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

현실을 섬뜩하게 반영하는 SF
정자세포는 물론이요, 체세포를 이용해서도 인간복제가 가능해진 시대에 첨단 유전공학은 어디까지 다다르게 될까? 자칫하면 유전공학의 급속한 발달은 인간 사회와 가족제도에 대한 기존의 도덕율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을지 모른다. 이와 관련하여 폴란드의 의사출신 과학소설가 스타니스와프 렘은 다음과 같이 흥미로우면서도 곤혹스러운 상황을 가정해본 바 있다.
삼백년 전에 이미 죽었지만 생식세포가 냉동보관 되어 있는 존이라는 사내가 있다. 그 세포들을 이용해 수태한 여인은 피터를 낳는다. 엄연히 존은 피터의 아버지인 셈이다. 만약 존이 죽으면서 생식세포는 커녕 단 하나의 체세포도 남기지 않았다고 가정해보자. 대신 존은 자신의 아이를 갖고 싶어하는 여성이 나타날 경우에 대비해 유전공학자에게 다음과 같은 유지를 남겨놓았다.
그 여성이 낳은 아이는 누가 봐도 존을 빼닮아야 하며, 다른 어떤 남자의 정충도 쓰면 안된다. 오로지 그 여성의 난자를 가지고 처녀생식(또는 단성 생식)만 가능하다. 따라서 유전공학자는 유전자를 조율해서 피터가 존을 쏙 빼닮게 태어나도록 발생학적인 단계에서부터 관리해야 한다. (이 때 존의 사진이나 생전에 녹음해논 존의 목소리를 참고하는 것은 가능하다.) 이 때 유전학자는 존이 태어날 아이에게서 기대하는 모든 특징들을 해당 여인의 염색체 속에 ‘조각해 넣어야’ 한다. 그렇다면 ‘존은 피터의 아버지인가 아닌가?’
이정도 되면 ‘맞다’ 또는 ‘아니다’ 식으로 명쾌하게 답하기가 불가능해진다. 어떤 면에서는 존은 사실상 아버지지만 다른 면에서 보면 그렇지 않다. 경험론에만 호소해서는 명쾌한 답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그 정의는 본질적으로 유전공학자 뿐만 아니라 존, 피터의 어머니 그리고 피터 모두가 살아있는 사회의 문화적 기준에 의해 내려질 것이다.
더욱이 만약 유전공학자가 어떤 의도이건 간에, 그 아이의 유전형질의 45%를 유언한 대로 하지 않고 전혀 다르게 구성한다면 어떻게 될까? 피터는 해당 문화권의 기준에서 보더라도 존의 자식이라고 할 수도 없고 딱히 아니라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조만간 부분적으로만 아버지가 되는 것이 가능한 상황들이 생길지 모른다. 이러한 문제를 묘사한 작품이 오늘날에는 환타지지만, 삼사십 년 뒤면 정말로 실감날 것이다.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자식 간의 인위적으로 가공된 이같은 혈족관계는 그때가서는 지금과 같은 허구가 아니라 진실이 될 것이다. 오늘날의 부자관계는 유전공학이 실현되는 시대와는 다를 것이다.주3 이 얼마나 소름끼치는 예언인가! 이 글은 1980년대 중반 발표되었는데, 작가 스타니스와프 렘은 당시 불과 삼사십 년 뒤면 자신의 가정이 현실화되리라고 내다보았으며 그러한 예상은 현실과 크게 빗나가지 않았다. 2002년말 미국에서는 외계인을 신으로 추앙하는 종교단체 라엘리언 산하의 인간복제기업 클로네이드가 법적 규제를 무릅쓰고 복제인간 아기를 출생시켰다고 공표함으로서 인간 유전자의 무분별한 조작에 반대하는 사회 일반의 여론을 들쑤셔 놓았다. 그 진위 여부를 떠나서 이 사건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바야흐로 실정법을 동원해서까지 인간복제를 막아야 할 정도로 기술이 앞서가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마 새로운 밀레니엄에 태어난 우리의 아들 딸들이 어른이 될 때 쯤에는 렘의 말마따나 결혼하지 않고 단지 처녀생식만으로 자식을 얻는 날이 오지 않을까? 만약 그렇다면 그 사회에서 가족에 대한 가치관과 도덕은 어떻게 변모할까?

SF보다 더 SF적인 현실
SF보다 더 SF적인 현실은 비단 과학의 첨단영역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SF에서나 꿈꾸어 보았을 만한 문명의 이기를 일상 생활 속에서 훨씬 더 자주 접하게 된다. 모바일폰으로 영화를 보고 카메라를 찍고 CD 음질의 음악을 듣는 판이니 SF 컨텐츠가 그려내는 미래의 파노라마가 오히려 밋밋해 보일 지경 아닌가. 전국민의 반수 이상이 인터넷을 이용하고 디지털 위성방송의 채널 수가 190 개를 넘어서며, 한 가정에서 CDMA 방식 핸드폰을 2대 이상 쓰고 있는 21세기 초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바라보면 지금까지 출간된 SF 소설들 가운데 상당수가 미래에 대한 상상화이기는 커녕 오히려 현 시점에서 씌어진 리얼리즘 소설처럼 생각될 지경이다. 오죽하면 미국의 과학소설 작가 로벗 실버벅이 일찍이 70년대 중반에 대체 자신이 지금 SF가 그려낸 미래 속에서 살고 있는지 아니면 진짜 현실 속에 살고 있는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라고 푸념을 했을까. 이처럼 현실과 SF가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함께 질주하고 있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점차 SF에 대한 호기심과 매력을 떨쳐내기가 어려워진다.
미국 SF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휴고 건즈백(Hugo Gernsback)이 장편소설 에서 컬러 TV와 비디오 전화 그리고 원격 화상회의가 등장하는 27세기의 모험담을 발표한 해가 1929년이다. 그러나 2003년의 우리들은 이러한 과학문명의 이기(利機)를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여온 나머지 SF적인 비전을 현실과는 동떨어진 별개의 별천지인 양 오해하기 쉽다. 하루에도 수백번씩 어제의 SF 세계와 만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SF란 하루하루 변하면서 쏜살같이 달리고 있는 과학이란 열차에 타고 있는 인간을 순간포착해서 카메라로 찍은 다음 인간학적인 해석을 덧붙여 놓은 해설판이다. 그래서 과학소설은 꿈인 동시에 현실이다. 요즘 SF가 대중문화의 강력한 아이콘으로 등장하고 있는 까닭은 무엇보다도 SF 자체가 꿈을 주면서도 현실에서 계속 확인할 수 있는 공명 현상을 지속적으로 일으켜 오고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출처:www.gehealthcare.com/krko/webzine/2003_fourth/human04.html)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