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S.S 반다인(S. S. VanDine)
- 미국 본격 황금 시대의 선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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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다인의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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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다인의 캐리터치>
■작가 소개■
미국을 대표하는 추리작가.
아가사 크리스티,앨러리 퀸,존 딕슨 카,F.W•크로프트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본격 황금 시대를 대표하는 거장중의 한사람.
반다인은 미스테리의 시조 에드거 알란 포오를 낳았으면서도 그 후에는 영국에 압도되어서 본격 추리소설이 침체하고 있던 미국에서 갑자기 나타나 일약 미 추리 소설계의 최고봉에 섰던 작가로로 그 후에 나타난 퀸과 함께 미국 본격파의 핵심으로서 활약한다.
본명은 월리엄 헌팅턴 라이트라고 하며 하버드대학원을 나와, 1907년 무렵부터 예술 평론가로서 활약하며 미술과 문학의 신문이나 문예 잡지에 평론을 쓰거나 순수 문학의 소설을 발표하거나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예술 분야에서의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저술한 원고등도 잘 팔리지 않아서 생활고와 장래에 대한 불안으로인해 1923년경에 큰 병을 앓게되어 요양 생활에 들어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 당시 요양 생활속에서 의사로부터 무거운 주제의 책들을 독서하는 것을 금지당하고 가벼운 읽을 거리로서 추천받은 것이 추리소설이었다고 한다.그리고 요양원에서 2년간에 대략 2,000권 가까운 작품을 독파하고, 나도 이정도의 추리 소설을 쓸수있다고 생각하고 스스로 추리소설을 쓰려고 결심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쓰여졌던 것이 1926년에 자신을 모델로 한 주인공 파일로 번스가 활약하는 처녀작 「벤슨 살인 사건」을 발표하는데 이 작품은 발표되자 마자 미국내에서 커다란 호평을 받게되고 이후로도 수준 높은 작품을 차례차례로 발표해서 추리 작가로서의 지위를 굳혀 가게 된다.반다인의 작품 제목은 벤슨 살인 사건이후 제목 첫머리에 반드시 영어 6글자의 단어(The … Murder Case)가 붙는 작품을 11편 발표했는데 12편의 작품중 한편은 그레이시-엘렌 살인사건으로 이 규칙에 따르지 않았다..
그가 쓴 12편의 작품 가운데서도 제3작 《그린가(家) 살인사건(1928)》, 제4작 《주교 살인사건(1929)》은 평이 높았다. 그가 창조한 탐정 파일로 번스는 심리분석을 중요시하는 괴팍한 현학의 소유자이다.
발표 당시에는 예술 평론가로서의 자신의 명성에 신경을 써서 본명을 사용하지 않고 S.S 반다인이라는 익명으로 작품을 발표했는데 그 때문에 당시의 미국에서는 「반다인은 누군가?」라고 하는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고 한다.참고로 반다인은 외가쪽 성이면 S.S는 외우기 쉬운 증기선의 약자라고 한다.
「뛰어난 추리 장편은 생애 6권 이상 쓸 수 없다」라고 본인 스스로 주장했던 만큼 당초에는 6개의 작품만 쓸 예정이었지만, 주위의 강한 •설득에 의해 6편을 더 발표하여 전부12편의 장편을 남기게 된다.
1928년에는 추리소설에는 연애적 요소는 두어서는 안된등의 주장을 포함시킨 「추리 작가 마음가짐 20」(반다인의 20칙) 을 제안하는등 독자와의 페어풀레이한 수수께끼 풀기를 주창한 작가이다.여담으로 반다인은 아가사 크리스티의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에 대해 언페어한 작품이라고 비난을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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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 반다인(S. S. VanDine)
예술 여러 분야에 날카로운 감상안을 지닌 평론가로서 잘 알려진 윌러드 헌팅턴 라이트(Willard Huntington Write)가 어찌하여 미스터리 소설 사상 획기적인 반 다인으로 변모했는지에 대해서는 그의 짧은 자서전 <반원을 그리다>에 자세히 나와 있다. 그것을 바탕으로 그의 전 생애를 더듬어보기로 하자.
그는 1888년 미국 버지니아 주 샤로트빌에서 태어났다. 그가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4살 때의 일로서, 그때 쓴 시가 마을 신문에 실렸었다. 4살 된 어린이의 작품치고는 실로 뛰어난 것이었다고 한다.
그는 공부하기를 좋아하여 지식을 얻는 기쁨으로 즐겁게 학교를 다녔다. 캘리포니아의 센트 빈선트 및 포모너 대학에서 공부했으며, 1906년에는 하버드 대학원에서 영어학을 전공했는데, 재학 중 고고학과 인류학 과목의 성적이 뛰어나 특별장학생이 되기도 했다. 미국 및 외국에서 7년에 걸쳐 연구를 했다고 한다.
학생시절 그는 재능이 다양했던 모양으로 화가가 되는 것이 자기의 천직이라고 여겨 뮌헨과 파리에서 미술공부를 하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되고 싶어 몇 해 동안 교향악과 관현악의 악보 연구에 몰두하기로 했다.
그러나, 펜과 종이를 대하는 즐거움 때문에, 1907년에 결혼하여 <로스엔젤리스 타임즈> 지의 문예 비평가담장자가 되어 6년 동안 그 자리에 머물렀다. 그동안 사교란 이외의 편집군 일을 모조리 도맡아했으며, 2년 동안은 일요일도 쉬지 않고 날마다 평균 여섯 단쯤의 기사를 쓸 정도로 활약했다. 1910년 회사 건물이 맥너매러 단의 다이너마이트 폭파사건으로 피격당했을 때 그는 심한 두통으로 폭발 10 전에 조퇴했기 때문에 다행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1910년부터 1914년까지 <타운 토픽스> 지의 문예비평담당, 1912년부터 1914년까지 <스마트 세트>지의 편집, 1915년에는 <포럼>지의 미술평론, 이듬해에는 <인터내셔널 스튜디오>지의 문예평론, 1917년에는 <뉴욕 이브닝 메일>지의 문예평론, 1918년부터 1919년까지 <샌프란시스코 회보>지의 음악 미술평론, 1922년부터 1923년까지 <인터내셔널>지의 미술평론 등 언론계에서 필봉을 휘둘렀다.
한편 그 동안에도 끊임없이 그리스 어와 라틴 어 및 독일과 영국과 프랑스의 고전 연구에 몰두했으며, 문화의 여러 문제에 대한 아홉 권의 저작을 집필했다. 모두 학구적 색채가 짙은 노작이었지만 그의 명성을 높혀주지는 못했다. 그리고 1916년에 그는 자신의 유일한 순문학 장편소설인 <약속한 사람>을 발표했는데, 이것은 리얼리즘 문학의 선구적 작품이라고 할 만한 것이었으나 몇몇 사람에게만 인정받고 책은 거의 팔리지 않았다. 나중에 문예미술 평론가인 라이트가 미스터리 소설가로 이름난 반 다인과 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진 뒤 1930년에 다시 출판했지만 그때도 역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제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때 그는 파리에 머물러 있었다. 하루 열 네 시간씩을 저술하는 데 바쳐, 그 뒤 런던에서 두 권의 책을 펴냈다.
그러나 전쟁으로 말미암은 격심한 긴장과 두려움에 찬 나날의 심리적인 영향이 그의 건강을 해쳐 버리고 말았다. 그리하여 마지막 서항을 하는 루시타니아 호로 미국에 돌아가 요양원에서 두 달 지낸 다음 <회화사>와 <응용미학론> 두 권을 세상에 내놓았다.
1923년 어느 날 아침, 침대에서 일어나려던 그는 무릎의 힘이 완전히 빠져 버려 일어설 수가 없었다. 끊임없는 집필 생활로 말미암은 몸과 마음의 혹사 때문에 신경쇠약게 걸린 그는 1925년까지 2년이 넘도록 병상에 드러누워 지냈으며, 가가스로 일어설 수 있는 날도 일이나 연구는 할 수가 없었다. 건장하던 몸이 바싹 여위었으므로 (죽음이라는 큰 모험에 맞닥뜨렸음을 느끼고, 내 병은 결코 치유될 수 없다)고 여겼다 한다.
오랜 병상생활을 해나가는 동안 그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지루한 나날을 보냈다. 특별히 어디가 아픈 게 아니라 다만 몸이 허약해져 신경이 날카롭고 기분이 우울할 뿐이었다. 지금까지 너무 지나치게 신경을 쓴 것이 병의 원인임을 깨닫고, 그는 기분전환될 일이 자신에게 필요하다고 여겼다.
그는 자기 병실에서 책이 완전히 자취를 감춰 버렸음을 깨달았다. 머리를 쓴다든가 집필하려는 의욕을 자극한다는 이유로 독서가 금지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의사에게 부탁해 보았지만 한 마디로 거절당했다. 그러나 한 달 동안이나 끈질기게 졸라댔으므로 마침내 의사도 굴복하여 가벼운 소설이라면 조금씩 읽어조 좋다는 조건부로 허락했다.
그러나 허황한 모험담이나 어리석기 그지 없는 연애소설로 결코 위안을 받지 못하고 있던 그는 온갖 방법으로 역습을 시도해 보았으나 모조리 실패로 끝났다.
그때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소년시절에 셜록홈즈를 읽고 그 베이커 거리 탐정의 추리에 흥미를 품었던 일을 기억해 내어 의사가 회진할 때 교묘하게 물어보았다.
"미스터리 소설 같은 저급하고 대수롭지 않은 책을 읽으며 기분전환하고 싶은데 어떻겠습니까?"
의사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윽고 승낙했다.
이리하여 그는 미스터리 및 괴기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2년 동안 다른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런 소설만 탐독했다. 이 일은 그의 쇠약해진 마음을 전의 문예 및 미술에 대한 연구에서 해방시키고 일종의 정신적 치료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몸도 살이 찌고 좋아졌다.
그러는 동안 미스터리 소설에는 그 나름의 테크닉과 매력이 있으며 독특한 법칙에 따라 전개되어 나간다는 것 - 한마디로 말해서 다른 소설과는 전혀 취향이 다른 문자에 의한 오락임을 점점 뚜렷이 알 게 되었다.
그는 미스터리 소설의 일반적인 연구로서 자신이 읽은 것을 정리하고 조직화하기 위해 에드거 앨런 포우로부터 시작하여 연대순으로 현대작품까지 읽었다. 베를린과 파리와 런던의 서점에 부탁하여 지난 75년 동안의 모든 미스터리 소설을 찾아보내달라고 했다. 뉴욕의 어떤 서점은 그의 요구에 따라 미국의 미스터리 소설을 찾아내기 위해 밤을 샌 일이 많았다고 한다.
이리하여 그가 병상에서 일어날 즈음에는 미국과 유럽의 미스터리 소설이 거의 총망라된 약 2천권의 책이름이 그의 노트에 수록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는 책을 읽으면서 분석적인 눈과 마음으로 페이지를 넘기고, 간호원의 눈길을 피해 노트를 했다. 병이 완전히 회복되면 미스터리 소설에 대한 평론서를 저술하려고 남몰래 계획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즈음의 일을 그는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다.
"현재 살아 있는 사람 가운데 나만큼 미스터리 소설을 많이 읽고 나만큼 기술적이고 문예적이며 더 나아가 진화적 입장에서 주의깊은 연구를 한 사람은 없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결코 훌륭하다는 뜻은 아니다. 정말이지 나는 다른 일을 하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925년 여름이 끝날 무렵, 병석에서 일어난 그의 두뇌는 다시 정상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근대문학과 언어학에 관한 저술을 완성하려고 마음이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그가 펴낸 책들은 한 번도 생활을 충족시킬 만한 수입을 가져온 일ㅇ이 없었다. 여태까지의 그의 문단생활은 신문과 잡지의 기고만으로는 살림을 꾸려나갈 수 없었고 편집이며 번역이며 교수 등의 부수입으로 보충해야 했다.
그런데 제 1차 대전 뒤 수입이 더욱 줄었고, 그의 쇠약한 체력이 집필의 생산력을 둔화시켰으며, 전쟁 뒤의 혼란 속에서 그듸 저작들은 통 팔리지 않았다. 더욱이 앓아 누운 동안 가진 돈을 몽땅 써 버려 실로 (뼈와 가죽과 오장육부의 자본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이런 때, 어떤 뚜렷한 결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몇 판이나 거듭 팔리고 있던 미스터리 소설을 읽다가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나보다 훨씬 경험과 연구가 부족한 작가가 이만큼 성공을 하고 있으니 나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법칙과 기교를 잘 알고 있다.'
그리하여 여태까지의 진부한 방법에서 벗어난 새로운 구성을 짜내었다. 그리고 범죄사건 해결에 새로운 근대적 추리를 적용하는 특색있는 주인공을 창조하였다.
이로써 파이로 번스가 태어나고, 세 권의 개요가 각기 3만 단어로 정리되었다. 그는 자기 책을 내줄 출판자로서 찰즈 스크립너 사의 퍼킨즈를 택했다. 하버드 대학 시절의 친구로서 사회에 나와 자주 만나지 못했으나 잠시도 잊은 적은 없었다. 퍼킨즈는 자신의 계획을 이해하고 도와주리라고 그는 믿었던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바라고 있던 책일세"하고 퍼킨즈는 곧바로 말했다. "세 권 내게 다 주게."
이리하여 1926년 10월 번스는 <벤슨 살인사건>으로 세상에 소개되고 또 S.S.반다인이라는 필명이 존재하게 되었다.
한편, 그는 오랜 노력과 근면 끝에 미술 및 문학비평가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의 저서 가운데 두 권은 회화를, 한 권은 미학을, 한 권은 근대철학을, 한 권은 프랑스 문학을 논한 것이었다. 그밖에 영국과 미국 근대문화의 영향을 논한 것이 두 권, 예술적 기질을 심리학적 견지에서 관찰한 것이 한 권, 제 1차 세계대전 전의 유럽에 관한 것이 한 권 있으며, 이들은 모두 현대문학계에 상당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자기 본래이름으로 미스터리 소설을 집필했다가 위의 본격적인 평론집들의 명예상의 상처를 입게 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리하여 할머니의 성인 반다인(Van Dyne)의 Y를 I로 바꾸고 기억하기 쉬운 약자로서 증기선 (Steam Ship)의 머리글자를 따서 S.S.반 다인을 필명으로 썼던 것이다.
그의 미스터리 소설 처녀작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비평가들은 찬사를 보냈으며 독자들의 호평도 받아 초판이 1주일 동안에 다 팔렸다 . 다음달에 재판과 3판이 나와 모두 팔려서 6년 동안에 그의 경쟁자들을 모조리 물리쳤다.
이 압도적인 성공의 원인은 무넛보다도 치밀한 구성과 현학적인 문체에 잇었다. 에드거 앨런 포우를 시조로 하여 미국에서 발생했던 미스터리 소설이 프랑스에 계승되고 이어 영국에서 큰 발전을 이룩했으며 통속적인 오락물이 아닌 지적 투쟁을 그리고 논리적인 것으로 승화되는 동안에, 미국에서는 그에 버금갈 만한 본격적인 장편이 나오지 못했다. 이러한 때 고답적이고 논리적인 새로운 미스터리 소설작가 반 다인이 나타난 것이다. 말하자면 미국의 맹점을 찌른 작품이었으며, 주인공의 예술까적 취미까지도 독자의 흥미를 끄는 데 효과적인 역할을 했다.
처녀작에 이어 제 3작 <그린 살인사건>은 1928년 4월에 간행되어 나오자마자 한 달 만에 온 미국의 최고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 세 번째 작품에 의한 반년 동안의 수입은 그의 15년 동안에 걸친 문단생활의 총수입보다 훨씬 많았다.
그는 그 즈음 미국에서는 미스터리 소설까가 그다지 존경받을 만한 직업이 아니었다는 것과, 또 하나는 노력 끝에 문단생활에서 확보한 평론가라는 자기 명예를 지키고 싶었던 두 가지 까닭 때문에 반 다인이라는 익명을 썼었다. 그런데 그의 미스터리 소설이 큰 인기를 얻게 되자 언론계와 독자들이 작가의 정체를 알고 싶어하는 성화가 빗발치듯했다.
먼저 뉴욕 <월드>지의 뛰어난 평론가 해리 핸슨이 <벤슨 살인사건>과 <카나리아 살인사건>을 쓴 작가는 신인이 아니라 필명 뒤에 숨은 경험있는 저술까임에 틀림없다고 논편을 했다. 그리하여 그가 미스터리 소설까로서 등장한 지 1년 반 만에 마침내 정체가 드러나고, 윌러드 헌팅턴 라이트라는 본디 이름이 밝혀졌다.
그러한 이중생활을 하고 잇는 동안에 우스운 이야기가 많았다. 그가 참석한 어떤 만찬회 석상에서 <벤슨 살인사건>과 <카나리아살인사건>의 진짜 작가는 누구겠느냐는 질문을 받기도 하고, 또 그에게 이 책을 팔려는 판매원으로부터 얼굴이 뜨거워질 정도의 책 선전을 듣고는 마지못해 몇 권 사기도 했다고 한다.
그는 애초에 세 권만 쓰고 그만둘 생각이었으나 <아메리칸>지의 권유를 물리치지 못하여 <승정살인사건>을 쓰게 되었다.
"이번에는 여섯권만 완성하고 그 이상은 쓰지 않겠다. 반 다스라는 짝수는 기분좋은 질서바른 숫자이다. 한 작가에게 여섯 편 이상의 미스터리 소설을 구상할 능력이 과연 있는지 나는 의심스럽다. 내게 수준 이하로 떨어지지 않고 무한하게 미스터리 소설을 쓸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해도 나는 여섯 권으로 끝낼 것이다. 큰 부자가 되는 것을 나는 그다지 바라지 않는다."
그러나 사실은 그 곱절인 열 두편의 미스터리 소설을 쓰고, 미국 미스터리 소설 사상 획기적인 작가가 되었던 것이다. 그의 작품은 영화로 만들어진 것도 많다.
그밖에 단편소설이 몇 편 있으나 대단한 것은 못되고, 도리거 그가 편찬한 <세계 미스터리 소설 걸작집>이 특기할 만한 그의 업적이다. 더욱이 이 책의 머리글은 그가 쓴 <세계 미스터리 소설사>라고 할 수 있으며 높이 평가되고 있다.
미스터리 소설을 써나가는 동안 그에게는 어떤 확고한 신념이 생기게 되었다.
"미스터리 소설은 일종의 지적인 게임이다. 아니, 오히려 스포츠라고 할 수 있다. 작가와 독자의 관계는 어디까지나 페어플레이다. 이상한 트릭을 만들거나 독자를 기만하면서 정직한 체하는 것은 브리지에서 속임수를 쓰는 것보다 더 용서받지 못할 일이다. 작가의 기지는 독자보다 뛰어나야 하고 독자의 흥미를 일깨울 수 있는 기교로서 이끌어가야 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설명하면, 자칫 범죄소설로 떨어지기 쉬운 미스터리 소설을 영국식 전통에 따라 (지적 게임)이라는 주장으로 뚜렷이 규정해 놓은 그의 공적은 특기할 만한 가치가 있다. 그것은 이 특수한 장르의 본질을 충분히 이해하고 파악한 뒤의 발언이며, 더욱이 그는 <미스터리 작가가 깨우쳐야 할 20조항>을 제안하여 엄격한 제한을 가했다. 자기 자신에게 과했다고 할 수 있는 제한 속에서 강렬한 의욕을 표현하려고 시도했던 것이다.
그는 미술 및 문예평론가의 엄격한 눈으로 2천여 권의 미스터리 소설을 섭렵하면서 그 본질을 정확하게 꿰뚫어보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번에는 스스로 창작하려고 결의했을 때, 당연히 그것을 응용하게 되었다. 그 시도는 훌륭하게 성공했으며, 그것은 그의 확실한 분석안을 충분히 증명하는 것이었다.
에드거 앨런 포우 이래 세계 코난 도일 다음으로 미스터리 소설계의 전통적인 직계 대산맥으로 그 위용을 자랑한 반 다인은 1936년 4월 11일 51살에 관상동맥혈전으로 세상을 떠났다. 열 두편에 이르는 그의 장편들은 모두 고전적인 걸작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출처:하우 미스터리)
(출처: myhome.naver.com/privateeye/about%20mystery/files/dine.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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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파일■
-본명:월라드 헌팅톤 라이트 (Willard Huntington Wright),예술 평론가로 유명.
S.S은 미국인이 잘아는 증기선(Steam ship)의 약어로부터 취했다고도 함
-출신지: 미국 버지니아주 출생
-생몰 :1888년 ~1939년 4월11일(51세)
-경력:
1907년- LA 타임즈지의 문예 비평 담당자로 근무
1923년-신경쇠약에 걸려 이후 2년을 병상에서 요양.이 때 약2,000책의 추리소설을 독파하는
1926년- S.S 반다인이라는 펜 네임으로 「벤슨 살인 사건」을 발표.미국의 본격 추리소설의
최고봉이 됨
1928년-〈추리소설의 20칙〉을 발표
1939년- 「윈터 살인 사건」까지 전 12편의 장편을 발표.
-시리즈 탐정:파일로 번스 (Philo Vance)
-대표작:「그린가 살인 사건」「승정 살인 사건」
국내 번역작:
벤슨살인사건/자유(절판),동서,황금가지
카나리아 살인사건/자유(절판),동서
그린 살인사건/하서,자유(절판),동서
승정살인사건/하서,자유(절판),동서
케닐 살인사건/자유(절판),동서
가든 살인사건/자유(절판),해문
딱정벌레 살인사건/자유(절판),동서
드래곤 살인사건/해문
카지노 살인사건/해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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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asp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