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청소년을 위한 인터넷 사이트 글틴에 추리 작가 권경희님이 쓰신글을 갈무리하여 올리는 글입니다.

추리문학의 세계 <1>

“입시 공부 중에 추리소설 가장 많이 읽었죠.”
수능 점수 발표가 나면 언론에는 으레 전국 1등의 인터뷰 기사가 나온다. 얄미울 정도로 높은 점수를 받은 1등 수험자, 인터뷰 내용은 더욱 얄밉다.
“과외 공부는 전혀 안 했어요. 오직 학교 공부만 충실히 했어요.”
정말일까? 그럴 리가....... 이런 질문을 던지는 내가 미련할 게야, 하면서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펴보곤 한다.
내가 만약 수능 전국 1등이 돼서 고3 때 어떻게 공부했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뭐라고 대답할까?
“과외 공부는 수학 단과반 한 번 들어봤고요, 주로 혼자 공부했어요. 공부하다 지치면 추리소설 보면서 머리를 식혔죠.”
가슴에 손을 얹고 말하는데, 이건 사실이다. 고3이 어떻게 추리소설 읽을 여유가 있었느냐고 묻는다면, 여유가 없었기에 추리소설을 읽으면서 여유를 찾았다고 답하겠다. 긴장과 불안의 연속인 고3 시절, 나는 어느 때보다 추리소설을 많이 읽었다. 추리소설의 합리적인 논리 체계, 그 안에서 벌어지는 날카로운 두뇌 싸움, 통쾌한 반전은 수험생으로서 겪고 있는 불안과 긴장감을 말끔히 씻어 주었다. 그래서 공부를 열심히 할수록 추리소설도 더 많이 읽게 되었다. 덕분에 고3 때 추리소설을 가장 많이 읽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수학 문제를 푸는데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았다. 풀어가는 과정에서 뭔가 문제가 있는 듯했다. 공부 진도는 안 나가고, 머리는 지끈지끈 아프고....... 에라, 하는 심정으로 코난 도일의 단편 하나를 읽고 잠이 들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 꿈에 그 수학 문제가 나타나고, 꿈속에서 해결법을 찾은 것이다. 바로 잠에서 깨어 꿈에서 푼 대로 공식을 대입해 보았더니 정말로 맞는 답이 나왔다.
그때의 신기한 경험 덕분일까? 내 첫 추리소설(저린 손끝, 1996)의 주인공인 박민기 순경 역시 수사가 미궁에 빠져 머리가 아플 때마다 수학 문제를 푼다. 취미로^^.

왜 추리소설인가?
영국의 저명한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도 자신이 가장 즐겨 읽는 책은 추리 소설이라고 했다. 추리 소설의 마니아급 독자인 그는 마침내 추리 소설을 직접 쓰기도 했지만 자기 말대로 재능이 없어서인지 별로 주목을 끌지는 못했다. 그가 왜 추리소설을 좋아하는가에 대해 간명하게 답하고 있다. ‘지적인 논리성의 재미’ 때문이라고 했다.
많은 추리 소설 평론가들은 다른 장르의 소설과 구분되는 추리 소설의 특징으로서 ‘지적 논리성’을 들고 있다. 소설이란 인간사를 다루면서도 논리성보다는 휴머니즘이나 감성적인 요소를 더 중시하기 때문에 그에 대칭시킨 이론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한 예로 추리소설을 탐독하거나 몰입한 나머지 자신이 직접 쓰겠다고 나선 사람들을 살펴보면 이러한 지적 수준을 갖추고 충분히 자기 논리를 표현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다.
역대 미국 대통령들 중에도 추리소설을 탐독한 사람들이 많았다. 링컨, 루스벨트, 클린턴 등이 대표적이다. 링컨은 변호사 시절의 경험을 토대로 추리소설을 쓰기도 했다. 루스벨트도 직접 추리소설을 쓴 대통령중의 한 사람이다. 클린턴은 미국 추리소설 독자상까지 받았다. 이들이 한결같이 추리 소설을 좋아하는 이유는 추리소설이 지니고 있는 지적인 흥미와 논리성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추리소설의 장르적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지적(知的)’이라고 하는 것과 ‘흥미’와 ‘논리성’이라고 하는 것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이 3요소는 서로 이율배반적 요소를 지니고 있다. 논리성에 치중하다 보면 딱딱해져서 소설로서의 재미를 잃어버리게 되고 지적인 요소에 너무 치중해도 지루해진다.
이 세 가지의 모순된 요소를 어떻게 조화롭게 할 것인가가 추리소설의 성공 여부를 결정짓는 요소가 되며, 추리소설을 손에서 놓지 못하게 하는 비법이 된다.
대개의 순수 문학은 독자들에게 어느 정도의 고민을 요구한다. 그러나 독자를 고민에 빠트리거나 골치 아프게 한다면 그것은 이미 추리 소설이 아니다. 추리 소설은 무엇보다 재미있고 편안한 이야기여야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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