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미국의  OSS 첩보원으로 일제 시대 조선 침투 작전인 냅코 프로젝트를 수행했던 유한양행의 창업자 유일한 박사에 대한 글을 올린 적이 있지요.


유일한 박사는 첩보원 지원 당시 50대의 나이에 미국에서 성공한 사업가였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내려놓고 조국 광복의 초석이 되기위해 앞장선 독립 운동가셨지요.

하지만 일본의 항복 선언으로 비밀 작전이었던 냅코 프로젝트는 폐기되고 유일한 박사 역시 살아 생전 자신의 독립운동 활동에 대해 가족을 포함 그 누구에게도 이야기 하지 않아서 그의 사후 20년이 지난 90년대에 미국의 비밀 문서가 해제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유일한 박사의 일생은 소설보다도 더 소설 같은 드라마틱한 일생이었는데 의외로 그의 일대기나 첩보 활동을 그린 드라마나 영화가 없는 것이 무척 의아할 따름입니다.


하지만 또다는 냅코 프로젝트의 첩보원이었던 박순동은 1965년에 자신의 이야기를 그린 수기를 공모해서 당선 되었습니다.박순동이 유일한 박사와 달리 비밀 작전이었던 냅코 프로젝트를 세상에 알린 것은 일본 학병을 탈출하여 미군 전략정보처(OSS)의 특수 요원이 되었으나 일제가 갑작스럽게 항복하자, 미국은 제네바 협약 위반 비난을 피하기 위해 이들의 공로를 은폐하고 하와이 포로수용소로 격리하여 '패전국 포로'로 취급했습니다미군 전략정보처(OSS)의 특수 요원이 되었습니다.그러나 일제가 갑작스럽게 항복하자, 미국은 제네바 협약 위반 비난을 피하기 위해 이들의 공로를 은폐하고 하와이 포로수용소로 격리하여 '패전국 포로'로 취급했고 국가가 없는 약소국의 청년이라는 이유로 미국과 연합군에게 철저히 이용당하고 버려진 분노와 수치심, 즉 ‘역사적 모멸감’을 세상에 고발하고자 수기를 공표했다고 합니다.


박순동의 일생 역시 매우 드라마틱 했습니다.1944년 일본 유학시절 학병을 차출되어 버마 전선에 투입(박순동은 모멸의 시대에서 버마 전선에 있던 조선인 위안부에 대한 기록을 거의 최초로 기술했다고 알려져 있음)되었는데 동료학병 3명과 일본군을 탈출하여 버마의 영국군에게 항복 이후 뉴델리로 이동하여 심문을 받은 뒤 미국 OSS의 눈에 띠어서 냅코 프로젝트 첩보 요원으로 차출 됩니다.

하지만 일본의 패망을 냅코 프로젝트가 폐기되자 박순동은 한인 전쟁포로(일본군출신임)들을 전쟁에 동원하지 말라는 제네바 협약 위반을 의식한 미군측에 의히 갑작스레 하와이 전쟁 포로 수용소에 수감되고 맙니다.이런 갑작스런 포로 대우에 박순동은 분노하지만 동료 2명과 더불어 하와이 포로 수형소에 수감된 2,700명의 한일 포로들을 위해 수용소내에서 자유 한인보를 발간하면서 한인 포로 지위 향상을 위해 동분 서주 합니다.

이후 박순동은 한국으로 송환되어 53년까지 영어 교사를 역임하고 53년부터 64년까지 직장인(제지회사 근무)으로 일했으며 65~67년까지 다시 영어 교사로 근무하다 67년에 49세에 나이로 사망하게 됩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냅코 프로젝트 비밀이 해제된 이후인 1999년에박순동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2002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하게 됩니다.그의 사후 25년 뒤에 그의 독립 운동이 인정된 셈이니 만시 지탄이라고 할 수 있지요.


박순동의 일생에서 알 수 있듯이 그가 모멸의 시대를 쓴 이유는 강대국에게 당한 배신과 '모멸'의 폭로하고 잊힌 역사적 진실의 발굴과 증언(냅코 프레적트 한국인들이 조국 광복을 위해 주체적으로 참여/버마 전선에서 일본군에 자행된 조선인 위안부의 피해를 고발),그리고 학벼으로 강제 동원되었던 수 많은 조선인들 중에 살아왔다는 부채의식이 함께 맞물려서 ‘우리 민족이 왜 이런 비극을 겪어야 했는가’에 대한 답을 후세에 전해야 한다는 지식인으로서의 사명감으로 저술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하지만 안타까운 점은 이런 생생한 후기가 후손들에게는 이미 잊혀져서 아는 이들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 말로만 독립 투사들을 떠받들고 있는 후손들을 참 부끄럽게 만들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by casp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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