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마 조선에 고장원님이 쓰신 SF관련 글입니다.
http://cinema.chosun.com/site/data/html_dir/2000/01/11/2000011100001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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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소설의 문학성에 관하여 - (2)
2000년 01월 11일 17:16
- (1)편에 이어 계속 -
사무엘 R. 딜레이니는 네뷸러 상 수상작 '바벨-17' (1966년)에서 언어학과 기호학의 지식을 활용하여 언어와 의사소통에 관한 작품을 썼다. 여기서는 '나'와 '당신'이란 대명사가 없는 컴퓨터 언어로 말하도록 조건화된 인물이 등장한다. 그의 1976년작 '트리톤 (Triton) 역시 의사소통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로, 주인공 브롬 헬스트롬은 의사소통과 사랑을 하는데 문제를 안고 있다. 성전환을 포함해서 어떤 조치를 취해도 문제는 해소되지 않는다.
이작품은 미래세계에서의 성의 본질과 성의 역할에 대해 중요한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 딜레이니는 이처럼 단순히 문학의 형식적인 실험에 그치지 않고 사회적인 전망을 덧대는 뛰어난 작가다. 토마스 디쉬는 '죄수 수용소' (Camp Concentration, 1972년)에서 죄수의 인체실험에 관한 일종의 우화를 보여준다.
이 작품은 희생자 중 한 사람의 일기를 통해 진행되는데, 이 작품과 딜레이니의 작품들은 과학소설이 인간의 삶이 부닥치게 되는 문제들을 향해 올 수 있는데까지 왔다는 것을 시사한다. 여류 작가인 조안나 러스는 예일대 드라마 학과 석사 출신으로, 뉴 웨이브 운동에서 차지하는 그녀의 위상은 두가지 점에서 중요하다.
첫째상징은 그녀가 사용하는 언어가 현대 산문 가운데 가장 생기있고 힘차고 대담한 축에 속한다는 사실이고 둘째로는 급진적인 페미니즘에 대한 그녀의 헌신적인 태도가 뉴 웨이브 운동의 사회의식을 상징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혼돈은 죽었다' (And Chaoc Died, 1970년)에서 그녀는 차분하고 객관적인 산문으로 사건을 서술해 나가지 않고 다양한 초감각적인 체험을 내면에서 전달하기에 적합한 언어, 문체를 겨냥하고 있다.
더 나아가서 '여성인간' (The Female man)에서 그녀는 여성들의 극단적으로 다른 인생들을 다양하게 대비시키는데 SF 고유의 상상력을 동원한다. 이것은 현대의 인간행동 관습에 얽매인 소설로서는 거의 표현이 불가능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뉴 웨이브 운동 세대의 작가들은 각기 고유 영역을 개척해나가면서도 전체적으로는 SF의 방향을 진실로 새롭고 실험적인 문학형식으로 바꾸는데 일정부분 기여했다. 뉴 웨이브가 시작될 무렵 강력한 비판 세력이었던 아이작 아시모프까지도 뒤에 가서는 할란 엘리슨의 '위험한 전망'에 격려하는 서문을 실었을 정도이니까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문학적인 실험이 뉴 웨이브 이전에 전무했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60년대 중반부터 70년대 초엽까지 그러한 각성의 기운이 조직적으로 무르익고 시너지 효과를 냈다는 역사적 사실을 거론했을 뿐이다. 우리는 이미 올더스 헉슬리나 예프게니 자먀찐의 선구적 과학소설들에서 단순히 진기한 이야기를 전달하는 수준을 넘어선 뛰어난 형식실험을 엿볼 수 있다.
나는 황홀하게 (그리고 아마도 바보스럽게) 미소짓는다. 그리고 그녀의 동공의 양쪽을 번갈아 바라본다. 그리고 양쪽 모두에게서 나 자신을 발견한다. 미세한 1밀리미터짜리 존재, 나는 미세한 무지개 빛 감옥에 갇혀있다. 그리고 또다시 꿀벌, 입술, 개화의 달콤한 고통... 우리 번호들 각자에게는 조용히 똑딱거리는 보이지 않는 메트로놈이 있다. 그리고 우리는 시계를 보지 않고도 5분 이내로 정확하게 시간을 안다. 그러나 내안의 메트로놈은 멈춰버렸다. (예브게니 이바노비치 자먀찐 지음, 우리들, 열린책들, 1996년, 159쪽)
위의 인용문은 전체주의 사회에서 은혜로운 분의 교시에만 맹종하던 한 남자가 한 여인과 진정으로 사랑에 빠져드는 과정을 비유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기계같은 마음이 사랑을 통해 다시 자신의 본성을 일깨우는 상황이 섬세하게 기술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초기 SF의 진지한 실험정신은 과학소설의 주무대가 미국으로 건너간 뒤에도 대가 끊긴 것은 아니다. 비록 상업화된 미국 출판시장이 과학소설을 끊임없이 세속화시켰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작가들이 자신의 영혼을 값싸게 팔아넘긴 것은 아니었다. 그 예가 바로 알프레드 베스터다. 그는 다작가도 아니요, 모든 작품이 성공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다음에 소개하는 작품 만큼은 눈여겨볼 만하다.
솔직히… 카네페는 어때요?… 맞아 …말해서… 고마워 맛있군…. 사실이야. …엘러리… 메리, 정말… 테이트,… 난… 요즘 …난… 자네가… 드 코트니를… 모나크 치료하고 있네…. 에서… 카나페는 어때요? 갤렌도 함께… 더 이상… 조금 데리고… 일할… 수… 있으면 …왔어… 있으리라고는… 그는 …축하해줄 일이… 뉴욕으로 …생겼거든…. 생각하지… 올 예정인 그는… 않네…. 걸로 …얼마 전에… 길드시험을… 알고 있네. 쳤고… …모나크의 정보활동이… 2급 만약… 윤리 강령에… 판정을 자네가… 반한다는… 받았다네. …수락만 해준다면… 결론을 내릴 자네를 회장으로 추천할 준비가… 되어… 카나페는 어때요? …있다는… …사실을… 얘기를 …알아… 들었기 …줬으면 하네…. 때문이야. …파웰… …카나페는 어때요? …아. …카나페는 어때요? …고마워, …메리...
(알프레드 베스터, '파괴된 사나이', 도서출판 시공사, 1996년, 45쪽)
만약 텔레파시로 입을 열지 않고 자유자재로 의사표현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대화를 나눈다면 그 상황을 어떻게 묘사하겠는가? 아마 그들의 의식이 몸 밖으로 투사되면서 그들이 모여있는 거실은 그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상념들로 가득찰 것이다. 베스터는 바로 그러한 상황의 한 순간을 포착해 위와 같이 표현해 내었다. 이것이야말로 형식과 내용의 일치가 아니고 무엇이랴! SF적인 소재를 그 성격에 맞게 실험적인 문체로 소화하는 자세, 이것은 뉴 웨이브가 태동하기 십여년 전에 이미 출간된 베스터의 '파괴된 사나이' (1953년)의 구석구석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래서 뉴 웨이브 작가 사무엘 R. 딜레이니가 자신의 작품 '신성' (Nova, 1968년)에서 베스터의 '나의 행선지는 별들' (The Stars, My Destination)을 모방함으로서 선배에게 신중한 경의를 표한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짧은 맺음말: 문학의 질을 재는 잣대는 장르가 아니다.
결국 과학소설이 문학적이냐 아니냐, 또는 문학적일 수 있는냐 아니냐 하는 논쟁은 무의미하다. 과학소설은 어디까지나 과학을 모태로 한 소설이지 과학정보가 아니기 때문이다. 소설은 어떤 장르의 형태를 취하더라도 얼마든지 탁월한 문학실험이 가능하다. 그것이 SF의 껍질 쓰건 무협지나 추리소설의 형태를 띠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정작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소설은 그 장르가 문제가 아니라 작품을 소화하는 해당 작가의 치열한 문학정신과 세계관, 가치관에 전적으로 좌우된다는 보편적인 사실이다. 과학소설이 우리에게 진정으로 의미있는 까닭은 진기한 과학지식이 아니라 그로 인한 인간과 사회에 대한 진지한 성찰에 있기 때문이다.
★ 참고문헌
1. 강수백, '해설:젤러즈니의 영광과 비극', '내이름은 콘라드' (This Immortal), 도서출판 시공사, 1995년, 320~337쪽 참조
2. 로버트 스콜즈와 에릭 S. 랩킨, SF의 이해, 평민사, 1993년, 118~119쪽 참조
3. 강수백 옮김, 알프레드 베스터 지음, '파괴된 사나이' (The Demolished Man), 도서출판 시공사, 1996년
4. 석영중/ 이현숙 옮김, 예브게니 이바노비치 자먀찐 지음, 우리들, 열린책들, 1996년
< SF 칼럼니스트 고장원 cmpman@lyco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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