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는 미래를 창조한다
위의 사례는 SF작가의 과학적 상상력이 어떠한 것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남들과 똑같은 조건 하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들만을 가지고 SF작가는 가장 과학적이면서도 창조적인 상상력을 펼치는 셈입니다. 이렇게 되면 SF는 단순히 미래를 예측하는 차원이 아니라 미래 그 자체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수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미래를 예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미래를 직접 창조하는 것’이라는 말처럼, SF작가 자신이 예언가가 아닌 창조자가 되는 것입니다. 남은 일은 SF작가의 창조물을 누군가 현실 세계에서 보고 그대로 만들어내기만 하면 되는 것이지요.
좀 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여기 또 다른 예를 하나 들지요.

세계 최초의 산업용 로봇 제조회사는 1962년에 미국 코네티컷 주에 설립된 ‘유니메이션’사입니다. 당시 제너럴 모터스 자동차 공장에 설치된 세계 최초의 산업용 로봇이 바로 이 회사 제품이었지요. 오늘날 전 세계의 산업용 로봇 시장을 형성하고 로봇공학의 물리적 토대를 제공하는 데 이 회사가 결정적인 공헌을 했음은 두말할나위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회사의 사장 조셉 엥겔버거는, 대학생 시절에 아이작 아시모프가 쓴 단편 「나는 로봇(I, Robot)」을 읽고 로봇의 가능성에 눈을 떴다고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1970년대 들어서 일본 회사들이 이 분야에 대거 진출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미국 산업용 로봇 시장에서 일본 제품의 점유율이 크게 높아졌는데, 당시의 일본 기술자들은 데즈카 오사무의 ‘아톰’ 로봇을 보고 자란 세대였습니다. 이를테면 일본의 ‘아톰’이 미국의 아시모프 로봇(사진 오른쪽)을 밀어낸 셈이라고나 할까요?

어쨌거나 SF는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한다는 점을 잘 유념하면 되겠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도 SF를 쓸 때 혹시 과학적으로 말이 안 되는 건 아닌지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요. SF의 과학적 상상력이 먼저 시대를 앞서가면, 나중에 현실에서 누군가가 그걸 보고 실제로 만들어낼 수도 있으니까요. 이러한 무제한의 과학적 상상력이야말로 SF의 가장 소중한 원천입니다.

SF의 공공의 적(?)
이제 SF작가들의 자유분방한 상상력은 때때로 과학자들이 미치지 못하는 창조적인 영역에까지 뻗어나간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겠지요? 게다가 그런 과감한 상상력이 과학자들에게도 새로운 영감을 제공하게 됩니다. 그런데 SF에 등장하는 이런저런 설정들을 두고 과학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단정지어 버리는 과학자들도 적지 않습니다.

<2001년 우주의 오디세이>를 쓴 아서 클라크는 세계적인 SF작가이자 미래학자이기도 한데, 그는 뛰어난 과학자들조차도 때로는 완고한 보수성을 고집하여 오히려 과학기술 발달에 장애가 될 때도 있음을 지적한 바 있지요.
예를 들어서 기관차나 자동차가 처음 만들어질 당시, 학자들은 ‘시속 30km만 넘어가면 사람은 숨을 쉴 수가 없어서 질식하고 말 것이다’라고 엄숙하게 선언했다고 합니다. 또 20세기 초반까지 거의 모든 과학자들은 ‘공기보다 무거운 물체는 결코 하늘을 날 수 없다’고 확신에 차서 얘기하고 있었습니다. ‘비행기’를 발명하려는 ‘바보 같은 사람들’을 비웃으며 하는 말들이었지요.
당시 미국의 저명한 천문학자였던 사이먼 뉴컴은 대표적인 비행기 불가론자였는데, 그의 생각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라이트 형제가 시험 비행에 성공했습니다. 그러자 뉴컴은 ‘비행사 한 명 정도의 무게 이상은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며 한 발 물러섰다고 하지요.
우주여행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꽉 막힌 과학자들이 있었습니다. 1950년대 중반에 영국 왕립 천문대장을 맡았던 리처드 울리 박사는 ‘우주여행이란 허튼소리’라고 코웃음을 쳤던 인물인데, 바로 그 다음 해에 소련에서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사진 아래 왼쪽-기념우표)를 발사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아서 클라크는 이상과 같은 예들을 들면서 ‘저명한, 그리고 나이가 지긋한 과학자가 어떤 것이 가능하다, 라고 말했다면 그건 거의 옳다. 그러나 그가 어떤 것이 불가능하다, 라고 말했다면 그것은 틀릴 가능성이 높다’라는 상당히 시니컬한 발언을 하기도 했답니다. 그러면서 ‘아주 발달된 과학기술은 마술과 구별이 안 된다’라는 유명한 말도 남겼지요.

우리는 SF영화 등을 보면서 거기에 나오는 장면들이 이러저러해서 과학적으로 엉터리다, 불가능하다, 라는 얘기를 접할 때가 많은데, 그건 어디까지나 SF적 설정을 이용해서 학습 효과를 얻으려는 교육적 수단의 한 방법일 뿐이지, 결코 SF 자체의 좋고 나쁨을 따지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SF는 SF대로 그 상상력을 마음껏 즐기고, 그와는 별도로 과학적으로 가능한지 아닌지는 또 그것대로 재미있게 따져보며 토론하면 되겠지요.

과학기술을 넘어서는 SF
SF가 창조하는 것은 사실 과학기술적 미래상뿐만이 아닙니다. SF에는 과학기술적 미래상이나 아이디어의 참신성 못지않게 문명 비판적 맥락도 작품 전반에 깔려 있거든요.
앞에서 예로 든, 원폭을 예언한 단편 「데드라인」의 경우에도 소설 속에서는 전쟁 당사국들이 결국 원폭을 사용하지 않기로 선언합니다. 원폭의 위력이 너무나도 대단해서 인류에 큰 위협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데드라인」 이전에도 이미 핵무기나 원자력을 상세하게 묘사한 SF소설은 여럿 있었습니다. 핵무기가 전 세계에 대량 확산되면서 딜레마에 빠지는 상황은 일찍이 1941년에 어떤 SF작가가 예언한 바 있고, 그보다 앞선 1940년에는 원자력 발전소의 노동자 문제를 다룬 작품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당시에 이런 SF들을 보면서 과학기술적으로 흥미를 느끼는 차원을 넘어 그로 인한 사회적 파장까지 일찍부터 주목했다면, 그 이후의 반핵 문제나 핵오염 등과 관련된 사회 문제도 일찍부터 조금은 더 나은 방향으로 흐르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SF는 위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과학 및 문화 양쪽 영역에서 모두 주류에 편입되지 못한 마이너 영역이었습니다. 그나마 인문학자들이 이런 쪽으로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1945년의 원폭 충격 이후의 일이며, 그것도 과학 그 자체를 새롭게 바라보려 한 것일 뿐 SF의 문명비판 기능에까지 적극적인 관심이 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SF가 과학적 상상력이라는 본령 못지않게 문명 반성의 실제적 매뉴얼일 수도 있다는 점은 1960년대를 지나면서 여러 작품에서 서서히 드러나게 되었지요. 그 결과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는 주저 <미래쇼크 Future Shock (1970)>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게 됩니다.
“...학생들에게 역사 과목은 가르치면서 왜 ‘미래학’ 과목은 없는가? 우리가 지금 로마의 사회 제도나 봉건시대 장원의 대두를 탐구하듯이 왜 미래의 가능성과 개연성을 체계적으로 탐구하는 과목은 없는가?
...SF를 문학작품이 아니라 일종의 미래 사회학이라고 본다면 그것은 예측의 습관을 길러내는 정신확장력으로서 엄청난 가치를 지닌다. 어린이들은 SF를 읽으면서 우주선과 타임머신에 관해 알게 될 뿐만 아니라, 더욱 중요하게는 어른이 되어 부딪치게 될 정치적, 사회적, 심리적, 윤리적 문제의 정글 속을 상상력을 발휘해 탐험해 보도록 이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SF는 ‘미래의 나’를 위해 읽혀져야만 한다.”
어때요? 이제는 우리도 학교에서 SF를 정식 교과목으로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By casp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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