에 대한 독창적인 견해로 알려진 작가는 아니다. 르 까르가 카인보다 조금 낫지만 그러나 두 사람의 경우 모두 그 문제는 결코 부각되지 않았다. 내가 이러한 것을 언급하는 것은 내가 결코 추리소설 비평에서 새로운 노선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동시에 여성들이 최근에 더 많은 책을 쓴 것만이 아니라 -“ 여성들에게 신의 축복이!”-그들은 그 장르를 변형시키는 데 상당한 역할을 하였음을 누군가가 눈여겨 봐주기를 바란다. 나는 범죄소설에 대한 학문적이고 육중한 책을 두 서가 가득히 가지고 있다. 그러나 새로 부각되는 양성적 작가를 고려하고 있는 책은 몇권 안되며, 여성을 다룰 때에는 마치 “ 야 이봐, 여자들이 소프트볼 팀을 만들었어”라고 말하는 양, 별도의 부분에서 다루고 있다. 아무도 범죄소설에서 중요한 변화가 일고 있다는 것을 주목하지 않고 있다.
물론 그들이 그것에 주의를 돌리지 않는 데에도 성적 편견이 있다. 내가 좋아하는 두 명의 남성 소설가에게 국한시켜 말한다면, 딕 프란시스 Dick Francis와 로버트 파커 Robert Parker는 반 스테레오 타입의 길을 갔으며, 그들은 둘 다 명성과 지위와 보수로 보답을 받았다. 그러나 거칠고 재치있는 남자 주인공과 함께 남성소설에서의 양성적 여성들은 여성소설에서의 양성적 여성만큼 위협적이거나 생경하거나 위험하지 않다. 그리고 이 사실이 많은 비평가들이 주목해 왔듯이 양성성의 전역사에서 큰 전환점이 되었다. 남자들은 여성적인 특성을 가져도 되지만, 남성적인 여자에게는 재난 있으라. 융 Jung이나 노만 브라운 Norman O. Brown의 이론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저돌적인 여자들은 모든 사람을 놀라게 한다. 우리가 불편해하도록 교육받은 것은 하나의 생각일 뿐이다. 더 나아가 우리는 남성들을 훌륭한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 비여성”으로서 규정지어왔다.
충격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서 쓰인 책들-로망스건 서부극이건-이 지나치게 많다. 이러한 책들은 플롯뿐만 아니라 남녀에 대한 기대치가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독자들을 편하게 한다. 고인이 된 세 명의 트리오 함메트 Hammet와 챈들러 Chandler, 로스 맥도날드 Ross Mcdonald에 의한 미국의 고전들이 점검되지도 않고 도전받지도 않은 그러한 똑같은 가정들을 항시 만족시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나는 전적으로 확신할 수는 없다. 파커가 나뿐만 아니라 많은 다른 사람들에게 흥미를 주는 것은 똑같은 전통 속에서지만 그는 그것들에 도전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남녀를 불문하고, 최근의 작가들 또한 그것들에 도전하기 시작하였다. 성의 감옥에 대한 이러한 개방성 때문에 홈즈의 이레느 아들러 Irene Adler가 그녀의 목적을 위해서 남장을 한 이래 추리소설이 명성을 얻게 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여기에서 그토록 많은 비방적인 의견을 던지고 있기 때문에, 처음에 용감하게 양성적으로 시작했던 영국인들이 이제 그 횃불을 오늘날 이 장르에 대한 놀랄 만한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는 미국인에게 넘겨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추리소설가들이 왜 일반소설이 아닌 추리소설을 쓰느냐는 질문을 빈번하게 받을 것이다. 많은 답변이 있을 것이지만, 중요한 하나의 답변은 결코 시작되지 않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미스터리의 계기와 해결을 가진 좋은 이야기의 궤도를 가지고서 작가는 작지만 심오한 혁명적인 사고에서 자유롭게 물장난을 할 수 있도록 남겨져 있다는 것. 내 의견으로는 추리소설이, 빈번하게 공식적인 소설이라 불리지만, 거의 단독으로 그리고 놀랄 만큼 성공적으로 가장 오래된 공식에 도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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