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은 미스테리 하우스의 추리 관련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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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제와 미스터리
추리소설을 그것의 역사로만 설명하려고 할 때 우리는 두 가지 잘못을 범할 수 있다. 첫째는 추리소설의 기본 요소들, 곧 범인과 피해자 그리고 탐정, 이 세 가지 구성 요건들이 사회의 발전에 의해 우연히 만들어졌고, 또 에드가 포우 Edgar Poe의 천재성 덕분에 드러나게 되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둘째는 포우 이후로는 추리소설이 연속적으로 문제소설 roman problème, 서스펜스소설, 엽기소설 등이 되면서 더 이상 변화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정된 사실로 아는 것이다.
과연 그런가! 추리소설이 존재한다면 그 이유는 우선 우리가 어떤 한 방식으로 생각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살해된 한 사람의 시체가 있다고 하자. 개는 단번에 범인을 찾아낼 수 있다. 말이 필요 없다. 냄새를 분별할 수 있는 것으로 충분하다. 초자연적인 존재 또한 단번에 범인을 알아낼 수 있다. 그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말이 필요치 않다. 시공의 한계를 초월하는 지성, 예를 들어 신의 지성과 같은 지성이 있다면 직관적으로 진실을 본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바로 그 직관성이 결여되어 있다. 감각에 의한 것도, 이성에 의한 것도 절대적으로 확실한 것은 되지 못한다. 인간은 추리하고 힘들게 실험함으로써 진실을 밝혀가야만 한다. 추리소설의 근본적이고 형이상학적인(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뿌리는 바로 거기에 있다. 곧 우리는 어떻게든지 감성의 명료함을 추출해내도록 운명지워진 존재들인 것이다. 우리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만큼 고통받는다. 그러나 그것을 이해하자마자 말할 수 없는 지적 쾌감을 맛보는 것이다. 포우의 말을 들어보자.
힘센 사람이 그의 체격을 자랑하고 근육 운동을 하며 만족을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로 분석가는 얽힌 문제를 풀어내는 정신적 활동에서 그의 영광을 찾는다. 그는 그의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아주 진부한 기회에서조차도 기쁨을 느낀다. 수수께끼와 암호, 판독하기 어려운 글씨를 무척 좋아한다. 그는 각각의 해결책에서 통찰력의 힘을 발휘하고 평범한 의견에서 초자연적인 특성을 찾아낸다.
그러한 미지의 것에 대한 번민과 수수께끼를 풀었을 때의 환희, 바로 그것들이 추리소설의 맥이다. 불안에 빠지는 상황에 이르게 하는 것들을 정리하는 것은 -사람들이 원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지만- 이미 추리소설의 전조인 것이다. 추리소설은 우리의 심리를 잡아놓는다. 그런 점에서 적어도 잠재적 상태로는 인간만큼이나 오래되었다. 생명의 위험 속에서 잡히지 않는 한 맹수를 추격했던 원시시대의 사냥꾼은 이기기 위해 몇 개의 교묘한 덫을 상상해야만 했고, 그 속에는 이미 추리 이야기가 살아 있었던 것이다. 말도 안되는 소리일까? 자, 그러면 비행접시의 경우를 보자. 사람들은 왜 그것들을 미확인 비행물체 O.V.N.I라고 부를까? 스캔들을 불러일으키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 무엇인지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이성으로 파고들 수 없는 그 무엇이 존재한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공포심과 강렬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그런데 성찰력을 궁지에 몰아넣는 것은 지금으로서는 그 특이한 ‘ 사실’을 분별하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의 형태를 생각해 본다. 곧 그것은 교통수단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만들 수 있는 교통수단은 ‘ 순간적인 물체’인 그것과는 전혀 닮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의 행보를 생각한다. 조종되는 것일텐데, 그렇다면 누구에 의해서? 어떤 종류의 생물체가 그 엄청난 속도를 견뎌낼 수 있을까? 그들의 출발지에 대해 생각해 본다. 그리고는 우주 속에서 정신을 잃게 된다. 간단히 말해서 형상은 관념으로 변환되지 않는다. 신비는(미해결의) 문제화되지 않는다. 우리는 아무런 흔적이 없는 원시세계나 혹은 텔레비전 앞에 놓인 원시인 혹은 모르그 거리의 두 범죄를 발견하는 첫번째 증인들과 같은 상황 속에 있는 것이다. 신비란 하나의 핵, 곧 문제를 감추고 있는 하나의 껍질과 같은 것이다. 신비는 감지될 수 있는 영역에 속해 있는 것이다. 곧 확인되고 상통될 수 있는 것이다. 신비를 파헤쳐 버릴 수 있는 지적 작업, 말하자면 그것을 밝혀주는 의미있는 단서들만을 취하는 데 방해가 되는 모든 외적인 것들을 지워버리는 지적 작업 없이는 그 신비가 근심거리인 상태로 남게 된다. 그것은 ‘ 비인간적’인 것이다. 그리고 그 주위를 고통의 장으로 만든다. 모르그 거리의 두 살인사건에서 레스빠네이 부인의 육신이 완전히 분해되어 있는 것, 그녀의 딸의 시체가 굴뚝 통로에 부조리하게 쑤셔넣어져 있는 것, 괴롭히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죽음은 아무것도 아니다. 암살도 마찬가지다. 마음을 뒤흔드는 것은 범죄의 잔인성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설명될 수 없는 듯하기 때문이다. 주어진 많은 것들, 그리고 수많은 모순들로부터 어떻게 문제를 풀어갈 것인가? 우선 무엇을 찾아야 할까? 연관성, 관계, 피라든지 어질러진 아파트, 바닥에 나뒹구는 값진 물건들, 곧 의미들을 일종의 최면상태 속으로 몰아넣어 착각하게 하는 모든 세세한 것들은 잊자. 어떻게 살인자가 자물쇠 잠긴 방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는지 생각보기로 하자. 그는 지붕을 통하여 침대맡에 있는 조그만 창문을 이용하여 들어와서 간단하게 처리하고 피뢰침 줄 근처에 위치한 그 창문으로 다시 나갔다. 그러한 사실들의 관계를 본다면 그것은 비좁은 뚜껑과 피뢰침 줄 사이에 설정된다. 그것으로부터 문제는 제기된다. 누가 피뢰침 줄을 이용하여 쉽게 지붕 위로 기어갈 수 있을까? 한 남자? 너무 무겁다. 어린아이? 충분히 강하지 못하다. 그러나 동물이라면 가능하다.
미스터리 덩어리 속에서 인과관계를 이루는 두 가지 요소들을 잘라 분석할 수 있게 되자마자, 하나의 관계가 격리되자마자, 미스터리는 하나의 문제로 변화한다. 그것은 전혀 자동적으로 해결책이 드러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모두 알고 있다시피 정확하게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이미 절반은 해결했다고 할 수 있다. 그때부터는 정신이 일을 하는 것이다. 정신을 혼란시키는 풍부한 구상을 제쳐놓으면서 논리적 전개로 이루어진 실제에 대하여 연구한다. 첫번째 목표 속에서 하나의 명백한 사실을 취하면서 논리를 이용하여 그 주변의 다른 명백한 사실들을 서둘러서 연결해 간다.
인간은 이성적 존재이다. 곧 감성과 이지적인 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그의 소명은 감성적인 것을 지성적인 것으로 바꾸어 놓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왜 추리소설이 불투명한 세계에서 인간 정신의 한 공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의 이유이다. 한번 더 말하자면 그 모험은 사물에 첫시선을 주었을 때 시작된다. 추리소설은 비교적 근대에 조금씩 구성된 듯하다. 그것은 외양일 뿐이다. 작품을 만드는 이성의 구조는 인간 자신과 동시대적이다. 그러나 그 구조들은 시대의 벽두부터 무의식적으로 기능하였기 때문에 알아차려지지 못하였다. 바퀴, 낚시, 지렛대 등을 발명하였던 미개인은 그가 정확히 생각하였는지를 알지 못했다. 논리를 알기 위해서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방법론을 알기 위해서는 데까르트를, 인식론을 알기 위해서는 끌로드 베르나르를 기다려야만 했다. 의식의 역사는 없지만 자각의 역사는 있다. 수사(搜査)는 인간 정신의 가장 자연스러운 방법인데도 사람들이 수사를 이해하는 데 오랜 세월이 걸렸다. 역사학자들은 기원이라는 것은 결국 명백하게 하기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추리소설이 합리적으로 이끌어가는 모든 탐구 속에서 싹트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지나치지 않느냐고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추리소설이 하나의 픽션이라고 할 때, 곧 상상의 산물로 생각할 때는 지나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쾌감을 위하여 이성의 근본적인 방법을 이용한다고 할 때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한편에는 그의 방법들을 천천히 그리고 근면하게 제어하는 실험학문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즐기는 그것이 있는 것이다. 그러한 학문적인 놀이는 귀납법과 연역법, 가정과 이론 등이 정확히 무엇인지를 안 순간부터만 가능한 것이다. 그 도구들은 장차 익숙해질 뿐만 아니라 또한 곳곳에서 항상 효과적인 것이다. 그것들은 결정적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도구들 덕분에 우리가 즐길 수 있는 일종의 모형을 제작할 수 있는 것이고, 추리소설은 과학적 수사의 아주 완벽한 모델이다.
그러한 탐색으로부터 탐색놀이로의 이행은 아주 중요하다. 수수께끼는 하나의 변신을 감당해야 한다. 곧 수수께끼는 우리의 쾌감을 위하여 불가사의한 범죄가 되고, 학자는 탐정으로 바뀐다. 가공할 살인자의 존재는 협박받은 피해자의 개념으로 이끌어진다. 창작의 결과와는 거리가 먼 그러한 극적 묘사는 심사숙고하는 지성의 자연발생적인 움직임에서 기인한다. 범인과 피해자, 수사의 논리, 그 모든 것들은 암암리에 사물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이성의 순수한 움직임 속에 들어 있었다. 우리는 그것을 모든 역사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스핑크스에게 질문을 받은 오이디푸스의 모험을 상기해 보자. 아침에 네 발, 점심에 두 발, 저녁에 세 발을 갖는 것은 무엇인가? 언뜻보기에 거기에는 단 하나의 문제풀이만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오이디푸스는 목숨이 달려있고, 빠르고 정확하게 맞혀야만 하는 탐정의 입장에 처해 있는 것이다. 그는 그가 이미 탐정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고, 후에 룰따비유 Rouletabille가 그랬던 것처럼, 이미 ‘ 능란한 판단력’을 가지고 있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래도 역시 그는 훌륭한 탐정들처럼 사실들을 분류한다. 곧 네 발, 그리고 두 발, 그것은 아이일 때 네 발로 기고, 이어서 두 발로 서는 사람일 수 있다(가정). 그런데 세번째 발은? 만일 그 가정이 정확하다면 부가된 발은 늙어서 의지하는 지팡이일 수밖에 없다.
오이디푸스는 하나의 추리소설을, 그러나 더듬거리면서 무언극을 연기하듯, 체험했던 것이다. 우리가 거리를 두거나 일에서 우리 생각의 다양한 움직임을 명명하고 구별하는 것, 그리고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그대로의 추리소설은, 이 세상만큼 오래된 무의식이 그것을 이루는 요소들로 분해되고 그것의 활동으로 재구성되는 순간부터, 정신분석학이 나타난 것처럼, 우리의 눈 앞에 나타난다. 프로이드는 무의식을 창조하지 않았고 그것을 드러냈다. 포우는 추리소설의 모든 작품들을 상상하지 않았다. 상황의 도움을 받아서 추리소설이 빛을 보게 한 것이다.
싸렌디피티 Sarendipity에 대해서도 똑같은 지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싸렌디프의 왕자들의 모험은 우화인데, 아마도 원래 페르시아 우화인 듯하다. 볼떼르가 <자디그 Zadig>를 쓸 때 이것의 영향을 받았다. 그 우화는 니자르의 네 아들의 여행에 대한 이야기이다. 하루는 그들이 풀로 덮혀 있는 땅을 보았는데, 한 부분의 풀은 뜯어먹혀 있었고 한 부분은 그대로 있었다. 모드하르가 곧바로 그곳의 풀을 뜯어먹은 낙타는 오른쪽 눈이 멀었다고 말했다. 라비는 그 낙타는 오른쪽 발을 절룩거린다고 덧붙였다. 이야드는 꼬리가 잘려있다고 지적했고, 안마르는 그것은 도망친 낙타인데, 사납다고 결론지었다. 사람들은 그 왕자들이 천리안의 재능이 있다고 믿었지만 그들의 설명은 아주 단순한 것들이었다.
풀밭의 한쪽만을 뜯어먹었기 때문에 그 낙타가 애꾸눈이라는 것이었고, 오른쪽 발자국이 다른쪽 발자국보다 더 세게 찍혀 있었으므로 절름발이라는 것이며, 낙타는 꼬리로 배설물을 흐트러뜨리는 습관이 있는데, 배설물이 덩어리로 모아져 있는 것으로 보아 꼬리가 잘려있다는 것이고, 끝으로 풀을 여기 저기 한 덤불씩 뽑으면서 불규칙적으로 뜯어먹은 것으로 보아서 사나운 성질을 가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 싸렌디피티’는 거리가 먼 다른 어떤 것의 원인이라기보다는 추리 이야기의 고전적인 형식일 뿐이라는 것에 동의하고 있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필자 미상의 한 평론가가 그 우화에 대하여 “ 그 예언자는 네 형제들의 지식과 영리함에 감탄했다. 그 판별의 방식은 예언술에 속하고 사람들은 그것을 밥-알-다즈킨 bâb-al-dazkïn이라고 부른다” 고 평한 것이다. 그런데 탐정은 예언하지 않는다. 물론, 그 네 형제들처럼 어떤 표징 signe으로부터 그 표징의 의미 signifié를 파악한다. 그러나 우리가 <마리 로제의 비밀 Mystère de Marie Roget>에서 볼 수 있듯이 탐정은 훨씬 더 복잡한 논리를 이끌어내는 능력이 있다. 그 싸렌디피티는 역사 속에서 어떠한 지표도 세우지 못한다. 아주 단순한 하나의 ‘ 돌발적인 출현’ 현상일 뿐이다. 이성은 하나의 요람기를 가졌고 자유로운 활동을 구속하는 마술적 방법으로부터 벗어나는 데 성공했다.
2. 상황 : 추리소설의 발생
우리는 그 상황들을 알고 있다. 그것들은 추리소설의 기원을 설명하려는 모든 사람들에 의해 나열되었고, 몇몇의 조건들에 불과한 것이 그 원인들로 간주되었다.
재론해야 할 첫번째 것은 프란시스 라까쌩 Francis Lacassin이 『추리소설의 신화 Mythologie du roman policier』라는 그의 책에서 아주 잘 설명해 놓은 ⌈도시문명의 출현⌋이다.
번지르르한 건물의 외양들과 함께, 각자가 그 속에서 범죄를 숨길 수 있는 정직한 사람들로 된 도시의 군중, 끊임없는 추적에 개방된 거리들, 요새처럼 육중한 창고들, 베일에 싸인 담장들, 불길한 밤을 밝혀주는 불빛들, 탐정에게 도시는 동시에 그의 공범자이자 적이고 동료이다. 도시는 일상의 가면을 쓴 채 웅크리고 있는 환상의 상징이다...
도시, 그렇다. 좀더 정확히 하자면, 노동자가 될 준비가 되어 있는 부평초와 같은 가난한 사람들이 즐비한 산업도시이다. 거기에는 늘 좀도둑들과 ‘ 암흑가’, 성공의 흐름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계층간의 격차가 아주 심한 사회의 무거운 요소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로부터 밑바닥 깊숙한 곳으로 흘러들었다. ⌈사업⌋의 출현과 더불어 모든 것이 바뀐다. 개개인을 자리 이동시키는 혼합이 일어난다. 이미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이 전반적인 신분 변화를 야기했었다. 상업과 산업의 눈부신 발전은 부자가 되거나 파산하게 하고, 하나가 올라가면 다른 하나는 추락하고, 거리낌 없는 사람들에게 부랑배 집단이 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낙오자들이 속출할 것이고, 그것은 빈민굴에서뿐만이 아닐 것이다.
도시의 발전과 병행해서 사람들은 경찰의 발전을 보게 된다. 우선 앞서가는 자들에 이어서 제국에 반대하여 음모를 꾸미는 자들이 문제였던 정치는 기득권자들의 질서에 맞는 강력한 체제를 갖춘다. 발작이 보트랭 Vautrin을 잊었더라면 그 시대의 사회상을 충실하게 보여주지 못했을 것이다. 위고는 그 나름대로 자베르 Javert를 상상해냈다. 그들의 모델은 틀림없이 과거의 도형수가 경찰이 된 비도크 Vidocq였다. 그러나 그는 수사기술을 가지지 못한 까닭에 천재성이 없는 경찰이었다. 그는 밀고자들의 모호한 증언에 의지하고, 범인을 체포하기 위하여 추리보다 고발을 더 믿는다. 그렇지만 그 경찰은 그의 첩보원들보다는 더 정탐자가 되어서 도시의 파노라마의 일부분을 담당하는 장점을 갖는다. 그후부터 경찰은 사회적 전형이 된다. 실크 해트와 구레나룻, 단추를 꼭 채운 프록코트, 포승줄은 그에게 친숙한 모습이 된다.
경찰의 면전에 변화무쌍한 모습의 범죄자가 있다. 왜냐하면 변장이 그에게 천의 얼굴을 갖게 하기 때문이다. 문학에서 언제 변장이 나타났을까? 그것을 찾아보는 것은 흥미있을 것 같다. 한 배우를 변장시키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것은 의상에만 관련된다. 얼굴을 달리하는 일은 어렵다. 거기에는 입이나 코를 변형시키기 위한 완벽한 기구들과 다양한 화장품들, 그럴 듯하게 모방한 가발들이 필요하다. 어쨌든 변장은 범죄자에게 모든 눈속임의 수단을 제공한다. 그는 이름없는 사람이 되어 사라지고 본질적으로 잡을 수 없는 사람이 된다. 거리의 전쟁이 시작되면서 선과 악의 대결이 대중을 사로잡는다.
왜냐하면 신문의 발전으로 이제는 대중이 함께하게 되었다. ‘ 다양한 사실’들을 만들어 내는 것은 바로 그 다수의 매체들이었다. 또한 그 다양한 사실들은 일반적으로 사고나 화재 등 평범한 사건이기도 했지만 자주 미스터리 범죄이야기들(프라슬랭 공작부인 살인사건, 라포르그 사건 등)이었다. 그런데 이런 종류의 이야기들은 신비의 매력이나 불행한 스펙타클로 인한 감동, 그리고 정의에 대한 갈망 등의 강열한 쾌감을 불러일으킨다. 이 시기에 신문소설이 태어나고 낭만적 드라마가 재현되어 그 대부분에서 우울하고 비극적 사건들을 다루게 된다. 그 때부터 추리소설이 모습을 드러낸다. 등장인물들이 자리를 잡고 이제는 그들을 결합하는 관계를 밝히는 일, 곧 수사만 남게 된다.
그런데 19세기에는 과학이 발전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현상을 지배하는 법칙을 발견하는 데 목표를 둔 실증과학이 발달한다. 얼마 안되어 사람들은 생각했던 것만큼 눈부신 결과를 얻게 되었고, 곧 이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모든 것>이란 인간 자신은 자기의 발판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는 것과 실증과학은 인간의 육체 안에서 진행되는 생화학적 과정뿐만 아니라 그의 사고 체계까지도 밝힐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거기에 핵심이 있다. 왜냐하면 인간이 사물과 다른 본능을 가진 존재라면, 그리고 그의 자유로 해서 완전히 예견할 수 없는 존재라면 파고들 수 없는 신비스런 존재로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수사는 범죄자가 남긴 흔적을 식별할 수 있을 것이지만 범죄의 동기를 찾지 못하고서는 유죄를 입증할 결정적 증거를 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범죄는 ‘ 어떻게’ 만큼 중요한 범죄의 ‘ 이유’를 통해서 설명되어야만 한다. 더구나 그 ‘ 이유’를 알게 됨에 따라서 사람들은 ‘ 누가’ 범인인가를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심리영역에서도 마찬가지로 신비로부터 미해결의 문제로 넘어가야만 하며, 모든 단서들 가운데서 불분명하게 보이는 행동을 추론하는 것으로부터 특이한 사실을 잡아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실증주의에서는 고전철학이 물질과 정신 사이에 파놓은 단절을 메우려고 애쓰며, 모든 생각의 흐름은 정신을 물질로 변하게 하는 경향을 띤다. 라쁠라스는 이 세계는 하나의 기계라며 그의 『개연성의 분석이론에 대한 개론 Introduction à la théorie analytique des probabilités』에서 다음과 같이 쓴다.
지능은 주어진 한 순간에 자연에 활기를 주는 모든 힘과 자연을 구성하는 존재들 상호간의 위치를 깨닫게 될 것이다. 더구나 지능이 그의 정보들을 분석해 낼 만큼 광범위하다면 우주의 가장 큰 물체들의 움직임으로부터 극히 미미한 존재들의 움직임까지도 같은 공식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지능 앞에 불분명한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며, 미래도 과거처럼 그의 눈앞에서는 현재처럼 보일 것이다.
그리고 레이몽 du Bois Raymon은 코난 도일이 『셜록 홈즈의 모험 Aventures de Sherlock Holmes』을 출판했던 1892년에 다음과 같이 쓴다.
우리는 이 세계의 보편적인 진화과정이 매순간 이 세계를 이루는 원자들의 속도나 방향 그리고 위치를 파악할 수 있는 하나의 수학 공식이나 하나의 방정식 체계에 의해서 표현될 수 있는 시점에까지 도달한 자연에 대한 지식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결정론자들의 고백이 이 시대를 특징짓는다. 그렇다. 이 세계는 하나의 기계이며 인간 또한 그 세계에 속해 있다. 그렇다면 기계 자체가 분해될 수 있다고 볼 때, 인간도 분해될 수 있다고 본다. 그들의 논리는 이념적인 것들의 결합인데, 그러한 이념은 형상 image으로부터 기인한 것이다. 그 형상들은 유사성이나 인접관계 혹은 대조의 법칙들에 따른 그들 사이에 체계적으로 연결된 일종의 원자들이다. 누가 그러한 법칙들을 정확히 응용할 줄 알 것이며 인간을 단번에 간파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연구소 실험의 발전을 따르는 것 이외에 더 이상 ‘ 생각을 읽는’ 까다로움이 아니다. 포우는 <모르그가의 살인> 사건 속에 잘 알려진 한 구절에서 그 증거를 제시한다. 뒤팽이 한 친구와 산책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조금 전부터 아무말 없이 걷고 있었다. 조금후 뒤팽은 그의 동료에게 단언한다. “ 바리에떼 극장의 그의 좌석으로 보아 그것은 실제로 아주 작은 소년이다.” 이 문장은 아주 정확하게 화자의 생각을 나타낸 것이다. 당황한 화자는 뒤팽에게 그가 어떻게 머리 속의 생각들을 재구성할 수 있었는지 설명해주기를 간청하고, 뒤팽은 기꺼이 이에 동의한다.
화자는 한 행인에게 부딪쳐서 울퉁불퉁한 바닥에 미끄러졌다. 그런데 그는 사람들이 도로에 나무포장을 하고 있는 곳에 이르면서 그 기술에 붙여진 이름인 절체법을 생각했고, 그 절체법이 원자의 개념을 떠올리게 했다. 그 원자들은 그에게 원자와 원자는 고리로 연결된다는 생각을 하게 했고 이어서 성운의 이론과 오리온 자리를 생각하게 했다. 왜냐하면 지난밤 한 풍자적 신문이 아주 작은 키의 괴상한 배우에 대하여 그 이름을 썼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아주 멋진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회의적이지만 그 당시 그것은 획기적인 새로움이었고 힘들이지 않고 확신을 가져다 주었다. 라바따르 Lavatar의 이론들, 관상학이 유행했었다. 사람들은 내적인 것은 없다거나 우리의 의식의 은밀한 움직임들도 외관으로 즉각 나타난다고 믿기 시작했다. 거기에 더하여 포우가 길을 열었다. 그는 카드놀이에 대하여 말하면서 주의깊은 관찰자는 그의 상대를 이길 것을 확신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그의 파트너의 외양을 연구한다... 놀이가 진행됨에 따른 각각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확신, 놀람, 승리 혹은 언짢은 기분 등의 다양한 표현들 가운데서 생각의 핵심을 모은다. 패를 모으는 방법에 대해서도 동일인이 그에 따라서 달리 반응하는지를 구별한다. 난처함, 망설임, 활기, 떨림, 모든 것이 그에게는 증상과 진단이다. 외양에 대한 직관과 그러한 투시 덕분에 그 모든 것들은 사물의 진정한 상태를 알려주는 것이다(모르그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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