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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번째 손
존 어빙 지음, 이문희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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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그러니까, 나는 처음 4분의 1정도를 읽었을 때까지도 이런 이야기가 될 줄은 전혀 몰랐다. 존 어빙의 유머를 즐기면서도, 과연 이 별 생각 없이 사는 잘생긴 남자의 이야기는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 이 작가는 어쩌자고 이런 시답잖은 이야기를 길게 끌고 가는 걸까, 중간중간에는 걱정마저 됐다.

끝까지 읽고 난 지금, 결론부터 말하자면 좋았다. 진짜 사랑이 한 사람을 변화시키고 무엇도 적극적으로 구하지 않던 사람을 열망하게 만드는 과정이 보기에 좋았고 나도 같이 안달이 났다

 

패트릭 월링퍼드는 그의 얼굴을 보는 누구라도 자연스레 호감을 갖게 되는 그야말로 훈남이다. 덕분에 크게 애쓰지 않고 별 생각 없이 살아도 한 뉴스방송국의 기자 자리에 않게 되고 원 없이 여자들도 경험한다. 결코 먼저 유혹하지 않지만 결코 거절하지도 않고 그저 세상 모든 여자들에게 자신을 열어둔 채 흐르는 대로 사는 속 편한 남자였다.

그러다 인도 한 동물원에서 사고로 맹수에게 왼손을 먹히고 그의 인생은 바뀌는데, 사실은 그것조차 스스로의 깨달음이나 의지에서 비롯됐다기보다는, 그 왼손을 먹히는 장면을 본 한 여자에 의해 변화를 유도 받게 된 것이다. 그만큼 패트릭 월링퍼드는 본인의 의지라는 것 자체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가 하면 오토 클로센 부인 역시 목소리 하나로 남자를 녹일 만큼 고유의 매력을 가진 여자다. 어쩌면 그 강력한 매력 때문에 남편도 사고를 당한 건지 모르겠다. 여자의 강력한 매력은 남자의 강력한 질투를 부르고, 남자의 강력한 질투가 술과 만나면 이처럼 불의의 사고를 일으키기도 하는 법이니까.

다만 클로센 부인이 월링퍼드와 다른 점은, 그녀는 적극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바를 구하고 능동적으로 행동한다는 점이다. 바로 그러한 극명한 차이가 월링퍼드로 하여금 그토록 깊게 빠져들도록 했던 것 같다. 극과 극은 결국 서로 만나게 돼 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클로센 부인은 도무지 그 속을 알 수 없다는 점에서 더더욱 매력적이다. 책을 다 읽은 후 지금까지 아무리 곰곰이 생각해봐도 이 모든 것이 다 그녀의 계산에 의해, 철저히 그녀가 의도한 바대로 흘러간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정말로 남편을 향한 사랑이 그녀로 하여금 남들이 봤을 때는 전혀 이해하지 못할 행동을 하게 한 것인지 아직도 모르겠다

 

아이를 갖기 위해 노력하던 두 잉꼬 부부는 함께 TV를 보던 중 패트릭이 사자에게 왼손을 먹히는 장면을 본다. 클로센 부인은 다른 여자들과 다름 없이 패트릭에게 매력을 느끼고 그만큼 강한 동정심을 갖게 된다. 오죽하면 그토록 사랑하는 남편에게 기회가 된다면 본인의 손을 TV에서 처음 보는 그 훈남 기자에게 기증했으면 좋겠다고 하고, 그러한 제안이 부른 순간적인 정신분열에 의한 사고로 남편이 죽자, 지체하지 않고 그 손을 들고 월링퍼드에게로 가는 것이다.

과연 클로센 부인의 진짜 마음은 뭘까, 남편도 사랑하지만 매력적인 월링퍼드에게도 너무 강한 끌림을 느껴 의도적으로 유혹한 걸까, 아니면 정말로 남편에 대한 사랑이 커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 사랑을 보존한 걸까

아무리 아무리 생각해보고 또 생각해봐도 글쎄, 클로센 부인의 진짜 마음은 잘 모르겠다. 보통 소설이라는 장르는, 어떠한 시점에서 쓰더라도 결국은 주인공의 진짜 속마음을 어떻게든 알려주게 마련인데, [네번째 손]에서는 끝까지 알 수가 없다.  

덕분에 클로센 부인은, 픽션 속 상대역인 월링퍼드 뿐만 아니라, 독자인 나에게까지도 끝까지 신비로운 여자로 남았다. 좀 이상한 여자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지만, 책을 다 읽은 후 지금까지도 이렇게 계속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작가로서, 자기가 시작한 이야기에 대해 이렇게 다 까발리지 않고 모호하게 남겨두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무릇 작가들이란, 다 말해주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모든 작가들이 다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알쏭달쏭 열린 결말을 내는 경우는 작가 자신도 어떻게 마무리 지을 지 몰라서일 때가 더 많을 거라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존 어빙이 이렇게, 다 말하지 않고, 다 설명하지 않고, 비록 소설 속 캐릭터에 불과하지만 한 여자를 이렇게 복잡한 상태로 남겨두었다는 점이 대단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무엇보다 패트릭의 변화를 없어진 손과 여전히 남아있는 감각으로 설명해내는 탁월함에도 반했다

 

사지가 절단되고 시간이 한참 지나도 없어진 자리에서 통증을 느낄 수 있다는 말은 사실이지만, 패트릭 월링퍼드는 그 사실이 별로 놀랍지 않았다. 오토의 왼손가락 끝부분, 그토록 살며시 클로센 부인을 만졌던 그곳에는 아무 감각이 없었지만, 패트릭은 그 손으로 그녀를 만질 때 진정으로 그녀를 느꼈다. 잠을 자면서 패트릭은 붕대로 칭칭 감아놓은 손을 얼굴로 들어올리면 없어진 손가락에서 아직도 그녀의 음부 냄새가 나리라고 믿었다. P.203 

계속 통증이 있는 건 아닙니다.” 월링퍼드는 설명을 이어갔다. “어떤 때는 시작만 하고 말기도 하거든요. 그러니까 쑤시거나 욱신거리기 시작하면 이제 곧 통증이 우겠거니 하는데, 오질 않는 겁니다. 시작하자마자 바로 사라지는 거죠. 마치 어떤 차단기가 있는 것 같은ÿÿ 전기차단기 같은 거요.”
, 바로 그겁니다.” 자작 박사가 말했다. 월링퍼드는 무엇을 기대했을까? 자작은 그에게 접합수술 겨우 오 개월 만에 22센티미터의 신경이 재생된 일을 상기시켰다.
기억합니다.” 패트릭이 대답했다.
, 이렇게 보면 됩니다.” 자작이 말했다. “그 신경들이 아직 할 얘기가 있다고.”
아니, 왜 이제 와서요?” 월링퍼드가 물었다. “손이 없어진 지 반 년이 지났는데. 전에도 어떤 느낌은 있었지만, 이번처럼 구체적이지는 않았어요. 이제는 정말 왼손 중지나 인지로 뭔가를 만지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데, 왼손은 없단 말입니다!”
다른 생활은 어떻습니까? 일과 관련해 스트레스를 좀 받고 있죠? 연애는 진도가 얼마나 나갔는지, 아니 진도가 나가거나 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내 기억으로는 연애 문제로 골치가 좀 아팠던 것 같은데요. 아니 당신이 그렇게 말했죠. 명심해요. 그 밖에 다른 여러 요소도 신경세포에 영향을 미칩니다. 거기엔 잘려나간 신경들도 포함되지요.”
그 신경들이 잘려나간느낌이 안 든다는 겁니다. 내 말은.” 월링퍼드가 말했다.
제 말이 바로 그겁니다.” 자작이 대답했다. “당신이 현재 느끼는 감각을 의학적으로 지각 이상이라고 합니다. 지각을 벗어난 이상감각이라는 거죠. 한때 왼손 중지나 검지에 통증이나 촉감을 느끼게 해주던 신경이 두 번 잘려나갔습니다. 처음에는 사자에 의해, 그다음엔 제가 잘라냈죠! 하지만 절단부위의 신경다발 어딘가에 잘린 신경조직이 아직 자리를 잡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그 신경은 온몸 구석구석에 퍼져 있는 다른 수백만 개의 신경과 이어져 있고요. 그런데 만일 절단된 신경 끝부분에 있는 뉴런이 접촉이나 기억이나 꿈으로 자극을 받으면 자신이 과거에 늘 보내던 그 메시지를 또 보내게 되죠. 그러니까 왼손이 있던 자리에서 비롯한 것처럼 느껴지는 그 감각은 왼손에서 나왔던 그 신경조직과 경로에 의해 기록되고 있는 겁니다. 이해하겠습니까?”
어느 정도.” 월링퍼드가 대답했다(사실은 잘 모르겠다가 맞는 대답일 것이다). P.223 

알고 보니 피부 속이나 위로 보이지 않는 작은 벌레가 기어다니는 듯한 느낌을 일컫는 용어가 있었다. “의주감이라고 하지요.” 자작 박사가 말했다.
역시나 월링퍼드는 이번에도 잘못 알아들었다. “?”
의주감입니다. ‘촉각적 환상을 뜻하죠.” 자작이 다시 한번 말해주며 설명을 덧붙였다. “n이 아니라 m입니다.”
(* ‘의주감(formication)’을 간통, 간음을 뜻하는 ‘fornication’으로 잘못 들은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 책은 결국 진짜 사랑은 사람을 변화시킨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상대가 어떤 사람이든, 어떤 의도로 접근했든, 그게 진짜 사랑이면 사람은 변한다는 것.  지금까지 이 리뷰에서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지만 굉장히 중요한 인물인 자작 박사 역시, 비록 의외의 여성과 사랑에 빠지긴 했지만, 사랑으로 인해 큰 변화를 겪는다.

그리고 그러한 변화는 별 생각 없이 일하던 패트릭을 한 인간으로서 철학하게 하고, 한 전문직 종사자로서 존재감을 갖게 한다. 

죽음과 악천후는 TV의 최고 장기였다. P.237 

언론이 명사들에게 취할 수 있는 태도는 단 두 가지다. 숭배하거나 버리거나. 애도는 숭배의 최고 형태이므로 명사들의 죽음은 분명 더 없는 기회였다. 그뿐 아니라 그들의 죽음을 통해 언론은 그들을 숭배하면서 버렸다. p.249 

좋은 소설과 영화는 뉴스 혹은 뉴스라고 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것은 아이템 이상이다. 좋은 소설과 영화는 읽거나 볼 때 그 사람이 느끼는 전반적인 분위기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책이나 영화에 대한 누군가의 취향을 똑같이 흉내 낼 수는 없다는 사실을 패트릭은 깨달았다. P.390 

변화 전의 패트릭을 아는 사람이라면, 패트릭의 위와 같은 사유의 흔적들을 믿을 수 없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이렇게 명확하게 패트릭은 변화를 거쳤다. 바로 그 위대한 사랑을 통해서 말이다

이리하여 패트릭 월링퍼드는 네 번째 손과 함께 두 번째 삶까지 덤으로 얻고야 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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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은 거짓말쟁이]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모든 사람은 거짓말쟁이
알베르토 망구엘 지음, 조명애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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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단번에 산도르 마라이가 떠올랐다. 사실 독자로서, 한 사람의 많은 시간과 생각이 압축돼 있는 작품을 읽고 난 후 이런 식으로 서평을 시작하는 건 좀 미안한 일이다. 적절하지도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모든 사람은 거짓말쟁이]를 읽으며 산도르 마라이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고 꽤 오래 읽지 않은 그의 작품을 열렬히 그리워하게 됐다.

각자의 독백 속에서 서서히 밝혀지는 진실, 혹은 새롭게 드러난 이야기들이 꼭 진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읽으면 읽을수록 처음의 생각이나 믿음을 뒤집을 수밖에 없는 치밀한 서사 구조와 그것을 이야기하는 등장인물의 심연, 분명 작가 자신의 철학일 거라고 믿게 되는 각 캐릭터들만의 철학.

이런 방식은 내가 생각하는 알베르토 망구엘의 [모든 사람은 거짓말쟁이]와 산도르 마라이의 많은 작품들의 공통점인데, 그래서인지 망구엘의 이번 작품에서 뒤로 갈수록 각자의 입장과 시각에서 다르게 회상되는 인물과 사건들, 또 숨겨진 이야기들이 그렇게 새롭지도 놀랍지도 흥미진진하지도 않았다.

현대소설들은, 영화도 그렇고, 왜 이렇게 일종의 ‘반전’을 좋아하는지 잘 모르겠다. 물론 30년이나 지난 사건과 그 때의 인물들과 그 때의 감정들을 4명이나 되는 서로 다른 사람의 기억과 해석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면 이런 식의 ‘반전스토리’ 형식을 지니는 것이 자연스럽긴 하다. 그런데 나는 오히려 이런 점들이 식상하다. 그래서 요즘은 오히려 추리소설이 아니라면, 인물의 자연스럽고 점진적인 변화를 잘 보여주는 이야기나 반전을 주목적으로 하고 있지 않은 이야기들에 더 마음을 주게 된다.

그리고 또 하나. 모든 픽션들은, 왜 이렇게 매력적인 인물-그러니까 누가 봐도 매력적이라고 할 만한-에 탐닉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4명의 화자가 저마다 다르게 그리고 있는 인물, 주인공은 ‘알레한드로 베빌라쿠아’라는 아르헨티나 출신 작가이다. 그렇게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으면서도 가장 첫 번째 환상 속 여자에게는 외면당했다거나 지나치게 엄격한 할머니의 가르침 속에서 외롭게 자랐다거나 하는 무시할 수 없는 아픔을 가진 인물이다. 그럼에도 그런 약점들이 그에게 연민을 불러일으킨다기보다는 오히려 그를 더 매력적으로 만든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태생적으로 아픔을 간직하고 있어서 매력적인 인물, 특히 예술가들에 이제 조금 신물이 난다.

때문에 이 책에서 가장 좋았던 부분은 4장의 고로스티사의 목소리였다. 이미 죽은 사람이라서 일까. 그의 목소리가 가장 담백하고 진실 되게 느껴졌다. 베빌라쿠아를 이야기하기 위해 베빌라쿠아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쏟아놓기보다는 자신의 이야기를 더 많이 함으로써 그의 인생에서 그가 어떤 존재인지를 이야기했다는 점 역시 그의 이야기에 신뢰를 느끼게 했다.

모두가 거짓말쟁이라고 외치는 가운데, 나는 그가 연인에게 읊어준 시구들만이 오로지 진실 같다.  

 

나는 가슴이 열매들로 부풀어 오르는 것을 느끼는,
그러고는 네 위에 떨어져 내려
너를 비옥하게 해주는 그 여름이라네.  

- 마누엘 J. 카스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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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명의 백인신부]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천 명의 백인 신부
짐 퍼커스 지음, 고정아 옮김 / 바다출판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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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좀 다른 얘기일지 모르겠지만, 입에 담는 건 물론이고 머릿속에 잠깐 떠올리기도 싫은 범죄가 일어났다는 뉴스를 볼 때마다 나는 이런 생각을 했었다. 모든 범죄자들이 자신이 정말 사랑하고, 또 자신을 정말 사랑해주는 연인이 있었어도 그런 일을 저질렀을까. 그러니까 세상 모든 사람에게 '짝'이 있다면 범죄는 확연히 줄어들지 않을까. 나라에서 죄수 교화와 법치 관련해 쓰는 돈을 인연 찾아주기 프로그램에 쓰면 오히려 더 좋은 효과가 나오지 않을까. 
 
친구들에게 얘기해봤더니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래서, 그 후론 정말 말았지만, 그리고 '천명의 백인 신부' 얘기와 따지고보면 엄연히 다른 이야기이지만, 또 한 번 '천명의 백인 신부' 리뷰를 쓰면서 이 이야기를 해본다. '리틀 울프'라는 이름의 인디언 족장의 제안이 어떻게 보면 나와 뿌리를 같이 하는 발상에서 비롯된 거라는 억지를 부려보려고. 
 
세상의 완전한 평화라는 것은 어쩌면, 세상 모든 사람이, 단 한 사람도 빠짐 없이 자신의 짝을 찾은 상태에서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 그리고 정말 이게 맞다면, 세상의 완전한 평화라는 것은 결코 오지 않으리라는 비극적이기 짝이 없는 생각. 하다못해 삼삼오오 모인 친구들 무리에서도 늘 누군가 짝을 만나면 누군가는 혼자이기 때문에. 
 
어쨌든 리틀 울프는 역사 속에서 실제로, 어떻게 보면 말도 안 되고, 어떻게 보면 순진하기 짝이 없고, 어떻게 보면 대담한 제안을 했다. 인디언과 백인들 사이의 융화와 평화를 위해서 천 명의 백인 신부를 보내달라고. 그러면 자기네들은 소중하기 짝이 없는 말 천 마리를 보내주겠다고. 역사에서는 당연히 이 제안이 하나의 해프닝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한 소설가의 머릿속에서는 이 대담하고 말도 안 되는 제안이 받아들여진다. 
 
'실미도'에 투입되는 사람들이 저마다 벼랑 끝에 있었던 것처럼, '천명의 백인 신부' 계획에 투입되는 천명에 턱도 없이 모자라는 숫자의 백인 여성들도 모두 각자 삶의 벼랑 끝에 있었기 때문에, 이 말도 안 되는 계획에 스스로 동참하고, 그래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메이라는 당차고 솔직하고 뜨거운 여성을 주축으로, 백인 사회에서의 삶 대신, 그들이 '미개인'이라고 부르는 인디언 부족 사회에서의 삶을 선택한 다양한 여자들과 또 그녀들의 남편, 또 다른 아내들과 그 가족들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것. 그들은 끊임없이 낯선 상황을 맞닥뜨리고, 겁 내고, 헤쳐가면서 조금씩 인디언 사회에 동화돼 간다. 서로 조금씩 다른 과정을 거쳐 서로 조금씩 다른 속도로. 
 
하지만 이런 현상을 단순히 '인디언 부족 사회에 익숙해지는 과정'이라고만 보기에는 뭔가 아쉽다. 각자 속해 있던 환경에서, 각자의 사연과 저마다의 이유로 배제됐던 그녀들이, 별다른 편견 없이 자신들을 바라봐주는 곳에서, '자기자신이 되어가는 과정'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 같다. 인디언들의 눈에 그녀들은 모두가 하나같이 '자신들과 다른 백인 사회에서 온 여성'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각자의 특징을 잡아 이름을 지어주지만 그런 작명법에는 아무런 편견이나 선입견이 반영되지 않고, 그저 그들이 가장 먼저, 혹은 가장 자주 목격한 장면을 문자 그대로 설명하는 방식이 있을 뿐이다.  
 
   
  그 아이들은 갈색 피부에 건강한 활기가 넘치고 아주 사랑스럽다. 나이보다 성숙하고 건강해 보이며, 같은 또래 백인 아이들보다 품행이 바르다. 아이들은 너무 수줍어서 말도 제대로 못 걸고, 내가 사탕을 주면 엄숙하게 받아들고 까치처럼 깍깍거리며 달아난다. p.169  
   
 
   
  여자들은 사냥단 참여가 허락되지 않지만, 샤이엔 족은 특별한 재능을 알아보는 데는 아무 편견이 없고, 피미는 사냥 솜씨를 확실히 증명했다. p.294  
   
 
메이는 그녀의 일기장에 인디언 부족 사회의 미덕을 이렇게 명료하게 설명한 바 있다. 그런데 이 소설의 진짜 미덕은 백인사회의 문화를 무조건 우월한 것으로 보지 않고 인디언 부족 사회의 장점을 바라보면서도, 또한 그네들의 '미개함' 또한 메이의 시선을 통해 냉정하게 주시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가난 문제는 동서고금을 초월하는 것 같아. 우리 사회처럼 미개인 사회에도 부자와 빈자가 있어. p.185  
   
 
잔인하기 짝이 없는 인디언들의 승전의식과 아직 낯선 술에 취해 몸과 마음을 가누지 못하고 벌이는 충격적인 행패들에 대해 충격을 받고, 가감 없이 비판도 한다. 
 
분명히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은 일임을 알면서도 소설에 몰입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생생한 묘사와 살아있는 캐릭터들 또한 이 소설이 크나큰 미덕이다. 
 
그럼에도 나는 소설을 읽으면서 왠지 가라앉는 기분을 피할 수가 없었는데, 이 이야기는 어떻게 해도 절대 해피엔드가 될 수 없겠다는 예감 때문이었다.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봐도 이것이 희극으로 끝맺어질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책 읽는 속도를 자꾸 더디게 만들었다. 
  
이미 우리는 인디언들의 역사와 그들의 아픔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항상 또렷한 의식으로 올곧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들의 가는 길이 편치 않다는 것을 많이 보아 왔기 때문에. 
 
실제 인물은 아니지만, 충분히 실제 인물이었을 수 있는, '천명의 백인 신부' 속에서 목숨을 잃은 수많은 자들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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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의는 아니지만]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고의는 아니지만 - 구병모 소설
구병모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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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차갑고 깊은 물. 구병모의 소설은 차고 깊은 물 같다. 차가운 물에 들어갈 때는 준비운동을 해야하고, 가슴에 참방참방 물도 좀 묻혀둬야 하고, 그래도 들어가면 처음에는 차갑다. 정신이 확 든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내가 쓰는 이 리뷰는 '마치 차갑고 깊은 물 같은 구병모 소설들에 대한 이야기.' 

받자마자 책을 읽었으니 책을 읽은지 3주가 지났는데도, 리뷰를 쓰기 위해 소설집의 목차를 다시 찬찬히 읽으니 각 이야기들이 웬만큼 다 생각났다. 많은 훌륭한 소설집을 읽어왔지만 이런 경우는 흔치 않다. 아니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모든 소설집은 읽고 나서 3주가 지나도 제목만 보고 이야기를 떠올릴 수 있어야 훌륭하다는 얘기는 전혀 아니다).  

그만큼 구병모 소설은 이야기 자체가 또렷하고 또 강렬하다. 발상부터가 기발하다. 이야기들의 성격은, 부산, 전주, 제천, 부천 등 우리나라에 수많은 영화제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꼭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같다'고 하면 맞을 것 같다. 때로는 신선하고, 기이하고, 괴기스럽기도 하고. 하지만 한 번도 유쾌하지는 않았다. 한 젋은 소설가가 써낸 소설집 전체를 한 마디로 정리한다는 것은 위험하고 어려운 일이지만 정말 이거 하나는 확신을 갖고 쓸 수 있을 것 같다. 유쾌하지 않다. 끔찍이도 싫어하는 벌레를 일단 두꺼운 책을 던져 잡아놓고는 차마 책 밑의 시신을 확인하지는 않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웬만하면 덮어두고 싶어하는 얘기들만 끄집어내서 그걸 아주 기발하고도 괴기스러운 상상력으로 더욱 더 또렷하게 만들어 눈앞에 들이미니까. 

명목상 경제적 효용성을 추구한다는 이유로 비유가 금지된 폐허를 찾은 남자의 이야기, 무슨 영문인지 눈 떠 본니 인도 한복판에 몸이 쳐박혀 있었다는 남자의 이야기, 훌륭한 교사로 살기 위한 노력이 한 순간의 실언(정말 실언일까)으로 끝나버린 여자 이야기, 죽음의 냄새를 풍기는 자들을 새들이 쪼아서 조장(鳥葬)해주는 시대를 살며 알바사기(?)를 당한 여대생 이야기, 잠들지 않는 아이를 세탁기에 넣어 돌렸다가 오븐에 넣어 조리하며 불면의 밤을 보내는 여자이야기, 눈물샘을 꿰메버린 고통을 느끼고 표현하는 법을 잃어버린 남자이야기, 그리고 성욕을 느끼면 몸속에 이식된 장치가 커다란 고철 괴물이 되어 몸밖을 뚫고 나오는 남자를 사랑한 여자의 이야기. 

[고의는 아니지만] 속에는 이렇게 한 줄 정도로 요약만 해도 감당하기 버거운 이야기들이 잘 짜여지고 쓰여져 있다. 그래서 책을 읽고 나면 이 책의 그로테스크하면서도 아름다운 표지가 얼마나 책 그 자체인지 알 수 있다. 모두가 공중에 붕 떠서 공중부양을 하고 있듯이 비현실적이고, 어쩌면 사람을 가장 사람답게 해주고 서로 구별할 수 있게 하는 머리 대신에 바나나나 치아, 장미, 포크, 하이힐, 캔 따위를 달고 있으니 공포스럽다.   

 

마치 ......같은 이야기 

가장 처음에 나오는 <마치 ......같은 이야기>를 읽고 나니 우습게도 누구 한 사람이 떠올랐다. 누구 한 사람이 떠오른 걸 '우습다'고 표현한 이유는 비유라는 것이 무언가를 더 효과적으로 설명하기 위한 장치이긴 하지만 결코 직접적으로는 언급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 많은 비유와 상황묘사들이 모여서 누구 한 사람(지금은 한 사람이지만 결국은 아주 여러 사람인)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이 그 자체로 역설이기 때문이다. 

"이건 더 말할 필요도 없는 실패작이야. 그냥 날생선을 우려낸 물도 이보단 낫겠어요." 

"생선이라니 그야말로 싱싱하지 않은 표현이로군요. 나로 말하자면 이건 병든 파충류의 분비물 같은 맛이에요." 

그러다가 일행 중 한 남자가 시인을 향해 손짓했다. 

"당신도 같은 걸 마시고 있으니 말해봐요. 이게 무슨 맛입니까?" p.13 

"왜 못합니까. 고작해야 비유일 뿐이잖아요." p.17
  

독재정권 하에서는 더욱 훌륭한 문학작품들이 많이 쏟아진다고 했다. 감시와 검열을 피해서 표현을 다듬고 말을 돌리고 주체를 숨기다보니 비유와 상징이 정교해지고 깊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치'라는 술집에서 술을 마시는 사람들은 간단한 안주 하나를 먹으면서도 시를 쓴다.  

"만일 손님께서 그...... 제가 조잡한 표현을 사용하는 걸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제물로 바쳐진 처녀의 핏빛 같은 술을 한잔 달라고 하느니보다 레드와인을 달라고 하는 게 실물로서의 술을 얻어내는 데 효율적이라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말하는 자와 그걸 듣는 자 사이에 존재하는 교양과 문화의 차이에 구애받지 않고 일을 진행할 수 있는 방법이지요." p.19  

비유가 금지된 표면 상의 이유는 쓰지 않는 편이 '경제적'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이면의 이유는, 인간의 말이라는 것 자체가 비유가 없이는 생동할 수 없다는 점을 감안할 때 듣기 싫은 말을 듣지 않고자 함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쓰고 또 알고 있는 두 가지 비유법을 금지하는 데 성공하자 나머지, 대상물 자체가 말의 표면으로 드러나지 않는 환유니 제유 같은 것들은 힘들이지 않고 차례로 자취를 감추었습니다만, 사실 권력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사라졌다기보다는 그것을 적재적소에 제대로 구사할 줄 아는 언어적 소양을 갖춘 경제 노동인구가 많지 않았을뿐더러, 수많은 말들 가운데 그것을 비유라고 뽑아낼 만한 예리한 식견을 갖춘 위정자도 흔치 않았기에 적발 사례가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다고 보는 게 맞겠습니다." p.21 

그런데 가장 아이러니한 것은, 그래봤자 위정자들은 이게 비유인지 아닌지 적발할 식견조차 제대로 갖추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보통 '어쩌고저쩌고 하면 넌 사람도 아니야' 뭐 이런 표현을 실생활에서 들을 수 있는데, 알고 보니 비유법을 금지한 그 사람은 정말로 '사람도 아니었다.' 어떤가, 유쾌하진 않지만 통쾌하지 않은가. 

타자의 탄생   

제목에 대해서부터 생각해보면, '타자'라는 것은 뭐 특별히 탄생한다기보다 그저 존재하는 것에 가까운데 작가가 '타자'가 '탄생'한다고 제목을 붙여놓은 걸 보면 특별한 의도가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그래서 <타자의 탄생>을 읽고 생각해보니, 타자는 그냥 내가 아니면 다 타자인데, 그 수많은 타자 가운데도 적지 않은 숫자의 타자는 나와 깊은 관계를 맺게 되고, 그런 사람들에게는 '남'이라든가, '타자'라든가 하는 말을 붙이기엔 좀 미안해진다. 분명히 '나 자신'도 아니지만 '남'이라고 하기에는 마음이 허락지 않는 그런 관계 말이다. 

그런데 살다 보면, 그런 관계에 있던 사람과 다시 멀어지거나, 그 사람을 밀어내야 할 때가 오고, 자의든 타의든 의식적으로 그렇게 했을 때 '타자'는 '탄생'하는 것이다. 

시작이 언제인지도 모르겠고 암튼 주인공 남자가 정신을 차려보니 자기는 길 한복판 이미 단단하게 굳어버린 시멘트 속에 정박한 상태였다. 처음에 사람들은 말을 걸고, 걱정하고, 도움의 손길을 준다. 완전한 타자였던 사람들과 조금씩, 순간이나마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역시나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는 법. 처음의 관심과 관계맺기도 오래가지 못하고, 오히려 도시락을 갖다주던 아내와의 관계도 이 일을 계기로 좀 더 명확한 상태로(?) 정리가 된다.  

그리고 길 한 가운데, 시멘트 속에 정박한 남자는 깨달음을 얻는다. 

육체가 한 장소에 정박해 있으면 시간은 거의 흐르지 않거나 비 그친 아스팔트 위의 지렁이처럼 포복 전진할 듯 말 듯 뒤틀린다. 어쩌면 시간은 자신의 몸이 움직이며 타인이나 사물과 부딪치는 데에서, 혹은 부는 바람을 적극적으로 온몸에 맞음으로써 비로소 생성되는 미미한 파장의 한 종류인지도 모른다. p.63  

정박한 것은 몸이지만, 몸이 정박하면 시간도 덩달아 꼼짝할 생각을 않고, 시간이 움직이지 않는데 무슨 일이 일어나겠는가. 이런 상황에서는 진짜 타자는 물론이고 나 자신조차도 타자가 된다. 

고의는 아니지만 

야, 쟤네들 봐. 쟤들은 되게 예쁜 거 한다. 그 말에 원탁의 아이들은 우르르 일어나서 그들과 자신들 사이에 놓인 강의 폭과 깊이를 깨닫는데, 그건 곧 준비물을 가져온 아이들과 그렇지 못한 아이들의 미술 활동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목도하는 것이다. p.87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어쩌면 삶은 '그들과 자신들 사이에 놓인 강의 폭과 깊이를 깨닫'는 일인 것 같다. 처음에는 어렴풋하게 느낄 뿐이지만 시간이 갈수록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목도하'게 된다. 엄마 아빠가 바쁜 아이들은 그 일을 남들보다 좀 더 빨리 시작한다. 

다 아는 얘긴데, 어쩌면 나도 겪었던 얘긴데, 구병모의 담담하고 무신경한 서술은 그것을 좀 더 또렷하게 만든다. 그리고 구병모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이런 아이들을 가르쳐야하는, 준비물을 가져오는 아이들과 매번 가져오지 못하는 아이들을 차별하지 않고 똑같이 사랑해야 하는 교사에 대해서도 말한다.

그녀는 누구한테 휘둘러버릴 것만 같은 주먹을 트레이닝 바지 주머니 속으로 감추고 마지막 남은 관용을 바닥까지 긁어 설득 조로 말했다. p.101  

좋은 선생님이 되려고, 차별하지 않고 모든 아이를 똑같이 대하려고 애쓰지만 교사도 인간인지라 하루에도 몇 번씩 '누구한테 휘둘러버릴 것만 같은 주먹을 트레이닝 바지 주머니 속으로 감추'어야만 한다. 하지만 참는 것도 한 두 번, 결국 그녀는 그렇게 감추어왔던, 대신 차곡차곡 쌓아두었던 주먹을 한 순간, 한꺼번에 휘두르고 그것이 결국은 비극을 부른다. 

아, 이쯤 쓰고 나니 정말 가슴이 답답해진다. 그런 말을 한 그녀를 나쁘다고 할 수 있을까. 과연 차이가 점점 더 또렷해지는 아이들을 차별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이건 누구의 잘못일까. 이건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내가 아이를 낳아 기를 때는 상황이 달라져있을까. 그렇지 않을 거라면 나는 어쨌든 아이의 준비물을 잘 챙겨줄 수 있는 부모가 되기 위해 더욱 더 치열하게 돈을 벌어야 할까.  

치열한 고민 끝에 단순한 결론 한 가지를 얻는다. 아이들 교육비와 심지어는 준비물들까지 다 유치원에서 준비해주면 어떨까.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나라에서 돈을 지원하면 어떨까.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나랏돈을 운용하는 작자들이 돈을 좀 합리적으로 잘 써주면 어떨까. 근데 그렇게 한다고 한들 아이들이 그 어떤 상처로부터도 보호될 수 있을까. 나는 지금 이 리뷰에서 도대체 몇 번의 질문을 하고 있나. 구병모의 소설이 이런 질문들을 만든다.

조장기 (鳥葬記) 

죽음의 냄새라니, p.123  

움직이지 않고 오랫동안 멈추어 있던 사람들에게 새의 무리가 날아와 그를 쪼아죽인다. 그들은 '죽음의 냄새'를 풍기는 자들이란다. 웃을 때 쓰는 근육보다 우울한 표정을 지을 때 쓰는 근육이 확실히 적다. 그러니까 움직임이 적다는 것은 어쩌면 '우울'이나 '좌절' 같은 말과 가깝다. 이런 점을 포착해내고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게 구병모의 재능이다.

그리고 '우울'이나 '좌절' 같은 말과 가까운 한 여대생. 학비를 벌어야 하지만 못생긴 데다 특출난 재주도 없다. 그런 여자가 쉽게 구한 일자리는 뭔가 개운치가 않다. 그래서 그만두려고 하는데 그것마저도 쉽지가 않다. 좋은 일자리는 구하기가 어렵지만 힘든 일자리에서 벗어나기는 힘들고, 좋은 일보다는 나쁜 일에 휘말리는 게 더 쉽다.  

자신에게 조금씩 다가오는 우울과 좌절과 죽음의 기운을 의식하며 두려워할 정도로 그녀는 다행히 아직 건강하지만, 곧 모든 것을 포기하고 벤치에 멍하니 앉아있게 될까봐 무섭다. 뭔가를 제대로 시작도 해보지 못하고 실패하는 이 땅의 청년들이 가엽다.

어떤 자장가 

이번에는 자신의 논문 대신 남의 논문이나 레포트를 대필하며 잠자지 않는 아이를 키우는 여자의 이야기다. 아이는 자지 않고, 남편은 깨지 않고, 독촉 문자는 온다. 갖은 방법으로 아이를 재우려고 해봐도, 재우려고 할수록 자지 않으려고 하는 딸과 여자는 거의 사투를 벌인다.

자라면서 아이는 여자가 자신을 재운 뒤 다시 부스럭거리며 일어나 무언가를 한다는 걸 조금씩 눈치챘으며, 그 무언가가 마치 비밀스러운 제사나 의식이라도 되는 줄 알고 그 현장을 놓치지 않기 위해 점점 더 오래 깨어 있기 시작했다. p.160  

이런 상황에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이 과연 무엇일까. 구병모가 제시한 해답은, 아이를 세탁기에 넣어 돌리고, 오븐에 넣어 익히는 것이다. 잠을 거의 자지 못해서 곧 죽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 여자가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한 환상. 아니면 잠을 거의 자지 못하다보니 멍한 정신에서 자기도 모르게 불러낸, 진심이 섞인 자신의 무의식. 

얼마 전에 들은 정말 결혼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더 생각해보게 만든 지인의 말이 절로 떠오른다. "우리 아내는 말랐는데도 팔 힘 하나는 정말로 세. 나는 우리 애를 30분도 못 안고 있겠는데, 우리 아내는 3시간도 안고 있더라니까. 와우, 정말로 팔 힘이 세." 자기 아내가 자기 딸을 세탁기에 넣고 돌리는지, 오븐에 넣고 굽는지도 모르는 채 자고 일어난 남편이 겨우, 그리고 버티다 못해 잠든 모녀를 보는 마지막 장면은 정말이지, 최고다. 이렇게 시니컬하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결말이라니.

재봉틀 여인 

"뭐 잘했다고 울어?"는 아마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법한 아주 보편적인 발화이다. 뭘 잘했다고 우는 게 아닌데, 뭘 잘했다고 우느냐 물으면 그게 아니라고 설명하기도 난감하고, 그렇다고 나는 눈물을 딱 그치기도 힘들다. 이런 상황에서는 애초부터 안 우는 게 최곤데, 애초부터 안 울 수만 있다면 안 울었겠지. 그러니까 "뭐 잘했다고 울어?"라는 말을 들으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오히려 눈물이 더 나는 것 같다. 그리고 우연히 뭐든 꿰메준다는 재봉틀 여인을 만난다.

"손님, 무엇을 꿰메드릴까요?" p.184 

뭐든지 꿰메준다고 하면 과연 나는 뭘 꿰메달라고 했을까. 무서웠을텐데 겁도 없이 이 남자는 그 재봉틀 여인에게 뭔가를 꿰메달라고 했고 그 덕에 그는 더이상 울지 않게 됐다. 하지만 울지 않는다는 것은 단순히 울지 않는다는 것 이상을 의미했다. 그는 차에 부딪혀도 울지 않았고 아프지 않았고, 사랑앞에서도 아주 시크한 사람이 됐다. 그래서 그는 행복했을까. 

곤충도감 

난감하다. 그러니까 구병모의 재주는 그냥 둬도 난감할 상황을 더 난감하게 이야기하는 것인 것 같다. 이걸 어째야하나, 이럴 경우 어떡해야 하지? 근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명확한 답을 낼 수 없는 질문만을 이야기 속에 교묘하게 섞어서 마구 던져대니까.  

오락실에서 1945 게임할 때가 생각난다. 처음에는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모두 쏴서 없애버리겠다는 결연한 의지로 시작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여기저기서 들이닥치는 폭격에 미처 대처하지 못하고 결국은 내가 뻥! 하고 사라져버리던. 아마 구병모가 던지는 질문에도 한꺼번에 다 대답을 찾으려다 보면 결국은 뻥!

어떤 계기로 인해 피해자와 가해자의 경계가 지워지는 것은 순식간이다. p.226 

범죄이기도 하고 범죄가 아니기도 하고, 잘못이기도 하고 꼭 잘못이라고 말 할 수 없기도 하고, 피해자이기도 하고 가해자이기도 하고, 용서할 수도 없고 용서하고 말고 할 일이 아니기도 하고, 말을 할 수도 없고 말을 안 할 수도 없고. 아, 정말 어쩌라고! 하는 반항아적인 대사가 절로 나온다.  

성범죄자와 성범죄자에 대한 처벌, 그리고 사회의 시선을 바라보는 구병모의 시선은 언뜻 불분명해보이지만,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기도 하듯이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기도 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가해자가 가해자가 된 것은 그 자신이지만, 가해자를 피해자로 만드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어제 본 [리틀 칠드런]이라는 영화 속 소아성애자 로니와 그의 엄마가 떠오른다.

그렇다고 해서, 구병모의 질문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고 상당히 동의한다고 해도, 재발율이 높은 성범죄자의 죄를 한 번의 실수로 생각하고 아무런 편견 없이 봐줄 수 있을까. 또 그건 자신이 없다. 대체 어떻게 해야할까. 나는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며,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모르겠다'는 답이 비겁하다는 걸 알지만, 정말 모르겠다. 

 

다시 책 표지 이야기를 하자면, 표지 속 일곱 명의 주인공들은 모두 한결같이 두 다리 곱게 모으고, 두 팔은 얌전히 차려 자세를 한 모습이다 (임산부만 가볍게 배를 받쳐들고 있다). 처음에는, 그리고 어릴 때는 다 다르게 시작하지만 결국 삶은 살다가 어느 순간 멈춰서 보면, 다들 이렇게 누가 구령이라도 부른 것처럼 '차려'를 하고 있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걸까. 그렇다면 이렇게 굴욕적이고 무의식적인 차려 자세에서 벗어나게 해 줄 수 있는 건 뭘까. 역시 잘 모르겠다. 하지만 수많은 방법 중 하나로 '이런 소설을 읽는 것'이 어쩌면 우리를 뭔가 좋은 답 근처로 데려가 줄 수 있을 것 같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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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틸 라이프 아르망 가마슈 경감 시리즈
루이즈 페니 지음, 박웅희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1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분명, 슬슬 페이지가 넘어가는, 마구마구 뒤가 궁금한, 숨막히게 재미있는 추리물은 아니었다. 하지만 따뜻했다. 

클라라는 지금까지 스리 파인스에서 25년 동안 살면서 단 한 번도 범죄 소식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마을 사람들이 현관문을 잠근다면 그건 기껏해야 주키니(오이 비슷한 서양 호박)가 넘쳐나는 수확 철에 이웃 사람들이 주키니를 몰래 가져다 놓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p.9 

마을에 대한 설명을 보라. 이런 곳이다. 살인 사건이 일어났으나 처음엔 모두가 사고사일 거라고 믿는 그런 조용하고 평화로운 마을. 그래서 나중엔 누가 문을 잠그고, 문을 잠그지 않느냐도 이 마을에서는 하나의 단서가 된다. 

"오스카 와일드는 양심과 비겁함은 똑같다고 말했어. 우리가 나쁜 짓을 하지 못하는 건 양심 때문이 아니라 붙잡히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때문이라고." p.33 

"오스카 와일드는 어리석음 외에는 죄가 없다고 했지요." p.209 

대화의 수준을 보라. 마을 사람의 절반쯤? 이건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이 사건의 주축이 되는 스리 파인스 사람들은 대부분 똑똑하거나 지혜롭거나 따뜻하거나 훌륭한 예술가다. 

가마슈는 이제까지 그런 사람들의 표정을 수도 없이 많이 보았다. 절대로 듣고 싶지 않은 소식을 간절히 원하는 사람들. p.50 

그는 갓 죽은 사람의 손을 볼 때면 언제나 아픔을 느꼈다. 그 손이 잡았을 온갖 사물과 사람들이 상상이 되는 것이다. 음식, 얼굴들, 문손잡이들. p.54 

이 사건을 해결하는 가마슈 경감은 대단한 혜안을 가진 지혜롭고 능력있고 인간미까지 넘치는 수사관이다.  

"훌륭하셨죠. 그분과 대화할 때면 그분은 제가 세상에 유일한 존재라도 된 듯한 느낌을 갖게 하는 놀라운 능력을 갖고 계셨죠. 이해하시겠어요?" 

물론, 보부아르는 알고 있었다. 아르망 가마슈도 똑같은 능력이 있으니까. 대다수 사람들은 이야기를 하면서도 다른 곳을 보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고개를 끄덕이거나 손을 흔든다. 가마슈는 절대 그러지 않는다. 가마슈가 누군가를 볼 때는 그 사람이 곧 우주다. 그러면서도 대장은 주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세세한 것까지 파악한다. 단지 드러내지 않을 뿐이다. p. 178

그리고 이 모든 사건의 중심, 살해당한 제인 닐은 마을의 정신적 지주와도 같은 사람이다. 제인의 죽음으로 클라라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받는 충격만 보아도 그녀의 영향력을 알 수 있다.

"사실, 미스터리는 왜 더 많은 사람이 살인을 저지르지 않느냐는 거야. 인간으로 산다는 건 끔찍할 게 분명한데." p. 246 

이렇게 부정적인 말만 주로 입에 담는 시인 루스 자도 역시 결국은 다음과 같은 시를 읊으며 제인에 대한 누구보다 깊은 사랑을 고백한다.

"우리가 만났을 때 제니가 내게 키스했다. 

앉았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시간아, 사랑스런 것들을 훔쳐가기 좋아하는 도둑아. 

그것도 네 명단에 넣어라. 

그래 나는 지쳤다. 그래 슬프다. 

그래 건강과 재산을 가지지 못했다. 

그래 점점 늙어간다. 

하나, 그건 꼭 넣어라. 

제니가 내게 키스했다." 

루스는 그 시를 작은 목소리로 읊었고, 조용한 방이 들었다. 

"리 헌트의 '론도'. 내가 썼으면 했던 유일한 시야." p.382 

마을 사람들에게는 죽은 제인이 이렇게 거대한 존재이기에, 결국 누가 제인을 죽였을 것인가가 궁금해지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 하지만 가마슈 경감이 범인을 추적하는 과정은 역시 현대의 과학수사 방식이 아니라, 끊임없는 관찰과 용의자들과의 대화 그를 바탕으로 한 끊임없는 생각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이는 '숨가쁜', '숨막히는', '손에 땀을 쥐는' 그런 종류의 추격전은 아니다.  

그것이 나의 읽는 속도를 지연시켰다. 마을 사람 하나하나의 사정과 내면에 집중해야하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그래서 누가 범인이냐고?!" 하는 조바심이 났달까. 추리소설 읽기란 흔히, 조금씩 조금씩 사건의 실체가 드러나는 과정을 급하게 쫓아가는 과정인데 말이다.   

그런데 또 생각해보면 용의자들의 내면을 탐구한다고 해서 긴장감과 속도감이 떨어졌던 건 아닌 것 같다. 미야베 미유키의 '모방범'의 경우 무려 3권에서 수많은 새로운 인물들을 등장시켜가며 그들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지루하기는 커녕, 지금 한 장면을 읽고 있으면서도 빨리 다음 장을 읽고 싶게 만드는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점심 먹으면서 저녁에 뭐 먹지 생각하는 것처럼. 

차이가 뭘까 생각해보니, 첫번째 차이는 이거였다. '모방범'에서는 새로운 인물이 등장할 때마다, 그 인물이 그 사건과 왜, 어떻게 관련을 맺고 있는 지도 함께 드러났지만, '스틸라이프'에서는 등장인물들이 저마다의 사연과 개성은 갖고 있지만 그들의 등장이 반드시 새로운 사건이나 단서가 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또 하나는 '스틸라이프'의 주인공들은 모두 각자 사연을 지니고 있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의 완벽에 가깝다는 것이었다. 죽은 제인 닐을 비롯해서, 좋은 화가인 데다 천사같이 착하기까지 한 클라라, 그리고 역시 뛰어난 화가인 데다 너무나 순수하게 그녀를 사랑하는 거의 완벽한 남편 피터, 가마슈 경감, 그를 완벽하게 보좌하는 보부아르... 

물론 성격파탄으로 그려지는 제인 닐의 조카 욜랑드와 그녀의 남편 앙드레, 철없는 아이들, 경거망동하는 신참 형사 니콜이 등장하긴 한다. 하지만 욜랑드와 앙드레는 범죄소설에서 꼭 필요한 가장 지목하기 쉬운 용의자 역할을 위해 없어선 안 될 캐릭터고, 니콜은 오히려 가마슈의 완벽함과 인간미를 부각시키기 위한 요소였던 것 같다. 

이런 점들이 '따뜻한 추리소설'을 탄생시키긴 했으니 '숨막히는 긴장감'을 떨어뜨리는 데 한 몫 했다. '이 사람인가?' '설마 이 사람이 범인?' 하고 의심해볼 용의자의 수를 너무 줄여놨고, 이렇게 착한 사람들만 만나는 것보다는 아무래도 각자 자신의 약점이나 추함을 드러내는 등장인물들이 범죄소설을 읽는 내 맘도 더 편하게 해준달까.

그럼에도 나는 '스틸라이프'가 좋은 작품이라고 말하고 싶은데, 죽음을 바라보고 설명하는 작가의 방식은 우리의 '가마슈 경감' 캐릭터처럼 지혜롭고 통찰력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안고 있는 문제를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어른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삶을 헤쳐 나가지 못하는 그들에게 온갖 변명거리를 제공해주잖아요?" p.205 

"살인에서 희한한 점은 그 행위가 종종 실제 행동보다 몇십 년 앞서서 실행된다는 겁니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데, 그 일로 오랜 뒷날 어김없이 살인이 벌어지는 거예요. 나쁜 씨앗이 뿌려진 거지요. 옛날에 해머 영화사에서 제작한 공포 영화들 같습니다. 괴물은 달지지 않아요. 절대 달리지 않지만 잠시도 쉬지 않고, 생각도 하지 않고, 사정도 두지 않고, 노리는 상대에게 다가가지요. 살인은 종종 그런 식으로 일어나요. 아주 멀리서 출발하는 겁니다." p.208 

"그런 일은 너무 자주 일어났다. 죽음은 보통 밤에 찾아온다...(중략)... 그러나 시골에서 죽음이라는 불청객은 낮에 찾아온다...(중략)...죽음은 해뜰 녘과 해 질 녘 숲 속에서 활과 화살을 들고 서 있다. p.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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