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브 키터리지>를 읽은 사람이라면, 그 작가의 첫 장편소설이라는 이 책을 고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뭐. 내가 이 책을 선택한 이유를 일반화시키고 있는 것일 지도 모르지만.  

 

나쁘지 않았지만, 기대만큼 좋지는 않았다. 이저벨이라는 삼십대 초반 엄마와 에이미라는 이십대 사춘기 아이. 그 모녀의 이야기이고, 그 주변인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어쩌면 다 같이 성장해나가는 이야기일 지도 모르겠다. 속에 비밀이라는 것을 꽁꽁 채워둔 사람들이 결국 의지하게 되는 이야기일 수도 있고.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라는 작가가 어떤 것을 좋아하는 지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올리브 키터리지>에서 느꼈었던 그 따뜻함,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이야기, 슬프지만 견뎌내야 하는 인생.. 이런 것들이 아직은 미성숙된 상태로 녹아져 있다고나 할까. 아 그것보다는 오히려 노골적이어야 할 것 같다. <올리브 키터리지>에서 감명받았던 은근함은 없었다. 말하고자 하는 것을 그대로 애기하는 느낌이 더 진했고. 그래서 내가 이 책을 아주 흡족해하지 않는 지도 모르겠다. 또는... 작가의 정말 잘 쓴 글을 이미 읽어버린 후유증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계속 나아갈 뿐이다. 사람들은 계속 나아간다. 수천 년 동안 그래왔다. 누군가 친절을 보이면 그것을 받아들여 최대한 깊숙이 스며들게 하고, 그러고도 남은 어둠의 골짜기는 혼자 간직하고 나아가며, 시간이 흐르면 그것도 언젠가 견딜 만해진다는 것을 안다 (p308)

 

책의 말미의 이 글. 이게 작가가 하고 싶었던 메세지리라. 도티와 베브와 이저벨이 친구가 되고 서로의 벽을 허물게 되는 순간, 에이미가 어른으로 거듭 나지는 순간, 이런 마음들이 느껴졌겠지. 외롭고, 힘들고, 남에게 말하지 못하는 내밀한 고민들을 가지고... 사람들은 살아간다. 누구랑 살고 누구의 엄마 아빠이고 누구의 친구이고... 라는 것과는 별개로, 산다는 건 때로 외롭고 가끔 힘겨워 쓰러질 듯 하고 도저히 내 속에서 뱉어내지 못하는 나만의 비밀스러운 무언가를 감추는 그 무엇이다. 어떤 것도 위안이 되지 않을 때, 그리고 사람에게서 받은 상처가 크다 못해 벌어지기 까지 해도, 역시 의지가 되는 것은 사람이다. 친절한 사람. 다 받아주는 친구. 인생을 조금 살다보니 이런 것들이 정말 가슴 깊숙이 절렬하게 느껴진다. 그게 사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그게 나와 사람을 사랑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그래서, 아 이 책은 안 읽어도 되겠어요... 라고 손사래를 치지는 못하겠다. <올리브 키터리지>를 보지 않은 분이라면 (아니 아직도?) 이 책부터 읽고 <올리브 키터리지>는 꼭 읽으세요.. 라고 말하고 싶고 <올리브 키터리지>를 읽은 분이라면 (사실 이런 분이 대다수이겠지 않나 라고 내 맘대로 생각) 작가가 원하는 게 항상 일관적이었음을 알아낸다는 차원에서도 한번 읽어 보세요... 라고 말하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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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시간 때우려고 고른 책이었는데, 꽤 재미있었다. 특히나, 항우 이야기에서 나온 고사성어들은 나를 감동(!)시켰다고나 할까. 자주 쓰는 이 고사성어들에 이런 역사적 배경이 있는 줄이야. 나의 무지함에 얼굴이 화끈거리지만서도, 한번 읊어보련다.

 

*

 

지록위마 (指鹿爲馬) - p162

 

진나라는 망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호해가 멍청이였기 때문이다. 이 멍청이의 가장 큰 공로는 중국 문화에 지록위마(指鹿爲馬)’ (권력을 독점한 환관 조고는 호해에게 사슴을 바치면서 이것은 말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호해는 어리둥절하여 중신들에게 의견을 물었지만 누구는 조고가 두려워 말이라고 하고 누구는 사슴이라고 답했다. 조고는 사슴이라고 답한 신하들을 모조리 투옥시켰고 이때부터 누구도 그의 의견에 반대하지 못했다. 이후 윗사람과 아랫사람을 농락해 권세를 휘두르는 것을 가리쳐 지록위마라고 일컫게 되었다) 라는 고사성어를 덧붙여준 것이다. 황제가 신하에게 그토록 조롱을 당하고도 아무 경각심도 없었으니 실로 멍청이 중의 멍청이였다.

*

이번에 신공항 발표나고 나서 청와대에서 신공항 공약을 어긴게 아니라 김해공항 확장이 신공항 공약이다.. 라고 말한 것에 대해 누군가가 이 얘기를 했다. 지록위마가 아닌가.

*

파부침주 (破釜沈舟) - p234

상장군이 된 항우는 즉시 영포 등에게 군사 2만 명을 데리고 서둘러 거록을 구원하라고 명한 뒤, 친히 전군을 지휘해 황하를 건넜다. 또 황하를 건넌 뒤에는 배를 다 가라앉히고 밥 짓는 솥을 깨뜨리는 한편, 머무를 집도 죄다 불살라버리라고 명했다. 그렇게 겨우 사흘 먹을 식량만 병사들에게 남겨 결사의 각오를 다졌다.

여기에서 나온 고사성어가 바로 파부침주 (破釜沈舟) . 밥솥을 부수고 배를 침몰시킨다는 뜻인데 퇴로를 없애면서까지 필사적으로 임하는 태도를 가리킨다.

*

금의환향 (錦衣還鄕) - p410

"이곳 관중은 비옥한 들판이 1000리이며 지키기는 쉬우나 공격하기는 어려운, 주나라와 진나라의 발상지입니다. 여기에 도읍을 세우면 능히 천하를 제패할 수 있는데 왜 굳이 팽성으로 돌아가려 하십니까?"

그러나 항우의 생각은 달랐다.

"부귀해지고도 고향에 돌아가지 않는 것은 화려한 옷을 입고 컴컴한 밤길을 가는 것과 같다. 그러면 누구 눈에 띄겠느냐?

*

목후이관 (沐猴而冠) - p411

이것은 그냥 치기가 아니라 그야말로 철부지 같은 생각이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세상 사람들이 초나라인은 원숭이가 그럴 듯한 갓을 쓰고 있는 격이라고 하더니 과연 그렇구나!" 라고 탄식했다. 이 말을 전해들은 항우는 지체없이 그를 기름 솥에 던져버렸다.

*

 

재미있지 않은가. 항우와 유방의 이야기가 널리 회자되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워낙 어지러운 시기였고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계략으로 넘쳐나던 때였다. 책은 한 글자도 안 읽는 항우와 유방이 세상을 평정해나가는 것도 꽤나 흥미진진하고... 진시황의 진나라가 왜 무너질 수밖에 없었는 지에 대한 이야기들도 재미있다. 예전 장국영이 주연했던 "패왕별희" 라는 영화도 생각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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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는 1권의 스릴러 소설 읽기 프로젝트.

(내 맘대로 정한 원칙이다. 휘릭)

 

이번에는 하라 료의 <천사들의 탐정>. 역시 탐정 사와사키가 나오는 단편집이다. 6개의 단편에 다 미성년자가 나오고... 사와사키는 역시나 매우 시크하게 매우 쿨하게 사건(?)에 임한다. 미성년자라고 해서 아기 취급을 한다거나 하지 않고 그냥 어른 취급을 해준다는 거, 이게 사와사키다운 대응이 아닌가 싶다.

 

여섯편 다 좋다. 대단한 플롯과 복잡성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아이들의 내면과 심리가 잘 담긴 단편들이다. 부모를 걱정하고, 친구를 걱정하고.. 친부를 증오하면서고 그리워하고... 아이들은 아이들이니까. 아. 내가 왜 아이 취급을. 아직 어른이 아니니까. 스무살이 넘지 않은 사람들이 가지는 미숙함, 두려움 들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마지막에, 사와사키가 어떻게 탐정이 되었는가가 묘사된 짧은 단편도 흥미롭다. 마치 내 옆에 있는 사람인 것 마냥 소설 속의 인물이 과거가 있고 사연이 있고... 그게 잘된 작품의 특징이 아닌가 싶다. 시리즈가 성공하려면 등장하는 사람들 각각에게 HISTORY를 잘 부여해야 한다. 어느 새 소설이 아니라 내 주변 인물의 이야기로 느껴질 만치.

 

가벼운 소설이라 금방금방. 어제 맥주 한잔 마시면서 (아 큰 캔이었다ㅜ) 읽다 보니 다 보게 되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머리가 많이 아픈... 야밤 맥주의 나쁜 점은, 먹을 땐 좋은데 일어날 때 고통이 수반된다는 점. 안대를 하고 잤는데 어디엔가 풀어제껴서 찾느라 혼났다는 첨언도 함께.

 

 

 

 

 

 

 

 

 

 

 

 

 

 

 

 

 

하라 료는 아주 드문드문 책을 내는 작가라, 이 번역본들 외에 남은 게 세권도 채 안된다. 허걱. 그나저나 내가 저 중에서 <안녕 긴 잠이여> 이걸 안 봤더라! 세상에. 내가 왜 놓쳤지? 나온 지도 꽤 된 저 책을. 흠냐. 바로 보관함에 퐁당. 이건 아니지. 몇 권 되지도 않는데 그걸 내가 놓치다니 이건 아니지. 라며 날 자책했다. 담주 주말 스릴러는 저게 되겠지. 냐하하.

 

하라 료의 소설은, 좀 더 써주세요.. 라고 얘기하고 싶을 정도로 재미있다. 레이먼드 챈들러의 필립 말로를 오마쥬한 것 같은 사와사키 탐정의 이야기를 볼 때면, 상당한 쾌감이 있다.. 라고 해두자. 그래서 번역이 마아~니 되었으면 싶은데... 지은 책 자체가 몇 권 안된다니. 철푸덕. 좀 쓰세요 하라 료. 데뷔한 게 몇 년인데 책 수가 이게.... 히가시노 게이고의 그 말도 안되는 다작 유전자를 나눠드렸으면 하는 바램이 스물스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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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16-06-07 0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천사들의 탐정을 곧 접해봐야겠네요. 하라 료 독특한 작풍이 저도 마음에 듭니다.

비연 2016-06-08 12:34   좋아요 0 | URL
추천드려요~^^
 

 

책 이야기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읽었던 오에 겐자부로의 '읽는 인간'.

올해의 책 후보로 올려놓고 싶은 책이다. 이미 올리기도 했고..

 

 

사실, 문체가 특이하다. 어째 머리에 착착 붙지 않는 문체. 그런데 그 진솔함이 뼛속까지 와닿는다. 아 이게 오에 겐자부로의 필력인가. 어쩌면 필력이라기보다는 진실의 힘에 더 가깝지 않을가 한다.

 

어려서부터의 책에 대한 사랑, 한 작가의 책을 3년씩 읽어내리는 독서법, 외국 책을 원서와 병행해 읽고 그 모든 독서가 자신의 작품에 계기로서 작용했음을 고백하는 老작가. 그와 함께 자신의 인생에 늘 함께 했던 '수상한 이인조'들. 책과 사람과 그의 개인적인 경험들이 한데 어우러져 감동이 되어 다가온다. 

 

"All right, then, I'll go to hell." (그래 좋다, 나는 지옥으로 가겠다) 이 대목에 영향을 받아 평생의 마음가짐으로 삼기 시작한 유년시절. 16세에 만난 <프랑스 르네상스 단장>이라는 책의 저자가 와타나베 가즈오이고 이 분이 도쿄대학 프랑스 문학과 교수라는 것을 알고 거기로 진학하기로 결심하게 된 계기. 그리고 생의 각순간마다 만났던 소중한 책들. 그리고 에드워드 사이드와의 소중한 인연.

 

자신의 본래 장소를 잃어버린 인간으로서, 망명자로 살아가는 나라의 가장자리에 서서 비판적 주장을 서슴없이 내놓는 인간이었습니다. 국가나 세계의 중심 지배 권력에 다가붙는 말을 꺼내는 인간이 아니라, 진정한 망명자로서 끊임없이 발언하는 태도로 일생을 관철해온 사람입니다. 자신의 진짜 고향에서 떨어져 나와, 자신의 진짜 장소가 아닌 곳에서 그러나 보편적인 의미에서는 진정으로 인간다운 일을 한 사람이라고, 저는 언제나 사이드에 대해 이렇게 말할 작정입니다. (p54)

 

에드워드 사이드를 원래 좋아하고 있었지만, 오에의 이 글로 더욱 좋아지게 되었다. 누군가에게 이런 평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흔할까.

 

그리고, 장애아를 아이로 가진 한 사람의 아버지로서의 고통과 그 때마다 위안이 되었던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에서는 뭉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은 의젓하게 성장한 히카리(음악가가 되었다)라는 아들과의 교감, 성장과정에서 느껴야 했던 고뇌들, 해결해야 할 문제들... 이런 것들이 오에의 문학적 성장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음을 또한 느낄 수 있었고. 특히,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 이 시인의 시들이 준 영향들. 아이와 '함께' 살아가기로 깊이 생각하게 된 마음. 그런 마음을 담은 <새로운 사람이여 눈을 떠라>라는 그의 책.

 

단테의 <신곡>. 죽마고우였던 이타미 주조... 유명한 영화 감독이었던 이타미 주조가 스캔들에 휩싸여 빌딩 옥상에서 뛰어내려 죽었을 때... 오에는 단테의 <신곡:지옥편> 제13곡을 다시 읽었다고 썼다. "나의 영혼은 끓어오르는 화를 주체할 수 없어, 죽어서라도 누명을 벗고자 올바른 몸으로 옳지 않은 일을 행하였다." (p144) ...  이 경험의 마지막에서, 오에는 고전을 읽으라고 얘기한다.

 

이렇든 고전은 다양한 형태로 몇 번이고 우리에게 새롭고 심오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측면이 있어요. 특히 노년에 이르러 그것이 주는 풍부한 경험을 생각하면, 저는 젊은 여러분에게 그때를 준비하기 위해서라도 자신의 고전을 제대로 만들어두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p154~155)

 

나의 고전. 무엇이 있을까 를 잠시 책을 내려놓고 생각해보았다. 어렸을 때부터 읽었던 책들 중에 내 마음에 남아 재독을 하고 싶을 정도로 인상에 남았던 책들도 떠올려본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 카뮈의 <이방인>... 그렇게 몇 가지가 떠오른다. 아 다시 읽어봐야겠다.

 

그리고, '수상한 이인조'의 중요인물인 이타미 준과의 인연에 대해 쭈욱 이야기하는 말미의 글들에서는 ... 괜한 찡함이 느껴졌었다. 

 

그에 더하여, 저는 삼부작의 마지막 작품인 <책이여, 안녕!>에서, 니시와키 준자부로가 번역한 T.S.엘리엇의 <네 개의 사중주>를 종종 인용했는데, 이번에 삼부작을 다시 읽으면서 직접 인용하지는 않았던 <리틀 기딩>에 나오는 다음의 한 소절이 지금 제 귀에 들리는 듯 합니다.

 

나는 옆어지는 밤의 어둠 속에서 고개 숙인 얼굴을 처음 보았다. / 낯선 사람 보듯 날카롭게 쏘아보는 동안 / 불현듯 내가 아는 죽은 선생을 닮았다는 걸 깨달았다. / 잊어버렸으나 어렴풋이 떠오르는 / 하나의 얼굴인 동시에 수많은 얼굴이다. (중략) 그리하여 나는 일인이역을 하며 소리쳤다, / 그리고 상대방이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 "뭐야, 자네 이런 곳에 있었나?"

 

'그렇다, 나는 이런 곳에 있다' 라는 마음을 담아 오랜 우정을 쌓아온 그리운 분들, 아울러 이 작품을 읽어주셧으면 하는 신세대 분들에게 이 책을 보냅니다. (p177)

 

살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지만, 특별한 인연들은 있기 마련이다. 이인조로서의 삶을 살아나가게 된다. 그런 사람들이 일생을 함께 할 수도 있고 먼저 떠나가기도 하고 그 시기만 함께 한 채 인연이 다하지 않을 수도 있고.. 하지만 그들이 있었기에 내가 있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기억하는 그들. 남은 반쪽인 내가 기억하는 나의 사람들. 이인조의 반대편. 그들에 대한 추억을 찬찬히 떠올려보기에 좋은 단초를 제공하는 글이었다.

 

이제 80대가 된 老작가의 지나온 인생과 책에 대한 글을 읽는다는 건, 참으로 소중한 경험이었다. 정말 진솔하게, 책을 사랑하고 읽고 쓰는 것에 한평생을 바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들, 그것이 진실이기에 글 너머로 감동이 전해오는 시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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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가 멸망하는 말 아침에도 블랙커피를 마실 수만 있다면 잠시는 생명체로서 느끼는 아늑함에 잠길 수 있지 않을까. 엄격한 경계조건을 조금은 잊을 수 있을 것이다. 사이카와 교수는 커피의 이런 기능을 한자 한 글자로 '魔(마)' 라고 표현했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니 오염된 밤 공기로 얼얼하던 목이 씻기는 기분이었다. (p247)

 

 

 

 

 

 

 

 

몸이 꽤 좋지 않아서, 커피마저 조금 자제하고 있는 요즘이라 그런가. 이 책에서 가장 인상에 남는 대목이 이 구절이었다니. 이건 말이다. 진정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면 쓸 수 없는 글이다.. 라는 생각을 했다. 모리 히로시는 분명, 커피 애호가(혹은 중독자?) 일 것이다. 모리 히로시의 S&M 시리즈에서 주인공 격인 사이카와 교수와 니시노소노 모에는 커피를 무지하게 좋아하고 담배를 또한 무지하게 좋아한다. 이게 다 작가가 투영하는 이미지 아닐까... 라고 잠시 생각.

 

어쨌든, 커피라는 건, 그렇게 잠시 주변과 내게 다가온 많은 문제들과 생각거리에서 떨어져 나 혼자에게 침잠하게 하는 정말 좋은 '음식'이다. 이것까지 자제한다는 건, 내가 몸이 좀 많이 좋지 않다는 거고 (덕분에 병원 순례 예정ㅜㅜ) 그래서 맘이 좋지 않다. 좀만 참으면 커피를 예전처럼 먹을 수 있겠지... 라며 위안하고 있기는 하지만.

 

 

겉치장을 신경 쓰지 않는 완벽하게 자유로운 인간은 그것을 자신의 삶의 방식으로 굳게 믿음으로써 겉치장을 한다. 멋 부리기를 싫어하는 인간은 멋을 내지 않는 게 멋있다고 생각하며 멋을 부린다.

문제는 같다.

타인에게 간섭하지 말라고 요구하는 인간은 그런 식으로 타인에게 간섭하고 있다.

자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특별하지 않다.

의식이란 원래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이렇게 자신의 정체성은 솔직한 사고에 의해 비가역적으로 연약해져간다.

가장 효과적인 방어는, 생각하지 않는 것.

(p363-364)

 

 

커피 얘기만 인상에 남은 건 아니다. 모리 히로시의 작품 4개를 다 보았는데, 이 책이 제일 맘에 들었다. 좀더 일반적이고 좀더 사유적이며 좀더 로맨틱(?)하다. 자세한 것은 직접 책을 보고 느껴보시도록...(흐흐)

 

일요일이 가고 있다. 주말 내내 침대를 내몸처럼 하고 누워만 있었더니 찌뿌뚱하기도 하지만 개운한 감도 가지게 된다. 워낙 스트레스가 많이 쌓였던 것일까. 정말이지 천장만 바라보고 아무 생각없이 멍 때리다가 자고 깼다가 다시 자고 하는 시간의 연속이었다. 이런 시간이 아깝다 라는 생각이 비집고 들어올 틈도 없이 그저 그렇게 반복적인 멍때리기 상태에 있어 본 지도 꽤 오랜만의 일이 아닌가. 덕분에 기력이 많이 회복되긴 했지만 그래도 조심 또 조심.... 한동안 스스로를 다잡아야 하겠다 싶다... 그러자니 커피도 잘 못 먹는다. 으. 급슬퍼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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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6-03-28 1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빠른 쾌유를 빕니다.
전 출근해서 핸드드립 한 잔 준비해 마시는 그 순간이 참 좋아요. 그 재미로 출근이 덜 힘드네요.
커피 마음껏 마시는 날이 빨리 오시길요....

비연 2016-03-28 11:06   좋아요 0 | URL
그쵸그쵸.. 그 재미로 출근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요...ㅜ
오늘 아침, 굳게 마음 먹고 한번 모닝커피를 해보았는데... 나쁘지 않아서..
하루 한잔씩만 일단 먹어볼까 싶어요...ㅜ 수시로 먹지는 못하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